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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사상 최대의 구출작전, 흥남철수


1950년 가을 맥아더 장군은 자신의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북쪽으로 더 진출해 한국전쟁을 끝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11월 28일 소위 지원군이라 불리는 중공군의 참전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유엔군은 다시 남쪽으로 급하게 후퇴해야만 했다.

맥아더 장군은 후퇴하는 연합군 10만 명, 18,000대의 탱크와차량, 그리고 35만 톤의 보급물자를 철수시키기 위해 즉각 흥남해안으로 200여 척의 해군군함과 운송 화물선을 배치하라고 명령하였다.

군인과 장비, 군수물자의 철수와 함께 10만여 명의 북한 피난민도 함께 철수시켰는데 이것이 일명 ‘흥남철수’라 불리는 전쟁역사상 가장 큰 해상철수작전이었다.중공군이 전쟁에 개입하기 전까지만 해도 미군과 유엔군은 북쪽 끝까지 다 점령하여 통일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1만 7천 5백 대의 군사차량과 탱크, 그리고 35만 톤이 넘는군사보급물자를 청진에 운송해 저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엔군이 사선을 넘어서후퇴하게 되면서 모든 군수물자를 다시 챙겨 와야 했다. 그곳에 그모든 물자를 두고 오게 되면 중공군과 북한군, 즉 적에게 무기를 다주는 일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미 10군단장 알몬드(Liutenant General Edward M.Almond) 장군은 10만 5천 명의 연합군 병사들과 무기, 그리고모든 군수물자를 철수시켜야 할 임무를 맡고 있었다.10)당시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에 힘입어 압록강까지 진출한 국군과 유엔군을 열렬히 환영하고 또 공산주의 정부의 지배 아래 억눌려 힘들고 고단한 시절을 보냈던 이북 동포들이 죽음으로내몰리게 되었다.이들은 목숨을 구하기 위해 후퇴하는 UN군을 따라 남을 향해 내려갔다. 이렇게 하여 흥남부두 연안에 집결한 북한동포 피난민의 수가 10만 명 가까이 되었다. UN군 철수작전의 지휘관 알몬드 장군은 처음에는 북한 피난민들의 철수를 생각하지 못했다. 그의 임무는 우선 UN군과 국군을 성공적으로 철수시키는 일이었다.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군 1군단장에게 집결한 피난민 10만명을 버리지 말고 데려 오라고 강력히 지시하였다. 당시 함경도 지역의 한국군 작전을 책임지고 있던 1군단 사령관 김백일 장군은 피난민을 함께 철수시킬 것을 알몬드 장군에게 강력히 요구하였다.

때마침 알몬드 장군의 민사부 고문으로 있던 현봉학 박사의 강력한탄원도 있었다.

10) “흥남철수작전,” 위키 백과, Google Search, 2010.2.711)

6.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26) 38선 북방방어거점을 확보하라,”《중알일보》, 2010.2.2.69이러한 상황에서 군인들의 철수임무를 맡았던 미군 사령부는얼어붙는 추위를 무릅쓰고 허리까지 차는 흥남해안의 바닷물 안으로 들어와 태워 주기를 간원하는 북한의 피난민을 그대로 두고 떠날 수가 없었다. 드디어 피난민들을 모두 태우라는 알몬드 장군의명령이 떨어졌다. 미군과 국군 그리고 군장비 수송의 임무를 띄고이들의 승선작전을 수행하던 100여 척의 미 수송선들은 피난민을태우기 시작했다.그리하여 미군 역사상 가장 큰 인류애 작전(humanitarianoperation)이 시작된 것이다.

수십 대의 상륙용 소형 함정들이 흥남부두로부터 연안에 정박하고 있던 미군 수송선과 해군 구축함에피난민을 실어 날랐다. 먼저 배 바닥 창고에 빈자리를 채우고, 군수북한 피난민들이 흥남부두로 가는 장면

사선을 넘어서물자 위에 송판을 깔아 피난민으로 채우고, 배의 갑판 위까지 콩나물시루같이 채우고, 배에 실린 트럭과 탱크 위에도 태우고, 일부 군수품을 바다에 버리고 자리를 만들어 또 태웠다. 흥남부두 연안에서 대기하고 있던 10만 명 가까운 피난민들을 모두 태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철수작전을 맡았던 미 해군사령부는 휘하의 폭파 부대(UDT)가 흥남부두를 폭파한 후 그곳을 떠났다. 군인들과 피난민을 실은 미군 수송선들은 남으로 항해하여 크리스마스전후 거제도 포로수용소 옆에 임시로 마련된 피난민 수용소에 철수민들을 안전하게 옮겼다. 이리하여 미군의 흥남 피난민 후송 작전은 성공적으로 완료되었다.

전쟁 중에 군인들이 해상으로 철수하면서 10만 명 가까운 많은 피난민을 싣고 함께 떠난 것은 세계전쟁역흥남부두에서 승선을 기다리고 있는 피난민들 (1950. 12)

군사역사 (military history)에서 처음 있는 일로 기네스 북(GuinnessBook)에 오르기도 하였다. 피난민의 철수를 돕기로 작정하기까지는 미군 지휘부와 한국군 지휘부, 그리고 미군사령부에서 근무하던 현봉학 박사와 같은한국인 고문들 사이에 상당한 실랑이가 있었다.

미군 지휘부의 눈에는 흥남부두에서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피난민들이 적지의 민간인
(enemy alien)이었다. 이들이 공산당의 통치를 반대하여 남한으로 가기를 원하는 것을 이해하긴 하였으나 미군지휘부의 주 임무는 UN군과 국군을 안전하게 철수시키는 일이었다.그러나 한국정부, 한국군 지휘부, 그리고 한국인 고문들에게는 부두에서 대기하고 있는 피난민들이 같은 동족이었다. 그 사람작은 선박을 타고 가서 미군 운송함으로 갈아타는 피난민들 사선을 넘어서들이 북쪽에 있었던 것은 그들의 의사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일이었다. 전적으로 미국과 소련의 냉전체제 대결에 의해 나라가 반 토막이 난 결과였다.

그들이 피난을 가지 못하면 죽거나 큰 피해를 당할 것은 뻔한 일이었다. 철수작전의 총사령관 알몬드 장군의 민사부고문이었던 현봉학 박사는 흥남부두를 가득 메운 피난민들에 대해알몬드 장군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저기 있는 사람들 중에는 나의 가족과, 친척과 친구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적이 아닙니다. 우리의 부모요, 형제요, 친구들입니다. 그들을 두고 떠날 수는 없습니다.”현봉학 박사는 미국 토마스 제퍼슨 의과대학에서 병리학 교수로 재직하다가 2007년 11월 25일 미국 뉴저지 주에서 노환으로73별세했다.


12)
흥남 피난민 철수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이승만 대통령의 결의, 한국군 지휘부의 강력한 탄원, 현봉학 박사와 같은 분의뜨거운 동포애와 기지, 그리고 미군지휘부의 인류애적 결단과 용기가 합해서 이루어진 역사적인 작전이었다.

한국전에 참가한 미국 군함과 선박들은 부록의 유의영 교수의이야기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1.4후퇴 시 부산으로 피난민이 계속몰려 더 이상 수용을 못하게 되자, 한국정부의 요청으로 일부 피난민을 부산에서 제주도로 실어 나르는 작전도 수행하였다.

13)
1951년 4월 당시 제주도에는 15만 명의 피난민이 있었는데 이는 제주도 인구의 절반이 넘는 숫자였다.

14) 이들 제주도 피난민 중에는 원산에서 한국군함을 타고 온 사람도 있었고 인천에서미 해군 LST 수송선을 타고 온 사람도 있었다.

15) 1950년 12월 말에는 미 공군 수송기 16대가 서울시립아동보육원 소속 고아 1,000명 이상의 고아를 딘 헤스(DeanHass) 대령의 지휘하에 제주도 로 실어날은 일도 있다.

16) 헤스 대령의 이야기는1956년에 “전송가”(Battle Hymn)라는 ”‘한국판 쉰들러’ 현봉학: 흥남대철수작전의 숨은 주역,” 「신동아」, 2010. 2.13)

”이상철 목사 회고록: 열린 세계를 가진 나그네,” 《한국일보》, 2007. 3. 12.

14) 김종배, “삼무정신 사라지게 한 피난정신,” 제주의 소리(www.jejusori. net)2004.2.8.

15) 《제민일보》(jemin.com), 2008. 3. 12.

16) 《조선일보(》Chosun.com), 2008.4.30.

 사선을 넘어서제목으로 영화배우 록 허드슨 (Rock Hudson)과 도산 안창호 선생의 아들이자 영화배우인 필립 안(Philip Ahn)이 출연하여 영화화되었다.

이와 같이 미국 군함, 수송선, 공군수송기들은 한국전쟁때 흥남피난민 철수작전 이외에도 다양한 민간인 수송 작전을 수행하였다.

내가 겪은 흥남철수그때는 흥남 피난민들에게 말로 표현할 수도 없이 너무나 무섭고 춥고 배고팠던 시련의 시간이었다. 그 당시에 가슴이 아리고 저린 경험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정말 상상도 못할 것이다. 죽음의막바지에서 그 두려움과 절망을 기적의 시간으로 바꾸어 주신 것은아무리 생각해 봐도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밖에는 설명이 되지않는다.

나는 흥남철수 때에 그 현장에 있던 주인공 중 한 사람이다. 나도 많은 피난민들과 함께 미국 수송선(Merchant MarineTransport Ship)에 올랐다.(내가 탄 배의 이름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기적의 배라 불리며 유명해진 SS 메리디스 빅토리 호는 아니다.)

흥남부두에서 군인들과 피난민들 사이에 끼어 철수를 기다리고 있었다.내가 특수첩보팀의 민간요원이라는 “G2”라고 찍힌 빨간 글자위에 적혀진 증명서를 소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승선이 어렵지 않을75것이라고 기대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 미군 장교 한 사람이 지나갔다. 그에게 영어로 말을 걸었다. 몇 마디 대화를 나눈 후 그는나에게 제안을 했다.“수송선 선장이 통역이 필요한데 한번 해 보겠소?”“네, 물론입니다.”그는 나를 상륙용 보트에 태워 해안에 정박해 있는 큰 배로 갔다.

이렇게 해서 나는 쉽게 배에 탈 수 있었다.배에는 벌써 군인들과 피난민, 그리고 군 장비가 가득 차 있었다. 몇천 명이 넘는 피난민들이 이 배의 갑판 위까지 가득 실려 있었다. 배에 실어진 탱크와 자동차 위, 그 사이, 갑판의 모든 공간을 가득 메워 차고 넘치는 사람들은 마치 시루에 꽉 찬 콩나물 같았다. 비좁아서 마음대로 움직일 수도 없었고, 바다의 매서운 바람 때문에 서로를 꽉 부둥켜안고 지탱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그렇게 서로의 바람막이가 되어 주며 죽음의 길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무서워 우는 아이들도 많았다. 하지만 이어 우리가 죽음의 길로부터 구제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아이들을 달래며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려 했다.

나는 나와 같은 배에 탄 사람들과 선장을 이어주는 역할을 했다. 나는 선장실의 한쪽에서 이틀 밤을 잤다. 피난민들은 선장의 주의사항을 협조적으로 잘 따라 주어 안전하게 거제도까지 갈 수 있었다.

나는 배가 부산에 도착하기 전에 한국 군인들과 함께 묵호항에서 먼저 내렸다. 군인들과 함께 수송선에서 밧줄로 만든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 상륙용 보트로 옮겨 타고 모래사장에 도착했는데
그곳이 묵호항이었다. 묵호항에 우리가 내렸을 때, 어떤 한국군 장성이 한국군 대위에게 심하게 욕을 하며 기압을 주던 모습이 선명하다. 대위가 무엇을 크게 잘못한 것 같았다. 그곳에서 나는 군인들과 함께 스리쿼터를 타고 밤새도록 덜컹덜컹 높은 대관령의 산길을지나 서울로 돌아갔다. 서울로 돌아가서 다시 가족들과 상봉하였다. 가족들은 그때까지 피난을 가지 못하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때가 1950년 12월 23일이었다.

기적의 배: SS 메리디스 빅토리 호흥남에서 거제도까지 9만 8천 명이라는 피난민을 옮긴 배는묵호항에 내리는 병사들77대략 100척이었다.

흥남철수작전에 참여했던 200여 수송선 중 100척가량이 주로 피난민을 수송하였다. 그 중 유난히 SS 메리디스 빅토리호(SSMeredith Victory)가 유명해진 것은 이 배 한 척에 1만 4천명의 피난민이 탔고, 세월이 지난 후 이 배의 선장 라루
(Larue) 의 행적이 미국 언론을 통해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다.
라루는 임무를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가 그때의 그 기적의 현장에 있었던 감동으로 영적 변화를 받아 천주교의 수도사로변신하였고, 일평생을 뉴저지의 한 수도원에서 거의 밖에 나가지 않고 수도생활을 했다. 그는 그 엄청난 일을 하고서도 이에 대하여 별로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행적은 한 사람, 두 사람의 입을 통하여 차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작가 빌길버트(Bill Gilbert)는 라루 선장을 수도원으로 찾아가 인터뷰를 하였다.

그 이야기를 책으로 냈는데 그 책의 이름이 『기적의 배』(Ship of Miracles)이다.

17) 빌 길버트는 한국전쟁 때 미 공군으17)Bill Gilbert, Ship of Miracles: 14,000 Lives and One MiraculousVoyage, Chicago: Triump Books, 2000빌 길버트가 쓴 『기적의 배』의 책표지78 사선을 넘어서로 참전하고 후에 《워싱턴 포스트》(Washington Post)의 기자로활약했던 사람이다.

정상적으로는 1,400명밖에 실을 수 없는 배에 피난민 1만 4천 명을 싣고 철수작전을 수행하였다. 배의 모든 공간에 피난민을가득 태우고 배를 항해하여 거제도에까지 무사히 데려다 놓았다.항해 중 5명의 새 생명이 태어났다.

다행히 한인 산파가 있어서 산모가 안전하게 아기를 낳을 수 있었다. 이 책이 출판된 이후 미국과 한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흥남 피난민 철수 작전에 대해 알고감동을 받았다. 이 기적의 배 모형이 지금 거제도 흥남철수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SS 메리디스 빅토리아 호가 알려지며 인정받게 된 것은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SS 메리디스 빅토리아 호와 마찬가지로 다메레디스 빅토리 호의 갑판에 가득 태운 피난민들은 많은 배들도 피난민들을 실어 나르는 기적의 일을 함께 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으로 쓰여진 SS 메리디스 빅토리아 호만 인정을 받게 된 것은 조금 아쉽게 생각된다.

R. J. 맥하튼의 다큐멘터리:

기적의 배그러던 중 알 제이 맥하튼(R. J. McHatton) 영화감독이 출판된 『기적의 배』를 읽고 감동을 받아 자신의 사비를 털어 비디오다큐멘터리를 만들게 되었다.

맥하튼 감독은 이렇게 귀하고 감동적인 기적은 다큐멘터리나 영화를 만들어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그때 그 기적의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을수소문해 찾아다니며 인터뷰를 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영상으로 찍으며 자료를 수집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다큐멘터리는 지금 거의 편집이 끝나고 미국 PBS 방송국을 통해 전 미국에 방영될 예정이다.

흥남철수 때 북한의 많은 동포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남쪽으로 가려고 노력한 광경과 미군들이 그 많은 북한의 피난민을 순전히 박애주의 정신으로 실어 나르는 데 동참한 경험을 나는 했다. 그경험이 나의 삶에 큰 영향을 주었다. 후에 내가 결혼 상대자를 찾을때 그레이스와 같이 물질적 가치보다 정신적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박애주의 정신과 사회봉사활동에 대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을찾게 된 배경에는 흥남철수 때의 나의 경험이 크게 작용한 것 같다.

13. 그들이 겪은 한국전쟁전쟁

참전 용사들과의 인터뷰 하든 맥하튼 감독이 현봉학 박사를 통해 나의 이름을 듣고 나에게 연락이 왔다.

그는 나에게 그 당시 흥남에서 피난했던 한국 피난민들과 미국 군인들을 모아 한 곳에서 만날 수 있게 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 우리를 인터뷰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 당시 나의 아내, 그레이스(Grace)는 캘리포니아 주의 수도인 새크라멘토(Sacramento) 한인회 회장으로 있었다.

아내의 도움으로 신문에 광고를 내 흥남에서 철수한 피난민과 군인들을 모았다. 미국 군인 10명과 한국 피난민 3명(박관옥 여사를 포함해서), 그리고 나와그레이스까지 15명이 한인회 회관에서 모여 맥하튼 감독과 인터뷰를 했다.

“Chosin Few”라는 미국 해병대 모임의 회원으로서 한국전쟁 중 흥남에서 철수한 10명의 미군 베테랑들이 왔는데 그런 모임이 있다는 것을 이때 처음 알았다.

page 81 

한국전쟁 당시 북진해 압록강까지 올라갔던 미국 군인들이중공군에 밀려 후퇴하면서 가장 많이 죽고 피해를 입은 곳이 함경북도의 ‘장진’이라는 곳이다. 장진에서 살아남은 군인들이 미국에 와서 만든 모임이 “Chosin Few”라고 하는데, 장진을 그 당시 일본에서 ‘초신’이라 불러서 미국 해병대원들은 그 이름을 따서“Chosin Few”라고 부른다고 한다.

“Chosin Few” 생존자들은매달 모여 서로 도우며 한 가족같이, 부인들도 친형제같이, 가깝게지내면서 한국의 발전을 기뻐하며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다. 참으로 한국을 사랑하는 한국의 친구들이다.그 이후 “Chosin Few” 참전용사들과 가깝게 지내면서 매년샌프란시스코 총 영사관 주관으로 로즈빌(Roseville)의 한국전 기념관에서 6.25 행사와 헌화를 하게 되었고, 그 이후 이들을 총영사관저에 초청하여 저녁 만찬을 대접하였다.

한번은 『3일의 약속』을쓴 도널드 정 박사(Donald Chung)를 초대하여 그의 책 내용과그분의 한국전 경험담을 듣고 미국 참전용사들에게 감사의 말씀을드리는 기회도 가졌다.이 책의 부록에는 매리디스 빅토리호를 타고 흥남을 탈출했던박관옥 여사, 한국전쟁을 겪었던 유의영 교수, 한국전쟁에서 큰 공적을 남긴 김석춘 씨의 전투일지, 장진강 전투와 흥남 철수를 목격한 미해병 프랭크 다야크와 러셀 풀턴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18) Donald K. Chung, M.D. The Three Day Promise: A Korean Soldier’sMemoir, Tallahassee, FL, 1989. 『3일의 약속』:  맥아더 장군을 비롯한 미국의 도움으로 3일 정도면 전쟁이 끝날 것이라고 생각하고, 3일 후에 돌아오겠다고 어머니와 약속하고 끝내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만나지 못했던 Donald Chung 박사의실화를 쓴 책.

14. 가족과 함께 다시 피난길로


흥남 철수를 하면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나는 서울로 와 집에 도착한 것은 12월 23일이었다. 동네 사람들은 벌써 남쪽으로피난을 가는데 우리 가족들은 나의 소식을 몰라 떠나지 못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서로 떨어져 가는 것이 불안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계급 없는 군복차림에 더블백을 메고 집에 들어서자 식구들은 나를 기쁘게 맞이하였다.“중공군이 내려오고 있으니 빨리 남쪽으로 떠나야 합니다. 서두르셔요.”우리 가족은 거의 마지막으로 피난길을 떠났다.우리는 짐을 싸 한 짐씩 지고 12월 25일 크리스마스 아침 걸어서 용산역을 지나 미군 공병대가 만들어 놓은 한강 부교를 건넜다.

여의도 공군비행장에 있는 전투기들을 옆으로 보며 기찻길을따라 영등포역을 향하여 걸어갔다. 영등포역에는 마지막 기차를 타려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날따라 함박눈이 쏟아져 발이 눈에 묻혔고 전쟁이 아니었으면 경치 좋은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될뻔하였다. 우리가 영등포역에 도착했을 때 군용 열차가 미군과 화물을 가득 싣고 부산으로 떠나려 하고 있었다. 객차 뒤쪽으로 달린화물차 지붕에는 벌써 피난민들이 가득 올라탔고 떨어지지 않게 짐들을 가장 자리에 붙잡아 매어 놓고 있었다. 우리도 사다리를 타고꼭대기에 사람들 틈에 끼어 앉았다. 추워서 담요를 쓰고 머리만 내놓았다.

오후가 되어서야 기차가 떠났고 굴속을 지날 때는 석탄연기로 콧구멍이 까맣게 되어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정거장에서 쉴때면 김밥이나 떡을 사 먹곤 하였다.대전역에 도착했는데 헌병이 와서 군복을 입고 있는 나를 보고 다가왔다.“증명서 좀 봅시다.”나는 첩보대 민간요원 증명서를 보여 주었다. 나의 증명서를뚫어지게 보던 헌병이 말했다.“잠시 조사를 해야겠습니다. 따라오시오.”헌병은 나를 역사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때는 헌병들이 기차를 타고 가는 사람들 중에 젊은 사람을 잡아 제2국민병으로 데려갈때였다. 역사에 들어가서 조사를 받고 있는데 한 미군이 들어와서그 사람들에게 무엇을 물었다. 영어를 하는 사람이 없어서 내가 통역을 해 주었다. 내가 미군과 의사소통이 되는 것을 보고 그만한 위치면 믿을만하다고 생각했는지 나를 돌려보냈다.

기차가 아침 일찍 경상북도 왜관 에 도착하였는데 여기가1950년 8월까지만 해도 인민군들이 제일 남쪽까지 밀고 내려왔던곳이다. 날이 몹시 추웠는데 사람들이 화장실에 가느라고 철로 된기차 옆에 달린 사다리로 내려갔다. 이때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웅성웅성하며 누가 사다리에서 떨어졌다고 하였다.

그쪽을 보니 하늘색 털코트를 입은 여동생 익란이가 땅에 떨어져 정신을 잃고 있었다. 차가운 사다리를 잡고 내려가다가 손이얼어서 사다리를 놓쳐 떨어졌던 것이다. 바로 내려가 익란을 업고정거장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마침 미군들이 있어서 사정을 했더니, 우리가 탄 기차에 있던 미군 의무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들이치료하여 주고 난 후 조금 있다가 익란은 정신을 차렸다. 나와 익란은 부산까지 가는 동안 미군이 탄 객차 안에서 지낼 수 있었다. 이때 충격으로 익란은 힘든 일을 하면 허리가 아프곤 했다.


15. 부산 피난 시절


우리가 탄 피난 기차가 부산 초량역에 멈췄다. 아버지가 북한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였을 때 강원도 영월에 출장을 가셨다가 서울에 돌아오지 못하고 부산까지 혼자 피난하셨을 때 계실 곳이 없어서 초량교회의 부속 건물에 계셨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번에도가족이 전부 초량교회로 갔다. 벌써 교회의 본당은 물론 부속 건물에까지 피난민들로 꽉 차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마당에 담요를 깔고 별을 보며 잤다. 그때는 유난히 추워서 북쪽에서 피난민들이 추위를 가지고 왔다는 말도 있었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당장 직업을 구해야 할 판이었다. 나는얼마 동안 부산 부두에서 데일리 워커(날품팔이 노동)로 일을 했다.당시 일할 곳은 부두에 나가 군용물자를 나르는 중노동밖에 없었다. 일정한 일이 아니고 아침에 일찍 나가 여러 사람 중에서 뽑히면그 날 일을 하고 일당을 받는 것이었다.

받은 임금으로 쌀 한 되와생 오징어 몇 마리를 사 들고 우리 가족이 종일 기다리고 있는 초량86 사선을 넘어서교회 마당의 천막으로 왔다. 그것이 우리의 저녁이었다. 내 가족은여동생이 만든 낙지볶음으로 함께 저녁을 먹으며 좋아했다.

그 낙지볶음의 맛과 냄새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그 후 미국 친구 중하나가 이 이야기를 듣고 나를 데리고 한국음식점에 데려가 그때를생각하면서 원 없이 먹으라고 낙지볶음을 사 주었다.초량교회에서 약 한 달 동안 있었는데 어느 날 아버지가 다니시던 회사의 간부가 찾아왔다. 회사의 직원들이 다른 지방에 출장을 갔다가 와중에 가족들과 헤어져 부산에 오게 되어, 임시 회사의합숙소를 만들고 약 7~8명이 같이 지나고 있는데 우리 집 식구도전부 그곳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조건은 우리 식구가 함께 있는 대가로 여동생이 식사준비를 맡으라는 것이었다. 여러 명의 남자 회사원들과 우리 식구까지 합하면 그야말로 대식구가 되는데, 하루 세끼 식사를 준비하라는 것은 보통 중노동이 아니었다. 그때 여동생익란은 고생을 많이 했고, 기차지붕에서의 낙상으로 다쳤던 허리가그 후유증으로 더 자주 아프곤 했다.그 합숙소는 부산정거장에서 가까운 번잡한 길에 있는 양식식당 2층에 있는 방이었다.

이 양식식당은 술도 함께 팔았는데 밤에는 미군들이 와서 늦도록 술을 마시고 취해서 서로 싸우는 일도 자주 있어 시끄럽고 어수선한 나날이 계속되었다. 후에는 싸우는 일이 심해져 미군당국이 골목 전체를 미군출입금지구역으로 정하였다. 그래도 가끔 와서 술도 마시고 싸우기도 하여 헌병들이 와서 미군들을 잡아가기도 하였다.

합숙소는 방이 두 개 있었는데, 이 두방에서 온 식구들과 회사 직원들이 모두 다 같이 지냈다. 이곳에서 사람들이 많아 익란이가 너무 고생을 한다. 이곳을떠나 피난민 수용소로 가자.”합숙소에서 여동생이 고생하는 모습을 안쓰럽게 지켜보던 아버지는 여동생을 위해 영도에 있는 피난민 수용소로 이사를 결정하셨다.

그곳은 큰 절인데 피난민들이 절간 안팎에 있는 마당에 천막을 치고 살고 있었다. 우리도 그곳으로 가서 한 구석에 천막을 쳤는데, 시장에 가서 미군들이 비가 올 때 쓰는 우비를 몇 개 사서 지붕으로 씌우고, 벽의 한쪽은 돌담장과 다른 한쪽은 절의 벽으로 하여간이 거처를 만들어 살았다. 방의 넓이는 3미터, 길이는  6미터밖에되지 않는 비좁은 방이었다. 잘 때는 마치 성냥갑 속에 들은 성냥같이 촘촘히 누워 자야 했다.피난민 수용소의 1년 반 생활은 정말 힘들었다. 아버지가 그나마 조금씩 토건 일을 받아 가족이 연명을 할 수 있었다.

500여 명이 살던 이 수용소에 우물이 하나밖에 없었는데 우물의 깊이는 약10m여서 깡통에 긴 밧줄을 매어 두레박을 만들어 올렸다 내렸다해야 했다. 아버지가 들어 올린 두레박 바닥에는 모래가 많아 조심해서 물을 물통에 부었다.

이렇게 겨우 물통 하나를 채우는 데 한시간이나 걸렸다. 한 통을 채우는 데에도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는데 줄을 쭉 늘어선 사람들이

 다 물을 길어야 했으니 낮에 사람이많은 시간에는 얼마나 오래 기다려야 했을지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상상이 갈 것이다.

이처럼 낮에는 사람이 많아 물을 길을 수가 없어서 매일 이른 새벽에 가서 물을 길어 와야 했다. 물을 길어 오는 것과 같은 힘든 일들은 아버지가 주로 맡아 하셨다.

(당시에 의예과 학생은 위생병으로 군에서 발령을 해서, 김선생님은 해군 하사관으로 복무하시다
의과대학으로 복귀하셧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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