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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영변 약산의 진달래꽃

"뒤늦게 하는 공부이지만 공부하는 것이 정말 쉽지 않다. 의지만으로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다. 이렇게 탈진한 상태로 더 이상 버틸 수는 없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야겠다."

가족과 함께 일본에서 유학생할을 하시던 아버지는 병고와 가족부양 때문에 많이 약해지고 지치셨고 생활이 점점 힘들어져 학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가족은 다함께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었다. 그때가 1937년이었다. 아버지는 일본에서 졸업 1년을 남기고 공부를 끝내지 못하고 돌아오신 것을 일생의 한으로 안고사셨다.

귀국하여 영변으로

온 가족이 일본에서 돌아와 평안북도 영변에 자리를 잡은 것은 내가 일곱 살 때였다. 영변으로 올 때에 기차에서 내려 약 한 시간 버스를 탔는데 포장이 되지 않은 울퉁불퉁한 길과 길 양쪽으로늘어서 있는 초가집들이 동경에 비해 너무 초라하고 가난하게 보여어린 나이에도 심란하고 불안한 마음이었다.

영변으로 귀국한 후 아버지는 도청 토목과 영변 지부에 취직을하여 일본인 과장 밑에서 일을 하셨다. 어머니는 영변장로교회에서풍금 반주를 하시고, 아버지는 집사로 교회 일을 많이 하셨다. 크리스마스 때 내가 동방박사 역을 했었는데 대본을 외우고 진지하게연기를 하던 모습을 지금도 가끔 생각이 난다.

국민학교 운동회 때 아이들이 손을 잡고 둥글게 원을 그리며빙빙 도는 율동이 있었는데 옆에 손을 잡은 여학생이 아주 예뻐 기분이 좋았던 생각도 난다.

언덕 위에 있던 우리 집 앞마당에는 봄마다 진달래꽃이 많이피어서 너무나 아름다웠다. 어머니는 토종닭을 여러 마리 키우셨는데 종종 맛있는 닭요리를 해 주셔서 온 가족이 옹기종기 모여 닭고기를 뜯어 먹던 모습이 생각난다.

둘째 동생 익성이는 입술에 밥풀을 묻힌 채로 마당에서 놀다가 토종닭에게 쪼여 입술이 찢어졌는데, 일흔 살이 지난 지금까지도그 상처가 남아 있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
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김소월, "진달래꽃")

김소월의 대표적인 시 "진달래꽃"을 읽을 때마다 어린 시절에뛰놀던 영변의 정경이 생각나 가슴이 뭉클해지곤 한다.
한번은 학교에서 약산에 소풍을 갔었는데, 그때 큰 소나무 둥치에 내 이름 '김익창'을 칼로 깊이 새겨 놓았다. 나는 어려서부터칼로 나무를 파서 무엇을 만드는 것을 좋아했다. 조금 더 커서는 도장도 잘 파게 되었는데 이것이 6.25 사변 때 인민군 점령 하에서 피난 갈 때 가짜 증명서를 만드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지금까지도 영변의 약산(藥山) 소나무에 파 놓은 내 이름이 남아 있을까 하고 가끔 생각을 해 보곤 한다.

나는 영변에서 국민학교 3학년까지 다녔다. 그때까지 나는 한국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국민학교 교장은 일본사람이었고 대부분의 교사들은 한국사람이었다. 일본인 교사도 몇 명이 있었다. 수업은 주로 일본어로 했다.

산에는 뽕나무가 많아서 누에고치를 이용하여 비단을 만드는공장들이 영변에 여럿 있었다. 영변중학교에는 김석목 선생님이 계셨는데 그분이 후에 서울사대 윤리학 교수로 실천철학을 많이 강조한 분이다. 그 아름다운 진달래, 그리고 누에들을 먹일 수 있는 많은 뽕나무들, 또 크고 잘 생긴 토종닭이 많았던 나의 어린 시절 평화스러웠던 고향 영변이 지금은 원자 폭탄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원자로가 있는 곳으로 온 세계의 관심을 모으고 국제적 문젯거리의대상이 되어 버렸다. 이와 같은 변화에 대하여 참 마음이 아프고 착잡하다.
(신의주에서 찍은 가족사진(1940년, 뒷줄 왼쪽부터 익란, 익창, 아버지, 어머니, 익성과 익풍)

5. 창씨 개명

영변에 정착한 지 3년 후인 1940년에 아버지가 신의주에 있는도청으로 전근하셔서 우리 가족은 모두 신의주로 이사했고, 나는 신의주 약죽국민학교(와까다께 쇼각고)로 전학을 했다. 이 학교의교장은 일본인이었고, 교사도 일본인이 한국사람보다 더 많았다. 학교 교육은 모두 일본말로 진행했다.

이 시기는 일제 강점기에 조선총독부의 민족말살정책이 극에달할 때였다. 일제는 민족말살정책으로서 신사참배, 황국신민서사암송, 강제 징병 등을 시행하고 1940년부터 조선의 성명제를 폐지하고 모든 국민이 자발적으로 일본식 창씨 개명을 하도록 강요했다.창씨 개명에 동참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각급 학교 입학 및 진학거부, 공사기관에 대한 취업 거부 및 퇴출, 아동들에게 이유없이 구타하여 부모에게 애원하여 창씨 개명에 참여하도록 하는 야비한 방법도 썼다. 시행 6개월만에 조선인의 79.3%가 창씨 개명을 했다. 내 이름도 어쩔 수 없이 이름을 일본이름 '요시카네 마쓰마사'로 바뀌었다.

담임선생 중에는 일본인 여선생과 남선생이 있었다. 여선생은부드러웠으나 남선생들은 군대식으로 엄하고 딱딱하게 학생들을 다루었다. 한번은 우리 반의 한 학생이 수업 중에 자기 짝과 말을 했다고 학생 모두가 벌을 받았다.

"모두 손바닥을 앞으로 내!"모든 학생들의 손바닥을 자로 때린 다음에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수업 시간에 학생이 떠드는 것은 선생인 나에게도 책임이 있다. 반장은 내 손바닥을 때려라."
선생님이 손을 내밀자 반장은 주저하며 때리지 못하니까 선생님이 고함을 질었다.
"빨리 때려."

그러나 반장은 때리는 시늉만 하고 세게 때리지는 못했다. 이분은 한국인 선생이었다. 개인의 책임을 전체가 공동으로 져야 한다는 당시의 교육철학을 나타낸 것이다.

약죽국민학교에 다닐 때 가까운 친구가 늘 전지가 들어 있는장난감을 가지고 놀았다. 우리 집에도 가지고 와서 같이 놀았다. 전지가 잘 안 되면 전지뿐만 아니라 장난감을 해체해서 고치곤 하였다. 이 친구 때문에 나는 이때부터 기술, 전기, 전자분야에 관심을갖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린 나이 때부터도 친구들의 영향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 준 것이다.

당시 우리 가족은 한경직(韓景職) 목사님이 시무하시던 신의주 제 2장로교회에 다녔다. 한경직 목사님은 1933년부터 10년간 이교회에 시무하시고, 1939년에는 보린원을 설립하셔서 고아들을 돌보셨다.

"여러분, 우리 조선의 미래는 우리가 얼마나 예수님을 잘믿고,하나님 앞에 바로 서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이 민족의열쇠입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우리 조선의 아픔을 하나님 앞에 구하고, 민족의 고난을 믿음으로 극복해 나갈 것을 설교말씀을 통해 전하면서용기를 북돋아 주셨다. 아버지는 그 교회의 집사로 계셨다.

한번은 부모님들이 교회 수요예배에 가셨는데 그 사이에 친구들이 우리 집에 와서 놀았다. 여학생도 몇 명 있었다. 그런데 부모님이 예상 밖으로 일찍 교회에서 돌아오셨다. 대문에서 들어오시는것이 보였다.
"얘들아, 우리 아버지가 오신다. 공부하지 않고 여학생들까지데려다가 놀고 있는 모습을 보시면 야단치실 거야. 모두 빨리 도망가."
나는 잽싸게 친구들을 뒷문으로 도망가게 한 일이 생각난다.

한경직 목사님은 광복이 된 해인 1945년 12월 2일에 함께 월남한 27명의 성도들과 서울 영락교회의 전신인 베다니전도교회를 세우시고, 일본 천리교 경성분소의 신전을 개조하여 예배당으로 사용하셨다. 1946년 11월 15일 교회의 이름을 당시 지명을 따라 영락교회로 바꾸었다. 우리 가족도 후에 서울로 온 다음에 한경직 목사님을 찾아 영락교회에 나갔다. 당시 영락교회에는 북에서 월남한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그때 영락교회는 교회로서의 일 이외에많은 피난민들에게 필요한 정보, 일자리 구하는 것 등 여러 가지 도움을 제공하였다.

나의 고향 신의주를 생각하면 마라톤 선수 손기정 씨가 생각난다. 그는 어렸을 때 신의주에서 자랐는데 그곳 둑에서 마라톤 연습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는 그 후 서울에 있는 양정중학교에 다녔는데 그때 베를린 올림픽에서 우승을 하였다. 이것이 자극이 되어나도 그 둑에 가서 뛰곤 하던 생각이 난다.

신의주에서는 할머니, 부모님, 나와 여동생, 남동생 둘 모두일곱 식구가 살았다. 서울에 계시는 외가에서 식모를 구해 보내 식구가 한 사람 더 늘었다. 어머니는 도청에서 약 1년 근무하셨다. 아버지는 평북 도청 토목과에서 기사로 계시면서 여러 지역에 출장을많이 다니셨다. 가끔 집에 오시면 아이들의 버릇을 바로 잡느라고 엄하게 야단을 치곤 하셨다. 그래서 나에게는 아버지는 멀고, 어렵고, 무서운 존재이셨다. 그런데 후에 어머니가 납치당하신 이후 아버지는 친절하고, 부드럽고, 말없이 일만 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 때 어머니는 신여성으로 모자를 쓰고 바지를 입고 다니셨다. 그래서 나는 동네 아이들에게 놀림도 당했다. 당시 유명했던 무용가 최승희 씨가 어머니 숙명여고 후배인데 신의주에 와서 공연을 했다. 어머니는 숙명여고 동창생들을 동원하여 환영 파티를 열어 주셨다. 이와 같이 사회활동은 아버지보다 어머니가 많이 하셨다.

6. 민족정신의 요람 오산학교(五山學校)

나는 약죽국민학교를 졸업한 후에 아버지의 뜻에 따라 신의주공업중학교에 입학하려고 시험을 쳤다. 이 학교는 주로 일본학생들이 다니던 학교였다. 그런데 신체검사 때 옆에 있는 친구가 웃기는 이야기를 해서 내가 조금 웃었다. 일본 선생이 내가 웃는 것을 보고와서 나에게 뭐라고 하더니 낙방을 시켰다. 나에게 이야기를 건 친구도 떨어뜨렸다. 그 당시 일본의 압제 속에서 한국 사람들은 이와같은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살았다. 그래서 나는 정주에 있는 오산학교(중학교)에 가게 되었다. 결과적으로는 나에게는 더 좋은 계기가 되었다.

오산중학교에 감으로써 나는 엔지니어 대신에 의사가 되었고,민족정신과 사회참여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그때 나의 나이가 열두 살 때였다. 처음으로 가족들을 떠나 혼자 생활하며 독립성을 기를 수 있는 기회도 되었다.

오산학교는 민족정신이 강한 학교였다. 애국정신이 강한 남강 이승훈(南崗 李昇薰) 선생이 1907년 창설한 학교로서 민족지도자, 문인, 종교계의 지도자를 많이 배출했다. 일제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민족정신이 투철한 실력 있는 사람들을 많이 배출한 데에는 애국정신이 투철한 이승훈 선생의 영향이 컸다.
오산학교 졸업생 중에는 시인 김소월(金素月), 사상가 함석헌(咸錫憲), 역사가 이기백(李基白), 종교인 한경직 목사 같은 분들이 있고, 교사 중에는 민족운동가 조만식(趙萬植), 소설가 이광수(李光洙)와 황순원(黃順元), 종교인 김교신(金敎臣), 화가 임용련(任用璉) 선생 등이 있었다.
정주에서는 오산중학교에서 관리하는 하숙집에 묵게 되었는데, 나보다 2년 선배인 학생과 같은 방을 쓰게 되었다. 이 선배는민족정신이 강하고 나의 장래에도 관심이 많았다. 이 선배가 나에게 오산중학교의 정신과 나의 장래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는 나에게 매주 글을 쓰게 했는데 이것이 내가 글 쓰는 법을배우고 민족정신을 고취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이 선배는 나의중요한 멘토였다. 후에 이 선배는 동경제대에 입학하였다. 이 선배가 나에게 내 주었던 첫 작문 주제는 "반딧불"이었다. 아직도 잊지못하는 것은 글을 쓰기 위해 밤에 논바닥에 가서 반딧불을 보며 글을 쓴 일이다.

오산중학교 부근의 과수원집 아들 이기문(李基文)이 내 친구였는데 그 친구와는 일주일에 한 번씩 독서를 한 후에 들에 나와 앉아 독후감을 써서 교환하곤 했다. 이기문은 그 후 서울대학교 국문과 주임교수를 역임했다. 그의 형은 우리나라의 유명한 역사학자 이기백(李基白)이다. 내가 오산중학교에 다닐 때는 일본이 미국과 전36 사선을 넘어서쟁을 하는 때였다. 모든 수업을 일본말로 했고, 군사훈련도 심했고,유도, 검도도 배웠다.

학생들은 한 달에 한 번씩 행진을 해 일본신사에 가서 참배를해야 했다. 교장선생이 일본사람이었고, 일본군 장교 한 사람(하야시 소위)이 교관을 했고, 사관후보생 두 사람이 파견 나와 군사훈련을 시켰다. 미군 상륙에 대비하여 전투훈련도 시켰다. 정신적으로임전태세를 갖도록 마음의 준비를 시켰다.
모든 교육을 일본식으로 했고 일본인 교장, 교관들을 통하여 일본 위주의 교육을 시켰으나, 강한 민족주의 흐름의 오산학교 전통과 한인 교사들 그리고 선배들을 통해 오산학교 학생들은 민족주의 정신을 유지할 수 있었다.

오산중학교의 일반 교사들 중에는 한국인이 대부분이었다. 이중에 미국 예일대학에서 미술과를 졸업하고 파리에 가서도 미술활동을 하다 돌아오신 미술 교사 임용련 선생이 계셨다. 당시의 일제식민통치하에서 한국 사람들은 아무리 훌륭한 교육배경을 가지고있어도 임 선생과 같이 시골의 작은 중학교에서 가르칠 수밖에 없었다. 임 선생은 오산학교의 학생이었던 이중섭의 비범한 재주를 발굴하여 그림을 공부하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 이중섭이 한국미술사에 빛나는 화가가 되는 길을 열어 주신 분이다.

임 선생님은 미술뿐만 아니라 영어 과목도 가르치셨다. 그는영어로 듣고 대화하는 회화를 학생들에게 많이 가르쳐 주셨다. 그당시의 영어 교육은 문법에 중점을 두었는데 이 분은 회화에 중점을두어 내가 영어회화를 익히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강제노동에 동원

내가 오산중학교 2학년을 마칠 무렵 일제는 한국학생들을 긴급 총동원하여 군수공장 등에서 강제노동을 시켰다. 나도 평양(平壤)의 무기군수품 생산 공장에 동원되어 전쟁이 끝날 때까지 1년동안 강제노동을 했다. 둥글둥글한 철조망이 덮인 높은 담으로 둘러싸인 공장에서 한 번도 밖에 나가지 못하고 1년 동안 꼬박 일만했다. 그들은 하루 3교대로 일을 시켰다. 공장은 하루 24시간 가동되었다. 우리들은 정밀철판기술을 배워 철을 깎아 무기와 폭탄을만드는 일을 하였다. 일본군 소대가 공장의 경비를 맡았는데 일본군의 군기가 상당히 엄하다는 것을 보고 알 수 있었다.

우리들은 창고의 한쪽 마루에서 공동 숙식을 하며 일을 했는데 아침저녁으로 점호가 있었고 규율이 엄했다. 생활은 완전히 군대식이었다. 식사는 작은 밥공기 하나에 콩나물국이 전부였다. 배가 항상 고팠다. 학습은 전혀 없고 일만 하였다.

나의 1년 선배였던 김윤덕 씨는 자기학년 학생들은 모두 압록강 수풍댐 수력발전소, 그곳에서 가까운 질소비료공장, 신의주 비행장 등에 동원되어 돌아가면서 3-4개월씩 광복이 될 때까지 모두2년에 걸쳐 중노동을 했다고 회고했다.

수력발전소에서는 학생들은 "도록고"라고 흙이나 돌 또는 석탄을 싣고 손으로 밀고 수동으로 조정하는 철로 위의 짐차 일을 하느라고 고생을 했다. 비행장에서는 흙을 파다가 높이 쌓고 그 위에 시멘트를 덮고 그것이 굳은 다음에 흙을 다시 파내서 비행기 격납고를38 사선을 넘어서만드는 중노동을 했다고 한다.

무기공장에서 들은 해방소식

평양의 무기공장에서 일하고 있을 때 갑자기 아침시간에 모두 마당으로 집합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날이 1945년 8월 15일이었다.

"나는 세계의 대세와 제국의 현상황을 감안하여 비상조치로서 시국을 수습하고자 충량한 신민에게 고한다. 나는 제국정부로 하여금 미*영*중*소 4개국에 그 공동선언을 수락한다는 뜻을 통고하도록 했다."

일본천황의 항복선언문 낭독이 확성기로 나왔다. 처음에는 천황이 하는 말을 잘 알아듣지 못했는데 곧 그것이 항복 선언임을 알고 깜짝 놀랐다. 우리는 일본인의 말만 듣고 일본이 전쟁에서 이기는 줄만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처음으로 여학생들도 그곳에 와서 일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다른 학교 남학생들도 와 있었다. 이 공장에 동원된 학생은 모두 1천여 명이나 되었다. 남학생들은 무기 만드는 일을 했고, 여학생들은 군복 만드는 일을 했다.

일본의 항복 소식을 들은 시민들은 모두 평양 시내로 몰려 나갔다. 우리 학생들도 평양 거리를 일렬종대로 걸어갔다. 평양 시내에 도착하였더니 모든 시민들이 태극기를 들고 나와 "대한독립 만39세"를 외치며 우리는 서로 얼싸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다시 오산학교로

해방 직후 우리들은 기차로 평양에서 정주에 있는 오산중학교로 돌아갔다. 오산중학교에 있던 일본인 교관 하야시 소위는 일본이 항복한 사실을 알고, 일본이 진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임신한 자신의 아내를 죽이고, 자신도 자살하였다.

"우리가 이처럼 충성을 다하고 있는데 도대체 왜 항복을 한단말인가."

그는 천황의 항복 성명을 듣고 심하게 화를 내면서 욕을 한 후집으로 가서 일을 저질렀다고 한다. 나보다 한 학년 위의 상급생 학생들이 그의 집에 찾아가 그들이 죽은 것과 시체 옆에 떨어져 있는권총을 발견하였다. 선배들이 주축이 되어 그들의 장례식을 해 주었다. 그때 학교에는 전쟁 말기 미국 비행기 B29가 지나가면서 떨어뜨린 휘발유통을 보관하고 있었다. 그 통에 남아 있던 휘발유를 뿌리고 시체를 태웠다. 화장을 끝냈는데 당시 우리 학년 반장이었던 나에게 그 뼈를 추려 담아 오라고 지시했다. 그래서 내가 뼈를 젓가락으로 주어 모아 조그만 나무상자에 담았다. 뼈를 주워 담았던 그때 내 심정은 나조차도 알 수 없는 복잡 미묘한 감정이었다. 나라가 해방이 된 기쁜 마음과 함께 자살로 생을 마친 일본인 장교와 그 아내가 인간적으로 불쌍한 착잡한 심정이었다. 교관으로 있던 또 한 사람의 일본군 사관은 전에 그 의기양양했던 모습이 사라지고 갑자기 사기가 죽어 콧물까지 흘리는 초라한 모습으로 변했다. 사기가 얼마나 사람의 외모나 행동에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인가를 절실히느꼈다.

그 당시 러시아 군대들이 주둔하면서 실질적으로 38선 이북을 통치하고 있었다. 이북의 보안대원들은 옆에서 보조하는 일을 했다. 러시아 군인들은 대개 교육을 받지 못한 무식하고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한국 사람들의 시계, 금품 등을 빼앗아 갔다. 팔목에 빼앗은 시계를 서너 개씩 차고 다니는 군인들도 있었다. 옷도 냄새가나고 더러웠다. 장교들은 러시아 백인이었고, 사병 중에는 중앙아시아 사람들과 중동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소련군들이 일본인 여자들을 잡아다가 강간한 일이 많았다. 그때 오산학교에서는 일본인들을 강당과 화학교실에 대피시키고 소련군들의 횡포를 피하도록 학생들이 조를 짜서 경비를 서면서 그들을 보호했다. 오산학교는 이와같이 한 때 탄압자였던 사람들도 박애주의 정신으로 보호해야 한다는 정신을 심어 준 학교였다.

평양 무기군수공장에서 정주로 돌아온 후 나는 밴드부에서 트럼본을 불었다. 그때 밴드부에서 플루트를 분 김몽필이 후에 서울시립교향악단 플루트 제일 주자가 되었다. 한번은 인민군 장군이 오산학교를 방문했는데 그는 오산학교 출신의 최용건이었다. 학생들이 운동장에 모여 그의 연설을 듣고 밴드부의 음악과 함께 사열식을 한 생각이 난다. 그는 일찍이 오산학교 때 조만식 선생이 길러낸 사람인데 중국에 가서 연안의 중국공산군과 함께 활동하면서 공산주의자가 되어 광복 직후에 돌아왔다. 그는 학생들의 반공반소운동을 막기 위하여 오산중학교에 왔었다.

7. 못다 핀 꽃 - 신의주반공학생사건

광복이 된 후 잠시 오산학교에 있다가 나는 부모님과 동생들이살고 있는 신의주의 동중학교로 전학을 했다. 내가 정주에서 기차를 타고 신의주에 도착했는데, 역전에서 소련 군인에게 가방 검열을받았다. 그때 내 책가방에 들어 있던 알루미늄 도시락 통을 러시아군인들에게 빼앗겼다. 어머니는 그 후 그 도시락 통이 아까워 두고두고 말씀을 하셨다.

또 러시아 군인들은 해바라기 씨를 너무 좋아했다. 그래서 소련군들이 주둔한 부근 길거리에는 해바라기 씨가 많이 떨어져 있었다. 밤에는 술을 마시고 와서 여자를 내놓으라고 위협하고, 강간도하고, 강도질도 해서 밤이 되면 모두 문을 걸어 잠그고, 아무도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러시아 군인들이 우리 집에도 와서 문을 두드리며 '마담'을 불러 우리가 문을 걸어 잠그고, 온 가족이 불안에 떨기도 했다.

우리는 그냥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머리를 짜내 자위책을 마련했다. 러시아 군인을 쫓아내는 방법 중의 하나로 집집마다 깡통에 돌을 넣어 두었다가 흔들면 옆집에서 그 소리를 듣고 같이 깡통을 흔들고, 그 옆집, 또 그 옆집, 모든 마을이 깡통을 흔들어 그 소리로 군인들을 내쫓기도 하였다.

광복이 되면서 그 당시 인민위원장을 하시던 조만식 선생이 도청 토목과에서 일하시던 아버지를 평북 토목국장으로 임명하셨다.
김일성이 공산정권을 장학하기 전 한때 북한의 행정이 조만식 선생의 집권하에 민주적인 나라를 세우는 데 주력했었다. 아버지는 기독교인이고 민족주의자이셨던 조만식 선생을 존경하셨다.
아버지는 직책관계상 회의가 많았고 출장을 많이 다니셨다. 조만식 선생을 만나기 위해 평양에도 자주 가셨다. 우리는 그때 적산일본 가옥들이 많이 있는 동리로 이사를 했는데 그곳에는 소련군장교들과 함께 사는 젊은 일본여자들이 많이 있었다. 이 여자들은조만식 선생과 러시아 군정 간부들 그 당시 상황에서 일본인들을 보호하고 그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희생적으로 소련군의 현지처 노릇을 했다.

이 일본여자들을 생각하면 한국전쟁 때 많은 젊은 한국 여자들이 몸을 팔아 부모와 동생들을 먹여 살리고, 또 후에 미국에 시집을 와서 가족들을 초청하여 이민을 시켰고, 동생들을 공부시킨희생적으로 산 여성들을 생각하게 된다.

신의주 반공학생사건

광복이 된 후 학교에서는 모든 학습이 공산주의 사상을 고취시키는 내용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역사과목이 한국역사는 가르치지 않고 공산주의 볼셰비키 혁명사 중심의 내용으로 개편되었다. 학생들은 불평하기 시작했고 학교당국에 항의도 했다.
그러나 학교당국은 학생들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고 인문계통의 모든 과목의 내용을 공산주의 사상을 고취하는 방향으로 개편해 나갔다. 학생들의 불만은 점차 높아졌다.

이와 함께 1945년 11월 16일 평안북도 용암포 사회민주당의 지방대회에서 공산당의 횡포를 신랄하게 비난하고 소련군은 물러가라는 시위가 있었다. 이에 동조하여 11월 23일에 신의주 6개 중학교 5천여 명의 학생들이 학원의 자유를 외치며 거리로 나왔다. 학생시위가 점차 커지고 격렬해지자 공산당의 보안대와 소련군이 무력진압을 시도하였다. 결과로 학생 23명이 사망하고, 700여 명이 중45경상을 입었으며, 2천여 명의 학생과 시민이 투옥이 되었다.

이때 나는 신의주동중 3학년이었다. 나는 우리반 학생들과함께 신의주 거리로 나가 반공과학원 자유를 외치며 행진하였다.
그때 소련 비행기 두 대가 나타나 기관총으로 시위대를 향해 사격을가하였다. 내 앞에 있던 학생 하나가 총알에 맞아 넘어졌다. 학생들은 공격을 피해 모두 흩어져 숨었다. 나는 숨었다가 집으로 도망해왔다. 내 친구 집에는 친구의 형 친구들 10명이 도망 와 다 다미방밑에 숨어 있었는데 소련 군인들이 집까지 쫓아와서 학생들과 친구아버지까지 잡아갔다. 이때에 내가 다니던 정주의 오산학교에서도학생들이 모두 신의주에 가서 시위에 동참하려고 정거장으로 몰려갔으나 갑자기 소련 비행기가 떠서 기관총을 쏴 대고 선생님들이 모두 뛰어나와 말리고 해서 못 갔다고 김윤덕 선배는 회고했다. 신의주와 그 주변지역의 모든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참여한 반공반소 시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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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Salome [3] 2008.06.07 이건일*68 2008.06.07 9689
62 “Ed Park의 Personal Days를 읽고” - 강창욱 (61) [1] 2008.06.07 강창욱*61 2008.06.07 7201
61 브람스 현악 6중주 1번 2악장 과 '연인들' file 2008.07.10 이건일*68 2008.07.10 10803
60 "데브다스" (내 친구교수의 글) [2] 2009.09.07 유석희*72 2009.09.07 8552
59 "How doctors Think," A must read [5] 2009.11.29 이한중*65 2009.11.29 3742
58 "부처를 쏴라" (내 친구교수의 글) [12] 2009.12.08 유석희*72 2009.12.08 7551
57 The Two Books I Recommend [4] 2010.01.05 이한중*65 2010.01.05 7846
56 『나무열전』(내 친구교수의 글) [6] 2010.01.08 유석희*72 2010.01.08 7820
55 "백경" (Moby Dick)을 읽고 (내 동기 김영준*72 의 글) [7] 2010.01.22 유석희*72 2010.01.22 7672
54 Hello Dr. Seo [11] 2010.07.10 문광재*68 2010.07.10 7075
53 The War in KOREA, 1981 [7] 2010.07.31 한원민*65 2010.07.31 8549
52 KOREA: The Untold story of the War. 1982 [9] 2010.08.08 한원민*65 2010.08.08 7661
51 [re] 박경리 - 토지 1 (정리단계, 작업 중입니다) 2010.10.20 운영자 2010.10.20 7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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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Book] A Bird and Its Albatross: A Tale of Renewal [1] 2010.12.24 운영자 2010.12.24 16218
46 [Book Review] "Cutting For Stone" / Abraham Verghese [6] 2011.01.09 이한중*65 2011.01.09 3164
45 [Book Review] Destiny of A Running Horse [1] 2011.05.21 운영자 2011.05.21 67941
» [Book 연재] "사선을 넘어서" by 김익창*56 #2 [4] 2011.12.21 운영자 2011.12.21 48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