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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昭君(왕소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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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漢) 원제(元帝) 건소(建昭) 원년, 전국에 후궁을 모집한다는 조서가 내렸는데, 전국 각지에서 선발되어 입궁한 궁녀들은 그 수가 수천명에 이르렀다. 이때 왕소군도 18세의 꽃다운 나이에 후궁으로 선발되었다.

황제는 수천명에 이르는 궁녀들의 신상을 일일이 파악할 수 없었기에, 먼저 화공 모연수(毛延壽)에게 한 사람 한 사람의 초상화를 그려 바치게 했다. 그래서 부귀한 집안의 출신이나 경성(京城)에 후원자가 있는 궁녀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화공에게 자신의 모습을 예쁘게 그려달라고 뇌물을 바쳤으나, 오직 왕소군만은 집안이 빈천하여 아는 사람도 없는 데다 자신의 용모를 황제에게 속일 마음이 없었으므로 뇌물을 바치지 않았다. 결국 모연수는 자기에게 뇌물을 바치지 않은 왕소군을 괘씸하게 여기고, 그녀의 용모를 아주 평범하게 그린 다음 얼굴 위에 큰 점을 하나 찍어 버렸다.

그 후 원제는 왕소군의 초상을 보았으나 추하게 그려진 그녀의 모습을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이리하여 왕소군은 입궁한지 5년이 흘러갔지만 여전히 황제의 얼굴도 보지 못한 궁녀 신분에 머무르고 있었던 것이다.

 왕소군은 궁중의 잡다한 일을 맡으면서도, 많이 남는 시간을 이용하여 독서와 서예, 가무(歌舞), 그림 등을 익히면서 항상 내실을 다지고 자신을 가꾸는 일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그러나 밤이 되면 아무도 찾아주지 않는 쓸쓸한 방에서 홀로 고독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꽃다운 나이를 이렇게 흘려보내고 나면, 언제나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을지, 언제나 부모님의 은혜에 보답할 수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다시 낙엽이 지고 풀벌레 슬피우는 가을이 찾아와 차가운 빗줄기가 창문을 두드리면 그녀의 마음 속에는 한없는 그리움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그때마다 그녀는 비파를 타면서 향수를 달래곤 하였다. 유명한 <오경애원곡(五更哀怨曲)>에는 바로 그녀의 이러한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 왕소군이 이렇게 쓸쓸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마침내 그녀의 운명을 결정짓는 날이 찾아왔다.

한(漢) 원제(元帝) 경녕(竟寧) 원년(BC 33), 남흉노(南匈奴)의 선우(單于) 호한야(呼韓邪: 재위 BC58~ BC31)가 원제를 알현하기 위해 장안(長安)으로 왔던 것이다.

당시 흉노에는 내란이 발생하여 호한야의 형 질지골도(郅支骨都)가 북흉노를 세워 남흉노를 위협하고 있었다. 이때 한나라의 서역도호(西域都護) 감연수(甘延壽)가 북흉노를 정벌하고 질지골도를 죽이자, 호한야는 황급히 원제에게 글을 올려 알현을 청하고 신하의 예를 갖추었다.

호한야는 모피와 준마 등 많은 공물을 가지고 장안으로 와서 원제에게 매우 공손하게 문안을 올렸다. 이를 크게 기뻐한 원제는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 호한야를 환대하자, 호한야는 원제에게 황제의 사위가 될 것을 청하였다. 

 원제는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고는 공주를 시집보내기 전에 먼저 그에게 한나라 황실의 위엄을 한 번 과시하고 싶었다. 그래서 명령을 내려 자기의 후궁 중에서 아직 총애를 받지 못한 미녀들을 불러와 술을 권하게 했던 것이다. 이 일의 중요성을 알아차린 후궁들은 이번이 황제의 주목을 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지라, 제각기 예쁘게 단장하여 황제의 환심을 사고자 하였다.

궁녀들이 줄지어 들어오자 호한야는 다채로운 모습에 한참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다, 그 중에서 절색의 미인을 발견하고 시선을 그곳에 고정시켰다. 그리고는 즉시 원제에게 또다른 제의를 했다.

 "황제의 사위가 되기를 원하지만 꼭 공주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저 미녀들 중의 한 명이어도 괜찮습니다."

원제는 원래 종실의 공주들 중에서 한 명을 택하려고 하였으나, 지금 궁녀들 중에서 한 명을 선발한다면 훨씬 번거로움을 피할 수 있다는 생각에 호한야의 제의를 즉석에서 수락하였다. 이에 원제는 호한야에게 직접 선택하도록 하였고, 호한야는 그 자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왕소군을 지적하였던 것이다.

호한야가 가리키는 손 쪽으로 보니 과연 그곳에는 천하절색의 미녀가 사뿐히 절을 올리는게 아닌가! 곱고 윤기 있는 머리결은 광채를 발하고, 살짝 찡그린 두 눈썹엔 원망이 서린 듯, 너무나 아름다운 왕소군의 미모에 원제도 그만 반하고 말았다. 그러나 황제로서 한 번 내린 결정을 다시 번복할 수도 없었다.

연회가 끝난 후 원제는 급히 후궁으로 돌아가서 궁녀들의 초상화를 다시 대조해 보았다. 그런데 왕소군의 그림이 본래의 모습과는 천양지차로 다른데다 얼굴에 점까지 그려져 있었던 것이었다. 그 순간 원제는 화공(畵工) 모연수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올라 진상을 철저하게 조사토록 명령하였다. 진상이 밝혀지자 모연수는 결국 황제를 기만한 죄로 참수되었다.

그 후 원제는 왕소군을 놓치기 싫은 마음에 그녀를 붙잡으려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하는 수 없이 호한야에게는 혼수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으니 3일만 기다리라고 속이고는 그 3일 동안에 왕소군과 못이룬 정을 나누고자 하였다. 그리고는 조용히 왕소군을 미앙궁(未央宮)으로 불러 사흘밤 사흘낮을 함께 보냈다.
 
3일 후 왕소군은 흉노족 차림으로 단장을 하고 미앙궁에서 원제에게 작별을 고하였으며, 원제는 그녀에게 "소군(昭君)"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소군"에는 "한나라 왕실을 빛내고" "황제를 대신하여 흉노를 빛내라"는 의미가 깃들어 있다.

왕소군은 마지막으로 장안을 한 번 바라본 다음, 가슴에 비파를 안고 말에 올랐다. 왕소군 일행이 장안의 거리를 지나갈 때는 구경나온 사람들로 거리를 꽉 메웠다. 이렇게 왕소군은 번화한 장안을 떠나 서서히 늙어가는 흉노 선우 호한야를 따라 황량한 흉노 땅으로 갔던 것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왕소군이 정든 고국산천을 떠나는 슬픈 마음을 달랠길 없어, 말위에 앉은 채 비파로 이별곡을 연주하고 있는데, 마침 남쪽으로 날아가던 기러기가 아름다운 비파소리를 듣고 말위에 앉은 왕소군의 미모를 보느라 날개짓 하는 것도 잊고 있다가 그만 땅에 떨어져 버렸다고 한다.

여기에서 왕소군을 일러 "낙안(落雁)"이라고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왕소군이 떠날 때 중원은 따뜻한 봄이었지만 북쪽 변방은 차가운 바람이 불어닥쳤다. 왕소군은 결국 긴 여로에 시달려 병이 나고 말았다. 

 며칠을 쉬면서 요양을 한 후 안문관(雁門關)을 나서자 흉노의 여러 장수들이 마중을 나왔다. 그러나 그곳에 보이는 건 평평한 사막과 부옇게 날리는 먼지, 그리고 끝없이 펼쳐진 초원 위로 뛰노는 소와 양떼들 뿐이었다. 흉노의 왕부에 도착한 호한야는 대단히 기뻐하면서 천막마다 등롱을 달고 아름답게 장식을 하여 왕소군과 혼례를 치렀다. 그리고는 "흉노족에게 안녕과 평화를 가져주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왕소군을"영호알씨(寧胡閼氏)"에 봉하고,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다. 그러나 슬픈 피리소리와, 달리는 준마, 비릿한 음식, 이역의 풍경 등은 왕소군에게 고국의 그리움만 더해 줄 뿐이었다. 왕소군이 흉노의 왕부에 도착한 지 3개월 후, 한 원제는 왕소군에 대한 그리움을 못잊어 신음하다가 그만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2년후, 즉 한 성제(成帝) 건시(建始) 원년, 왕소군은 호한야의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을 이도지아사(伊屠智牙師)라 하였다. 이도지아사는 후에 일축왕(日逐王)이 되었다. 다시 1년이 지난 후 노쇠해진 호한야가 세상을 떠났으니, 이때 왕소군의 나이 불과 24세였다. 이미 3년간 흉노땅에서 생활한 왕소군은 점점 흉노의 생활에 익숙해졌다.

대알씨(大閼氏)의 장자 복주루(復株累)가 선우의 직위를 계승하자, 흉노의 예법에 따라 왕소군은 복주루의 아내가 되었다. 젊은 선우 복주루는 왕소군을 더욱 아끼고 사랑하여 부부간의 금슬이 매우 좋았다. 왕소군은 두 명의 딸을 더 낳았다. 장녀의 이름은 운(雲)이고, 차녀의 이름은 당(當)인데, 후에 이들은 모두 흉노의 귀족에게 시집갔다.

한 성제(成帝) 홍가(鴻嘉) 원년, 복주루는 왕소군과 11년의 부부생활을 마치고 세상을 떠났다. 이때 왕소군의 나이 35세였다. 왕소군의 형제는 후작(侯爵)에 봉해졌으며, 그 후 여러 차례 칙명을 받들어 흉노의 사신으로 가서 왕소군을 만났다. 왕소군의 두 딸도 장안으로 와서 입궐하여 태황태후(太皇太后)를 모신 적이 있다. 이 태황태후는 바로 원제의 황후였다. 태황태후에게는 왕망(王莽)이라는 조카가 있었는데, 후에 왕망은 서한 정권을 찬탈하고 "신(新)"나라를 세웠다. 이에 흉노의 선우는 유씨(劉氏)의 후손이 아닌 왕망을 중국의 황제로 인정하지 않고, 다시 중국의 변방을 자주 침범함으로써 전란이 끊이지 않게 되었다.

자신의 노력으로 성립된 화친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상황을 목도하면서 왕소군은 한없는 원망과 절망 속에 쓸쓸히 죽음을 맞이하였다. 왕소군이 죽은 후 그 시신은 대흑하(大黑河) 남쪽 기슭에 묻혔으며, 지금도 그 묘지는 내몽고 후허호트시(呼和浩特市) 남쪽 9km 지점에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가을에 접어든 이후 북방의 초목이 모두 누렇게 시들어도 오직 왕소군 무덤의 풀만은 푸르름을 잃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청가(靑家)"라 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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