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0.21 02:35
문화재청(청장 김 찬)은 ‘조선태조어진(朝鮮太祖御眞)’을 국보로, ‘부여 왕흥사지 사리기 일괄(扶餘 王興寺址 舍利器 一括)’ 등 3건의 유물을 보물로 각각 지정했다. 국보 제317호 ‘조선태조어진(朝鮮太祖御眞)’은 1872년(고종 9)에 제작된 태조 이성계의 어진이다. 당대 최고의 화사들이 동원되어 원본에 충실 하게 이모(移模) 작업이 이루어져 조선 초기 선묘 위주의 초상화 기법을 잘 간직하고 있다. 더욱이 대규모의 화면, 표제(標題)와 장황(粧䌙), 용문이 직조된 풍대(風帶), 낙영(絡纓)과 유소(流蘇) 등이 온전하게 구비된 상태로 진전(眞殿·선원전의 다른 이름) 봉안용으로서의 격식을 잘 갖추고 있다. 완전한 형태의 어진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실정에서 조선 시대 왕의 전신상으로는 유일한 자료이다. 더불어 이 어진과 관련된 ‘경기전의(慶基殿儀)’, ‘어진이모도감의궤(御眞移模都監儀軌)’ 등의 자료를 통해 어진 제작의 전 과정을 종합적으로 살펴볼 수 있어 학술적으로도 가치가 높다. ‘조선태조어진’은 1987년에 보물 제931호로 지정되었고, 예술적·학술적 가치는 물론 상징적인 가치도 높아 이번에 국보로 승격됐다. 조선시대에 태조 이성계의 어진은 총 26점이 제작되었지만 현재 전주시 경기전 경내의 어진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어진이 현존하는 유일본이다. 조선 왕조는 태조의 어진을 봉안할 진전(眞殿)으로 경복궁의 선원전, 함경도 영흥의 준원전, 전주의 경기전, 개성의 목청전, 평양의 영숭전, 경주의 집경전을 세웠다. 경기전의 어진은 태조 재위 당시에 제작된 집경전의 어진을 1409년(태종 10년)에 모사하여 1410년(태종 11년)에 봉안하였으며, 1763년(영조 39년)에 수리를 거치고 나서 1872년(고종 9년)에 어진도사(御眞圖寫)의 화사(畵師)로 활동한 조중묵이 다시 모사하였다. 경기전의 태조 어진은 1592년 임진왜란 때에 의주를 거쳐 묘향산에 이안되었고, 1597년 정유재란 때에 어진이 봉안되어 있던 경기전이 소실되자 1614년(광해군 6년)에 경기전이 중건된 후에야 전주로 환안 되었다. 경기전 어진은 1636년 병자호란 때에 다시 무주 적상산으로 피난을 가서 이듬해 환안되었다. 1767년(영조 43년)에는 전주성에 화재가 발생하여 전주향교로 옮겨졌 으며, 동학 농민 운동 당시에는 위봉사 법당으로 이안된 후 다시 환안 되었다. 2005년에 문화재청의 국정감사에서 태조 어진의 훼손 사실이 드러나 2008년에 보존 처리를 완료하여 전주시로 반환되었으며, 2010년부터는 경기전 경내에 위치한 어진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2012년에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 지정되었다. 보물 제1767호 ‘부여 왕흥사지 사리기 일괄(扶餘 王興寺址 舍利器 一括)’은 부여 왕흥사지의 목탑지 심초석 남쪽 중앙 끝단에 마련된 장방형 사리공 내에서 발견됐으며, 가장 바깥에 청동제의 원통형 사리합을 두고 그 안에 은으로 만든 사리호, 그리고 보다 작은 금제 사리병을 중첩하여 안치한 3중의 봉안 방식을 취하였다. 청동제 사리합 외면에는 “정유년(丁酉年, 577년) 2월 15일에 백제왕 창(百濟王 昌)이 죽은 왕자를 위하여 찰(刹)을 세우는데, 2매였던 사리가 장시(葬時)에 신의 조화로 3매가 되었다.”는 6행 29자의 명문이 있다. 이 명문은 사찰의 건립시기, 사리기의 제작 시기와 사찰의 건립 배경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부여 왕흥사지 사리기’는 현재까지 확인된 국내 사리기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가치가 높아 보물로 지정됐다. 보물 제1768호 ‘백자 청화 흥녕부대부인 묘지 및 석함(白磁 靑畵 興寧府 大夫人 墓誌 및 石函)’은 경기도 파주시 교하면 당하리 일대의 파평 윤씨 정정공파(貞靖公派) 묘역에서 백자 지석(誌石) 6장이 석함에 담긴 채로 발견됐다. 6장의 백자 지석 중, 맨 앞과 뒤의 지석은 순백자이며, 가운데 4장은 청화(靑畵)로 묘지의 주인공인 인천 이씨(세조의 장모이자, 정희황후의 어머니)의 장례 경위와 생전의 덕행, 가계와 후손들의 현황 등을 적고 있다. 이 4장의 뒷면에는 순서를 1장(一張)~4장(四張)이라고 청화로 적어두었다. 이 묘지가 제작된 경태(景泰) 7년은 1456년으로 지금까지 알려진 기년명 백자 청화의 제작시기 중 가장 이른 예로, 백자 청화의 개시 시기와 편년에 획기적인 자료이다. 더불어 후대에 제작된 백자 묘지들과는 규격이나 번조법 등에서 차이를 보이며, 커다란 석함에 공간을 마련하여 매납한 형식도 특이하다. 백자 지석의 초기 제작 양상과 매납법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제공해 주는 매우 중요한 자료 가치가 크다. 보물 제758-(2)호 ‘남명천화상송증도가(南明泉和尙頌證道歌)’는 권말에 수록된 최이(崔怡·?~1249)의 지문(識文)을 통해서 이 판본의 제작 동기와 1239년 당시 최고의 권력자인 최이에 의하여 주자본(鑄字本)을 번각(翻刻)하여 간행한 목판본임을 확인할 수 있다. 더불어 이 판본의 판각시기인 1239년보다 앞선 시기에 ‘남명천화상송 증도가’가 활자로 인쇄되었음을 알 수 있다. ‘남명천화상송증도가’의 금속활자본(金屬活字本)이 전래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지문을 통해 우리나라 초기 금속활자인쇄술의 정황을 살펴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그 가치가 매우 높다. 더불어 불교학과 서지학 연구에도 매우 귀중한 자료로 가치가 크다. 이번에 국보로 지정된 ‘조선태조어진’과 ‘부여 왕흥사지 사리기 일괄’ 등 보물로 지정된 3건의 문화재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대한민국 관보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출처: 문화재청과 Wikipedia |
2012.10.21 03:05
2012.10.22 01:58
조선 임금들의 수명
제1대 태조 (아들 태종과의 마찰로 인한 홧병도 그 원인 중 하나) 능은 건원릉 동구릉안에 있다. 제2대 정종 오복(五福 ; 수,부,강녕,유호덕,고종명)을 다 갖추고 63세에 승하 (상왕으로 물러난 후 편안하게 살면서 가장 많은 자식을 둔 왕임) 조선역대왕 중, 유일하게 북한에 있는 후릉 (경기도 판문군 영정리 ) 제3대 태종 상왕으로 물러난 후 태종은 폐렴으로 56세에 승하 부인 민씨도 학질로 56세 졸. 능은 헌릉 제4대 세종 대식가로 당뇨병으로 54세에 승하 (고기를 매우 즐긴 왕.. 식단에 항상 고기가 있었음, 그래서 종기가 많이 났음) (그리고 여러 부인을 둔 만큼 성병도 있었다고 함) 소형왕후 심씨와 합장함으로써 조선최초 합장릉 능은 영릉 제5대 문종 등창으로 39세에 승하, 아버지 세종을 닮아 몸이 허약했음 능은 현릉 제6대 단종 영월 청령포에서 사사됨 숙종때 단종으로 복위. 능은 장릉
제7대 세조 악업으로 문둥병과 불면증으로 52세에 승하. 능은 광릉 도 20세에 급사 능은 창릉
제9대 성종 불에 태워지는 수모를 격는다. 능은 선릉제10대 연산군 중종반정으로 왕위에서 물러난 후, 강화도로 유배 강화도에서 괴질로 31세 졸 아들 넷은 강화도에서 사사됨 묘는 서울 방학동 제11대 중종 거머리로 등창을 치료하다, 울화병과 노환으로 57세에 승하. 재위 39년 능은 정릉 제12대 인종 이질로 31세 승하(문정왕후에 의한 독살설도 있다.) 하늘이 낳은 효자로 알려져 있으며, 후사가 없다. 능은 효릉 제13대 명종 지나친 방사로 34세에 승하 문정왕후의 아들로 마마보이 로 성장 하였으며, 무수리출신 장씨와 지나친 방사로 인한 졸지에 승하 어머니 문정왕후한테 회초리도 맞았다고 함 능은 강릉 제14대 선조 임진왜란 이후 중풍으로 57세에 승하 영조 다음으로 41년간 재위 능은 목릉 제15대 광해 가장 불운한 왕, 인조반정으로 물러난 후 유배 그 뒤 십수년을 더 살다가 제주도에서 67세로 졸 (유배 생활 중에 시중 드는 사람이 '영감'이라고 불러도 꿋꿋하게 견뎠다 함) 이때 담배가 일본에서 들어옴 제16대 인조 청나라에게 항복한 후, 홧병 걸림 신하들 손아귀에서 울화병으로 55세에 승하 아들 소현세자를 독살한(?) 왕으로 보고있으며, 재위중 늘 그것때문에 신하들에게 시달려 왔으며 능은 장릉 제17대 효종 봉림대군 수전증있는 어의의 실수로 출혈사로 41세에 승하 강한의지의 북벌정책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승하했으며, 능은 영릉 제18대 현종 청 황제에게 벌금형을 받은 임금으로 학질과 과로로 34세에 승하'하멜'에 의해 조선이 유럽에 알려지기 시작 했다. 능은 숭능 제19대 숙종 어릴 적 천연두 후유증, 노인병, 등창 심한 당파 싸움으로인한 스트레스로 60세에 승하 (인현왕후, 장희빈과의 문제도 있었을 듯) 풍류를 즐겼던 숙종은 봄이면 3000 후궁을 거니리고 큰잔치 별러다한다 능은 명릉 제20대 경종 게장을 먹다 급사하여 37세에 승하 장희빈이 사약을 받기전 아들을 보게 해달라고 하자 거절하다 인정에 끌려 세자를 데려오자 갑자기 경종의 하초잡아당겨 성기능을 잃어 내시와 같았다 한다. 능은 의릉 제21대 영조 장수하였으며 치매로 83세에 승하 세자를 폐위하여 서인을 강등 한후 뒤주속에 가둬 굶어죽게한 일과 늙어 노망 부린것이 오점으로 남았으며, 일본에서 '조엄'이 고구마를 처음 가져왔다. 능은 원릉 제22대 정조 개혁적인 군주, 사도세자(장조)의 아들 등창으로 49세에 승하 (독살설도 있지만, 최근 자료로 보아 등창으로 승하한게 맞다고 봄) 안경을 처음 쓴 임금. 능은 건릉 제23대 순조 매독 3기로 45세에 승하. 이때 나라는 콜레라가 창궐했으며, 안동김씨 세도가 시작되었다. 능은 인릉 제24대 헌종 23세에 술과여자로 보내다 폐결핵으로 승하. 능은 경릉 제25대 철종 세도정치에 의해 졸지에 왕이 된 강화도령 33세 폐결핵으로 승하 강화도를 그리워 하며, 안동김씨 그늘에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채 살았다. 능은 예릉 제26대 고종 황제 자리에서 물러난 후, 1919년 일제에 의해 독살되어 67세에 승하.능은 홍릉 제27대 순종 몸이 허약했고, 남성 구실을 못했다 함.. 1926년, 라디오 들으면서 심장마비로 53세 승하. 능은 유릉 의친왕 독립운동을 했던 고종의 아들, 순종의 동생, 영친왕의 형 그의 아들 이우 왕자가 얼짱 왕자로 유명해졌다. 현재 의친왕의 아들과 손자들이 다수 생존해 있다. 1955년, 6.25전쟁 중에 걸린 영양실조로 79세로 서거 묘는 홍유릉 내의 의친왕 묘(합장묘) 의민황태자 영친왕 어릴 때 일제에 볼모로 잡혀간 비운의 황태자다. 1963년 뇌혈전증으로 귀국해 7년간 병상에서 생활하다가 1970년 74세의 나이로 서거 왕비인 이방자 여사는 자선 활동을 하다가 1989년 서거 능은 홍유릉 내의 영원(합장묘) |
2012.10.22 03:16
수년전에 우리동기 웹에서 3개월여를 걸쳐 조선왕조 왕릉순례를 한적이 있는데
목적은 단순한 왕릉 순례라기보다는 조선왕조라는 선대왕조의 공과를 대충이남아
훓터 봄으로 현재의 우리자신을 아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었습니다.
잘나나 못나나 우리 선대인 조선왕조는 우리가 비판할수는 있으나 부정할수는 없으니까요.
조선왕조의 흥망을 간단하게 잘 요약되었네요. 감사합니다. 규정
2012.10.22 09:35
작년에 들렸던 조선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모셨다는 경기전(慶基殿)
경기전 안에는 이조 실록을 보관하는 사고 (史庫)도 있다고 합니다.
2012.10.22 18:14
조선 왕조 태조의 어진이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된 뉴스가 있어 여기에 옮깁니다.
이로서 우리역사 문화의 국보는 총 317점이 된셈입니다.
참고로 조선조 어진은 보물 932호인 영조 어진 말고는 남은것이 없어 안타값습니다. 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