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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vel [re] 한국 천주교의 역사

2011.08.24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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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shaun8036


한국 천주교의 역사



조선천주교의 창설 배경


서 양의 강대국들은 근대초기에 이루어진 지리상의 발견을 계기로 동양으로 눈길을 돌리기 시작하였다. 서양 강대국들의 동양 진출로 말미암아 서양의 학문, 곧 서학이 동양에 전해지게 되었다. 아울러 서양의 종교인 천주교도 중국과 일본에 전해지게 되었다.

임진왜란 때 일본의 예수회는 스페인 예수회 회원인 세스페데스(G.de Cespedds)신부를 조선 남해안에 파견해 일본인 천주교 장병들의 신앙을 돌보게 하였다. 물론 세스페데스 신부는 조선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하려 했을 것이다.

한 편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강제로 끌려간 사람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천주교로 개종하였다. 이들의 개종은 일본의 예수회 회원들에게 조선에도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희망과 관심을 일으켜 조선전교를 시도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일본의 예수회 회원들의 이러한 시도들은 모두 좌절되었다.

한편 중국의 예수회 선교사들도 북경에 오가는 조선 사신들을 통해 조선 전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북경을 방문하는 조선 사신들은 서양문물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얻기 위해 서양 선교사들을 자주 찾았다.

선교사들 역시 이들을 기꺼이 맞이하였고, 조선의 사신들과 함께 서양의 학문과 종교에 대한 필담을 나누었다. 이렇게 해서 서양 문물은 조선 사신들을 통해 처음으로 조선에 소개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병자호란때 볼모로 끌려가 있던 소현 세자와 친교를 맺었던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Adam Schall)은 소현세자를 통해 조선 정교를 시도하려 하였으나, 소현세자가 귀국한 지 2달만에 원인 모를 병으로 갑자기 죽는 바람에 좌절되고 말았다. 이처럼 중국으로부터 시도된 조선 전교역시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러나 중국의 서양 선교사들이 한문으로 쓴 천주교 서적들은 17세기초부터 계속 조선에 소개되었다.

이렇게 소개된 천주교 서적들은 특히 남인 학자들에게 환영받았다.이 책들에 대한 연구는 남인 학자들이 중심이 된 실학 운동에 자극을 주었고, 마침내 서학이란 새로운 학풍을 낳게 되었다. 그러다 마침내 실학자 이익의 제자들 가운데는 학문 차원의 관심을 넘어 서학에서 인생의 진리를 발견하고 신앙을 실천하는 학자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홍유한은 처음으로 천주교 계명을 실천에 옮겼는데, 그때가 1770년경이었다. 이어 권철신, 정약전, 이벽등에게서 천주교 신앙이 싹트게 되었는데, 주어사에서 가진 강학(일종의 연구토론회)이 그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유교의 경전에서 인생의 중요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지 못하자, 천주교서적에서 이를 찾고자 했고 기도 등 천주교 계명의 일부를 실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벽을 뺀 나머지 사람들은 이러한 생활을 계속하지 못했다.
이벽 또한 천주교 서적의 부족으로 천주교 진리를 폭넓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조선 천주교의 창설과 조선교구의 설정

천 주교는 마침내 1784년 북경에서 영세하고 돌아온 이승훈이 이벽, 정약전 등과 더불어 신앙 공동체를 구성하면서 정식으로 조선에 수용되었다. 이벽은 자신의 친구인 이승훈이 동지사편에 북경으로 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아가 '북경에 가면 선교사를 방문해 영세를 청하고 많은 성서와 성물을 갖고 돌아와 달라 '고 부탁하였다.

이러한 부탁을 받은 이승훈은 북경 북당의 그라몽(de Grammont)신부로부터 필요한 교리를 배우고 베드로란 세례명으로 영세한 다음 많은 성서와 성물을 갖고 1784년 봄에 귀국하였다.

이승훈은 귀국한 다음 이벽과 더불어 교리를 연구하면서, 자신들의 친척과 친지들에게 전교했고 그해 음력 9월부터는 영세를 주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세례를 받은 신자들로 구성된 교회가 탄생하였다.

또한 이벽은 정약전과 정약용 현제를 찾아가 복음 전파의 필요성을 강조하였고 중인 계급에게 전 교해 김범우,최인길,최창현,지황 등을 입교시켰다.또한 학문과 명성이 높은 이들의 개종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이벽은 양근의 권씨일가를 찾아가 전교하였고, 그 결과 권철신과 권일신 형제를 개종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개종과 더불어 복음 전파의 열렬한 사도가 된 권일신은 자신의 제자인 충청도 출신의 이존창과 전라도 출신의 유항검을 입교시켜 멀리 충청도와 전라도 지방까지 복음을 전파시켰다.

이들 교회 지도자들은 1786년, 당시 교회의 영수격이었던 이승훈을 먼저 신부로 선출하였고, 이어 이승훈이 또 다른 10명을 신부로 임명해 성서를 집전시켰다. 이른바 가성직 제도였다. 물론 이러한 일은 교회법에 어긋나는 일이었지만, 그들은 무지와 선의에서 미사를 드리고 고백성사,견진성사 등을 집전하였던 것이다.

이 가성직제도는 약 2년동안 게속되었다. 하지만 교회 지도자들은 점차 가성직제도가 잘못된 것이라고 느껴 이를 북경의 선교사들에게 문의하였다.
이러한 문의를 받게 된 북경의 선교사들은 그 잘못을 일깨워 주면서 성직자를 영입하라고 권고해 주었다. 이러한 권고를 받은 교회 지도자들은 구베아(de Gouvea) 북경주교에게 밀사를 파견해 선교사 파견을 약속받을 수 있었다

그 결과 마침내 1794년 말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조선교회에 파견되었다. 주문모 신부의 노력과 신자들의 전교 활동으로 말미암아 조선교회는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 주문모 신부가 입국했을때 4천 명에 지나지 않던 신자는 1800년에 가서 1만 명으로 늘어났다. 특히 신자들은 명도회라는 신심단체를 조직해 함께 교리를 익히고 이웃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명도회의 초대회장이었던 정약종은 신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순 한글로 된 교리서<주교요지>를 손수 편찬하기도 하였다.
그 러나 1801년의 대박해는 교회를 거의 페허로 만들어 버렸다. 주문모 신부는 물론 교회의 지도급 인물들 대부분이 죽음을 당하였다. 그러나 박해를 피해 뿔뿔이 흩어졌던 신자들은 정하상,신태보 등과 새로입교한 유진길과 조신철등을 중심으로 새로운 신자집단을 형성하면서 성직자 영입 운동에 앞섰다.

이들은 부경주교는 물론 교황에게도 1811년과 1825년경 두차례에 걸쳐 편지를 보내 선교사 파견을 호소하였다. 조선교구의 설정은 이러한 배경 아래서 이루어질 수 있었다.
조 선 교우들의 청원에 감동된 로마 교황청은 1831년 조선에 교구로 설정하고 조선교구를 파리외방전교회에 위임하였다. 이로써 조선 교회는 1792년 부터 북경 주교에게 위임되었던 북경교구의 관할권을 벗어나게 되었다. 때마침 파리외방전교회 회원 브뤼기에르(Bruguiere) 주교가 조선 선교사를 자원하였다.

조선교구의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된 그는 조선 입국을 서둘렀으나 조선 땅을 눈앞에 두고 중국 땅에서 병들어 죽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뜻을 이어받아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의 선교사들이 1836년부터 조선에 입국할 수 있었다. 1837년에는 이로써 조선교구는 명실공히 북경교구로부터 독립하였다.


조선 천주교의 시련: 박해


천주교는 수용 직후부터 거의 100년동안 약 10회에 걸쳐 크고 작은 박해를 조선의 조정으로부터 받아야 했다.

최 초의 박해는 1785년 봄 이승훈을 비롯한 당시 교회의 지도자들이 종교 집회를 가지고 있다가 관리들에게 검거되면서 일어났다.(을사추조적발). 체포된 신자들 가운데 중인이었던 김범우만 귀양을 가서 희생되어 이 땅에서 신앙을 위해 죽음을 당한 첫 순교자가 되었다. 1791년에는 조상 제사를 거부했던 윤지충과 권상연이 전주에서 순교하였다.(신유박해)

1795년의 박해는 주문모 신부의 체포령으로 말미암아 시작되었는데, 주문모 신부는 피할 수 있었으나 그 대신 윤우일, 최인길,지황 등이 주문모 신부를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희생하였다.(을묘박해)

하 지만 대규모로 이루어진 첫 박해는 순조 즉위와 더불어 시작된 신유박해이다. 교회의 빠른 발전에 두려움을 느낀 조선의 집권층은 천주교에 대한 일대 탄압을 시작하였다.주문모 신부는 물론 지도급 신자들 모두가 죽음을 당한 이 박해에서는 이미 배교를 선어했던 이승훈, 김건순과 같은 인물에게도 정치 보복의 성격을 띤 사형이 선고 되었다.

이때 황사영(1775 ~1801)의 백서 사건이 발생하였다. 초기 교회에서 중요한 지도자 가운데 한명이었던 황사영은 박해가 일어나자 피신하였다. 그는 피신처에서 박해의 상황을 알리고 구원을 요청하는 편지를 북경주교에게 보내려 하였다. 그러나 이 편지는 도중에 발각되었고, 그 도 체포되었다. 이 편지의 내용에는 조선왕조의 체제를 부인하는 강경한 표현들이 들어 있었다. 따라서 조선의 조정은 천주교가 널리 퍼지는 것에 대해 더욱 긴장하게 되었고, 황사영도 죽음을 당하였다.

두번째로 큰 박해는 헌종때 일어난 1839년 기해박해이다. 이 박해로 3명의 선교사(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와 정하상, 유진길, 조신철 등 교회 지도자들이 순교하였다. 이 박해에서 프랑스 선교사들이 순교하자, 조선 조정의 천주교 탄압은 국제 문제로까지 확산되었다. 1846년 박해(병오박해)는 김대건 신부의 체포가 그 발단이 되었다.

마카오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조선최초의 신부로 서품된 김대건 신부는 서해안에서 선교사의 입국로를 개척하다가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남녀 교우9명이 김대건 신부와 함께 순교하였는데, 그 가운데 한 사 람인 현석문은 다른 교우들과 함께 1839년 기해박해 때의 순교자들에 관한 자료를 수집한 <기해 일기>를 남겼다.

1860년 박해(경신박해)에도 조선 교회는 놀라운 발전을 이루었다. 이에 고정의 후견인으로 정권을 장악한 흥선 대원군은 대규모의 박해를 강행하였다. 1866년에 시작된 이른바 병인박해는 거의 10년 동안 계속되면서 병인양요, 남연균묘 도굴사건, 신미양요 등으로 더욱 심해졌다. 이 박해에서 조선에 있던 선교사 12명 가운데 9명이 희생되었고, 남종삼, 홍봉주 등 약 8천명 에 이르는 신자들이 신앙을 증거하기 위해 순교하였다.

1876년 조선이 문호를 개방하자 입국한리델(Ridel) 주교와 드게트(Deggette)신부는 곧 체포되었지만 처형되지 않고 중국으로 송환되었다.이제 선교사에 대한 박해는 더 이상 있을 수 없는 시대로 변했던 것이다.
이러한 박해의 원인은 무엇보다도 조선 조정이 천주교를 조상과 임금도 모르는 '무부무군'의 사교로 낙인 찍고 천주교 신자들을 강상죄로 다스린 때문이었다.

이밖에 유교의 배타주의, 정교 합일주의, 당쟁과 세도 정치, 쇄국양이주의 등도 박해의 원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 러한 박해로 말미암아 처음에 교회를 주도했던 양반과 지식층이 물러나고 점차 가난한 서민층이 교회의 주축을 이루게 되었다. 또한 처음에 주로 도시에 집중되었던 천주교는 박해로 말미암아 산간 벽지로 흩어져 많은 교우촌을 형성하게 되었다.

또한 조선 천주교는 비교적 평온했던 철종(1850~1864년) 때를 이용해 많은 교리 서적을 인쇄. 보급해 신자들의 신앙을 깊게 하는 한편 복음을 널리 전파시킬 수 있었다. 천주교는 수용 때부터 민중의 글인 한글을 공용어로 사용해 민중에게 지식을 확산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개화기의 조선 천주교

1886 년 조선 조정이 프랑스와 맺은 한불조약은 불완전하나마 처음으로 조선에 종교의 자유를 가져다주었다. 이 조약으로 선교사의 정착이 가능해졌고 본당 조직이 발전하게 되었다.

조선에 세워진 최초의 본당인 서울의 종현(지금의 명동)본당이었다. 종현 본당에 이어 원산. 제물포. 부산. 마산포. 목포 등의 개항지와 갓등이. 평양 등의 중요한 교우촌과 주요 도시에도 본당이 건설되어 나갔다. 또한 용산에 서양식 신학교 건물이 세워지면서 조선인 성직자 양성이 본격 추진되었다. 이때 복음은 남쪽으로는 제주도, 북쪽으로는 국경을 넘어 멀리 간도 지방까지 전파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에서 조선 천주교는 자주 조선의 조정, 특히 지방 당국과 마찰을 일으켰는데 이른 바 '교안' 으로 불리는 사건들이다.

한불조약 뒤 주선 교회의 긴급한 과제는 선교사들이 개항지 밖의 지역에서도 정착할 수 있는 권리를 얻어내는 일이었다. 이를 얻어내려는 과정에서 제주교안과 해서교안 등 숱한 교안 사건들이 일어났다. 이러한 충돌을 미리 막고자 1899년 조선 조정과 교회는 '교민조약' 을 맺었다. 또한 5년 뒤 프랑스 공사와 조선의 외부 대신이 선교 조약을 맺으면서 선교사들이 지방 본당에 정착할 수 있는 권리가 법으로 인정되었다.

개화기의 조선 천주교는 언론과 교육을 통해 개화 운동과 애국 계몽운동을 적극 추진하였다. 천주교에서 발간한 주간 [경향신문]은 1906년에 창간되어 일제의 탄압으로 폐간되기까지 4년동안 발행되었다. 국권이 기울어져 가던 때에 [경향신문]은 내적 개화를 강조하면서 국민들이 자강운동에 나서도록 계몽하였다.

조선 천주교의 교육사업은 처음에는 국민 교육과 기초 교육에만 치중하였다. 하지만 1909년부터는 독일의 상트 오틸리엔(St. Ottilien) 의 배네딕도회 선교사를 초대해 사범 교육과 실업교육을 실시하게 하였으나, 한일합방 뒤 일본인들의 교육 독점으로 폐교되고 말았다.

하지만 조선 천주교는 프랑스 선교사들의 무관심과 소극적인 태도 때문에 국권 수호 운동과 독립 운동에는 범교회 차원으로 참여할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천주교 신자들은 개인 차원으로 이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독실한 천주교인이었던 안중근의 의병활동은 천주교 신자가 국권수호 운동에 참여한 가장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또한 국채 보상 운동을 제창한 서상돈 역시 열렬한 천주교 신자였다. 서상돈의 주장에 호응해 조선 천주교회 전체가 국채 보상 운동에 참여하였으며, [경향신문] 과 교회 조직을 통한 이 운동은 1910년 한일합방 때까지 계속되었다.


일제 치하의 조선 천주교

한 일합방 뒤 곧바로 일어난 '안악사건'은 황해도 지방의 천주교 신자였던 안명근을 중심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다가 발각된 사건이었다. 또 '105인 사건' 의 한 사람인 이기당도 의주 본당에서 활약하던 교우였다. 191년 3.1운동에 참여했다가 퇴학 처분을 받기도 하였다. 또한 이때 강화나 광주 등 여러 곳에서는 천주교인들이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고, 이밖에도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여러 지역에서 만세 시위에 가담하였다가 감옥에 갇혔다. 또한 은율의 윤예원 신부는 상해 임시정부의 국내 조직에 가 담해 활동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일제의 종교 탄압은 해를 더할수록 더욱 심해졌다. 마침내 [경향신문] 은 일제의 탄압에 못이겨 폐간되었고, 이어 사범교육 기 관인 '숭신학교' 도 폐교 당하였다. 그뒤 일제는 이른 바 '포교 규칙'을 만들어 종교 활동을 방해하기 시작했고, 심지어 교회 학 교의 종교 교육까지 금지하였다. 또한 일제는 1920 연대에 들어서면서 신사 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하였다.

안타깝게도 1930연대에 이르러 신사 참배는 국민 의례라는 일본 당국자들의 주장을 근거로 삼아, 교황청은 신사 참배를 허용하고 말았다. 하지만 신자 들 가운데는 신사 참배를 거부해 직장에서 쫓겨나거나 투옥된 신자들의 수가 적지 않았다. 1940 연대에 들어서면서 태평양 전쟁 을 시작한 일제는 서양인 교구장들을 일본일들로 바꿨다.

아울러 교전국이었던 미국의 선교사들을 쫓아내는 한편 서양인 선교사들을 구금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시기에도 조선 천주교는 꾸준히 발전해 교구 수가 9개로 늘어났으며, 교구 조직의 발전과 더불어 메리놀회. 골롬반회 등 새 선교 단체가 진출하였다. 한편 1942년에는 노기남 주교가 서울 교구장을 맡으면서 최초의 한국인 주교가 탄생하였다.


해방후의 한국 천주교

민족의 해방과 완전한 종교의 자유는 천주교회에도 밝은 전망을 안겨주었다. 언론. 출판 분야에서는 일제 때 폐간되었던 주간 [ 경향신문]을 일간지로 창간하는가 하면, 일제 때 폐간되었던 [경향잡지]와 [가톨릭청년]을 다시 발간하기 시작하였다. 교육 분야 에서는 초등 교육기관들이 중.고등 교육 기관으로 개편되었고, 성직자 양성 기관인 용산 예수성심신학교가 '성신대학'으로 승격 되었다. 한국 천주교는 제1공화국의 건국 사업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총선거를 앞두고 '가톨릭시국 대책위원회'를 조직해 신자 청년들을 단합시키는 한편'교구장들은 연합 교서를 통해 국가와 민족을 위해 기도와 희생을 바치도록 신자들에게 지시하였다. 정부가 수립된 뒤에도 주교들은 조국의 통일을 위해 기도를 계속할 것과 순교 정신으로 공산주의에 대항하도록 권고하였다. 비록 시대 상황 때문이라고 할지라도 화해와 일치를 위해 힘써야 할 교회가 반공주의를 내세워 동족에 대한 증오를 부추긴 것은 안타까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국토 분단의 비극은 북한 천주교회의 전멸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북한 공산주의 세력은 토지 개혁과 화폐 개혁 등을 통한 공 산화 정책을 착착 진행하였다. 그러다 북한에 공산 정권이 정식 건립되면서부터 종교 말살 정책이 본격화되었다. 신자들 가운데 많은 이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남쪽으로 피신하였고, 남은 신자들은 끝까지 신앙을 고수하였다.

1949년 5월, 마침내 북한 정권 은 덕원의 베네딕도 수도원과 함경남.북도에 살던 모든 외국인 신부. 수사. 수녀들을 체포하였다. 이에 평양교구장 송용호 주교 가 항의하였으나, 북한 정권은 홍 주교마저 체포한 다음 평양 시내와 평안남.북도의 한국인 신부들을 모조리 체포하였다.

한국 전쟁을 전후해 황해도와 강원도 지방에 남아있던 신부들까지 모두 체포되면서 북한에는 한 명의 신부도 남지 않게 되었다. 남한 의 천주교는 한국전쟁 (1950~1953년) 의 시련 속에서도 발전을 멈추지 않았다. 남한의 천주교는 전후 복구 과정에서 눈부시게 발 전했다.

해마다 입교자의 수가 몇 만 명을 넘어, 휴전 당시 약 16만 명에 지나지 않던 신자수가 1962년에는 53만 명으로 늘어났다. 한편 1962년 교계 제도의 설정으로 한국 천주교회는 새로운 장을 열게 되었다. 또한 같은 해에 열린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는 한국 천주교회의 쇄신과 발전에 크나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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