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2.10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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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10 15:13
2020.02.11 00:03
I blamed it as my nostalgia, Dr. Choh!
Yes, everyone felt uncomfortable on my stubborn complaints about such strange nationally-unified (?)
new quasi-Korean language/dialect I had to encounter from the first day when I got back to Seoul in 1994
till to the last day to leave in 2004 – thank goodness such mental torture is over!!!-.
It was totally new with an odd accent, similar to 경상도 사투리, to offend me immensely for some reason
and simply my brain failed to digest it properly to have frightened me.
Yes, I just couldn’t grasp the content of their conversation/presentation as a whole, distracted
by such a weird accent dominating throughout the whole conversation.
Naturally, I sat up straight to ask to repeat the presentation seriously to make them get nervous
only to increase their funny accents and I had more trouble to grasp their delivery properly.
Regretfully, this new(?) language, especially by young girls/staffs on the high octave, I had to encounter
unexpectedly, irked me to take a hostile response, precipitated my ill relationship with them.
Good old Seoulian dialect we all shared is now gone forever and further new language is now a half jumble
of foreign language/terms pronounced/translated within the limit of Korean phonetics like no ‘F’ and no ‘V’,
hopelessly contaminating natural/original Korean language!
Say how they write/pronounce ‘fuck’ or ‘fever’? ‘퍽’, ‘피버’? What a hilarious quotation, buddy!
That was one of the reasons why I felt so foreign in Korea to encounter new Korean language,
missing our language all the way through until I left Seoul, Bless them!
Gone are the days!
BB Lee
2020.02.11 00:47
It is just a piece of incredible news personally Dr. Choh just gave me in the above.
박태원씨의 장남, 박일영이 나와 2-3년전까지도 가까이 연락하면서 지내온
경동 고등학교 동기인데, 소영씨가 둘째누님임을 방금알게 되었습니다.
Thank you, Dr. Choh.
My friend who wrote a book about his father commemorating his 100th
birthday, a big event held by his students in Seoul, lives in Washington, DC.
I will have to get hold of him now.
Thank you again, Dr. Choh, for the information, indeed.
PS: just called my friend and confirmed that 봉준호씨가 내친구 두째누님의 아들임을.
What a small world !
2020.02.11 01:19
This is very interesting story. '한국 사람은 세 사감 건너가면.., 미국사람은 8사람 건너가면...
다 연관이 있다고" 하는 데...
한국에서 의학책을 전부 한국말로 바꾸면서 한문으로 된 명명을 그대로 한글로 바꾼 것은 큰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지음 한국사람들은 거의 말한마디 마다 영어한국말(?)을 섞어 씁니다.
아마 의사들은 더 할것으로 생각 되네요. 차라리 의학책도 영어한국말을 사용하는 것이 의사
전달에 편리 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영어에서 도입한 한국말을 제대로 쓰기위해서는 한글 알파벳을
늘이는 것이 어떨런지요? 우선 five를 파이부라고 읽을 때는 영 촌놈 같 거든요.
요지음 한국의 젊은이들은 "코먹은 소리"를 많이 섞어 말하는 것 같읍니다.
아마 서양말 흉내내기 아닐까요?
2020.02.11 21:47
Conference 에서 어떤 의사도 "대동맥 판막" 이란 말은 안 쓰는데, 기록에는 가끔 Aortic valve 대신 대동맥 핀막이라 쓴다.
보험 수가 신청등과 관 계있을 듯
한국 Journal 도 어떤 journal은 영어로 논문 제출을 원하고---- 하여간 very confusing.
이런 이유로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가끔 영어 공용/병용 화를 주장하는 사람이 나오곤 한다.
경제-문화-과학을 아우르는 열린 토론과 연구를 해 볼만한 문제일 듯----
이 선배님,--- 저는 어떻게 박태원 같이 순수 문학을 하던 분이 월북을 하게되었는지 이해가 안됩니다. 어쩌면 6.25 때 서울 에 남아 있다가 북에서 내려온 친구 이태준이나 제일고보 친구 정인택 정지용 등과 어울리다가 9-28 혼란중에 올라간 것은 아닌지???
아니면 문단의 정신적 지주 였던 벽초 홍명희를 찾아간 겄일까???
한 십여 년전에 북에 있던 큰 따님이 남북 가족 상봉시 남한의 가족을 만난 기사를 본 적이 있읍니다.
하여간 이 모든 비극의 근원은 분단 그리고 6.25 를 시작한 김일성의 죄악이라고 할 수 밖에 없읍니다.
2020.02.12 08:34
"2부 '요동치는 역사의 한복판에서'는 박태원이 해방 이후 강제로 보도연맹에 가입했다가
한국전쟁이 나자 인민군에 끌려가 종군 작가가 되고 이후 북측이 남측 예술가들을 차출해 꾸린
'남조선문학가동맹 평양시찰단' 일원으로 북에 가기까지의 과정이 기록됐다."
Dr. Choh,
I found the partial answer to your question in the introduction to the book in the above
my friend, 박일영, 박태원 씨 장남, wrote about his father 2016.
2020.02.12 11:03
이승만이 대전으로 도망와서 서울에서 보도연맹가입자들이
인민군에 협조했다는 소식을 듣고 보도 연맹 가입자들을 모두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6.27일부터 9월 28일까지 서울을 인민군이 통치 할 때 좌익 인사들과
서대문 형무소 죄인들을 모두 석방하여 통치하는 데 이용했다고 합니다.
자의였는지 강제였는지는 알길이 없지만 보도연맹 가입자였던 박태원 씨가 인민군
과 같이 일했을 가능성은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9월에 그들이 떠날 때 따라가지 않는
유명인사는 다 죽였을 것입니다.
이승만의 학살 명령으로 보도연맹가입자 약20만명이 학살 되었다고 합니다.
2020.02.12 21:20
나는 현대의 한국사를 거의 전혀 모른다. 그렇다고 조선시대 근대사에 해박한 지식을 갖지도 못했다.
요즘 Dr. 온, 그리고 다른 회원님들로부터 가끔 읽게 되어서 조금씩 알게 되었다.
내가 소학교 다니던 시절 1945년부터 1949년까지 경동중학 근방에 있었던
광업진흥 회사 사택에서 살 때였다.
그 곳 운동회날 우리 동네 애들과 함께 몰려가서 그들의 경기, 그리고 노래자랑 등을 들었다.
그때 어른들께서 하시던 보도연맹이란 말을 많이 들었다. 옛날 이야기다.
어제밤 봉준호의 시상 장면을 보며, 그의 월북작가 외조부 박태원의 소설들
그리고 그 가족들의 슬픔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밖에 없었다.
어쩌면 박태준의 예술적 피가 봉준호에게 흐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River runs through it.---it is haunting.
당시 최고의 지성인 친구 들로 미술 문학을 아우르던 천재 이상, 이효석 ,이태준
박태원의 고교-대학-문필활동시의 친구 정인택, 그리고 남한에 남아서 창작 활동을 접고
영문학 교수로 생을 마친 조용만 교수(정신과 조두영 교수 부친)등 은 비슷한 시기
영국 London 의 intellectual등의 모임이었던 Bloomsbury Group(Vrignia Woolf, J M Keynes,EM Foster--)을
연상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