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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I

3. 한국전쟁 참전용사 김석춘의 전투일지
4. 프랭크 다야크의 이야기
5. 러셀 풀턴의 이야기


3. 한국전쟁 참전용사 김석춘의 전투일지

1950년 6월 24일 나는 휴가를 받아 인천 선화동 13번지 우리 집으로 갔다. 하룻밤을 자고 나서 25일(일요일) 아침을 먹고 인천 시내 극장에 간다고 나왔다. 인천에 주둔하고 있는 육군부대 주번 사령들이 군인들은 자기의 본 부대로 즉시 돌아가라며 마이크로외치고 다녔다. 큰 도로에는 화물 자동차들이 삼각형 깃대를 달고서울 쪽으로 마구 달려가고 있었다.‘또 인민군과 전투가 벌어진 모양이로구나.’그때 38선에서는 크고 작은 전투가 자주 있었다.‘전쟁이 벌어지면 밥은 많이 먹겠지.’이런 생각을 하며 빨리 집으로 돌아 와서 지참물을 챙겨 부대로 복귀를 서둘렀다. 집을 나서려는데 어머니가 나를 불러 세웠다.“석춘아 ! 점심때가 다 되어가니 점심은 먹고 가라.”“큰일이 난 모양이니 빨리 가야 합니다.”사랑이 깃든 어머니의 손을 뿌리치며 나는 하직 인사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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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나섰다. 인천역에서 기차를 타고 용산역에서 내려 한남동 부대로 가려고 하는데 택시 기사가 큰 소리로 나를 불렀다.“군인 아저씨 빨리 타시오. 돈은 안 내셔도 되니 빨리 부대에들어가시오.”택시기사는 나를 한남동 부대까지 태워 주고 가 버렸다. 부대에 복귀하여 주방으로 들어가 보았더니 먹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빨리 출동하라는 명령에 쫓기어 내 장갑차로 갔더니 차에는 휘발유와 실탄과 쌀, 부식물이 준비되어 있었다. 장갑차에 앉아 시동을 걸려고 하니 배터리가 방전이 되어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평소에 차를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장갑차를 움직일 휘발유는누군가가 빼서 내다 팔아 버렸다. 일주일에 배급량이 1갤런 정도였다. 나는 움직이지 않는 차를 다른 차로 끌어서 시동을 걸고 휘발유를 넣어 출발하였다. 한남동 고개를 올라가는데 엔진이 멈추어 버렸다. 휘발유 탱크를 점검하여 보니 휘발유 탱크에 물이 들어 있었다. 평소에 휘발유를 관리하는 사람이 휘발유를 팔고 물을 반 통정도 채워 둔 것을 모르고 휘발유를 넣어서 그렇게 되었다. 그것도모르고 중대장은 마구 고함을 쳤다.

“이 빨갱이 새끼! 권총으로 쏘아 죽여 버리겠어! 빨리 수리해.
”나는 휘발유 탱크 밑의 파이프를 열어 물을 제거하고 다시 시동을 걸어 출발하였다. 서대문 독립문을 지나 서울 시가를 벗어났다. 전투 행렬로 행진하는 군인들과 전쟁터를 피하여 도망치는 백성들이 우리 장갑차가 전쟁터에 나가면 필연적으로 이길 것이라 생각하고 모두들 만세를 불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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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산 지방을 지나 어느 초등학교 운동장에 장갑차를 정차시켰다. 저녁밥으로 주먹밥을 주었다. 전쟁이 일어나면 밥은 많이 먹을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주먹밥을 주어서 너무나 섭섭했다. 나는 전쟁보다 밥을 많이 먹는 것이 좋았다.그곳에서 밤을 새우고 아침밥을 주었는데 어제 저녁보다 밥 덩어리가 컸다. 기분이 좋았다. 우리는 건빵 두 봉지씩을 지급받았다.너무나 기뻤다. 밥을 먹은 후에 건빵 두 봉지를 모두 먹어 치웠다.이 세상에 태어나서 배가 불러서 고생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 당시 연대장은 유모 대령이었다. 내가 입대하여 일 년 반이 된 때였다. 유 대령은 군인들을 이등병으로 묶어 두고 이렇게 말했다.“귀관들이 계급을 올려 월급을 받으면 부식이 나빠진다. 그러니 계급을 올리지 말고 부식을 많이 먹는 것이 좋을 것이다.”그러나 사병들은 매일 배가 고파서 사경을 헤맸다. 아침 식사후에 전선으로 출동하여 산 위에 장갑차를 세우고 전투 장면을 쳐다보았다. 평지와 나무 사이에서 상호간에 실탄이 오고 갔다. 연막이 가득한데 부상당한 군인들을 가마니로 만든 들것에 옮겨 연속적으로 들고 나왔다.
우리 장갑차에서 37mm포를 발사하려고 목표물을 찾고 있었는데 인민군의 포탄 한 발이 차 옆으로 날아와 터졌다. 장갑차가 흔들거리고 땅이 진동했다. 우리는 차를 후진시켜 다른 전선으로 향하였다. 산마다 인민군 판이었다. 한 고지에 있는 인민군 부대를 향하여 포탄을 마구 퍼부었다. 여기저기 공격을 하다가 밤이 되어 불을 끄고 반딧불 같은 소등을 켜고 남쪽으로 이동하였다.

우리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길을 가로수만 쳐다보고 대략의
서윤곽을 잡아 행진하였다. 노면의 높낮이가 고르지 않아 얼마나 고생을 하였는지 십 년 인생을 하룻밤에 산 것 같았다.다음날 양쪽에는 물 논이 있는 어느 둑길 위에 장갑차를 세워놓고 좌측과 전방에 나타난 인민군을 향하여 포를 발사하였다. 너무나 많은 실탄을 쏘아 운전대에 앉은 나는 포성 소리에 귀가 멀어버리는 줄 알았다. 한순간 포성이 멎고 얼마 안 되어 장갑차 내부에서 폭음이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차 안에 불이 나고 있었다. 뒤에있어야 할 승무자는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불을 끄고 급하게 차에서 내려 우측 논바닥으로 뛰었다. 한 사병이 허벅지에 관통상을 입었다. 길가에 초가집 세 채가 있어서 그곳으로 모두 몸을 피했다.잠시 후에 고지에 있는 인민군을 공격하며 다시 전투가 시작되었다. 나는 장갑차를 운전하기 위하여 다른 한 사병과 함께 장갑차안으로 들어갔다. 장갑차는 운전자 혼자 후진을 할 수 없다. 앞에서 한 사람이 유도하여야 후진이 가능하다. 후진 기어를 넣으니 체인지 레버가 꼼짝을 하지 않았다. 뒤쪽을 쳐다보니 차 바닥에 구멍이 나 있었다. 철판이 휘어서 체인지 레버관을 꽉 잡고 있었다. 차가움직이지 않자 승무원들이 차 위의 뚜껑을 열어 둔 채 도망하였다.

그때 인민군이 쏜 총유탄이 차 안에 명중되어 수류탄이 터졌다. 실탄 박스가 등 뒤에 있어서 나는 무사했다. 숨었다 돌아온 승무원들과 함께 차를 수습하여 운전을 하는데 길 위에는 온갖 종류의 차들이 운전수는 도망가고 버려져 있었다. 고생고생하며 장갑차를 후진하여 초가집 세 채가 있는 곳까지 왔다. 가마니에는 주먹밥이 가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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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 있었다. 그러나 밥을 먹을 사람은 모두 도망가고 없었다. 주먹밥에 붙은 쇠고기를 한 점씩 떼어 내 우리 승무원들은 모두 배불리먹었다.해는 져서 어두워져 갈 때 초가집을 빠져 나오니 좀 떨어진 거리에서 인민군의 사격이 빗발쳤다. 먼 곳에서 쏘는 실탄은 겁이 나지 않았다. 남쪽을 향하여 후퇴하는데 십 리도 못 가서 가던 차들이 멈추어 서 있었다. 사연을 알아보니 나무로 만든 다리가 내려앉아서 그런 것이었다. 모든 병사들이 가마니에 흙을 넣어서 다리 밑에 도랑을 채우면서 밤이 새도록 공사를 하였다. 제일 선두에 섰던야포를 달은 스리쿼터 차가 다리 밑으로 내려갔다 올라오는데 야포달린 꽁무니가 강바닥에 빠져 버렸다. 수십 명이 붙어서 밀고 당겨도 요지부동이다. 뒤에는 차들이 많이 밀려 있었다. 날은 밝아졌고인민군은 밀려오고 있었다. 상황이 다급해지자 중대장이 장병들에게 명령하였다.“이제 어쩔 수 없다. 모든 차들을 적이 다시 쓰지 못하도록 파손시키고 철수하라.”나는 전투교육 받는 책과 사물을 모두 논 물에 쑤셔 넣었다.내가 몰던 장갑차는 전기선을 절단시켜 사용이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차를 모두 사용 불가능하게 만들어 놓고 집합했더니 중대장이명령을 하달했다.“지금부터 전원 해산해서 시흥까지 가서 거기 있는 기갑부대에다시 집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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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갈 길이 막막했다. 나는 나와 함께 입대한 정충만과 같이 영등포 쪽으로 한강을 따라 걷기로 하였다. 길을 따라 가는데 한강 쪽을 향하여 운전자 없이 서 있는 차들이 수없이 많았다. 버스와 승용차 안에는 부상당한 환자들이 꽉꽉 차 있었다. 죽겠다고 하고 고함을 쳐도 소용이 없었다. 실내에는 썩는 냄새가 진동을 쳤다.트럭에는 쌀과 부식물이며 총탄들이 가득가득 실려 있었다. 우리나라의 모든 차들이 여기에 모여 있는 것 같았다.우리 둘은 한강 둑까지 와서 갈대 속을 헤치며 영등포 쪽으로걸었다. 오후 3시쯤 되어 영등포가 보이는 데까지 왔다. 여기서부터한강을 헤엄쳐 건너야만 했다. 옷을 벗어 총과 함께 머리에 이고 헤엄을 치는데 중간에서 힘이 빠졌다. 생사가 오락가락하는 판에 뒤에서 누군가가 밀어 주었다. 한참을 버둥거리다가 발을 강바닥에 내려놓으니 모래가 발에 닿았다. 그제야 살았다고 생각했다. 한강 중간 섬을 지나 다시 배를 타고 나머지 강을 건너는데 10명 정도 탈수 있는 배에 20명, 30명이 마구 탔다. 거기에 우리 둘도 끼어 무사히 건넜다.영등포구청 앞 삼거리에 둘이 앉아 경인도로를 따라 집이 있는인천으로 갈까, 그렇지 않으면 경부국도를 따라 부대가 기다릴 시흥쪽으로 갈까 수없이 망설였다. 나는 결정을 하였다. 인천의 집으로가면 탈영병이 되니 집안 식구들도 못 살게 되고 나도 죄인이 된다.그래서 부대로 가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여 둘이 시흥 쪽으로 향해걸었다. 길을 걷는데 배가 고파 허기가 졌다. 밭 언덕에 기대어 기진맥진하고 있는데 지나가던 자동차에서 건빵 두 봉지가 날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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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을 먹고 나니 천지가 밝아졌다.시흥에 도착해서 보니 연대본부가 와 있었다. 연대본부에서밥을 먹은 다음에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발바닥이 쪼였다. 신발을벗어보니 군화 안에 자갈모래가 들어가 있어서 발바닥이 시루떡같이 되었다. 돌을 파냈더니 피가 나기 시작했다. 약이 없어서 치료를할 수도 없었다. 부대가 전열을 정비하여 다시 한강 쪽으로 갔다.인민군이 한강을 넘지 못하게 둑을 방위하는데 인민군 박격포가 아군 진지에 마구 떨어졌다. 그러나 우리는 진지를 사수해야 했다. 최병덕 장군이 헌병을 시켜 후퇴하는 병사는 총살하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인민군 전차가 철도를 타고 건너왔다. 60mm 로켓포로 명중시켰으나 급히 멈추었다가 다시 공격해 왔다. 인민군 전차에 대해아군이 대항할 무기가 없었다.“후퇴하라”우리는 평택까지 후퇴해 왔다. 처음으로 UN군의 쌕쌕이가 날아왔다. 파일럿이 공중에서 보니 지상에는 남하하는 군인과 민간인뿐이었다. 그들이 아군과 적군을 구별하지 못하여 마구 쏘아댔다.우리는 큰 소나무를 잡고 머리는 땅으로 박고 엉덩이는 하늘로 향하여 기어갔다. 이쪽으로 쏘면 저쪽으로, 저쪽으로 쏘면 이쪽으로수없이 돌면서 간신히 피하였다.평택역 쪽에는 100칸 정도의 화물 열차에 전상자들이 타고있었다. 그런데 비행기가 사격을 가하여 모조리 사망케 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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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선을 넘어서그 후 충청도 보은 지방의 전투에 참가하였다. 한 전투에서 우리 중대가 풍지박살이 되었다. 우리는 지휘관을 잃고 우왕좌왕하고있는데 한 장교가 나에게 명령을 했다.“지프차를 운전하여 산 아래 부락에 가서 포위되어 있는 우리장갑차 두 대를 구해 와라.”“산 아래에는 전부가 인민군인데 가면 죽습니다.”“안 가면 총살이다.”전시에는 상관의 명령에 불복하면 총살을 당할 수도 있었다.“넷, 명령에 따르겠습니다.”여하 간에 가다가 죽는 것이 좋겠다 싶어 복창하고 지프차를몰고 떠났다. 고지에서 하행 길을 1,500m쯤 내려갔는데 집중 기관총 사격을 받았다. 진행하는 하행 길에 지프차를 혼자 가게끔 두고 쏜살같이 뛰어 내렸다. 총탄이 어느 쪽에서 오는지 분간을 못하여 정면에서 온 줄 알고 산 중턱에 앉아서 발포 방향을 점치고 있는데 시간이 1분 정도 흘렀다. 갑자기 정면 논둑에서 나의 복부에 정조정하여 기관총을 발사하였다. 기관총을 고정 상태에서 발사하여도 노리쇠를 칠 때마다 총구가 하향하여 거리에 따라서는 목표물의30cm 또는 40cm 떨어진다. 인민군이 쏜 기관총 실탄은 나의 발가락 곁에서 수십 발이 떨어졌다. 나는 잽싸게 밑으로 뛰어 내려서죽음을 면했다. 만약에 인민군이 숙달된 사병이었으면 나의 머리를조정했을 것이다. 그곳을 조정을 하면 복부에 정통으로 박힌다. 그렇게 되면 나는 다시 살아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산 고갯길 1,500m를 제일 포복으로 올라가는데 머리카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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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만 보여도 기관총 사격을 당할 수 있다. 땅을 지렁이가 기어가듯이 수 시간이 걸려 구사일생으로 고갯길 상봉까지 올라갔다. 얼마나 발광하며 올라왔는지 정신이 혼미하여 하늘이 보이지 않았다.마침 장교들만 타고 있는 스리쿼터 차가 보였다. 일개 사병인 내가말도 하지 않고 장교들 차에 올라탔다. 쥐가 고양이 소굴로 들어간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나도 겁나지 않았다. 나는 장교들의 얼굴을쳐다보았다. 거의 죽은 자의 얼굴빛처럼 공포에 질려 있었다. 그들은 장갑차를 타고 반대쪽에 있는 부대에 도착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총탄이 날아와 장갑차를 관통하여 운전병이 즉사하였다고 한다.나는 그 장교들을 태우고 부대로 복귀했다.나는 또다시 지프차 한 대를 운전하여 청주쪽 전투에 참가했다. 그곳에서 우리 장갑차와 인민군 탱크가 산길 커브에서 마주쳤다. 양측의 운전병이 모두 놀라서 당황하여 장갑차는 급하게 후진하여 논바닥에 처박히고 인민군 탱크는 선 채로 회전하다가 한쪽바퀴의 체인이 길 밑으로 떨어지며 차 밑쪽이 길바닥에 닿았다. 아무리 돌려봐도 한 쪽 바퀴의 체인만 헛돌고 있었다. 급한 나머지 인민군 운전병이 차에서 내려와 논바닥으로 뛰어 도망가는데 때마침아군 비행기 한 대가 나타나 도망가는 인민군을 향해 기관총사격을 하여 즉사시키고, 탱크를 폭격하자 탱크는 곧바로 화염에 휩싸였다.나는 지프차를 타고 본부로 가는데 타이어가 펑크 났다. 스페어타이어가 없었다. 그래도 가야 했다. 비포장 자갈길을 계속 달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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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니 타이어는 벗겨져 나가고 호일만 남았다. 그 상태로 수십 리를달려 부대에 도착하였다.우리 부대는 싸우면서 계속 남쪽으로 내려갔다. 대구에 집결하여 신병을 보충받고 부대를 재편성하여 팔공산 전투임무를 받았다. 팔공산을 향하여 트럭을 타고 가는데 운전병이 졸아서 차를 전복시켜 버렸다. 나는 논바닥에 거꾸로 처박혀 철모가 논바닥에 들어가 박혔다. 그러나 사병들은 크게 다치지 않았다. 우리는 전열을가다듬고 다른 트럭을 타고 팔공산으로 갔다.대구 팔공산 전투에서 우리는 높은 고지를 점령하기 위하여 여러 주간을 싸웠다. 한 개의 산을 두고 계속 전투를 하였다. 몇 십리밖에서 미군이 포를 쏴 명중시키고, 전투기가 와서 사격을 하여 고지 상봉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고 먼지만 폭삭폭삭했다. 그런데 우리가 공격해 올라가면 땅굴 속에서 인민군이 여전히 공격을 했다.열세 번을 공격하여 실패하고 열네 번째 공격하여 고지 점령에 성공했다. 그리고 다른 후속부대와 교대하였다. 우리가 교대를 하고 십리도 못 갔는데 고지 상봉에서 인민군의 만세 소리가 들려왔다. 또인민군에게 점령당한 모양이었다.전투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을 때 우리는 또 대구에 집결하여다음 전투를 기다렸다. 또 신병을 보충받고 재편성하였다. 다음은청송 전투에 가야 했다. 그런데 그때 나는 말라리아 병에 걸렸다.결국 청송 전투에 가지 못하고 여섯 명의 환자와 같이 대규모 방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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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서 머물고 있었다. 많이 아픈 것을 방직회사 직원들이 보고노란색의 건기랍을 주어서 계속 먹었다. 눈동자도 노래지고 얼굴도노래져서 황색으로 변하였다.일주일이 되었는데 청송 부대본부에서 전원 청송으로 오라는전갈이 왔다. 반장갑차를 타고 청송으로 가는데 지프차를 타고 있던 한 장교가 물었다.“너희들 지금 어디로 가냐?”“청송으로 갑니다.”“지금 너희들이 온 길은 안동으로 가는 길이다. 차를 돌려 의성으로 가서 청송으로 들어가라.”이 말을 듣고 차를 돌리다가 고장이 났다. 간신히 수리하여 의성에 도착하니 밤이 되었다. 의성에는 연대본부가 있었다. 저녁을얻어먹고 생각 끝에 여기서 밤을 새고 다음날 아침 일찍 출발하기로작정하였다.아침이 되어 갈 길을 쳐다보니 우리 기병대의 말 한 마리가 콩잎을 한 입 물고 도망쳐 오고 있었다. 그 병사를 통하여 사연을 알아보았다.“밤사이에 인민군에게 완전 포위되어 부대 전체가 박살이 났습니다. 여태까지 부대 전체에 장갑차 몇 대와 기병대 말이 몇 마리남아 있었는데 모두 박살이 났습니다.”다시 부대가 재편성되었다. 우리는 602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산 밑에서 주먹밥에 쇠고기 한 점 붙은 것을 먹었다. 고지에 올라가기 위해 물을 많이 마시고 수통에 물을 가득히 채웠다. 전투자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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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올라가는데 때가 양력 8월 중순이라 너무나 더워 산을 반도오르지 못했는데 수통의 물이 떨어졌다. 모두가 눈알이 뒤집힐 정도로 목이 탔다.이 산은 산 정상이 쌍봉인데 한쪽은 인민군이 있고 한쪽은 우리 군대가 있었다. 어젯밤 전투에서 죽은 인민군 시체에서 썩는 냄새가 열기를 타고 코 안으로 들어왔다. 목이 말라 견디다 못한 대대장이 사병들의 수통을 마구 흔들어 보아도 물이 들어 있는 수통은하나도 없었다. 화가 난 대대장은 수통을 발길로 찼다. 물이 들어있는 수통을 가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대대장이 화가 나서 고함을 쳤다.“이 새끼들아, 물 없는 수통은 왜 차고 다니느냐?”이 산봉과 저 산봉에서 교전하는 실탄이 서로 부딪쳐 ‘챙’ 하며마주치는 소리가 간간이 들렸다. 모두가 물이 없으니 하늘을 쳐다보고 바람을 배속으로 급하게 빨아 넣었다.차츰 목에 수분이 없어 목구멍이 말라 들어갔다. 목이 말라양쪽 목구멍이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더 급하게 바람을 빨아들이니 위장 가까이까지 말라 들어갔다. 얼마나 급했던지 소변을 손으로 받아서 마시니 더욱 더 죽을 판이었다. 양쪽 목구멍이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간신히 목구멍 양쪽을 떼어서 계속 바람을 빨아들여 이제는 종잇조각을 서로 마찰하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목구멍에서는 ‘가삭 가삭’ 소리만 났다. 너무 말라서 들러붙지 않았다.이때 전투가 격렬하여 공격명령이 떨어졌다. 적군을 향하여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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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해 나가다가 모두 인민군의 총알은 아랑곳하지 않고 물을 찾아 산비탈 아래로 내려갔다. 산중턱으로 내려가니 30cm 둘레에 높이10cm 정도의 녹물이 고여 있었다. 그런데 이 물에는 벌레들이 꽉차 있었다. 벌레와 같이 물을 빨아 마시는데 다른 놈이 보고 밀어버리고 자기가 남은 벌레들을 마셨다. 산이 가팔라서 한 번 밀려 내려가면 다시 올라갈 생각을 못했다.나는 쌍봉 중간까지 내려왔다. 물은 보이지 않고 바윗돌을 덮고 있는 돌옷(돌에 붙어 있는 이끼)이 수분에 젖어 있다. 모두가 돌옷을 빨아댔다. 입안에는 이끼만 한 입씩 들어 있었다. 시원한 해갈을 구할 길이 없었다. 산 아래 저 멀리 강물이 흘러 내려갔다. 하염없이 그쪽만 쳐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돌격명령이 떨어졌다. 양쪽 진지에서는 계속 엄호사격을 하고 있었다.총알이 빗발치는데 ‘와- 아-’ 하는 함성과 함께 돌격해 올라가니 인민군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우리는 인민군을 추격해 저쪽산 아래까지 도망치게 하고 아군의 사상자를 찾으니 5명이 전사하고 부상자는 보이지 않았다. 인민군이 도망가지 않고 반격을 하였다면 물을 마시지 못한 병사들이라 더 많은 사상자가 나왔을 것이다.시체를 거두어 인민군들이 파 놓은 호 속에 안장하여 함께 매장하였다.물은 계속 없었다. 모두가 사경에 이르렀다. 햇볕은 너무나 따갑게 비쳤다. 모두가 허탈 상태에 있는데 하늘에서 난데없이 까만구름 한 조각이 지나갔다. 안개 빗방울이 소나무 잎에 묻어 있다.우비를 소나무 밑에 깔고 나무를 흔들거리니 물이 한 나무에서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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홉 정도 떨어졌다. 모두가 해갈을 면하고 있는데 산 아래 동리에서인부들이 물과 사과를 지고 올라왔다. 이 산 전투를 마치고 하산하였는데 밭 옆 웅덩이에 물이 차 있었다. 물을 쳐다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철모를 벗어 물을 떠 한꺼번에 마시고 한을 풀었다.다음 전투에서는 어느 이름 모를 산을 공격했는데 3일간을 아무런 보급도 받지 못하고 사과밭에서 사과만 따먹고 견뎠다. 뱃속에는 사과만 가득 차 있었다. 항문을 한 번 열면 뱃속에 있는 사과가소화되지 않고 전부 쏟아져 나왔다. 다시 사과를 따먹기를 되풀이하면서 3일간을 지냈다.경북 어느 고지에서 전투가 있었다. 경기관총 반장을 맡아서전투를 하는데 인민군의 사격이 너무나 극하여 기관총 사수에게 뒤로 조금 후퇴하라고 하였다. 한 사병이 총구에 팔을 대고 있는데 또한 사병이 총을 이동시키기 위하여 방아쇠를 잡고 기관총을 드니총알이 타다닥 발사되었다. 총구를 잡았던 사병의 팔이 덜렁덜렁거렸다. 이 사병은 입대하여 첫 전투였는데 자기의 부주의와 훈련 부족으로 부러진 팔을 안고 후송되었다.전투가 격렬하여 수랭식 기관총에 물이 떨어졌다. 총열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물이 없어 급한 나머지 분대원 전원이 와서 총에 소변을 보라고 하였지만 불가항력이었다. 얼마나 쏘아 댔는지 총열이 달아서 연기만 무럭무럭 났다. 총알은 가까운 골에서 떨어졌다. 쌍방이 똑같은 사정일 것이었다.얼마 있다가 소총 부대가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경기관총 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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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중지하고 소총부대의 후미로 가서 다시 공격을 시작하였다. 드디어 고지를 점령하고 총열을 살펴보니 총열에 흠이 생겼다.전투를 끝내고 우리는 다시 대구의 어느 초등학교에 집합하여신병을 보충받아 부대를 재편성하였다. 그때가 음력으로 7월 22일이었다. 다음날 7월 23일은 내 생일이었다. 생각해 보니 내일 출동하다 죽을지도 모르는데 오늘 미리 생일을 챙겨 먹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남몰래 부대를 빠져나와 대구 시내에 있는 포장마차에 들러서봉급으로 받은 천 원으로 소주 두 잔과 우동 한 그릇을 사 먹었다.부대로 돌아오니 즉시 경주로 출동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경주에서 어느 미군부대가 전멸당했다고 한다. 경주에 도착하여 전투행군을 하는데 보충받은 사병이 총을 오발하여 부상자가 생겼다.여기서부터는 더 이상 인민군이 남쪽으로 오지 못하도록 하라는 임무였다. 경주의 산봉을 지키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전투를 해야 했다. 저녁밥도 먹지 못하고 종일토록 행군하여 밤에 어느 고지에 도착하였다. 대원을 배치하고 전원에게 전투자세를 환기시켰다.“만약에 눈을 감고 조는 사람이 있으면 인민군이 와서 귀를 잘라 가니 절대로 조는 자가 없도록 하라.”산의 상봉에는 인민군이 파 놓은 호가 있었다. 그곳에 두 명을배치하고 나는 산의 지형을 대략 살펴보았다. 휴식할 곳을 찾았는데 마땅한 곳이 없어서 상봉에 다시 올라가 보니 두 사람의 병사가졸지 않고 잘 지키고 있었다.나는 그 옆에 앉아서 총을 호 위에 두고 졸고 있었다. 가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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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날씨라 아침과 저녁은 매우 쌀쌀하였다. 얼마나 졸았는지모르는데 호 위에서 수류탄이 한 발 터졌다.‘이놈들이 수류탄을 오발했나?’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데, 또 한 발이 바로 호 옆에서터졌다. 흙이 호 안으로 쏟아졌다. 급하게 눈을 떠 전방을 쳐다보니 5m 앞까지 인민군 둘이 올라와 있었다. 총을 잡아 방아쇠를 당길 사이도 없이 뒤로 5m 정도 물러서 엎드렸다. 인민군은 호 안으로 따발총을 대고 이리저리 쏴댔다. 호 속에 있던 두 사병의 신음소리가 들렸다. 다음 차례는 나에게로 총알이 올 것이었다. 머리, 등,다리, 어느 쪽으로 총알이 날아올지 모르는 죽기 직전 순간이었다.우리 집 식구들의 얼굴들이 눈 속에서 활동사진처럼 어머니로부터시작하여 차례차례 지나갔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총알은 오지않았다. 철모를 들어 그쪽을 쳐다보니 인민군 두 놈이 엎드려 반대방향을 쳐다보고 있다. 내가 여기 있는 것을 모르는 모양이다. 허리에 차고 있던 수류탄을 한 손으로 벗기려고 하는데 말을 듣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산 아래로 뛰었다. 인민군 수류탄이 뒤에서 터졌다. 산 아래 계곡으로 내려가니 지휘관을 잃은 병사들이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공포를 한 방 쏘아 조용하게 하고 말했다.“여기서 전방 100m쯤 가면 신작로가 나온다. 그곳에서 북쪽으로 전투 행렬을 지어 날이 밝을 때까지 가서 멈추어 기다려라.”고참병 세 사람만 뒤에 남았다. 세 사람이 공격해 올라가려 하니 인원이 너무 부족하였다. 논에 숨어 고참들이 몇 명 더 모이도록기다렸다. 날이 밝을 때까지 고참 수 명이 더 모였다. 모여서 공격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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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라가니 인민군은 간 데 없고 호 속에는 두 명의 병사만이 담요를덮은 채 죽어 있었다. 호 위에 흙을 대충 맨손으로 덮어 주었다. 산비탈에는 미군의 시체가 고성에 무너진 돌담처럼 여기저기 흩어져있었다. 매일같이 오는 비에 시체들이 불어서 집동같이 커져 있었다.매일같이 오는 비에 군복이 젖고 배가 차가워져 이질이 걸렸다. 약이라는 것은 약자도 모르는 형편이었다. 아픈 상태에서 전투가 수없이 반복되었다. 낮에는 우리가 고지를 빼앗고 밤이면 인민군에게 다시 빼앗기곤 하였다. 전진했다가 후퇴하기를 수없이 되풀이하면서 삼사일 간격으로 접전이 이루어졌다.가을에 접어들면서 전세가 바뀌었다. 인민군은 무기와 장비가떨어졌고 사기도 떨어졌다. 우리가 공격하는 대로 인민군은 순순히물러섰다. 우리는 계속 인민군을 밀고 북으로 올라갔다. 북진하여가는 길에 어느 목적지에 도착했는데 소대장님이 오지 않았다. 인민군 낙오병들이 뒤떨어져서 혼자 오는 소대장을 유인하여 콩밭에서 사살하였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듣고 중대장이 나를 불러 명령했다.“콩밭을 공격하여 소대장의 시체를 찾아오라.”고참병 다섯 명을 골라 콩밭 쪽을 공격하는데 경계담을 하나넘으면 조밭이고 그 다음이 콩밭이다. 수류탄 한 발씩을 적진 쪽으로 던지고 담을 넘어 조밭에 들어갔다. 제일포복으로 콩밭 경계담까지 갔다. 거기서 다시 수류탄 한 발씩을 콩밭 쪽 적지에 던지고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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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히 경계담을 넘어 콩밭에 들어갔다. 그때 적지로부터 갑자기 기관총 사격이 가하여졌다. 옆에 있던 사병의 철모에 실탄이 들어와 철모 안에서 뱅뱅 돌았다. 아무도 부상은 당하지 않았다. 너무나 사격이 심하여 다시 담을 넘어 본 위치로 돌아왔다. 빈손으로 돌아온우리를 보고 중대장은 화를 냈다.“다시 적을 공격하고 소대장의 시신을 수습하라.”중대장의 명령을 받고 다시 공격하기 위해 출동하려고 군장을정비할 때였다. 한 사병이 갑자기 배를 움켜잡고 땅바닥에 구르기시작했다.“아이고 배야! 배가 터질 것 같아요.”이번에는 들어가면 틀림없이 죽는다는 생각 끝에 꾀병을 부렸다. 하는 수 없이 다른 사병을 교체하여 전과 같은 방법으로 밀고들어갔다. 콩밭에는 소대장의 시체와 아군복장을 한 인민군의 시체가 있었다. 소대장 시신의 양쪽팔을 둘이서 잡고 제일 포복으로 밭고랑을 나오는데 소대장의 머리가 밭고랑에 부딪혀 한 고랑 한 고랑을 어렵게 넘었다. 담벽을 넘기는데 둘이서 시체를 한 사람은 등쪽을 잡고 한 사람은 허벅지를 잡고 하나 둘 호령을 붙여 넘기고 우리도 넘었다. 소대장의 시체를 담요에 싸서 밭 언덕에 대충 묻어 장례를 지냈다. 사병들이 분을 참지 못하여 인민군의 시체에 분풀이를하고 요동을 쳤다.우리 부대는 북진 행군 도중에 인민군 병력을 발견하여 포위망을 좁혀놓고 전투개시를 곧 시작하려 하였다. 그때 한 사병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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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산 아래 동리에 내려가서 닭을 한 마리 잡아서 삶아 오겠습니다.”생각해 보니 자기는 전투에서 죽으면 절대로 안 된다는 의미였다. 하는 수 없이 갔다 오라고 했다.그때부터 한참 동안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인민군들은 자기들이 파 놓은 호 속으로 일렬로 도망을 갔다. 그들을 뒤에서 기관총으로 사격하였다. 좁은 호 속에서 하나가 총을 맞아 쓰러지고, 다음 사람이 그 위에 쓰러지고, 그 위에 다섯 명이 같이 쓰러졌다. 우리는 쓰러진 인민군 병사들 위를 팔로 짚으면서 넘었다. 밑에 있는병사가 “으악!” 하며 비명을 질렀다. 총을 맞고 호 속에서 그대로 쪼그리고 앉아 있는 병사도 있었다. 얼굴과 입술이 까맣게 탔다. 한판의 전투가 끝났다. 죽은 자가 20여 명이고 생포된 자가 10여 명이다. 아군의 피해는 한 명도 나지 않았다. 죽은 자의 시체가 모두 엎어져 있었기에 병사들에게 명령을 했다.“시체들의 가슴이 하늘을 보도록 뒤집어 놓으라. 그리고 시체의 호주머니에 들어 있는 담배를 너희들 호주머니에 넣으라.”박격포도 5문을 노획했다. 전투가 다 끝이 났는데 닭을 잡으러 간 사병이 닭 한 마리를 잡아 삶아서 왔다. 그 사병에게 시체를뒤집어라 하니 하나도 뒤집지 못했다. 너무나 겁쟁이였다.전투가 끝나고 다시 북으로 행진하여 갔다. 조그마한 강둑길을 행진해 가는데 전방의 고지에서 박격포 탄이 날아와 나의 발 옆강벽 아래에 떨어져 폭발하였다. 강둑 위에서 폭발하였으면 나는폭음과 함께 천국으로 갔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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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행을 연기받았다.어느 산 고지에서 노무대 인부가 주먹밥을 가마니에 넣어 지게에 지고 올라왔다. 전쟁 때 30대 사람들이 노무대로 소집되어 전선에서 밥과 탄약 나르는 일을 했다. 인부가 배식하기 위하여 가마니속으로 엎드려 밥을 끄집어 내는 순간 박격포 탄이 날아와 인부의등에 떨어져 폭발하였다. 인부의 양팔과 양다리가 이쪽저쪽 나무에걸렸고 창자와 몸의 모든 부분들이 산산조각이 되어 흩어졌다. 팔과 다리, 그리고 다른 몸조각을 거두어 호 속에 넣고 흙을 덮었다.우리는 손도 씻지 못하고 그 손으로 다른 인부가 배식하는 주먹밥을 받아먹었다.북진을 계속하는데 인민군의 저항이 별로 없이 행군하다 보니벌써 삼팔선이 다가왔다. 삼팔선을 넘으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 감격의 눈물이었다. 삼팔선 중간에 한 채의 초가가 있었다. 마당가에한 그루의 감나무가 있었다. 마당에는 잡초만 무성하고 지붕은 초라하게 썩어 모양이 처량하였다. 잡초 위에 떨어져 있는 홍시 감을몇 개 주워 먹으면서 생각했다.‘전쟁 중 임자가 없는 감나무에도 하나님은 감이 열리게 하여홍시가 되게끔 하는구나.’하나님은 평등하심을 알았다. 다시 행진해 가는데 전달이 왔다. 이북 쪽으로 넘어가면 사과나 과일을 줄 것이니 고맙게 받아서호주머니에 넣고 먹지는 말라고 하였다. 혹시나 독이 들어 있는지모르니 먹지 말라는 명령이었다. 이북 쪽으로 넘어가니 북쪽의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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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들이 만세를 부르며 길가에 사과 상자를 쌓아두고 우리 군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고맙다고 하며 사과를 받아 호주머니에 넣고 한참 가다가 내가 말하였다.“내가 먼저 먹을 테니 무사하면 너희들도 먹어라.”나는 사과를 한 개 먹었다. 맛이 있었다. 30분쯤 걸어가도 아무런 독의 반응이 없었다. 모두 사과를 먹어도 무방하다 하여 일제히 사과를 먹으면서 행진하여 북으로 갔다.원산을 점령할 때 접전이 있었다. 인민군의 소수가 사살되고무사히 시내로 들어갔다. 시민들이 우리에게 귀띔을 해 주었다.“인민군이 형무소의 죄인들을 모두 박살내고 달아났습니다.”우리는 함경남도 여흥에 도착하였다. 산길 중턱을 가로막고 인민군의 낙오병을 모았다. 삼팔선 이남까지 가서 전투한 사람을 골라선악을 가르고, 심사를 하여 집에 보낼 사람은 해산시켜 보냈다. 우리는 승전하여 전진하는 판이라 낙오병들에게 선심을 많이 썼다. 낙오병 중 의심이 가는 한 명이 자기는 인민군이 아니라고 고집하기에연대 정보과에 이첩시켰다. 몇 시간 후에 보니 자기가 묻힐 곳을 삽으로 파고 있었다.어느 산 밑에서 동네 사람들에게 부탁해서 부대 부식용으로소를 잡는데 인민위원장 부인이라 하는 여자가 소 잡는 것을 도와준다고 하며 소고기를 만졌다. 그런데 그 여자의 손이 지나간 소고기에는 색깔이 변하였다. 조사해 보니 손에 독약을 바르고 와서 소고기에 문질렀다.“이런 악독한 년! 총살형에 처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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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을 산 중턱의 우리가 있는 곳까지 데리고 왔다.“잘못했어요. 한번만 살려주세요.”“필요 없다. 앞으로 걸어가라.”울면서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여인을 앞으로 걸어가게 하고 신병 중에 겁쟁이 세 명을 골라 사격을 하게 했다.“쏴라!”명령에 따라 신병들이 사격을 했으나 아무도 맞추지 못하였다.총소리에도 무사함을 안 여인은 계속 걸어갔다.“너희 사격수들이 무릎 쏴 자세로 사격하라.”“탕탕탕!”세 발이 모두 명중하였다.
여인은 총을 맞고 한 바퀴 빙그레돌아 뒤로 돌아 누워 영원한 잠으로 떨어졌다.
여자는 총을 맞고 죽으면 반드시 누워서 죽는 것이 본능인 것 같았다. 남자는 총을 맞으면 모두 엎어져서 죽는다. 다음날 아침에 한 노인이 와서 시신을 거두어 갔다.여흥을 떠나 종일토록 행군해 가다가 날이 저물어 한 동리에서저녁식사를 하기 위하여 멈추었다. 이북 돈으로 6원짜리 큰 돼지한 마리를 사서 대원들을 시켜 잡아 저녁식사의 부식으로 먹었다.방이 비좁아서 소대장과 나, 그리고 소대 연락병과 셋이 딴 빈집으로 이동하여 머물고 있었다.그때 산으로 피난 갔던 이 집 주인영감이 소달구지에 짐을 싣고 주인마님과 큰딸, 둘째딸을 데리고 돌아왔다. 집이 큰 집이라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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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네 개나 있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피난 갔던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18세 되는 예쁜 작은딸이 나에게 다가와서 말했다.“제가 계급장을 수놓아 만들어 드리겠어요.”나는 너무나 호감이 가서 몸 둘 바를 몰랐다. 이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처녀에게서 풍기는 고마움과 대화였다. 수줍은 마음으로 가슴을 두근거리며 계급장을 수놓아 만드는 것을 구경했다.일등중사 계급의 세 개의 V자형과 밑에 작대기 한 개 가운데V자 세 개는 완성이 되고 작대기를 만들라는 순간 출동 명령이 하달되었다. 빨리 행장을 챙겨서 소대 연락병과 같이 대문 밖으로 나왔다. 처녀가 따라 나와 나를 전송하였다. 나는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처녀에게 큰마음을 먹고 악수를 청했다. 처녀는 손을 주지 않았다. 연락병이 곁에 있어서 그런 것 같았다
.“연락병, 너는 먼저 떠나라.”연락병을 보내고 악수를 청하니 그때서야 악수를 받아 주었다. 처녀는 수줍어서 어쩔 줄을 몰라 하는데 나는 너무나 아름다운처녀라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우리 집이 기차역 옆에 있으니 전쟁에서 승리하시고 돌아가실때 기차에서 불러 주시면 뛰어 나갈 테니 꼭 잊지 말고 불러 주세요.”처녀는 몇 번이고 당부하였다.

그러겠다고 다짐하고 헤어져 행군대열에 끼어 가는데 처녀의 환상이 앞을 가로막아 도랑에 헛발을디디는 수가 허다하였다. 내 마음이 전부 그 아가씨에게 가 있었다.아무리 잊으려고 해도 계속해서 그 예쁜 처녀의 환상이 앞을 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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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았다. 그러다 보니 부대가 보이지 않았다. 부대를 찾기 위하여 얼마나 뛰었는지 처녀도 환상도 모두 잊어 버렸다. 그 이후로는 여자와 대화를 할 일이 없었지만, 전혀 하지 않기로 하였다. 전쟁 중에여자를 취한 사람은 삼 일이 못가서 죽는 것을 많이 보았다.길주를 점령하기 위하여 어느 길 부근 산기슭에서 철도 옆의부대가 머물고 대공표시를 해 놓고 적진의 산봉을 향하여 전투할작전을 구상하고 있는데 비행기 네 대가 날아와서 전방의 산봉을갈기갈기 사격하여 아군의 전진을 용이하게 도와주었다. 산을 점령하고 산을 넘어 들판에 대공표시판을 펼쳐 두고 다음 산에 전투를시작하여 공격을 하며 올라가는데 소총반보다 우리 경기관총반이먼저 산 위에까지 올라갔다. 공격이 너무 빨라서 대공표시판이 미처따라오지 못하였다. 아군의 비행기가 와서 아군진지에 무차별 사격을 했다. 우리는 아군의 비행기인 줄 알기에 모두 몸을 숨기지 않고철모를 벗어서 흔들어 댔다. 비행기는 사격을 중지하고 여러 차례실탄을 쏘지 않고 공중을 돌면서 비행하다가 우리가 아군인 것을확인하고 앞쪽에 있는 인민군 진지에 공격을 시작했다. 우리가 공격해 올라가 산꼭대기가 30m쯤 남아 있을 때 돌격을 시작하였다. 그때 비행기는 사격을 중지하고 엄호비행을 계속해 주었다. 산봉우리를 점령하는 데 얼마나 수월했는지 모른다.길주를 점령하기 위하여 좌우편에 일 개 중대씩, 전면에 일개 중대, 모두 세 개의 중대가 공격해 들어갔는데 우리는 좌편의 공격 중대였다. 좌우편에서는 산을 타고 전진이 수월한데 길주 앞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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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이 직행 30리 들판이라 중앙의 공격 중대가 인민군 직사포에 밀려 공격이 늦어지고 있었다. 드디어 세 개 중대가 공략하여 산꼭대기를 점령하였다.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밥이 올라오지 않았다. 배가 고파 허기지고 추위가 겹쳐 손과 발이 얼어 버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불을피울 수가 없어 조그마한 삭달이를 모아 반딧불같이 피워 놓고 손을 쬐는데 한 사람이 손을 들어 밀면 어느 사이에 딴 사람 손이 밑에 있었다. 하는 수 없이 점령했던 산을 포기하고 산 밑으로 내려와연대본부에서 밥을 얻어먹고 불을 쪼이니 지상낙원이 그것이었다.불을 쬐며 놀고 있는데 중대장에게서 전갈이 왔다.“김석춘은 중대장 앞으로 빨리 오라.”즉시로 뛰어가 중대장을 뵈니 명령을 하달했다.“경기관총반을 다른 선임중사에게 맡기고 김 중사는 인민군에게서 노획한 트럭을 운전하라.”대원들과 순간적으로 이별하니 모두가 울기 시작했다. 눈물을머금고 서로 이별하고 나는 즉시 실탄을 싣고 각 전선에 실탄을 보급하였다. 하룻밤을 지나고 다음날 아침에 길주 시내를 완전 점령하였다.나는 차를 타고 내가 속해 있던 경기관총반을 찾아보았다. 그런데 대원들이 전투에서 모두 죽고 세 명만 살아남았다. 나는 땅을치며 통곡했다.‘내가 있었으면 죽지 않았을 것인데…’사실을 알아보니 행군해 들어가 전투배치도 하기 전에 인민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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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격포탄이 날아와 한 방에서 수십 명이 같이 죽었다고 한다.길주 변두리 어느 사과밭을 찾아 주인에게 사과 한 상자를 달라고 사정하였다.“2년 동안 농사해서 지은 것이 조금밖에 되지 않아서 안 됩니다.”농부는 거절했다. 나는 땅에 떨어져 있는 사과 한 개를 집어멀리 던져 놓고 칼빈총을 쏘아 반으로 쪼개 터트렸다. 나의 사격 솜씨를 좀 보여 준 것이었다. 나의 사격 솜씨를 보자 주인이 태도를바꾸면서 말했다.“남반부 군인들은 사격술이 대단합니다.”그는 칭찬을 아끼지 않으면서 사과 세 상자를 주었다. 사과를중대원들이 잘 먹었다.길주를 점령하고부터는 전진길이 빨라졌다. 인민군의 저항도별로 없었다. 하루에 백리 가까이 전진하였다. 나는 자동차 한 대를가지고 중대 살림을 하기 위해 연대본부, 대대, 중대 사이를 3, 4회씩 왔다 갔다 해야 했고 부대이동을 따라 중대 이삿짐을 실어 날라야 했다.밤늦게까지 나 혼자 산길을 넘어 다녀야 하는데 이북의 산 중턱에는 군데군데 천하 대장 군상들이 세워져 있었다. 한 손에는 총을 잡아 앞 유리에 대고 한 손으로 운전을 하는데 갑자기 나타난 천하 대장군상을 인민군인줄 알고 깜짝 놀라서 당황한 일이 몇 번이나 있었다. 그때 심정을 말로써는 다 표현을 못한다. 얼마나 놀랐는지 식은땀이 와락와락 솟아났다. 이동을 하면 밤사이에 이삿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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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실어 날라야 했다. 그리고 다음날 전진거리를 또 되풀이하여야 했다.전투 병력이 부족하여 자동차에는 조수도 없었다. 지명도 모르는 삼수갑산 쪽으로 간다고 가다가 산세도 험하고 밤이 되어서 산아래 평탄한 골에서 대대병력이 밤을 새우는데 연대본부의 실탄을실은 트럭 운전수와 대대본부의 밥을 실은 트럭 운전수가 찾아와서30리 거리에 있는 후방 시내에 가서 자고 오자고 권했다.“거기에 가면 주색도 있을 것입니다.”이들이 한사코 권했다.“나는 중대장님의 명령에 따르겠다.”나는 중대장을 찾아가 중대장께 여쭈었다.“김 중사가 알아서 해라.”나는 생각 끝에 그들에게 말했다.“우리가 아무리 전투에 이기고 있다 해도 급하게 전진하고 왔기에 인민군의 낙오병이 처져 있을 것이다. 아무래도 병력이 집결되어 있는 곳이 안전할 것 같다. 나는 가지 않겠다.”두 대의 트럭은 시내 쪽으로 갔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뒤에 시내 쪽 후방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는지 하늘이 진동하리만큼 총탄과 포탄이 터져 울렸다. 대단한 병력이 교전하는 것 같았다. 전투가 너무나 격렬한 모양이라 대대장이 명령했다.“내가 권총을 쏘면 제관들은 각기 가진 총에 실탄을 장진하여모두 하늘을 향하여 일제히 쏴라.”대대병력이 일제히 공포를 쏘아 여기도 큰 병력이 있다는 알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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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이었다. 다음날 아침이 되어 시내 쪽으로 트럭을 운전하여 가는데 도중에 우리 트럭 두 대가 모두 불에 타 있었고 운전수 두 명도 불에타 죽었다. 그 중 한 명은 나와 둘도 없는 동기생이었다. 밥을 실은트럭의 배식하는 여인 두 사람은 살아서 시내에 있었다.“큰 바위 덩어리를 길 복판에 굴려다 두고 인민군 여러 명이양쪽에서 기다리다가 차가 가지 못하고 멈추어 서는 순간 양쪽에서총을 쏘아 그분들을 죽였습니다. 우리는 트럭 뒤에서 뛰어 내려 산쪽으로 도망쳐서 살았습니다.”밤사이의 소란은 실탄 실은 트럭이 폭발하며 터지는 소리였다.내 동기생은 불에 타서 입을 꽉 다문 채 양팔은 오그라졌고 다리는 오그라들어 개미다리를 하고 죽었다. 나도 어젯밤에 같이 갔으면 저 모양이 되었을 것이라 생각하면서 현장을 수습하고 시내로 갔다. 죽고 사는 것이 일순간의 차이라 생각하니 누군가가 방향을 잡아 주셨기에 살아남았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이 모두가 하나님아버지께서 방향을 잡아 주신 것을 깨닫고 감사했다.우리 부대는 삼수갑산 쪽을 포기하고 북경성을 거쳐 청진을 옆길로 질러가서 청진과 나진 사이에서 회령으로 들어가는 길로 전진해 나갔다. 두만강까지 3백 리가 남았다고 했다. 이제부터 삼일만더 하면 전쟁이 끝난다고 생각하였다.그런데 난데없이 후퇴 명령이 하달되었다. 트럭에 있는 실탄을 모두 내려놓고 회령 쪽으로 가 후퇴하고 있는 병력과 배낭을 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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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오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때 나는 경기관총 반을 선임중사에게맡기고 인민군에게서 노획한 트럭을 운전하여 전투부대를 돌며 무기와 탄알을 공급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급하게 회령 쪽으로 가려고 태산을 넘어가는 중간쯤에서 경기관총 반에 같이 있던 전우가손을 흔들어 차를 세웠다.“너는 어제 대전차지뢰를 밟아 죽었다고 들었는데 살아 있었구나.”그 친구는 나를 보자 무척 반가워하며 말했다.1,500m 고지나 되는 태산을 넘어 쏜살같이 달려 평지에 도착하여 논길로 들어섰다. 논길에 들어서서 100m도 못 갔는데 좌측 앞바퀴가 빠져 나갔다. 차가 논둑에 처박혔다. 만약 태산의 내리막길에서 바퀴가 빠졌으면 아마 나는 뼈도 못 추렸을 것이다. 후퇴하던 중대장이 보고 나에게 차를 불사르고 오라고 명하였다. 나는근처의 민가에 가서 어떤 할아버지의 화롯불을 빌려 와 휘발유 탱크 코크에 불을 붙였다. ‘펑’하는 소리와 함께 나의 눈썹과 머리가일부 타 버렸다. 그런데 차에 불이 붙지 않았다. 나는 총으로 휘발유탱크를 쏘아 차에 불을 붙였다.그 사이에 우리 부대는 모두 후퇴했고 나는 혼자 외톨이가 되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흥남부두까지 후퇴해야 했다. 며칠을 걸어야만 흥남에 도착할지도 몰랐다. 후퇴대열에 끼어 걸어가다가 다른 부대의 수송차가 지나가면 올라타고 가기도 하고, 내려서 후방부대가올 때까지 눈을 붙이며 기다리기도 하다가 어느 역에 도착하여 기차를 탔다. 거기에는 군인들이 가득 차 있었고 쌀과 부식들도 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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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선을 넘어서있었다. 내가 탄 화물차는 다섯째 칸이었다. 기차가 출발하여 한 시간쯤 갔는데 굴을 지나고 높은 다리를 지나고 또 굴에 들어가려는찰나에 내가 탄 다음 칸이 떨어져 나가면서 뒤의 칸들이 일부는 전복되기도 하고 일부는 파산되기도 하였다.그런데 기차는 서지 않고 그대로 진행했다. 굴을 지난 다음 우리는 공포사격을 하여 기차를 멈추게 하였다. 누군가가 기관사와대화를 한 후 기차는 다시 출발하여 다음 역까지 가서 섰다. 그러나아무리 기다려도 기차가 다시 출발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모두 내려 흥남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얼마 가다가 나는 지나가는 다른 부대의 자동차를 얻어 타고 수십 리를 달려 어느 곳에 도착했다. 도보로 오는 우리 부대를 생각하니 내일 쯤 그곳에 도착할 것같았다.우리 부대를 기다릴 겸 나는 그곳에서 잠을 잤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우리 부대가 새벽에 벌써 지나갔다고 하였다. 나 혼자만 다시 뒤에 떨어진 상황이 되었다. 당황하여 다시 수소문해 보았더니 어떤 사람이 나를 안심시키며 말했다.“부대에서 여기에 부식물을 남겨 두고 갔소. 아마 몇 시간 후에 부대 차가 올 것이오. 그러나 여기서 기다려 보시오.”얼마 후 우리 부대 차가 왔다. 나는 운전병과 함께 부식물을차에 싣고 오버를 덮어쓰고 잠을 자면서 갔다. 운전수가 천지가 흰색으로 덮인 눈길을 달려가다가 도랑둑이 길인 줄 알고 핸들을 급회전시켰다. 트럭은 전복되어 도랑에 처박혔다. 나는 도랑으로 굴러떨어졌고 운전병은 트럭에 깔려 압사하였다. 나는 부락사람의 도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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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도랑에서 둑으로 올라왔다. 내가 입은 옷이 금방 얼음덩어리가 되었다. 부락사람들이 물을 끓여 와서 추위를 덜어주었다. 부락사람들이 고마웠다.나는 다른 트럭을 타고 한 시간 후에 연대본부에 도착하였다.주방을 찾아 대충 허기를 면하고 방 안을 들여다 보니 대원들이 아랫목이 너무 더워 비워 둔 채 잠을 자고 있었다. 나는 얼씨구나 하고 얼어서 유리조각같이 된 옷을 그대로 입고 호망천지 깊은 잠에빠졌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옷에서 떨어진 흙먼지가 수북하였다.중대장을 찾아 자초지종을 보고했다. 내 보고를 들은 후 중대장은다시 나에게 명령을 했다.“김 중사는 지금부터 박격포반을 맡아 지휘해라.”나는 박격포반을 인솔하고 흥남부두까지 걸어서 강행군으로길을 재촉하였다. 피난을 가는 민간인이 인산인해를 이루어 행군에막대한 지장을 받으며 걸었다. 흥남부두 가까이 가니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어 부두에 접근하기가 대단히 어려웠다. 함경남북도의 모든 사람들이 남으로 가려고 흥남부두로 몰려온 것 같았다. 행군 중 부락들을 지나면서 보니 집에는 걸을 수 없는 할머니, 할아버지만 남아 있었다. 부둣가에 먼저 도착한 사람들은 첩첩이 밀어닥치는 사람들에 밀려 바다로 빠지는 사람들이 허다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허리까지 차는 바닷물 속으로 밀려들어가 배 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우리 부대는 흥남부두에서 며칠 기다렸다가 미국 군함을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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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선을 넘어서군함에는 군인들만 아니라 민간인들도 많이 타고 있었다. 항해 중배가 흔들려 포열이 배 밑창으로 떨어졌다. 다행이 부상자는 발생하지 않았다.며칠 만에 우리 부대가 탄 배는 묵호에 도착하였다. 하선한 우리 부대는 군비를 정돈하고 강릉 쪽을 향하여 공격하며 다시 북진을 시작하였다. 내가 지휘하는 박격포반이 강릉 쪽 어느 산 아래서모두 전방 고지를 목표로 박격포를 쏘아 대는데 그중 일문의 포열에서 발사가 안 되었다. 수없이 포탄을 많이 쏘아 댔지만 불발은 처음있는 일이었다. 불발 처리를 생각하니 하늘이 캄캄하였다. 내가 신병 훈련 때 훈련은 받았지만 실습은 한 번도 안 해 봤다. 포탄을 포열에 집어 넣을 때 포탄의 앞쪽 안전핀을 뽑고 넣었기 때문에 탄의앞쪽이 조금만 부딪쳐 압력을 받아도 폭발한다. 포열을 거꾸로 들어 포구까지 내린 다음에 포구까지 내려온 포탄을 앞쪽 뇌관을 다치지 않고 받아야 된다. 만일 포탄의 뇌관에 손이 닿으면 포탄이 터져사방 30m 안에 있는 사람은 죽거나 부상을 당한다. 대원들을 안전하게 먼 곳으로 대피시키고, 그 중에 제일 영리한 사람을 한 명 뽑아 포열을 들게 하고, 나는 포구에 손을 대고 포탄이 내려오기를 기다렸다.“포열을 조금 더 들어 올려, 조금 더, 조금 더.”내가 지시하는 사이에 포탄이 손에 닿았다. 순간 천지가 캄캄하고 머리털이 일제히 빳빳하게 섰다. 포탄을 잘 받아서 안전핀을다시 꼽고, 부하에게 밭 언덕에 묻으라고 지시하고, 다시 전방을 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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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포를 발사하기 시작하였다.수없이 많은 전투 끝에 강릉 대관령 좌편 산까지 점령하여 들어갔다. 대관령 좌편 산상봉을 주간에는 점령하고 야간에는 후퇴하기를 수없이 거듭하였다. 산 중턱을 지나가는데 어젯밤 전투에서 죽은 인민군 병사들의 시체가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다음날이 음력으로 우리나라 설날이라 하였다.“내일이 설날인데 그믐날 미리 세배 인사하는구나.”남자는 총을 맞으면 모두 앞으로 엎어져 죽는다. 나는 겁쟁이신병들을 불러 명령했다.“시체를 뒤집어서 담배를 끄집어 내어 너희들의 호주머니에 넣어라. 배낭에 들어 있는 밀, 콩, 옥수수, 볶은 것을 호주머니에 넣어라. 열심초가 나오면 나도 좀 달라.”열심초는 인민군 장교만 피우는 담배인데 열심히 빨지 않으면불이 꺼짐으로 열심초라 명명하였던 것이다.하루는 대관령 좌편 산 중턱에서 대관령 고개 밑의 조그만 부락을 향해 기관총으로 겨누고 밤을 새웠다가 아침 일찍 집합하여점호하는 인민군들에게 집중사격을 하였다. 인민군이 놀라서 흩어져 앞산을 향해 도망가는 것을 아군이 추격하여 모두 소탕하고 여자 군인 세 명만 생포하여 왔다. 우리가 대관령을 점령하고 진부령쪽으로 공격해 가는데 인민군 한 명이 계속 피를 흘리며 눈 위로 10리 정도 도망쳐 가다가 어느 부락에서 쓰러져 죽었다. 총을 맞은 곳을 찾아보니 발뒤꿈치에 약간의 부상이었다. 계속 피를 흘려 피가부족하여 죽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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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가다가 날이 저물어 높은 산 아래 동네에서 밤을 샜다.전방 고지에서 인민군이 딱꿍총을 우리 후방 보급소를 목표로 쏘아댔다. 밤중에 각 초소를 순찰하면서 지휘관들의 숙소를 돌아보았다.장교들의 숙소에는 아이가 딸린 한 여인도 있었다. 아침 4시에 식사를 마치고 모두가 앞산 쪽으로 공격해 올라가는데 아기 업은여인이 한사코 우리와 같이 가야 한다며 산을 따라 올라왔다. 나는여인을 달래다 달래다 막무가내여서 결국 호주머니에 있던 양말 두켤레를 주면서 달랬다. 그녀는 하는 수없이 산을 내려갔다. 나의 전재산이 양말 두 켤레뿐이었는데 너무 섭섭했다.우리는 아침부터 계속해서 산을 타고 전진해 갔지만 인민군은나타나지 않았다. 해가 서산으로 기울 때 저녁노을이 찬란하다고느꼈는데 인민군의 딱꿍총이 딱꿍하고 반항했다. 우리는 모두가 공격태세로 들어갔다. 박격포반은 야간에 포를 쏠 수 없어 산 밑의 초가집에서 밤을 새우기로 하였다. 강원도 농촌집 방 한 칸에서 수십명이 밤을 새려니 쪼그리고 앉지도 못하고 반수는 선 채로 밤을 샐판이었다.하는 수 없이 멀리 언덕 밑의 초가를 발견하고 찾아갔더니 방안에는 등불이 켜져 있었다. 안에서 사람들의 소리가 들렸다. 문을열고 들어가려고 하다가 멈추고 잠시 생각을 하였다. 인민군이 거기서 밤을 새우고 있다면 어찌하나 생각하니 소름이 끼쳤다. 나는 재빨리 언덕으로 다시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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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이 되니 산중턱에 박격포를 차려두고 수십 발을 쏘아대고있었고 산 아래를 내려다 보니 중공군과 인민군이 양쪽에서 구름같이 몰려오고 있었다. 수가 너무나 많아 아무리 공격하여도 밀고 올라오는 데에는 막무가내였다. 하는 수 없이 포를 거두어 각각 짊어지고 분산하여 도망가기 시작하였다. 한 사병은 달아나는데 총알이손등을 관통 당하였다. 지혈할 여유도 없었다. 한 손으로 손목을꽉 잡고 안전한 곳까지 뛰라고 하고 산 아래 계곡으로 뛰었다. 양쪽산에서 기관총 사격이 소낙비처럼 쏟아졌다. 그것이 포위망이었다.다음 산을 올라 산 중턱 비탈의 눈 위를 조심조심하며 걸어가는데위에 있던 사람들이 꽁꽁 얼어 있는 인민군 시체를 잘못 건드려 굴러 내려가기 시작하였다. 조심하며 걸어가는 군인들의 다리를 시체가 굴러 내려와서 쳤다. 군인들은 눈과 시체와 함께 엎어지면서 구덩이에 빠져 서로 빠져 나오지 못하여 도망길이 늦어졌다. 나는 몸은 빠져 나왔지만 구덩이에서 총을 잡아 뺄 수가 없어서 얼마나 시간이 오래 걸렸는지 모른다.산에서 내려와 큰길 위에 도착했는데 다시 집중사격을 받았다. 배가 고프고 잠이 오고 허기가 져서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더구나 포위망을 벗어난 줄 알았는데 제 2의 포위망이 있어서매우 실망하였다. 나는 총탄이 날아오는데도 상관치 않고 길바닥에들어 누웠다. 나는 순간적으로 잠이 들었다. 뛰어오던 한 병사가 나의 머리를 잡아당기며 일으켜 세웠다. 포탄이 큰 소나무 위에서 폭발했다. 길옆의 계곡을 건너면 피신하기 수월한데 힘이 빠져 내려가지 못하고 들판으로 가야 했다. 포탄과 사격이 계속되었다. 산모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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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까지 와서 직사탄을 맞지 않을 지점을 찾자 또 잠이 들었다.또 다른 사병이 나를 흔들어 깨웠다. 하늘도 땅도 보이지 않았다. 인부가 쌀을 지고 따라 다니다가 버리면 죽는다고 했는데도 지고 갈 힘이 없어서 버리고 갔다. 군인들은 쌀을 서로 입에 넣었다.나는 쌀을 집을 힘조차 없었다. 방한모를 벗어서 쌀자루 곁에 가까이 대니 한 사병이 한 홉 정도 넣어 주었다. 쌀을 한 입에 넣었는데씹을 힘이 없어서 한참 동안 기다리니 쌀이 침에 부풀어 씹지 않아도 뱃속으로 저절로 빨려 들어갔다. 뱃속으로 들어가는 소리가 쭈룩쭈룩 하고 났다. 씹을 힘이 생겨 다음 한 입은 씹어서 쌀을 넘겼다. 이렇게 세 번을 먹고 나니 하늘도 땅도 보였다. 대원들도 옆에있어서 나의 이런 상황을 알았다. 우리는 포를 여기까지 지고 왔었다. 포와 탄약을 모두 눈 속에 묻어 두고 몸만 가기로 하였다.간신히 도망하여 높은 태산을 넘어 큰길 신작로로 나왔다. 다시 산을 올라 중턱에 이르니 또 총탄이 날아왔다. 제 3의 포위망이었다. 길바닥은 눈이요 빙판이라 제대로 걷지를 못하고 계속 엉덩방아를 찌었다. 자꾸 넘어져 일어서기가 싫어졌다. 기어가다시피 하여 어느 부락까지 와서 보니 동리의 초가집이 드문드문 몇 집 있는데 사람들이 꽉 차서 들어갈 곳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저 멀리 들판을 바라보니 거기에 희미하게 초가집 같은 것이 보였다.나는 그쪽으로 허둥지둥 걸어갔다. 가서 보니 기둥 네 개에 지붕을 받치고 벽은 없는 방이었다. 방바닥에는 눈이 쌓여 있었다. 오버자락으로 눈을 쓸어 내고 그 자리에서 문지방에 걸터앉아 다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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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에 두고 상체를 누이니 금세 호망천지가 되었다.아침이 되어 해가 뜨자 따가운 햇살이 내 다리를 비추어 주었다. 따뜻한 기분이 들기에 눈을 떠 보니 살아 있었다. 기쁜 마음으로 몸을 일으키니 뒤로 다시 누워졌다. 수차례 반복하였으나 마찬가지로 다시 누워졌다. 생각해 보니 신발에 물이 차서 꽁꽁 얼어버렸다. 발목의 관절이 얼음 때문에 움직이지 않으니 발목의 얼음을부수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여러 차례 요동하여 간신히 발목의 얼음을 부수었다. 그렇게 하여 일어설 수 있었다. 어정어정 걸어서 동리의 초등학교까지 걸어갔다. 가서 보니 사람들이 교실의 마룻바닥을 뜯어내어 불을 붙여 쬐고 있었다.나는 왼발을 불에 쪼이면서 두드려 장화를 벗었다. 다음에는얼음을 깨어 녹이며 군화를 벗었다. 다음에 양말 두 켤레를 발의 살결과 같이 붙은 것을 불에 쪼이며 살살 만져 벗었다. 발이 갑자기커지기 시작했다. 얼마나 커졌는지 군화 위에 신는 눈 장화에도 들어가지 않았다. 너무나 겁이 나서 오른발을 벗을 엄두도 못 내고 있는데 얼은 발은 찬물에 담그면 얼음이 빠진다고 옛 어른들의 이야기를 교훈 삼아 철모에 찬물을 떠오게 하여 발을 담그니 얼음이 떨어졌다. 그렇게 신발을 벗어서 아무 탈 없이 아프지도 않고 정상이 되었다.강릉 어느 국민학교에 패잔병들이 모두 모였다. 추운 날씨에난로도 없었다. 얼었던 발은 아프기 시작했다. 다시 재편성하여 재차 공격하려는데 연대병력 중 오직 500명 정도만 살아왔다. 그 중

212 사선을 넘어서

에는 환자도 다수 끼어 있었다. 중대장이 동상자와 환자들은 연대의무대에서 치료받으라고 하였다. 연대 의무대에서 치료가 불가능한 자는 후방 병원으로 가라고 하였다. 나는 중대장께 보고하고 대원 중 6명의 동상자와 같이 후방 병원으로 가려고 했다. 그러나 자동차나 교통편이 전혀 없었다. 묵호까지 가서 일주일을 기다려 부산으로 가는 무연탄배의 탄 위에 같이 탔다. 묵호에서 부산까지 3일이 걸려 부산 수영 뱃머리에 도착하여 배에서 내려 보니 환자들이모두 연탄굴에서 나온 사람들 같았다.아무도 찾아오는 사람도 없이 마냥 기다리는데 구경꾼들이 모여들어 우리들을 보고 인민군을 잡아 온 것이라고 쑥덕거렸다. 가슴에 총상을 입은 한 장교가 짚고 있던 지팡이로 구경꾼들을 쫓아냈다. 가슴의 총구멍에서 피와 숨소리가 버렁버렁 들렸다. 너무 기가 막혀 분에 못 이겨 화를 냈기 때문에 상처가 벌어진 것이다.그러고 있는데 트럭 한 대가 우리를 데리러 왔다. 트럭을 타고몇 군데의 병원을 둘러보아도 들어갈 곳이 없었다. 겨우 토성동 토성중학교의 운동장 천막 밑에 들어가게 되었다. 밤을 새고 보니 옆에 누워 있던 총상환자가 숨을 쉬지 않았다. 환자가 한밤중에 물을찾았는데 간호원이 물을 시약인 줄 모르고 마시게 한 모양이다. 총상 환자에게 물을 주면 즉사약이다. 삼 일 후에야 병실로 쓰는 학교교실로 옮겼다.동상 때문에 발은 좀처럼 아물지 않았다. 군의관들은 내 발을보고 말했다.“안 됐지만, 발가락 다섯 개를 잘라야 할 것 같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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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캄캄하였다.“너희들이 만약에 내 발가락을 자르면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나는 군의관들을 노려보며 공갈을 쏘아 주었다. 3개월 만에상처가 원만히 치료되었으나 엄지발가락에서 계속 고름이 나왔다.충무 시내 충열초등학교에 육군 원호대로 전속을 가서 2개월 동안정훈과에서 근무하고 1951년 6월 15일 나는 명예제대를 하여 광목 반통을 제대선물로 받아 짊어지고 밀양의 어머니와 형님이 계시는 곳으로 달려갔다.후기명령대로 따라 싸우는 생사 갈림길의 전쟁터에서 총탄을 한 방도 맞지 않고 여태까지 무사히 살아남게 됨은 12년 전(1998년)에100세의 일기로 돌아가신 어머니의 지극하신 기도의 힘이었음을알고 감사드립니다.우리 6남매가 전쟁에서 모두 무사하였음을 하나님께 감사 올립니다. 나는 아직도 어머니의 기도의 힘을 받아 계속 하나님의 뜻대로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제대한 뒤 젊었을 때 결혼해서 아들 셋, 딸 셋 낳고 대학까지공부시키고, 처자 봉양한다고 시간적 여유가 없어 일기를 쓰지 못하다가 이제 와서 할 일 없게 되니 기억도 상실했는데, 시간이 있어서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지명도 산의 이름도 전투의 해수도 제대로 기록하지 못함을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수없이 전투를 많이214 사선을 넘어서했는데 기억이 상실되어 대충 기록하여 알립니다.이것이 명예제대 시 이등상사였던 6.25 참전용사 김석춘의 전투일지 기록입니다. 현재 만 81세이고 미국 Rowland Heights,California에서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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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프랑크 다야크 (Frank Dayak) 의 이야기



프랑크 다야크(Frank Dayak)는 씰 비치(Seal Beach)에있는 우리 집에서 약 1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사는 한국전에 참전했던 해병대원이었다. 그때 흥남 피난길에 함께 있었던 미 해병대원중 하나였다. 그는 USS 로체스터(USS Rochester)라는 미 해군구축함을 타고 있었다. 그 당시 대략 200척 정도의 미군 구축함이있었는데, 100척 정도는 주로 피난민들을 실었고, 100척 정도는주로 군인들과 무기를 실었다.그때 USS 로체스터함은 무기를 실은 배였는데, 마지막에 피난민들을 태우느라 무기를 다 싣지 못하였다. 흥남부두에 남겨 두고 온 무기는 피난민을 모두 실은 후 부두를 폭파시킬 때 함께 태웠다. 프랑크 다야크는 또 인천상륙작전 때 북한 공격기가 날아와 배에 폭탄을 떨어뜨려 배가 침몰할 뻔한 위기에서 살아남은 이야기를해 주었다. 그런 고난을 함께 나눈 그의 말을 들으면서 우리는 더이상 다른 민족이 아닌 생사를 함께 한 같은 전우로 생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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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러셀 풀턴Russel Fulton) 의 이야기


프랑크 다야크는 그와 함께 한국전쟁에서 싸웠던 친구 러셀풀턴(Russel Fulton)을 우리에게 소개해 주었다. 러셀 풀턴과 전화로 인터뷰를 하였다. 러셀은 아이다 (Idaho) 주에서 살고 있으며3년 전에 중풍에 걸려 말을 더듬으며 이야기했다. 그는 1950년에해군에 입대하여 1954년에 상사로 제대하였다고 한다. 제대하고는G. I. Bill로 위스콘신(Wisconsin)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하고 3학년 때 지금 부인과 결혼하여 두 아들이 있다.러셀이 소속되었던 수 송함 “Gen. George RandallAP115”호는 아시아를 순회하는 도중 한국전쟁이 나서 한국으로파견되었다. 그때가 맥아더 장군이 지휘한 유명한 인천상륙작전이었다. 내가 탔던 운송함은 미 해병대원들을 싣고 인천연안으로 상륙하는데 참여했고, 나의 어렸을 때부터 친구였던 프랑크가 탄 구축함과 같이 19척의 배가 한 부대로 행동을 하였다. 두 대의 북한비행기가 프랑크가 탔던 순양함에 폭탄을 떨어뜨렸으나 손상은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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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고 했다. 인천상륙의 성공으로 UN군은 북진하여 거의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갔으나 예기치 않던 중공군이 반격하기 시작했고,국군과 UN군은 후퇴를 해야만 했다. 함경북도에서는 국군과 UN군이 포위되어 흥남에서 배로 후퇴해야 하는 위기를 맞았다. 이때흥남부두에는 후퇴하는 군인들과 남한으로 가려는 피난민들로 가득 찼었다.내가 탔던 수송함은 635피트의 길이와 1만 9천 톤의 큰 배였고 5천 명이 잘 수 있는 작은 침대들이 있었다. 5천 명의 미 해병대원, 영국 해병대원들과 탱크, 차, 무기들을 싣고 부산으로 운송했고, 다시 흥남으로 가서 두 번째 운송을 하였다. 이때에 피난민들도 많이 태웠다. 우리가 흥남을 떠날 때 프랑크가 탔던 구축함은 대포로 그곳의 공장들을 파괴시켰다. 5천 명 중에는 3백 명의 중공군포로와 한 명의 소련 비행사 포로도 있었는데 이들은 부산에서 포로수용소에 보내졌다. 한국전에 나왔던 북한 전투기에 소련 비행사도 있었다는 것이 증명된 것이다.


부록 2

1. 아버지의 비망록 중에서
2. 경주 김씨 가계보
3. 외할아버지 주하룡 가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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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버지의 비망록 중에서

*1976년 8월 Davis에서 


아버지 김권직의 비망록

나는 백의민족(白衣民族)의 한국 사람이다. 광무 6년(1902)
12월 1일에 평안북도 의주군 가산면 도령동에서 4대 독자로 태어났다. 아버지 김영호(金永浩) 씨와 어머니 김영화(金永和) 씨 사이에 1남 5녀를 두셨다. 나의 누님이 세 분이고 동생이 둘이다. 나의 고향은 산골짝이나 뒤에 작은 산이 있어 올라가면 사방이 잘 보였고 뜰 앞에는 시냇물이 흐르고 시냇가에는 큰 과수(띨광나무)가5,6그루 있었는데 가을과 첫 겨울에는 시냇물에 떨어져 있는 띨광이를 주워 먹던 것이 퍽 인상적이었다.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강이 있어 여름에는 목욕하고 수영하며놀았다. 이른 겨울에 엷게 언 얼음을 타다가 물에 빠졌으나 깊지 않아 나올 수 있었으며 의복을 다 적신 채 울면서 집으로 돌아갔던 기억이 난다.우리 집에서는 농사를 지었으나 아버지는 한학자로서 농사일은 하지 않으셨다. 그때의 풍습으로 아이들은 남녀를 물론하고 머리를 길게 따서 늘이고 댕기(붉은 비단으로 만든 것)를 끝에 매었다. 남자는 결혼하면 상투를 틀고, 여자는 머리를 따서 머리 위에얹고 칠보꽃을 꽂았다. 보통 결혼한 여자들은 머리에 흰 수건을 썼다. 결혼한 남자들은 외출할 때는 갓을 쓰고 집에 있을 때는 감투를 썼다. 모두 검은 말총으로 만든 것이며 갓을 넣어 두는 곳은 직경이 40cm쯤 되는 큰 공을 절반 절단한 모양으로 나무와 종이로만들고 문은 평면에 만들고 그것을 천장에 매달았다.내가 8세 되던 해에 아버지를 따라 당목회당에 갔다. 처음으로 예수를 믿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에 교육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이는 젊은 부부가 강단에 올라 “내 주의 지신 십자가 우리가 안 질까”라는 찬송가를 불렀다. 지금 개편 찬송가로 366장이다. 그 사람들이 높아 보이고 부럽고 아직도 그 모양, 찬송소리가 내 귀에 들리는 듯하다.

나는 15세(1916.12.3)에 미국 선교사 위대모(魏大模) 목사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주일 학교에 다닐 때 생일 축하 때나 동무를인도하면 표면에 아름다운 그림이 있고 뒷면에 성경 구절이 들어있는 카드를 주었다. 그것을 받는 것이 좋아서 동무를 많이 인도하려고 하였다. 그 당시 아직도 깨지 못하였던 한국 사회에 예수교가 문명의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내가 교회에서 뒤따라 늘리었던 머리를깎고 집에 오니 할머니가 집을 나가라고 노발대발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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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8세부터 2년간 한문을 공부하였다. 앞마을에 있는 서당에 다녔다. 그 날 배울 것을 종일 소리 내어 읽었다. 많이 읽을수록 좋은 것이다. 선생님(훈장)은 읽지 않는 학생의 유무를 감시하셨다. 그 이튿날 아침에 어제 배운 것을 암송시켜서 못 외는 아이에게는 종아리를 회초리로 때리셨다. 나는 공부를 못하여 종아리를 맞아 본 일은 없다. 여러 아이들이 떠들었다고 모두 종아리를 때릴 때딱 한 번 맞았다. 매우 아프고 부어올랐다. 아이들은 글을 읽다가선생님이 밖에 나가시면 공부하지 않다가 들어오시는 기미가 보이면갑자기 소리를 내어 읽었다. 배운 것을 몇 번 읽었는지 알기 위하여편지 봉투 크기만 하게 유지로 접어 만드는데 표면에 삼각형으로 두번만 잘라 그것을 열었다 닫았다 하게 여러 개 만든다. 참 가볍고도편리한 계산기였다. 내가 10세 되던 해에 의주군 수진면 이화동으로 이사하였다.아버지는 장사를 하시고 나는 5리가량 떨어져 있는 배신학교 심상과 제 1학년에 입학하고, 14세 되던 해에 심상과를 졸업하고 고등과 제 1학년에 입학하였다. 선생님은 신성학교를 졸업하신 박순익씨였다. 교회는 배신학교 옆에 있었는데 나는 교회에 열심히 다녔다. 나의 성대는 좋지 못하나 그 당시 3,4명의 학생과 같이 나가서찬송가를 부르면 잘 한다고 박수를 쳐 주는 것이 퍽 기뻤다.

배신 학교에 입학하여 처음으로 사진을 찍었다. 지금으로부터약 65년 전이다. 운동회 때에 나팔도 처음 구경하였다. 운동할 때에는 야구할 때에 실을 둥글게 감아 공을 만들고 그 위에 가죽으로싸서 걸어 맨다. 공이 딴딴하여 맞으면 매우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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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선교사는 매년 2,3차식 지방교회를 순회했는데 침대, 이부자리, 통조림 등을 말에 싣고 그 위에 타고 다녔으며 쿡도 데리고다녔다. 어떤 때는 자전거로 다녔는데 처음으로 구경하며 이상하게여기는 것을 보고 자전거에서 내려서 어떻게 이 바퀴가 돌아가는지를 실제로 설명하여 주었다.아버지는 약에 상식이 있는 사람과 약방을 경영하시며 침놓는 의술을 배워 침도 잘 놓으셨고 만주(압록강 연안)에 이따금 1주일간씩 가셔서 침을 놓아 병을 고치시곤 하였다. 그때에 나도 아버지를 따라 처음으로 외국에 여행하였다. 신을 신은 채 방에 들어가고,온돌방은 높이 만들고, 밥을 지을 때는 연기가 방에 많이 들어오며, 옥수수로 만든 죽과 옥수수 가루떡(깔랑)을 주식으로 하고, 부식은 땅콩과 감자를 돼지기름에 볶은 것과 부추에 계란을 섞어 볶은 것이 있고 파를 따장에 찍어 먹는다. 음식이 맞지 않고 잠자리가불편하여 빨리 집에 오고 싶었다. 한 집에 말 같이 큰 개를 5,6마리기르는데 처음 보는 사람이 지나갈 때에는 사람을 둘러싸고 물려고달려든다. 공포를 느낄 때에 주인이 한 마디만 말해도 슬금슬금 다물러 간다. 주인의 말은 잘 듣는다.내가 16세 나던 12월에 중국 관전현 안지거우로 이사하였다.상업이 순조롭지 못하던 차에 안지거우에 있는 친구가 살기 좋으니 오라고 하여 그리로 간 것이다. 압록강을 건너고 큰 고개를 넘어야 되고 하루길이나 되는 머나먼 만주 땅으로 이사한 것이다. 이삿짐은 오직 등에 지고 가야만 하는데 친구 되는 분도 짐을 져다 주었다. 나는 배신학교 고등과에 다니던 때라 학업을 중지할 수도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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맏매부 댁에 기숙하면서 학교를 계속하였다. 물로 하숙비를 내지않았고 전 가족이 친절하게 대하여 준 은혜는 잊을 수 없다. 1919년 2월 내가 18세 때 배신학교 고등과를 우등으로 졸업하였다. 심상과 졸업 때에도 우등을 하였다. 그 당시 소학교에서 심상과 4년,고등과 4년 합계 8년 만에 졸업하는 제도를 두었다. 지금 생각하면2년간을 손해 본 것이다.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를 부르게 되었다. 내가 배신학교 고등과를 졸업하고 의주읍에 있는 농업학교에 입학하려고 입학시험을보기 위해 의주읍에 갔을 때 수백 명의 민중들이 거리에 집합하여태극기를 들고 성문 앞에서 만세를 불렀다. 그때에 일본 헌병들은어쩔 줄을 모르고 해산하라고 말할 뿐 강경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나는 입학시험을 단념하고 만주 본집으로 들어가 어머니가 하시는농사일을 도왔다. 처음으로 김을 매 보니 허리가 아프고 땀이 흘러의복을 적셨다. 먼지가 흐르는 땀과 혼합되어 얼굴이 흙물로 칠한것 같이 보였다. 참말 농부는 수고한다. 쌀 한 알이라도 아껴야 하겠다. 그 해에 독립투사들이 많이 만주로 들어왔다. 우리 안지거우지방에도 많은 사람이 다녀갔다. 이름을 다 알 수도 없고 알던 사람의 성명도 잊어버렸다. 생각나는 것은 오동진(吳東振), 최지화(崔志化), 윤하영(尹河英) 씨 등이다. 우리 안지거우 지방에 상해 임시정부 산하에 있는 안지거우 사무소가 있었는데 이름을 잊어버린 것이유감이나 박 총무가 계셨고 내가 서기 일을 보았다.1920년 2월에 우리 가족은 만주를 떠나 의주군 수진면 대수동으로 이사하였다. 2년 2개월간 만주에서 살다가 고향으로 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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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것이다. 그때 아버지는 대수동 사숙에서 교편을 잡으시고 나는와롱동에서 10여 명 되는 학생에게 한문을 가르쳤다. 한문지식이박약한 나로서는 가르치기가 퍽 힘들었다.한문 가르치는 일을 그만두고 20세 때에 본교인 사립 배신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던 때였다. 헌병 보조원의 아들이 말을 안 듣기에 등을 한 번 때렸더니 집에 가서 아버지에게 말하여 보조원이 학교로 찾아와서 나를 밖에 꿇어앉히고 회초리로 내 귀를 쳤다. 나는귀가 붓고 일주일간 고통을 당했다. 내 왼편 귀가 빨리 먹은 것도그 원인이 아닌가 생각된다. 진찰하여 보지는 않았었으나 고막도 파열되었었으리라고 생각한다.그 당시의 보조원은 세력이 당당하였다. 일본 헌병의 앞잡이로온갖 세도를 다 부렸고 감히 대항할 수 없었다. 소련에서 살다가 온사람이 있었는데 일본 헌병이 공연한 트집을 잡고 때렸으나 왜 때리느냐고 대항도 할 수 없었다. 무조건 굴복하여야 했다. 일본 통치36년간에 억울하게 매를 맞고 천대를 받은 것이 붓으로 다 쓸 수 없다. 더욱 남한에 있던 농민들은 농지를 척식 회사에 빼앗기고 만주로 이주하여 고생한 농가들 많았으며 애국적인 지도자들과 독립 운동자들을 얼마나 괴롭히고 감옥에 가두었는가, 한국에서나 일본 교포들에게 얼마나 인종 차별을 하였는가 생각할 때에 몸이 떨린다.1922년 4월에 평양 숭실중학교 제 2학년 입학시험에 좋은 성적으로 합격하였다. 입학 성적이 우수하였던 관계로 반장이 되고학감이 내 이름을 기억하고 부를 때 마음이 흐믓하였다. 아버지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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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내가 중학교에 가기를 매우 원하고 있는 것을 아시고 집한 채 있던 것을 20원에 팔아 나의 학비를 조달하셨다.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아프다. 1924년 3월에 자격 없는 선생을 갈아달라고동맹스트라이크를 하였다. 나는 그때도 제 3학년 반장이었다. 동맹스트라이크의 지도자는 각 반의 반장은 물로 참가하였다. 그 관계로 학교에서 퇴학을 당하고 그 해 9월부터 수진면 미산동 명신학교교원으로 시무하고 이듬해 3월에 사직하였다.1924년 1월 20일에 신의주 진사정 3정목 3의 2번지로 이사하다.1925년 4월부터 1926년 1월까지 의주 태동 직조 공창의 서기로 근무하다.1925년 4월 9일 나를 지극히 사랑하시던 할머니가 별세하셨다.1925년 4월 17일에 의주 남문동 183번지로 이사하고 대성상점에서 26년 1월까지 서기로 근무하다.1926년 2월 15일, 사랑하는 부모, 동생을 떠나 일본 동경으로 떠났다. 모진 바람이 불던 날 동생들은 울고 아버지는 강변까지따라 나오셨다. 어머니, 누님, 나 세 사람이 빙차를 타고 압록강을내려와 신의주에 도착하였다. 2월 17일 누님과 같이 신의주에서 기차를  타고 부산에 도착하여 관부 연락선으로 하관(시모노세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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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와서 다시 기차로 20일 낮에 동경에 도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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