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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오기를 준 그 국밥집 간판

광고회사 취직시험에 연패했다.
대학 간판을 중시하고 실력보다 스펙만 외치는 사회
그러나 세계적인 예술가 백남준은 명문 미대를 나왔던가
스펙은 중요하지만 과실의 향기 같은 게 아닐까



나는 광고장이다.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기업이나 제품의 그럴싸한 간판과 포장을 만들며 살고 있다.

나는 대학 졸업 후 2006년 미국으로 유학 갔다. 2007년 한 해 동안 8개 국제적인 광고 공모전에서 30여개의 각종 메달을 받았다. 세계 3대 광고제의 하나로 꼽히는 뉴욕의 원쇼 페스티벌에서는 ‘굴뚝 총’으로 최우수상을 받았다.

공장 굴뚝을 총열로 바꿔 ‘굴뚝 총’에서 연기가 흘러나오는 장면으로 ‘대기오염으로 한 해 6만명이 사망합니다’를 연출했다. ‘누군가에게 이 계단은 에베레스트산입니다’라며 지하철의 높은 계단에 에베레스트산을 그려놓은 작품은 광고계 오스카상이라는 클리오 어워드에서 동상을 받았다. 내가 생각해도 대단한 일이었다.

나는 중·고등학교 때 공부 대신 종이와 연필만 있으면 만화를 그렸다. 친구들은 “속편이 언제 나오느냐”며 내 만화가 나오기만 기다렸다. 고교 때 선생님들은 공부시간에 딴 짓하는 나를 혼냈지만 담임선생님만은 오히려 “미술대학에 가라”며 격려해주셨다. 내 적성에 맞았는지 나는 만화에서 상상력을 키웠고 그 창의력이 발휘된 게 바로 광고 무대였다.

 ◀◀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사실 내가 미국 유학을 결심한 것은 아주 사소한 문제 때문이었다. 당시 대구의 한 미술대학을 수석으로 나왔지만 국내 대기업 광고 회사 취직시험엔 연전연패했다. 내가 그토록 공부를 열심히 해 받은 학점은 한국에선 쓸모가 없었다.

어떤 기업도 그것을 평가해 면접에 오라는 데가 없었다. 지방대의 한계에 절망했다. 나는 대구에서 음식점·안경점·사진관 등의 인테리어나 간판을 그려주는 동네 간판장이 노릇을 시작했다.

그러던 내가 동네 명함집 아저씨한테 판정패를 당했다. 30만원을 받기로 한 국밥집 간판인데 “10만원이면 할 수 있는 것을 왜 30만원이나 주려고 하느냐”는 그의 말에 그만 손을 들고 말았다. “누구는 선 하나 긋고 디자인이라며 30억원을 받는데 나는 죽어라 고생해서 간판을 만들어도 왜 30만원도 못 받아야 하나?” 억울했고, 분하기도 했고 세상을 이해하기도 힘들었다.

“그래, 내가 그동안 스펙(학력·학점·토익점수 등 입사시험 평가요소 )이 없어 경쟁에서 얼마나 많이 밀려났던가. 이참에 나도 스펙을 잘 만들어 놓고 진짜 실력으로 세상과 싸워보자.” 미군 부대를 들락거리며 1년간 영어공부를 한 뒤 미국행 가방을 쌌다.
미국의 대학에선 내 학점을 보고 장학금까지 주겠다며 오라고 손짓했다.

한국처럼 대학 간판을 그리 중시하지 않은 것이다. 대학 다닐 때 각종 국내 광고 공모전에서 그 흔한 장려상조차 받아 본 적이 없다. 그러나 미국에 간 지 1년 만에 상복이 터졌으니 이걸 무엇으로 설명해야 할까.

따지고 보면 한국처럼 실속 없이 간판만 중시하는 곳은 없다. 그러니 부작용도 만만찮다. ‘보여주기’ 식의 우리의 문화는 기업문화에도 그대로 이어지는 게 아닐까.

요즘 아이폰이 출시되면서 국내 휴대폰 회사들마다 비상이 걸렸다. 과연 국내 기업들은 그동안 무엇을 했을까. 새로운 기술로 차원이 다른 진보된 제품을 만드는 데 주력했을까. 오히려 똑같은 제품을 놓고 얄팍하게 제품 이름과 껍데기만 바꿔서 신제품이라고 내놓았던 것은 아닐까?

자동차 시장도 마찬가지다. 어느 날 느닷없이 ‘아이폰’이 아닌 ‘아이카’ 같은 게 나타날지 알 수 없다. 우리가 껍데기만 바꿔 신제품이라고 발표하고 있을 때 어디선가 비장의 무기가 나올지 모를 일이다.

‘한국차=싼차’라는 이미지를 언제까지 업고 가야 하나? 우리가 명차로 알고 있는 벤츠나 BMW는 껍데기만 화려한 명품이 아니다. 그들은 2차 세계대전에서 얻은 탱크 제조 기술력으로 수십만대의 차를 때려 부수며 안전도 테스트를 거쳐 최고 성능의 기계를 만들었다. 그런 다음에 비로소 멋진 껍데기를 씌운 것이다.

그럴싸하게 포장하는 광고도 겉이 아닌 속에 신경 써야 경쟁력이 생긴다. 잘 되는 식당은 맛으로 승부한다. 아무리 식당을 인테리어로 멋있고 화려하게 치장해도 맛이 없으면 손님은 끊기기 마련이다.

올해 스물아홉밖에 안 된 나이지만 사람들이 나에게 “광고를 잘 만드는 비법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고 말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훌륭한 가수가 되려면 노래를 잘해야 하고, 좋은 연필은 잘 써져야 하고, 차는 잘 굴러가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그러기보단 좋은 머리로 잔재주를 부리기에 바쁘다. 나는 세상에서 기본이, 정도(正道)가 가장 빠른 지름길이라 생각한다. 세상에서 기본이 제일 쉽지만 기본이 제일 어렵기도 하다.

안타깝게도 내가 아는 많은 친구, 동료들은 화려한 겉만 좇지 속은 텅 빈 삶을 살고 있다. 실력을 갖추기보다는 스펙을 쌓아야 된다며 젊음을 바친다.

그러나 위인들은 과연 얼마나 대단한 스펙을 가졌을까. 나는 세계적인 아티스트로 손꼽히는 백남준이 어떤 미대를 나왔는지 모른다. 헬렌 켈러 여사가 무슨 명문 여대를 나왔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단지 철학과 원칙을 지켜 역사의 한 획을 그었던 것이다.

나는 스펙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스펙이란 마치 옹골차게 속이 익은 과실에서 자연스럽게 풍기는 향기 같은 것이어야 하는 게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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