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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첫돌

지난 월요일(8 9)에 병원에 갔습니다. 이식외과 외래 간호사가 작은 카드를 하나 주었습니다. 그 내용은

“첫돌 축하합니다.

제 첫 번째 첫돌은 1940 10월에 강원도 산골 촌 마을에서였습니다. 그 때의 사정으로 아버지는 외지에 나가 계시고 아버지 외가집에 살고 있는 처지에 돌잔치를 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그 때쯤에 찍은 것으로 생각되는 사진이 한 장 있습니다.

이번 8 20일은 제 두 번째 첫돌입니다.

이제 죽으러 가야지 하면서 병원에서 퇴원한 것이 작년 8 19 4시였습니다.

“이제 어떻게 하지!”라면서 아내와 무겁게 저녁을 먹었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인생, 그것도 제대로 기능하지도 못하는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지 참 막막했습니다. 이제 죽을 곳으로 어떤 병원을 찾아야 하지? 언제 그곳에 가지? 정리하지도 못하고 버리지도 못한 그 많은 내 흔적들은 어떻게 하지? 그런 생각들을 아내와 이야기 하다가 기력이 진해져서 “나중에 생각하자!“ 면서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내일이 내게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다음에 생각하자!“니 말이 안 되지요. 그래도 다음으로 미루고 잠인지 기력 없음인지 모를 심연으로 빠져 들었습니다.

비몽사몽중에 ”뇌사자--- , “하는 아내의 말소리에 정신이 들었습니다. 뭔 소리지하면서도 온전히 정신이 들지 않았습니다. 아내가 주는 수화기를 받으니 삼성서울병원 이식담당 코오디네이터의 전화였습니다.

뇌사자가 있었고, 장기기증의 허락은 본인 자신이 한 것이고, 보호자들도 동의하였고, 그러나 인공호흡기도 더 이상 효과가 없어서 이식할 장기를 이미 적출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늦어도 밤 12시 이전에 이식이 시작되어야 한다는 말과 함께 간이식을 받으려면 10시 이전에 병원에 도착해야 한다는 전갈이었습니다. 10분 후에 전화를 걸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아내는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말로 듣기는 했지만 이식수술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으니까요. 병원에 드나들었지만 만성 간경변 환자와 이식수술을 받은 사람이 만나는 기회는 거의 없으니까요. 또 기증자가 없기 때문이 이식수술을 생각지도 않았었구요. 그래도 아내는 이제 앞으로 일어 날 일이 뻔한데 기회가 되면 하는 것도 좋겠다는 조심스러운 의견이었습니다.

참고로 말하면 2008년에 병원 이식쎈터에서 어찌 될지 모르니까 이식이 적절한지의 검사를 하고 이식대기환자 목록에 넣자고 해서 그러마고 했지만 이식을 깊이 생각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기회가 오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2009년 봄에 입원실에서 이식등록을 위한 검사를 받으러 입원한 환자들을 여러 명 보았고, 아내는 그들과 이야기도 좀 했었던 모양입니다.

이식을 제안 받고 당장은 암담했습니다. 의논할 사람도 없으니까요. 그냥 큰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무슨 말씀이세요. 수술 받아야지요!”라면서 아무 걱정 말고 수술 받으라는 것이었습니다. 병원에 수술 받겠다고 하니 당장 병원으로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회사에서 야근중인 둘째에게는 수술 받으러 간다고 통보만 하고 아내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습니다. 퇴원할 때 들고 나온 작은 트렁크는 풀지도 않은 채 다시 들고 왔습니다.

9시를 좀 지나 병원 지하주차장으로 들어가는데 이식쎈터에서 다시 전화가 왔습니다. 어디 있냐고요. 주차장이라니까 병원 1층 승강기 앞으로 오라고 했고 그곳에서 젊은 일반외과 권OO조교수를 만나 그의 방으로 갔습니다.

“이식 받을 간은 아주 좋습니다. 아무런 병도 없었고, 젊기 때문에 건강합니다. 다만 환자가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사망했으므로 이식할 수 있도록 일찍 적출해야 하고 그러면 간조직 스스로가 Decay되기 때문에 시간이 급합니다. 그래서 늦어도 12시 이전에는 수술이 시작되어야 합니다. 또 한가지 문제는 교수님 연세가 많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는 나이와 예후 사이에는 약간의 정적 상관관계가 있습니다. 그래도 수술하셔야지요.

그런데 이식할 기증된 간의 상태가 빨리 수술해야 한다는 조건이 내게 수술기회가 돌아오게 한 것이었습니다. 그 간을 다른 병원에 보낼 수도 없고, 그 제한된 시간 안에 수술 받으러 올 수 있는 대기 환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가장 빨리 올 수 있는 사람이 새벽 5시나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정부기관인 국립 장기이식관리쎈터에서도 쉽게 나에게 이식하라고 승인이 난 것입니다.

급했습니다. 일인용 방에 들어가 옷을 벗고 피를 뽑고 무슨 기름인지 꺼먼 색의 기름을 온 몸에 발랐다가 또 금방 씻어 내고 소독된 하얀 시트를 덮고 수술장으로 향했습니다. 수술장에 갔습니다. 수술 서약서, 등등 거쳐야 하는 절차는 뒤에 하면서 수술장에 들어 간 것이 11시고 그 뒤로 나는 기억이 없습니다.

이 복잡한 과정에서 아내는 혼자 뒷감당을 해야 했습니다. 큰아들은 다음날 아침에야 도착하고, 둘째는 전화를 받자마자 온양에서 출발해 내가 수술이 시작될 때쯤에야 병원에 왔습니다. 아내는 내가 수술장에 들어간 후 거의 두 시간을 아들과 단 둘이 있어야 했습니다. 지금 내가 그런 아내에게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그날 밤처럼 강한 아내는 처음입니다. 물론 그 뒤로 내가 걷지도 일어나지도 못하는 동안의 아내의 고생은 말로 다 할 수 없지요. 그래서 지금 나는 밥투정을 못합니다.

내가 정신을 차린 것은 중환자실에서 잠간입니다. 웬일인지 수술 후 수술장에서 남보다 늦게 내보내는 대신 회복실을 건너뛰어 중환자실로 옮겼습니다. 아내가 보였고 처제와 그의 남편이 보였고 작은 아들이 보였습니다. 잠시 후 소아과의 이흥재교수가 왔습니다. 이흥재 교수는 4년 후배지만 인턴 동기고 한양대학교에서 같이 근무했었고 그가 부천 세종병원으로 옮긴 다음에도 서로 연락이 있었던 사이입니다. 그러다가 성균관의대에서 다시 만나 가깝게 지냈지요. 내가 몇 년간 입퇴원을 반복할 때에 자주 내 병실을 찾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의료이야기, 인생이야기, 특히 의료인의 자세(윤리문제까지)에 대해서는 거의 의견이 일치하는 사이였습니다. 내가 죽음을 기다리는 동안 그는 그의 아내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결국 2년전에 세상을 떠나셨지요.

내가 약간 정신이 들었을 때 그가 보였습니다.

“이 웬수야! 당신 괴롭히려고 또 살아 왔다. 히히.

“그럼요, 그래야지요!

요즈음도 삼성서울병원 식구들 중 주치의를 제하면 제일 자주 만나고 있고, 그 날 말대로 괴롭히고 있습니다.

이 일련의 사건, 죽기 직전의 상태, 예기치 않았던 수술, 그리고 회복, 이런 일들을 많은 사람들이 기적이라고 합니다. 막판에 뇌사로 장기를 기증할 사람이 나왔다는 것, 장기이식 대기자 중에서 우선순위가 순서에 미치지 못하는 내게 온 우연인 것 같은 수술의 기회, 성공적인 수술, 이 모든 것이 기적이라는 것이지요. 저는 그 일을 은총이라고 부릅니다. 누가 섭리하지 않고는 그런 일은 일어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장인께서 하신 말씀, “어찌되었던 하나님은 준비하고 계실터이니 절망하지 말고 기도 열심히 해”라던 말씀이 지금도 귀에 울립니다.

그러고는 많은 사람들이 왔다 갔지요. 수술 다음날은 2년전에 세상을 떠난 김용일 교수의 부인이 병실을 찾아와 긴 기도를 했지요. 김용일 교수는 서로의 죽음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서로 “내가 먼저 갈거야”라고 농담을 하며 웃기도 했던 사이입니다. 내가 결혼식 주례를 세 번 했는데 가장 정성을 들인 주례가 그의 딸 결혼식(사위가 정신과의사 박준혁) 때였습니다. 그가 마지막 쓸어져 의식없이 인공호흡기에 의지할 때 나도 곧 따라 갈거라고 말로는 못하고 마음속으로는 울었었습니다. 다시 살아난 내가 그 부인에게는 어찌나 미안했던지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이 살아나셔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라는 그분의 말을 듣고는 내가 챙피하기도 했습니다. 나와 같은 기회를 잡지 못했던 아는 사람들이 생각났습니다. 나와 같은 경우면서 나보다도 더 건강했는데 기회를 얻지 못한 친구의 죽은 아내가 생각났습니다. 그 친구가 면회를 왔기에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나는 원래 생체 이식을 반대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한양대학병원에서 뇌사판정위원이 되라는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이기적이라는 점이었습니다. 의과대학생들을 상대로 장기이식에 관한 태도조사를 했습니다. 결과는 급하면 나는 이식을 받겠지만 나는 남에게 주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치료방법은 도덕적 타당성을 인정받지 못한다는 생각이었고, 그래서 내 놓고 반대했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장기를 기증받고 나니까 내 행동의 타당성을 설명할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이렇게 자기자신을 기만하면서 얻은 생명이니 가치있게 써야 한다고는 생각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 지는 아직 막막합니다. 더구나 이 일로 신세 진 분들이 너무도 많은데 어떻게 갚아야 하는지도 막막합니다. 우선 감사의 말씀만이라도 드려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수술받는 날부터 내가 중환자실에 있었던 며칠간 아내를 비롯한 가족들은 병원 복도의 장의자에서 잠을 잘 때도 많았습니다. 80노구의 장인, 장모 어르신네의 기도와 위로는 내게 무한한 위로가 되었었습니다. 의사이신 장인은 내 병이  희망이 없다는 것을 아시면서도 하나님은 어떤 방법이든 준비하셨을 것이라고 저를 위로했지요. 뻔히 아는 병인데 무슨 말씀이신가고 한편으로는 웃음도 나왔었습니다. 되게 건방진 행동이지요. 멀리 미국에 있는 내 형제들, 죽기 전에 보아야 한다고 여러 번 귀국했었습니다. 아픈 중에도 이별을 준비한다고 밥을 같이 먹고 담소를 나누었습니다.

큰아들의 장인 어른께서는 멀리 부산에서 일부러 문병을 오시기고 하고 며느리를 통해 많은 위로와 격려의 말을 전해 왔습니다. 장로이신 그분도 매일 새벽 나를 위해 기도를 하셨습니다. 둘째 아들의 장인 부부께서는 수술 날 밤 열두시부터 무려 5 시간이나 수술장 앞 돌마루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했습니다. 이분은 목사이십니다. 처제와 동서는 병원에서 한 밤중에 두시간을 기도하고 또 금방 교회에 가서 새벽기도에서 내 회복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내가 아파서 연락을 못 드린 동안 제 걱정을 하면서도 행여나 나쁜 소식 듣기가 겁나 전화도 못 걸고 마음을 조리셨던 선배들, 친지들, 동료, 후배들의 마음고생을 제가 압니다. 멀리서 알게 모르게 저를 걱정해 주셨던 여러분의 마음도 제가 헤아려야 함을 너무도 잘 압니다. 바쁘신 가운데 여러번 병원과 집을 방문하셨던 조두영교수님께는 무어라고 말씀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답은 알고 있지요. 공기 좋고 산세 아름답고 인심 좋은 곳, 선생님께서 일하시는 곳에 가겠다고 하면 좋아하실 것을 알면서 그 답을 못하는 제 마음도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갚을 일만 남은 것을 압니다.

노력해 보겠습니다.

제 두 번째 첫돌, 축하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걸어 보렵니다. 뒤뚱거리면서!

우리집 근처에 오시면 밥을 살 준비는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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