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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너무 쉽게 한 우승

골프 바깥 세상에 난 유치원생이다 천천히 배우자... 보던 TV를 끈다.
다시 연습장으로 갈 채비를 한다 차 시동을 걸면서 홀로 되뇐다.
"그냥 이렇게 사라질 수는 없어"

얼마 전 열린 삼성월드챔피언십 대회에 출전조차 하지 못하고 집에서 쉬면서 많이 심란했다. 지난 1999년 내가 정상에 올랐던 대회다. 더구나 나를 전폭 후원해주고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에서 이 자리에 이를 수 있도록 해준 기업이 스폰서를 하는 대회를 지난해에 이어 또다시 TV를 통해 지켜만 봐야 하는 착잡한 심정… 누가 알 것인가. 이 대회는 상위 스무명만 출전하는데 나는 올해도 그 자리에 끼지 못했다. 최나연 선수가 55번의 도전 끝에 우승컵에 입맞춤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처음 미 LPGA투어에 데뷔했던 1998년의 기억 속으로 빠져들었다. 우승이란 얼마나 뼈저린 과정을 겪으면서 찾아오는 것인지, 1m밖에 되지 않는 홀까지 그 거리가 얼마나 아득하게 느껴지는지, 누가 대신 퍼팅을 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오히려 얼마나 온몸을 진저리치게 하는 것인지….

그래… 지금 생각해보면 난 너무나 쉽게 우승했는지도 모른다. 1998년 US여자 오픈 마지막 날 한 타라도 줄여볼 생각에 양말을 벗고 물속으로 들어갔을 때, 그 장면을 두고 온 국민이 그렇게 기뻐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11년 전 그때의 우승을 지켜보며 골퍼의 꿈을 키웠다는, '세리 키즈'라고 불리는 젊은 한국 선수들을 보면 마음 한편이 뭉클하기도 하고 따뜻해져 오기도 한다. 세계적인 무대에서 당당히 선전하고 있는 후배들이 기특하기도 하고, 나에게도 큰 자극이 된다. 맏언니로서 좋은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는 책임감이 늘 마음 한구석에 자리하고 있다.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승부와 함께 살았다. 나는 오직 승리만을 향해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독일 전차'처럼 달려왔던 것 같다. 새벽부터 밤늦도록 잠자고 밥 먹는 것 외에는 오로지 공만 치는 단조로운 생활에 스스로 숨이 막혔다. "나의 성적에 대한민국의 명예가 걸려 있다"는 생각은 감히 없었다. 딤플이 파인 하얀 공이 원수 같을 때도 있었다. 내가 쳐내지 않으면 나를 잡아먹을 것 같았다. 나는 연습밖에 모르는 벌레였다. 성적에 방해가 되는 일이라면 돈벌이가 되는 일도 싫었다.

나는 옳게 살아온 것일까. 요즘도 승부라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세리 키즈'를 보면 마음이 편치 않다. 책임감도 느낀다. 어린 시절 내 모습을 보는 것 같고, 또 집과 친구, 가족을 떠나 있는 그들의 어려움을 잘 알기 때문이다. 오랜 타지 생활을 하면서 한국 음식, 따뜻한 한국 사람들의 사소한 정에도 감동하게 되는 게 LPGA투어 생활이다. 또래 여대생들의 즐거움을 그들은 전혀 모르고 살 것이다.

사람들이 현재 내가 슬럼프에 빠졌다고 쑥덕거린다는 것을 알고 있다. 프로골퍼에게도 귀는 있다. 슬럼프, 끔찍한 말이다. 그러나 슬럼프란 그걸 자인(自認)하는 자에게만 적용될 뿐이다. 나는 그렇게 배웠다. 흐린 날이 있으면 맑은 날도 있고,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다. 나쁜 경험은 없다. 딛고 일어서는 사람에겐 모든 것이 좋은 경험이다. 삶이라는 것도 그렇지 않을까. 골프처럼 재미있기도 하고 어렵기도 하고, 신중해야 하지만 너무 긴장할 필요는 없고, 자신의 경험을 밑바탕으로 계획을 세우고 밀어붙여야 하는 것.

나이 드신 분들께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나도 이제 혈기왕성한 어린 선수들을 보면 그들의 체력만큼은 따라잡을 수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나에겐 오랜 경험이 선물해준 정신력이란 무기가 있다. 큰 대회에서도, 어떤 악조건에서도 이겨낼 수 있는 포스가 내 뱃속에는 들어 있는 것이다.

요즘 많은 외국 골프 선수들이 한국 선수들에 대해 칭찬하는 이야기들을 자주 듣는다. 실력뿐 아니라 매너 또한 빠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지만, 때로는 그 칭찬이 달콤한 옷을 입은 독약일 때가 있다. 경기에서든 삶에서든 자만심에 손목을 잡히는 일보다 더 무서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이제 서른을 훌쩍 넘겨 미 LPGA투어에서 활동하는 한국 골프 선수들의 맏언니가 된 지금, 결코 즐겁지 않은 현실에 속상하면서도 한편으론 다시 시작하자는 각오를 다진다. 새로운 기록에 도전하고 싶다는 의욕이 불끈 솟구치기도 한다. 지금은 은퇴한 애니카 소렌스탐, 호주의 캐리 웹 등과 나는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LPGA투어의 빅3로 불렸다. 웹이 가끔 전성기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플레이를 펼치면 나도 위안을 느끼기도 한다. 그녀도 나 못지않은 어려운 시기를 겪었다. 요즘 여러 이유로 힘들어하는 분들이 다시 한번 박세리를 통해 용기와 기쁨을 느꼈으면 하는 욕심도 내본다.

친구들이 하나둘씩 결혼을 하고 부모가 되는 걸 보니 결혼에 대한 생각도 새롭게 갖게 된다. 현모양처의 삶이란 어떤 것일까. 평생을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을 갖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18홀 내내 골퍼와 함께하는 캐디가 배우자와 비슷한 것일까. '경기 도우미'와 '인생의 동반자'는 무엇이 닮았고 무엇이 다를까. 나는 골프와 함께 살았다. 열심히 살았다. 그만큼 골프 밖의 세상을 모른다.

골프 밖의 세상에 대해 나는 유치원생이다. 천천히 배우자. 나는 지켜보던 TV를 끈다. 다시 연습장으로 갈 채비를 한다. 차 시동을 걸면서 되뇐다. "그냥 이렇게 사라질 수는 없어." 내 플레이를 보고 용기와 힘을 얻는 분들이 계시는 한 나는 절대로 물러설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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