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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veral interesting stories. 

1. 출처 서울 미국 대사관.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130주년

(1882년 5월 22일 – 2012년 5월 22일 )

1882년 5월 22일 체결

1883년 1월 9일 상원 비준

1883년 2월 13일 대통령 비준

1883년 5월 19일 비준안 교환

1883년 6월 4일 공표

조미수호통상조약(1882년 5월 22일)

서명자:

미국: R.W. 슈펠트 미국해군함대사령관 겸 미국 전권공사

한국: 신헌 조선 전권대사

김홍집 조선 전권대사

승인·외교·영사 관계 미국사 가이드: 한국


승인

승인(1882년)
미국과 조선(한국)은 양국 대표가 1882년 5월 22일 제물포에서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면서 최초의 공식 외교 관계를 맺었다. 이 조약은 역사적으로 조선과 조공관계를 유지하면서 오랜 세월에 걸쳐 조선의 외교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중국 관료들의 지원을 받아 체결되었다. 실제로, 조선은 독립국이었으며 조약에도 그러한 사실이 명시되었다. 조미수호통상조약은 조선이 서양 국가와 체결한 최초의 조약이었다. (출처: http://history.state.gov/countries/korea)


영사 관계
외교 관계 수립 및 공사관 설치(1883년)
1883년 5월 20일에 루시어스 H. 푸트가 초대 특명전권대사로 부임하여 조선의 국왕에게 신임장을 제출하면서 조미 외교 관계가 수립됐으며 공사관이 설치됐다.

 

 

(출처: http://history.state.gov/countries/korea)

유용한 링크

  • 아시아-태평양 관련 미국사 주요 연도 및 사건

(출처: http://www.capaa.wa.gov/data/timeline.shtml)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의 체결로 한국인의 미국 이민 허용

1882년 5월 22일
한국과 미국이 최초로 체결한 조약인 ‘조미수호통상조약’은 미국 측 슈펠트 전권공사와 조선 측 전권대사들이 서명하였다.
 
이 조약은 외교 및 영사 사절의 임명에 관한 사항을 명시하고 있었으며 미국 선박이 조난을 당하거나 연료가 필요한 경우 조선의 항구에 기항할 수 있으며 조선에 체류하는 미국 시민은 현지 관청의 보호를 받는다고 규정하고 있었다.
 
또한, 조선 백성은 미국 전역에서 “다양한 직업과 활동”을 추구할 수 있지만 미국 시민은 조선이 개항한 항구에서만 사업을 영위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이 조약은 1883년에 비준됐다.

(출처: https://www.cia.gov)

… 마침내 1882년에 윌리엄 슈펠트 미국해군함대사령관은 ‘은둔의 왕국’과 포괄적인 양자 조약을 체결하는 데 성공했다.
이 조약에 의해 교역 관계가 시작됐으며 공사 관계가 수립되었다.

조선은 미국에 특사단을 파견하여 서명이 기재된 조약 문서를 미국 정부에 전달했다.

특사단은 미국의 생활상을 둘러보기를 원했다. 국무부의 요청에 따라 미 해군은 특사단이 워싱턴, 뉴욕, 보스턴을 방문하는 동안
 
이들을 수행할 2인의 초급 장교를 배치했다. 그 중 한 명이 조지 포크 소위였다


포토갤러리

1883년에 조선 국왕은 민영익을 미국 전권대사로 임명했다. 홍영식이 이끄는 보빙사(報聘使)는 미국을 방문하여 미국 정부에 수호통상조약 문서를 전달하고 미국의 통관•우정 체계, 공공 교육제도, 군 부대 등을 시찰했다. 또한, 사절단은 미국의 생활상을 둘러보기를 원했다.

(앞줄 왼쪽부터) 로웰(통역관), 홍영식, 민영익, 서광범 (사진/동아일보


* 이 사람들이 싼프란시스코에 처음 도착한걸 기렴해서 무슨 기렴비를 세운다고 들엇읍니다.




2. 뉴욕의 한국 사람들:  (경기 57회 동문 홈페지)

1883년 9월 18일 오전 11시: 뉴욕시내 한 복판 5th Avenue Hotel (당시의 명칭: 지금은 Fifth Avenue Building으로 뉴욕의 사적지로 등재되어 있음)에 장기 체류중이던 미국 21대 Chester Arthur 대통령은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서 온 진기한 사절들을 접견하고 있었다.

미상선 아라빅 호편으로 샌프란시스코에 일단 내려 ‘원(圓)의 중심을 달리는’ 대륙횡단열차를 타고 워싱턴에 들렸다가
여기로 올라온 대한제국 보빙(報聘)사절단 - 23세의 전권대신 민영익(민비의 양동생), 부사 홍영식(27세), 종사관 서광범(24세), 그 외 유길준등 9명의 상투틀고 양반 갓 차려 쓴 모두 20대의 젊은이들.

한 해전 1882년 5월 22일 체결된 한미통상수호조약에 따라 미국측에서는 일본에 주재하던 Lucius Foote 가 한양에 초대 특명전권공사로 부임해 왔으나, 카운터파트를 미국에 주재시킬 만한 재정형편이 안되는 대한제국은 우선 인사치례(?) 사절단을 파견하게 된 것이다.

실세개화파에서 뽑혔다고는 하나, 일행은 중국가서 단어 몇마디 배운 역관출신 고영철 외에는 모두 영맹(英盲)이었기 때문에, 우리 대표단이
우리말로 발언하면, 일단 일본말(일본인 통역사 미야오카 츠네지로)
또는 중국어로 한번 옮긴 다음,
다시 일영(日英)통역관 미국인 Percival Lowell 또는 중국인
통역사 우리탕(吳禮堂)이 미국측에 재통역하는 번거로운 소통(?)이 불가피했다. Vice Versa –
 
역(逆)도 마찬가지. 접견식은 먼저 한글로 작성된 고종의 국서와 신임장 전달, Arthur 대통령의 답사등으로 이어지다가

끝내는 사절단 일행 전원이 <무릎을 꿇은 채 손을 머리위로 들고 이마가 땅바닥에 닿도록>
조선식 큰 절을 하는 바람에 대통령이 그만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일행은 대통령의 배려로 우체국, 소방서, 전신회사, 신문사, 보험회사, 섬유공장, 제약공장, 병원, 시범농장 그리고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 부루클린 해군기지 견학등 강행군으로 미국의 구석구석을 판도라의 상자속 들여다 본 듯 요즘말로 문화적 충격에 멍해진 정신을 가다듬으며 여러 달의 꿈 속 헤매듯한 견문여행을 마치고는 미군함 Trenton 호를 타고 유럽을 거쳐 이제 갓 문 열려던 본국 – <은자(隱者)의 나라>로 돌아갔다.
 
뉴욕 땅에 발을 디딘 첫 조선인 – 한국인들이었다. 같은 배를 탔고 같은 세상을 보았건만, 어떤 이는 조국의 나약함과 후진성에 대한 비탄의 심정을, 어떤 이에게는 손아귀에 쥐고 있는 기득권을 앞으로 어떻게 지킬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그리고 또 어떤 이는 조국개혁의 결의를 다지게 하는 사건이었다. 그 중 26세이던 유길준은 관비유학생으로 미국에 남아 보스턴에서 멀지 않은 Byfield 타운에 있는 명문고등학교 William Dummer Academy(지금은 the Governor’s Academy)에서 기초과정을 공부하던 중 이듬해 김옥균 서광범 서재필등 개화파가 일으킨 갑신정변이 3일만에 실패하고 말았는데도 자진 귀국하면서 남긴 자기가 쓰던 한복, 부채, 명함, 활 등 개인 사물(私物)이 지금도 학교근처,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Peabody Essex Museum 에 소장 전시되어 있다. (부기: 2003년 4월 뉴잉글랜드한인이민 100주년 기념사업회는 학교안에 유길준기념비를 세웠고 학교는 그에게 120년만의 명예졸업장을 수여했다.)

20세기 들어 선 뉴욕은 이미 세계의 중심중의 중심지였다.
망국의 한을 독립운동으로 승화시키려는 의식있는 지식층이라면 반드시 한번 쯤 거쳐 가야 할 만한 땅이었다.
 

서재필, 안창호, 이승만. 장덕수, 김양수, 오천석, 김규식, 장이욱, 김활란, 정일형 등등 맨해튼을 거쳐 간 인물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 뉴욕은 말하자면 애국투사의 배양소(培養所)였던 것이다. 하늘은 훗날 그들 각자에게 조국에서의 역할과 운명의 몫을 나누어 주셨지만, 그 중에도 1910-20년대 뉴욕에 자리잡고 가장 활발하게 움직인 사람은 조병옥이었다.

뉴욕의 선배격인 서재필은 필라델피아에서, 안창호는 캘리포니아를 본거지로, 이승만은 하와이와 워싱턴을 중심으로 움직인 반면,
 조병옥은 어떤 의미에서는 엘리트 뉴요커라 할 수 있다.

연희전문학교 졸업후 미선교사의 추천으로 1914년 20살때 미국유학길에 오른다.

처음에 다닌 펜실바니아주 킹스턴에 있는 와이오밍 미션스쿨(고등학교)에서부터 두각을 나타낸다. 영문학책을 탐독한 탓에 웅변대회에 나가서 입상할 정도. 졸업반에서는 전체학생회장. 그리고 뉴욕의 컬럼비아대학 입학.
 뛰어난 학교성적과 선생님들의 강력한 추천서 덕분에 전액장학생이었다.

경제학 전공에 논문 <경쟁설의 연혁적 발전>으로 석사학위, 이어, 1925년 (31세) <조선의 토지제도>를 주제로 Ph. D. - 요즘 기준으로 보아도 꽤 빨리 학문적 수준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겠다.
 
학부에 다니면서 뉴욕 최초의 한인교회인 <뉴욕한인교회(Korean Church & Institute)> 창립(1921. 4. 18)에도 한 몫을 한다. 재력있는 미국 감리교인들의 후원을 얻어내는 수완을 보였다. 이에 앞서 3.1운동이 일어나던 1919년 4월 서재필 주도로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전한인연합대회에 유학생대표로 나가 대선배 서재필 이승만을 도와 홍보(?)담당보좌관 역할을 한다.
 
안창호의 흥사단에도 가입했다. 이미 10여개가 넘는 미주 각 지역의 유학생회를 엮어 1921년 4월 30일 결성된 <북미한인유학생총회>는 뉴욕에 본부를 두고 회장에 이용직, 부회장에 조병옥을 뽑는다.

뉴욕 유학생출신인 이승만(컬럼비아대학원에 등록했다가 프린스턴대학으로 옮겨서 정치학박사학위를 땄음)과 조병옥은 유학시절엔 조국의 독립을 위해 서로 도와 리더쉽의 동반자가 되었으나, 고국에 돌아와 두 사람은 여야로 갈라섰다.

이승만이 고집불통의 지도자라면 조병옥은 타협형의 통 큰 정치가 아니었던가?
역사에서의 가정(假定)이란 한낱 부질없는 일이지만, 만약, 1960년초 대통령 선거기간중 급환으로 미국 월터리드 육군병원으로 실려 온 66세의 조병옥이 성공적인 위암수술로 완쾌되어 돌아와 이승만을 이겨 대통령이 되었다면.....
 
아마도 4.19도, 5.16도, 오늘 종북무리의 창궐도 겪지 않고 이미 자유 민주 통일도 이루어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근자에 들어와 국내정세를 둘러싸고 왈가왈부 지껄이는 제법 유복해 진 뉴욕교민들의 목소리가 시끄럽다.

세금 한푼 안 내면서도 국내납세자 저리 가라듯이 콩놔라 밤놔라 하는 모양새 보기도 좀 그렇다.

국내 투표권까지 떼쓰고 얻어 가더니 이번엔 모국대통령 물러 나랜다. 어느새 10만 명 넘는 한국교민들이 되는 소리 안되는 소리 목청 돋구며 제 맘대로 살고 있는 뉴욕 -
 여기저기 눈 비비며 둘러보아도 80년대초 뉴욕에서 가발 비즈니스 하다가 국내정계를 기웃거리던,
 나중에는 어느 대통령 분신으로, 남북거간꾼으로, 정상배(政商輩)의 화신이 된 P 모 하나 말고는
옛 인물다운 인물을 찾을 길이 없다.



3. 여기 언급된 특사 유길준 (兪吉濬) 생얘;

유길준:


(민경탁)

이본에게 관심을 가진건 언제 여기 피바디박물관에 소개돤 최초 조선정부파견단을 사진 기록을 보고 을 보고
또 유길준의 미국첫인상기를 읽고 한참웃은 기억이 있기 때문이지요.

아직도 잊지 않는 이분의 얘기가 " 미국사람은 참으로 비굴하다고" 삼각한 비판을 햇는데,
 이유는 여자가 먼저 들어가게 문도 열어주고, 남자들의 행동이 완돼먹엇다고 썼든군요,

Lady First (약자 장애자 를 우선한다는) 미국습관을 아주 나쁘게 비판한 사실.
유교적인 가치관이 골수에 종교같이 밖혀있든때라.

감금 감옥 생활도 총 10 여년하고, 지금으로보면 풍운아.

이분이 미국가기전에 가본 일본서도 여자의 지위는 항상 여필종부엿든시대
100 년전의 조선사람이 세상을 어덯게 보앗는지 돌아보게하는 좋은 역사적 사실:

지금 파키스탄에서 이람교에 세뇌된 사람과 다름 없는것 같이 보이고
그러니 한국사람보다 정신적으로 100 년 이상 뒤져진 사상들이 지금 지구 한쪽에서 난리를 치고 있다고
보면 정확하겟지요.



더 적확한 위키페디아내용을 아래 소개함.
.

유길준 (兪吉濬)
출생 1856년 11월 21일(음력 10월 24일)
사망 1914년 9월 30일 (57세)

사인 병사 (신장염과 과로, 스트레스의 합병증)

별칭 자는 성무(聖武) 또는 성무(盛武), 호는 구당(矩堂), 천민(天民), 구일(矩一)
학력 미국 보스턴 대학교 1학년 중퇴
직업 문신, 정치가, 철학자, 개화 사상가
배우자 경주 김씨, 충주 이씨
자녀 유억겸, 유만겸
부모 아버지 유진수, 어머니 한산 이씨

친척

유회준(형), 유성준(동생), 유각경(조카), 유옥겸(조카), 이경직(외할아버지), 윤덕영(사돈), 윤택영(사돈)


유길준(兪吉濬, 1856년 양력 11월 21일(음력 10월 24일) ~ 1914년 양력 9월 30일)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외교관, 작가이며

대한제국의 정치가·개화 사상가·계몽운동가이다. 본관은 기계(杞溪)이고 자는 성무(聖武) 또는 성무(盛武), 호는 구당(矩堂), 천민(天民), 구일(矩一)이다. 근대 한국 최초의 일본과 미국 유학생의 한사람이며, 개화파의 이론가로서 수많은 저작물을 발표하여 개화사상을 정립하였다.

그는 서구의 의회 민주주의 체제와 합리주의 사상을 적극 수용해야 된다고 주장하였고, 정치적으로는 전근대적인 한국의 정치·경제·사회의 변화, 개혁을 시도하려 하였으나 실패했다.

1910년 8월 29일, 한일 병합 조약이 맺어지자 이 조약에 대한 반대운동을 추진하다가 체포되었고, 전국민을 선비로 만든다는 목적으로 흥사단을 조직했다.

1870년(고종 7년) 박규수, 강위, 유대치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박규수 사후에는 유대치와 강위, 오경석에게서 수학하였다. 1871년 향시에 장원하였으나 번번히 대과에 낙방하고, 당시 과거 시험의 폐단을 비판하였다.

1881년 일본에 파견되는 신사유람단의 수행원으로 다녀왔으며 이후 일본과 미국에서 수학하고 귀국하였다.

갑신정변 실패 직후 귀국하여 6년간 감금당했다가 풀려나 김홍집 내각의 내무부협판과 내무부대신으로 활동하였다.

1894년(고종 31년) 갑오경장 당시 단발령을 전격 추진하였으며, 양력 사용, 신식 학교 건설 등의 개혁정책을 수립했다. 갑오경장과 을미개혁 이후 제도 개편을 추진하다가 아관파천으로 일본으로 망명했다.

그 뒤 고종을 퇴위시키고 의친왕을 추대하려는 정변을 꾸몄다가 발각되어 실패했으며, 1900년(광무 3년) 한국으로 환국을 기획하다가 외교문제가 되자 일본 정부에 체포되어 4년간 구금당했다.

1905년(광무 8년) 11월 을사 보호 조약이 체결되자 일본의 조선병합할 것을 예상하고 이를 반대하였으며, 교육과 계몽의 필요성을 외쳤다. 이후 계산학교 등의 학교를 설립하고 노동야학회를 조직하여 문맹퇴치와 국민 계몽 등의 활동을 하였다.

국내 산업 자본의 육성을 위해 국민경제회, 호남철도회사, 한성직물주식회사를 조직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흥사단의 조직과 1909년의 한성부민회와 청년학우회 등의 조직에 참여하여 활동하였으나, 한일합방을 막지는 못했다.

1910년(융희 4년) 10월 1일의 한일합방 역시 반대하였으며, 한일 합방 무효 시위를 기도했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했다.
이후 총독부의 회유와 일본 정부가 준 작위를 거절하고 여생을 마쳤다.

그는 각종 저서와 계몽 강연을 통해 서구의 의학, 교육 등 신문명의 존재와 민주주의, 자본주의 등을 소개하였다.
사후 안창호에 의해 애국자이자 이상적인 정치 지도자로 추모되었다.[1]

1895년(고종 32년) 근대 최초의 한글 문법서이자 국어사전인 조선문전을 발간하였고,

10년간의 수정과 증보 후 1909년(융희 3년)에는 대한문전으로 재간행하였다.
또한 독일의 프리드리히 대왕을 소개한 《보로사국 후례대익 대왕 7년전사(普魯士國厚禮大益大王七年戰史)》와
이탈리아의 통일을 소개한 《이태리 독립전사》등의 책을 집필하였다.

그는 1895년 8월 명성황후가 암살당하자 조선인 고위 협력자로 흥선대원군을 지목했다.

그러나 친구이자 후배였던 윤치호에 의해 그 자신도 명성황후 암살의 조선인 출신 주요 공모,
협력자의 한사람으로 지목되었다.[2] 외할아버지 이경직(李耕稙), 노론 실학파 학자 박규수(朴珪壽),
개화 사상가 유대치, 오경석(吳慶錫), 강위(姜瑋) 등의 문하생이었다.

한성 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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