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易水歌 荊軻
易水歌 荊軻
역수가 협객형가

風蕭蕭兮,易水寒,
풍소소혜 역수한하니,

壯士一去兮,不復還。
장사일거혜 불부환을.

探虎穴兮,入蛟宮,
탐호혈혜 입교궁하니,

仰天呼氣兮,成白虹。
앙천호기혜 성백홍을.
역수의 노래
전국시절 협객 형가

바람이 소소히 붊이여,
역수가 차도다.

장사가 한번 떠남이여,
다시 돌아오지 못하리.

호랑이 굴을 찾음이여,
교룡 궁전으로 들어가네.

하늘을 우러러 부르짖으니,
흰 무지개를 이루도다.
 
The Yi River Song Jing Ke [Translated by Frank C Yue]

‘Whoosh! Whoosh!’— the fierce wind did blow;
The Yi River water was cold.
Once from here to go he did turn –
Ne’er should the Fearless One return!

Into the dragon's and tiger's den:
The Brave One just went --
Whistling sharply towards the sky,
With th'Emperor he wanted to die!

易水诀 - Farewell by Yi River [Another English translation]

Shrill winds rise, waters cold
Fiery passions in his guts
The hero shall go and never come home
His heart is set
 
易水送別 Youtube


易水诀 Youtube


易水秋色: 역수의 가을 모습, 참담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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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代畫像石: 한대에 그림으로 그런 초상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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荊軻剌秦王: 현가는 진왕을 찌르려하고...
战国传奇:壮士一去兮不复还,为啥荆轲刺秦王会失败_太子

樊於期: 번오기 목을 찌르다
 

注釋
蕭蕭(소소):指風聲。바람소리
易水(역수):指水名,源出河北省易縣,是當時燕國的南界。강 이름으로 하북석 역현에서 시작하여 당시 연나라의 남쪽 경계

譯文
風蕭蕭地響把易水岸邊吹得很冷,壯士去了就再也不回來了。刺殺秦王就像是到虎穴到龍宮一樣危險啊,但是我們的英雄英勇的氣概,連仰天吐氣都能形成白虹.史書上說,高漸離擊築,荊軻悲歌“風蕭蕭兮易水寒,壯士一去兮不復還”,唱得太悲壯了,以至於聽者嗔目,發盡上指。 一段唱畢,只聽見荊軻仰頭長嘆一聲,天空中居然出現一道七彩虹。高漸離趁勢變了一個調,樂音顯得更為激昂,荊軻繼而唱道:探虎穴兮入蛟宮,仰天呼氣兮成白虹。太子丹最後被徹底地感動了,跪在地上向荊軻敬了一杯酒。

鑒賞
這是一個身赴虎穴,自知不能生還的壯士的慷慨悲歌。 全僅兩句。第一句寫臨別時的環境,蕭瑟的秋風,寒冽的易水,一派悲壯蒼涼的氣氛。景物描寫中滲透著歌者的感情。第二句表現了英雄赴難義無反顧的獻身精神。 這首詩語言十分平易、簡練,借景抒情,情景交融,是中國古代詩歌中的一曲絕唱。 荊軻以此得名,而短短的兩句詩乃永垂於千古。在詩裡表現雄壯的情緒之難,在於令人心悅誠服,而不在囂張誇大;在能表現出那暫時感情的後面蘊藏著的更永久普遍的情操,而不在那一時的衝動。大約悲壯之辭往往易於感情用事,而人在感情之下便難於辨別真偽,於是字裡行間不但欺騙了別人,而且欺騙了自己。許多一時興高采烈的作品,事後自己讀起來也覺得索然無味,正是那表現欺騙了自己的緣故。《易水歌》以輕輕二句遂為千古絕唱,我們讀到它時,何嘗一定要有荊軻的身世。這正是藝術的普遍性,它超越了時間與空間而訴之於那永久的情操。
對荊軻的行為,自古以來評價不一。有人說荊軻是舍生取義的壯士,有人說他是微不足道的亡命徒,還有人說他是中國古代的恐怖分子。

荊軻
重寫荊軻:中國史上最著名的刺客是怎麼失敗的?早年: 傳說荊軻本是齊國慶氏的後裔,後遷居衛國,始改姓荊。荊軻喜讀書擊劍,曾遊說衛元君,不為所用。後遊歷天下,與四方名士豪傑交往。曾經在榆次和蓋聶論劍,話不投機,蓋聶怒目而視,二人不歡而散。又在邯鄲和魯勾踐爭道,魯勾踐怒斥他,他默默離開。又到燕國,和當地的狗屠夫及擅長擊築的高漸離結交,成為知己。荊軻嗜酒,每天和高漸離在街市中喝酒,酒酣之時,高漸離擊築,荊軻唱歌,唱著就哭了起來,認為天下沒有知己。燕國遊俠田光也結識荊軻,認為他不是平常人。
未詳-前227)戰國末衛國(今河南鶴壁淇縣)人。
先世為齊貴族,遷於衛,衛人稱慶卿。秦滅衛,亡至燕,燕人稱荊卿、荊叔。時秦已滅韓、趙。燕太子丹謀刺秦王政,結交荊軻之友田光,因田光之薦,乃尊荊軻為上卿。燕王喜二十八年,以秦亡將樊於期首級和內夾匕首之督亢地圖出使秦國,欲乘機行刺。向秦王政獻圖時,秦王政展圖,圖窮而匕首見。行刺未成,被殺。► 1篇詩文

정관호 설명
협객의 노래
“바람이 소소히 붊이여, 역수가 차도다.
장사가 한번 떠남이여, 다시 돌아오지 못하리. “
이는 俠客(협객) 荊軻(형가)가 秦(진)나라 왕 政(정)을 칼로 찌르려는 계획을 세워 燕(연)나라를 떠나서 서쪽으로 갈 때, 연나라태자 丹(단),
그와 가까웠던 빈객이 易水(역수)까지 나와 전별하였다.
시절은 戰國(전국)의 말기로, BC227년이었고, 장소는 현재 河北易縣(하북역현)경계였고, 이들은 모두 白衣素冠(백의소관) 즉 흰옷을 입고 흰 관을 썼다. 역수에 이르러 술자리를 벌려, 단은 형가에게 동석을 하고 술잔이 몇 차례 돌은 후, 형가의 가까운 친구 高漸離(고점리)는 악기 筑(축)을 두드렸다. 형가는 이에 화답하여 노래를 부르니,
風蕭蕭兮易水寒,壯士一去兮不復還!
變徵之聲(변치지성)으로 제4음급으로 반음이 낮았다. 그 소리가 심히 哀慘(애참)하여 빈객과 종자 모두 눈물을 흘리며 흐느꼈으니, 喪(상)에임한 듯했다. 형가는 하늘을 우러러 숨을 내뿜으니, 그 기세는 곧장 공중으로 올라가, 흰 무지개가 생겨서 해의 중심을 꿰뚫었다. 보는 사람이 모두 놀랐을 때다시 강개하게 羽聲(우성)으로 부르니 이는 비장하며 금옥성이 나며 격앙시킨다. 探虎穴兮入蛟宮,仰天噓氣兮成白虹。
이때 소리는 격렬웅장하니, 모든 사람이 눈을 부릅뜨고 분노를 참지 못하니, 마치 적과 대치한 모습이었다. 태자는 술을 따라 무릎을 꿇고 형가에게 한잔을 올리니, 그는 한숨에 다 마시고 그의 부관 秦舞陽(진무양)을 이끌고 수레에 뛰어올라 채찍으로 재촉하여 서쪽으로 질주하며 뒤돌아보지 않았다. 태자는 높은 阜(부)에 올라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섰다가 처연히 돌아오며 눈물을 흘렸다.
이 글 시작에 형가의 노래를 실었다.

註釋
蕭蕭(소소): 가을바람소리. desolate, dreary
壯士(장사): 용사,[heroic man;vigorous man] 勇士, 心雄膽壯的人;意氣豪壯而勇敢的人。
蛟(교): 이무기.교룡.【虛假的存在】WAREZ的生物工程,甚至不可能是人類本來能夠創造出的。a legendary dragon with the ability to control rain and floods: see also 蛟龍
噓氣(허기): 숨을 내쉬다.噓氣;喘氣 [make a din],

鑒賞
상구는 경관이 바람이 불고 물은 차가움을 그리었기에 쓸쓸하고 비장한 기분을 장식하였다.
하구는 결사적 정감을 서사하니, 떠나지만 돌아올 수 없음을 분명히 알기에, 의연히 전진하고 결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소소히 부는 바람소리눈 청각에 따라 이별할 때 참혹함을 꾸미고, 다시 형가의 “군자는 지기를 위하여 죽는다.”함에 대비하였으니, 이는 강개히 국난에 뛰어드는 늠연한 정기로다. 비록 겨우 십육개의 글자이지만, “처완격렬, 풍골정경이 각양각색으로 구비하였다.”

歷史的考察(역사적고찰)
이번에 소개하는 시는 <역수가>로서, 전국 말기에 형가가 연태자와 역수에서 이별하며 부르고 떠나간 시이다. 협객이란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知己)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며 일을 해나가는 사람이다. 그럼 어떤 일을 수행한단 말인가? 주로 대의를 위하여, 때로는 개인적인 원한을 갚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 중 가장 대표적인 협객은 지금 소개하려고 하는 형가였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의 거사는 실패로 돌아갔고, 일은 모두 그르쳐 버렸다.
그러나 그는 후세에 모든 중국인의 우상의 대상이 되었다. 成敗(성패)를 가리지 않고 그의 義氣(의기)를 택하였기 때문이다.
전국 말에 六國(육국), 즉 韓(한), 魏(위), 趙(조), 燕(연), 楚(초), 齊(제)는 점차 진격해 오는 秦(진)나라 앞에서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그때 연태자 단은 오랫동안 진나라에서 볼모생활을 하였다가 본국으로 달아나 온 실정이었다. 그는 진에서 받았던 혹독한 대우에 개인적인 원한도 있었고, 그보다는 대국적 입장에서 볼 때, 멀지 아니하여 이 여섯 나라가 차례로 진나라에 정복될 것을 알고 이에 대처하려고 협객을 구하고 있었다.
그 무렵 연나라에는 유명한 협객 田光(전광)선생이 있었다. 그를 초청하여 의논한바, 전광선생은 이미 칠십 고령이었다. 그는 협객 형가를 천거하였다. 형가는 어떤 사람인가?
그는 위나라에서 입국한 사람으로, 일찍이 검객 魯句踐(노구천)과 도박에 관한 논쟁을 할 때, 노구천은 눈을 부릅뜨고 호통을 치고, 형가는 머리를 숙이고 아무 말도 못하고 물러섰다. 그런 지 오랜 후 노구천이 형가의 의거가 실패했음을 듣고 대단히 애석히 여겼다. ‘내가 사람을 잘못 보았도다. 그는 내가 두려워 피한 게 아니고 나를 그의 생명을 걸고 싸울 상대가 아니기에 그냥 사라졌을 뿐이었는데…그럴 줄 미리 알았으면 내가 그에게 검술 몇 수 가르쳐 주었을 것을!’
형가는 항상 자기의 목숨을 걸고 싸울 知己(지기)를 원했다. 그는 연나라에서 竺(축), 즉 고대의 악기를 잘 쓰는 고점리와 친하였다. 대낮에 시정에서 술 마시고 방약무인하게 형가가 비장한 노래를 부르고 고점리가 축을 치면 길 가던 사람이 모두 강개하여 듣고 눈물을 흘렸다.
전광선생의 소개로 형가는 연 태자의 귀빈이 되어 진나라의 왕 秦王政(진왕정)을 칠 계획을 하였다. 형가의 말은 옛날의 曺沫(조말)의 고사를 들어 진왕에게 접근한 후 “왼손으로 진왕의 멱살을 잡고, 오른손으로 비수를 겨누고, 지금까지 진이 빼앗은 모든 나라의 땅을 돌려 달라”고 위협하여 그가 들으면 일이 성사되고, 안 들으면 그를 찔러 죽이고 자기도 그 자리에서 죽겠다는 계획이었다. 그런데 너무 힘든 계획이라 자기 친구 한 사람과 함께 가면 가능한데 혼자서는 성공률이 높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그 친구를 기다리다 지친 연 태자는 형가에게 재촉하여 결국 진무양이란 다른 협객으로 대치하고 진나라로 떠나는데 이 점에 형가는 만족하지는 못했으나 거절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형가가 연 태자궁에서 귀빈으로 대우를 받았을 때 몇 가지 일이 기재되어 있다. 첫째 전광 선생보고 이 거사를 비밀로 해달라는 연 태자의 말을 들은 후 그는 형가를 추천하며, 자기는 칼을 빼어 목을 찌르고 죽었다. 즉, 이 일이 새어 나갈까 두려워했던 연태자의 우려를 없애겠다는 일념으로 한 일이었다.
어느 날 연회석상에서 술을 따르던 궁녀의 백옥 같던 손이 너무 아름다워 그 손을 형가가 만진 것을 보고 즉시 연 태자가 명하여 그 궁녀의 손을 잘라 쟁반에 바쳐 형가에게 선물하였다 한다. 그러나 이는 너무 참혹하다! 진나라의 맹장 번오기(樊於期)가 죄를 짓고 연나라로 달아나 와 있었고 同病相憐(동병상린)으로 연 태자의 후대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형가는 번오기의 목을 잘라서 진왕에게 바쳐야 그가 완전히 믿고 형가를 만날 것이 아닌가 하며, 그의 목을 원했다.
이에 연 태자는 자기는 차마 그렇게는 못 하겠다 하니, 형가가 스스로 번오기를 찾아가서 묻기를 “내가 그대를 위해서 또 연 태자를 위해서 목숨을 내 놓고 진왕을 치려고 하는데 그대는 무엇으로 내게 보답하겠소?” 하였다.
이에 번오기는 울며 답했다. “나는 아무 것도 가진 게 없소이다. 그저 이 목숨으로 보답하겠소.” 그러자 형가가 말하기를, “내가 장군에게서 필요한 물건이 하나 있는데 그게 무엇인지 아시오?”
번오기가 대답하기를, “내가 비록 어리석어도 어찌 그것을 모르겠소? 또 그렇게 쉬운 일이 어디 있겠소?” 그러고는 칼을 빼어 자기 목을 찔러 죽었다.
죽은 번오기의 머리를 갖고 연 태자에게로 와서 보니, 연 태자는 너무 불쌍한 번오기의 머리를 보고 크게 통곡한 후 후장을 해주었다. 이리하여 형가는 督亢(독항) 땅을 받히는 족자로 된 지도를 갖고, 번오기의 목을 상자에 보관하고 진나라로 가기 위해 출발 준비를 하였다. 그런 후 형가는 다른 협객 진무양과 함께 진나라로 향하니 태자의 일행을 멀리 역수까지 전송하였다.
이 두 사람은 진나라 서울에 이르러 진왕의 총신인 中庶子(중서자) 夢嘉(몽가)에게 천금의 예물을 바치고 진왕의 알현이 주선되어 진왕궁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진왕은 높은 왕좌에 앉아 있었고, 칼을 찬 무사는 까마득한 아래에 서서 지키고 있었다. 진왕 주위에는 궁녀, 환관 등 비무장한 시종만 있었다. 형가는 독항 땅 降書(항서)인 족자로 된 지도를 열어서 그에게 설명하고자 신체 수색을 수십 번 한 후 진왕 앞까지 와서 그와 맞대면하고, 돌돌 말은 족자 지도를 차차 펴면서 지리를 설명하고 있다가, 거의 끝나 갈 즈음 족자 끝에 숨겨놓은 비수를 꺼냈다.
계획대로 오른손으로 그 비수를 움켜쥐고, 왼손으로 진왕의 멱살을 쥐던 순간에 이에 놀란 진왕이 펄쩍 뛰어 뒷걸음질을 치니 형가가 왼손으로 쥔 용포자락이 떨어져나갔고, 형가의 왼쪽 손에는 찢어진 진왕의 웃옷자락만 잡혀 있을 뿐이었다. 유명한 그림이 이 장면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놀란 진이 뒷걸음질 치며, 왼손에 진왕의 옷자락을 잡은 형가는 오른손에는 비수를 움켜쥔 채 진왕을 향하여 돌진하며, 마루에 놓인 상자는 열려 있고, 그 안에 번오기의 머리가 있고, 궁전의 내시가 약탕관으로 형가를 때리는 장면이 나온다. 아래에서 무사들이 급히 올라오는데 시간이 한참 걸리는 중, 진왕은 달아나고 형가는 그 뒤를 바짝 쫓고 있었다. 진왕만이 큰칼을 찼는데 이를 뽑으려면 잠깐 서서 왼팔로 칼 고리를 잡고 오른팔로 칼자루를 빼어야 할 텐데 형가에게 쫓기느라고 진왕이 자기의 大刀(대도)를 뽑지 못하고 애를 쓰는 중, 환관 趙高(조고)란 자가 진왕을 향하여 “대왕은 부검(負劍), 부검 하소서” 하니 이 말을 알아듣고 큰칼을 자기의 왼쪽 어깨에 걸치니 두 손을 안 쓰고서도 칼을 뺄 수 있었다.
그때 그가 거의 형가에게 붙들리기 일보 직전 달려드는 형가를 향하여 대도를 내려치니 형가의 왼쪽다리가 끊기고 쓰러지면서 형가가 비수를 던졌으나 재빠르게 진왕은 큰 기둥을 돌아 몸을 피하고 비수는 기둥에 박혔다. 그때 올라 온 무사에게 맞아 죽으며 형가가 말하기를 “내가 원래 너를 죽이려 한 건 아니고 빼앗긴 땅을 도로 찾으려 했을 뿐이다.” 이리하여 그의 壯擧(장거)는 비극적인 실패로 끝났다.
너무 놀란 진왕은 반나절동안 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고 한다. 그 후 정신을 차린 후 그는 형가, 진무양의 시체와 번오기의 수급을 시중에서 태우도록 명하였고, 다음에 연나라를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결국 연나라왕, 연태자, 그리고 형가와 관련된 사람들 모두 죽었다. 역사적 사실을 요약해보면, 형가의 거사는 B.C. 227년이었고, B.C. 221년에 진왕은 천하통일을 이룩하고, B.C. 220년에 진왕이 죽고 B.C., 202년에는 무도한 진나라가 멸망했다.
어부사의 작자 굴원의 사망연도는 B.C. 289년으로 알려졌으니, 형가의 거사는 그때보다 62년 후에 생긴 일이었다. 또한 묵과할 수 없는 사실은 형가가 진왕궁에서 비통하게 죽은지 겨우 25년만에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룬 진나라가 초패왕 항우에게 멸망되었다는 사실이다. 다음에 형가를 읊은 시 한 수를 싣는다.

 
于易水送人 駱賓王
于易水送人 駱賓王
어역수송인 낙빈왕

此地別燕丹, 壯士髮衝冠.
차지별연단, 장사발충관.

昔時人已沒, 今日水猶寒.
석시인이몰, 금일수유한
역수에서 친우를 보내며
초당시인 낙빈왕

이곳에서 연태자 단을 이별하였으니,
장사의 머리터럭은 관을 찌르도다.

옛 사람은 이미 사라졌으나,
오늘날 강물은 오히려 차도다.

註解(주해)
형가가 역수에서 연 태자와 이별할 때의 정경을 다시 그려본다. 그때 형가의 강개했던 기세는 마치 머리터럭이 일어나 머리에 썼던 관을 찌르는 듯한 기세였다. 천년이 지나서 당시의 모든 사람은 사라졌지만, 형가가 불렀던 역수가에서 ‘역수의 물이 차도다’함은 지금도 마찬가지로 역수 의 물은 아직도 차가웠다.

作者(작자)
义乌才子骆宾王_知网文化낙빈왕은 王勃(왕발), 楊炯(양회), 그리고 盧照隣(노조린)과 더불어 初唐四傑(초당사걸)로 추모받는다. 생몰연대는 기록이 되어 있지 않다.
그는 현재 浙江城義烏縣(절강성의오현) 사람이고, 長安注簿(장안주부), 施御史(시어사) 등을 하였다. 고종 당시에 무후가 정치를 전횡하자 그를 간하였고, 그 후 옥에 갇히기까지 하였다가 후에 석방되고 서경업이 측천무후를 토벌하는 군사를 일으키자 거기에 가담하여 유명한 토무씨격문을 지었다가 서경업이 패망하자 낙빈왕은 종적을 감추었다.
문장에 공을 들여 초당사걸의 일인이다. 오언율시 건립에 공이 크다. 上官儀流的(상관의류적) 綺錯婉媚(기착완미) 文風(문풍)에 반대하였다. 오로지 年少而才高(연소이재고), 官小而名大(관소이명대)라 하였으니, 즉 나이는 어려도 재주가 높고, 직위는 낮아도 이름이 컸다는 뜻으로 말미암아 중하게 여김을 받지 못했다.
역수는 河北易縣西(하북역현서)에서 동으로 흘러 定興縣西南(정흥현서남)에 이르러 拒馬河(거마하)로 합하여 옛날에는 武水(무수)라고 불렀다.

 
Kwan Ho Chung – October 28,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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