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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土地)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본문

제 1 편 어둠의 발소리

서(序)

 1897년의 한가위.

 까치들이 울타리 안 감나무에 와서 아침 인사를 하기도 전에, 무색 옷에 댕기꼬리를 늘인 아이들은 송편을 입에 물고 마을길을 쏘다니며 기뻐서 날뛴다. 어른들은 해가 중천에서 좀 기울어질 무렵 이래야, 차례를 치러야 했고 성묘를 해야 했고 이웃끼리 음식을 나누다 보면 한나절은 넘는다. 이때부터 타작마당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고 들뜨기 시작하고- 남정네

노인들보다 아낙들의 채비는 아무래도 더디어지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식구들 시중에 음식 간수를 끝내어도 제 자신의 치장이 남아 있었으니까. 이 바람에 고개가 무거운 벼이삭이 황금빛 물결을 이루는 들판에서는, 마음놓은 새떼들이 모여들어 풍성한 향연을 벌인다.

"후우이이- 요놈의 새떼들아!"

 극성스럽게 새를 쫓던 할망구는 와삭와삭 풀발이 선 출입옷으로 갈아입고 타작마당에서 굿을 보고 있을 것이다. 추석은 마을의 남녀노유, 사람들에게뿐만 아니라, 강아지나 돼지나 소나 말이나 새들에게, 시궁창을 드나드는 쥐새끼까지 포식의 날인가 보다.

 빠른 장단의 꽹과리 소리, 느린 장단의 둔중한 여음으로 울려 퍼지는 징소리는 타작마당과 거리가 먼 최참판댁 사랑에서는 흐느낌같이 슬프게 들려온다. 농부들은 지금 꽃 달린 고깔을 흔들면서 신명을 내고 괴롭고 한스러운 일상(日常)을 잊으며 굿놀이에 중하고 있을 것이다. 최참판댁에서 섭섭잖게 전곡(錢穀)이 나갔고, 풍년에는 미치지 못했으나 실한 평작임엔 틀림이 없을 것인즉 모처럼 허리끈을 풀어놓고 쌀밥에 식구들은 배를 두드렸을 테니 하루의 근심은 잊을 만했을 것이다.

 이날은 수수개비를 꺾어도 아이들은 매를 맞지 않는다. 여러 달만에 소증 풀었다고 느긋해하던 늙은이들은 뒷간 출입이 잦아진다. 힘 좋은 젊은이들은 벌써 읍내에 가고 없었다. 황소 한 마리 끌고 돌아오는 꿈을 꾸며 읍내 씨름판에 몰려간 것이다.

 최참판댁 사랑은 무인지경처럼 적막하다. 햇빛은 맑게 뜰을 비춰 주는데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가버렸을까. 새로 바른 방문 장지가 낯설다.

한동안 타작마당에서는 굿놀이가 멎은 것 같더니 별안간 경풍 들린 것처럼 꽹과리가 악을 쓴다. 빠르게 드높게, 꽹과리를 따라 징소리도 빨라진다. 깨깽 깨애깽! 더어응응음- 장구와 북이 사이사이에 끼여서 들려온다. 신나는 타악 소리는 푸른 하늘을 빙글빙글 돌게 하고 단풍든 나무를 우쭐우쭐 춤추게 한다. 웃지 않아도 초생달 같은 눈의 서금돌이 앞장 서서 놀고 있을 것이다. 오십 고개를 바라보는 주름살을 잊고 이팔 청춘으로 돌아간 듯이, 몸은 늙었지만 가락에 겨워 굽이굽이 넘어가는 그 구성진 목청만은 늙지 않았으니까. 웃기고 울리는 천성의 광대기는 여전히 구경꾼들 마음을 사로잡고 있으리. 아직도 구슬픈 가락에 반하여 추파 던지는 과부가 있는지도 모른다.

 "쯔쯔 ... 저 좋은 목청도 흙 속에서 썩을랑가?"

 "서서방이 죽으믄 자지러지는 상두가 못 들어서 서분을 기요."

 "할망구 들을라? 들으믄 지랄할 기다."

 "세상에 저리 신이 많으믄서 자게 마누라밖에 없는 줄 아니 그것이 보통 드문 일가?"

 "신주단지를 그리 위할까? 천생연분이지 머."

 "소나아로 태어나가지고 남으 제집 한 분 모르고 지내는 것도 벵신은 벵신이제?"

 나이 듬직한 아낙들은 그런 말을 주고받는지 모른다.

 목수가 본업이요 섬진강의 강태공인 곰보 홀아비(정확히는 총각) 윤보는

 "이 사람들아! 사랑도 품앗이라 안 하더나?"

 "머라 카노? 자다 봉창 뚜디리네."

 "타작마당에서만 이럴 기이 앙이라 강가에도 가서 한마당 굴리자!"

 "그는 또 와?"

 "용왕님네 심사도 풀어주어야 안 하겄나? 그래야 개기도 풍년이 들제."

 "젯상에도 못 오르는 민물개기가 어디 개기가! 당산에 가자! 당산에!"

 누군가가 팔팔하게 반대하고 나서면 너희들이야 그러거나 말거나 두만아비는 느릿느릿 징을 칠 것이다. 봉기는 헤죽헤죽 웃으며, 구경하는 아낙들보고 부끄러워하며 고깔을 흔들 것이다. 이들은 한창 일할 나이, 살림의 기틀을 잡고 있는 삼십대 중간쯤의 장정들이 싱긋이 웃으며 큰 키를 점잖게 가누어 맴을 도는 이용이다. 그는 누구니 누구니 해도마을에선 제일 풍신 좋고 인물 잘난 사나이, 마음의 응어리를 웃음으로 풀며 장단을 치고, 칠성이 북을 더덩덩! 뜨드리면 무같이 미쭉한 영팔이는 욱욱 헛힘을 주어 춤을 추고 있을 것이다. 아낙들은 노인들 아이들 틈새에서 제 남편 노는 꼴을 반쯤은 부끄럽고 반쯤은 자랑스러워 콧물을 폴짝일 것이다.

 타작마당에서 한마당 벌이고 나면 시장기가 든 농부들은 강가도 당산도 아닌 마을길을 누비다가 삽짝 큰 집에 밀고 들어 한바탕 지신(地神)을 밟고 그러고 나면 갈고리  같은 손으로 땀을 닦으며 술과 밥을 먹게 될 것이다.

 팔월 한가위는 투명하고 삽삽한 한산 세모시 같은 비애는 아닐는지. 태곳적부터 이미 죽음의 그림자요, 어둠의 강을 건너는 달에 연유된 축제가 과연 풍요의 상징이라 할 수 있을는지. 서늘한 달이 산마루에 걸리면 자잔한 나뭇가지들이 얼기설기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소복 단장한 청상의 과부는 밤길을 홀로 가는데 - 팔월 한가위는 한산 세모시 같은 처량한 삶의 막바지, 체념을 묵시(默示)하는 축제나 아닐는지. 우주 만물 그중에서도 가난한 영혼들에게는.

 가을의 대지에는 열매를 맺어놓고 쓰러진 잔해가 굴러 있다. 여기저기 얼마든지 굴러 있다. 쓸쓸하고 안쓰럽고 엄숙한 잔해 위를 검시(檢屍)하듯 맴돌던 찬바람은 어느 서슬엔가 사람들 마음에 부딪쳐와서 서러운 추억의 현(絃)을 건드려주기도 한다. 사람들은 하고 많은 이별을 생각해보는 것이다. 흉년에 초근목피(草根木皮)를 감당 못하고 죽어간 늙은 부모를, 돌림병에 약 한 첨을 써보지 못하고 죽인 자식을 거적에 말아서 묻은 동산을, 민란 때 관가에 끌려가서 원통하게 맞아죽은 남편을, 지금은 흙 속에서 잠이 들어버린 그 숱한 이웃들을, 바람은 서러운 추억의 현을 가만가만 흔들어준다.

 "저승에나 가서 잘 사는가."

 사람들은 익어 가는 들판의 곡식에서 위안을 얻기도 한다. 그러나 들판의 익어 가는 곡식은 쓰라린 마음에 못을 박기도 한다. 가난하게 굶주리며 살다 간 사람들 때문에.

"이만하믄 묵을 긴데……."

 풍요하고 떠들썩하면서도 쓸쓸하고 가슴 아픈 축제, 한산 세모시 같은 한가위가 지나고 나면 산기슭에서 먼, 먼 지평선까지 텅 비어 버린 들판은 놀을 받고 허무하게 누워 있을 것이다. 마을 뒷산 잡목 숲과 오도마니 홀로 솟은 묏등이 누릿누릿 시들 것이다. 이러고 저러고 해서 세운 송덕비며 이끼가 낀 열녀비며 또는 장승 옆에 한 두 그루씩 서 있는 백일홍나무에는 물기 잃은 바람이 지나갈 것이다. 그러고 나면 겨울의 긴 밤이 다가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해가 서산에 떨어지고부터 더욱 흐느끼는 듯 꽹과리 소리는 여전히 마을 먼 곳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밤을 지샐 모양이다. 하기는 마을 처녀들의 놀이는 이제부터, 달 뜨기를 기다려 강가 모래밭에서 호작거리는 물 소리를 들으며 시작될 것이다.

 "진지상 올릴까요."

 방문 앞에 계집종 귀녀가 와서 묻는다. 벌써 두 번이나 물어보는 말이다.

 방안에서는 아무 기척이 없다.

 "등잔에 불을 켜야겠습니다."

하며 귀녀는 방문을 열고 들어온다. 최참판댁 당주인 최치수는 책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오래 묵은 한지 같은 저녁 빛깔이 방안에 밀려들고 있다. 등잔불이 흔들리면서 밝아온다. 어둑어둑한 방에서 정말 글을 읽고 있었는지. 최치수 콧날에 금실 같은 한줄기 불빛이 미끄러진다. 수그러진 그의 콧날이 날카롭다. 이 세상 온갖 신경질과 우수가 감도는 옆모습, 당장에라도 벌떡 일어서서 눈을 부릅뜨고 고함을 칠 것 같은 위태위태한 분위기가 방안 가득히 맴돈다.

"자리나 깔아."

"예."

 거들떠보는 것도 아니었건만 귀녀는 눈웃음치며 도토롬한 입술을 오므린다.

 병약한 치수로서는 번거로웠던 명절날 집안 행사에 어지간히 시달리어 피곤했던 것 같다.

 "저녁은 안 드시겠습니까?"

 아랫목에 자리를 깔아놓고 다시 확인하려 했으나 귀녀는 대답을 듣지 못하고 방에서 물러난다. 대청을 지나 건너편 방으로 해서 그 방에 잇달린 골방으로 들어간 귀녀는 품속의 면경을 꺼내어 얼굴을 비쳐본다. 치수 방에 들어가기 전에도 이 방에서 면경을 보았었는데. 머리를 쓰다듬고 한 번 더 꺼무꺼무한 자기 눈을 들여다보고 나서 면경을 품속에 넣는다. 뒤뜰로 향해 난 장지문에서는 아직 엷으려다 말고 귀녀의 눈이 맞은켠으로 쏠린다. 사랑 뒤뜰을 둘러친 것은 야트막한 탱자나무의 울타리다. 울타리 건너편은 대숲이었고 대숲을 등지고 있는 기와집에 안팎 일을 다 맡는 김서방 내외가 살고 있었는데 울타리와 기와집 사이는 채마밭이다. 그 채마밭을 질러서 머슴 구천이가 지나가는 것이었다. 냉담한 귀녀의 눈이 구천이의 옆모습을 따라가다가 눈길을 거두며 실뱀이 꼬리를 치는 것 같은 미미한 웃음을 머금는다. 귀녀는 신발을 신고 치맛자락을 걷으며 안채를 향해 돌아나간다.

 무 배추를 심은 채마밭이 아슴아슴한 저녁 안개에 싸여들어가고 있고, 부스스한 옷매무새의 김서방댁이 부엌을 들락거리며 부산을 떨고 있다. 닭장에 들어갈 때가 되었는데 닭들은 배추잎을 쪼아먹고 있었다.

 땅바닥에 눈을 떨구고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당산 누각 앞에까지 올라간 구천이는 자신의 발부리를 오랫동안 내려다보고 서 있었다. 다시 느릿한 보조로 누각에 올라간 그는 난간을 짚으며 걸터앉는다. 달 뜨기를 기다리는가. 마을엔 아직 불빛이 보이지 않았고 최참판댁 기둥귀에 내걸어놓은 육각등이 뿌윰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얼마 되지 않아 달은 솟을 것이다. 낙엽이 날아내린 별당 연못에, 박이 드러누운 부드러운 초가지붕에, 하얀 가리마 같은 소나무 사이 오솔길에 달이 비칠 것이다. 지상의 삼라만상은 그 청청한 천상의 여인을 환상하고 추적하고 포옹하려 하나 온기를 잃은 석녀(石女), 달은 영원한 외로움이요 어둠의 강을 건너는 검은 명부(冥府)의 길손이다.

 구천이는 눈을 반쯤 감고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다.

 지난 정월 대보름날에는 당산에 달집을 지었었다.

 "워어이이- 달 나왔다아!"

 아이들이 달을 향해 소리치면 강아지도 덩달아서 짖어대었다. 저마다 한 가지씩 소망을 품었을 마을 사람들이 달집 둘레에 모여들면서 불을 질렀었다. 훨훨 타오르는 불길, 아낙들은 손을 모아 수없이 절을 했었다. 불빛을 받은 사내들 얼굴은 짙붉게 번들거렸으며 눈은 숯덩이처럼 짙게 빛났었다. 순박하고 경건한 소망의 기원이 끝났을 때 마을 사람들은 장날에 모여든 장꾼처럼 떠들기를 시작했었다. 사내들은 곰방대를 꺼내들며, 아낙들은 코를 풀고 치맛자락을 걷어 불빛에 윤이 나는 콧등을 닦으며 새삼스럽게 서로 인사를 나누고 친지들의 소식을 물어보고, 씨받은 암소 얘기며 떡이 설어서 애를 먹었다는 얘기며 노친네 수의(壽衣) 걱정이며, 이윽고 달집은 불길 속에 무너지고, 무너진 자리에서 불길마저 사그러지면은 끝없이 어디까지나 펼쳐진 은빛의 장막, 그 장막 속에서 노니는 그림자같이 마을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져 갔던 것이다. 달이 떠오른다.

 강이 굽이쳐 돌아간 산마루에서 달이 얼굴을 내비친다. 까맣게 찢겨진 나뭇잎들의 흔들리는 모양이 뚜렷해지고 밋밋한 나뭇가지는 잿빛, 아니 갈빛을 띠기 시작한다. 꽹과리 징 소리가 먼 곳에서 흐느껴 울고 강가에서 부르는 처녀아이들의 노랫소리는 좀더 가깝게 들려온다.

 달은 산마루에서 떨어져 나왔다. 아직은 붉지만 머지않아 창백해질 것이다. 희번덕이는 섬진강 저켠은 전라도 땅, 이켠은 경상도 땅, 너그럽게 그어진 능선을 확실한 윤곽을 드러낸다.

 난간에 걸터앉아 달 뜨는 광경을 지켜보는 구천이의 눈이 번득하고 빛을 낸다. 달빛이었는지 눈물이었는지 아니면 참담한 소망이었는지 모른다.

1장 서희

 김서방이 떠들어댔다.

 "해마다 애를 믹이는 사람들은 딱 정해져 있다 말이다!"

 "누가 애를 믹이고 싶어서 믹이는 기요."

 "말 마라. 소가 죽었심다. 다리를 뿌라서 일 못했심다. 혼사가 있어 장리빚을 냈심다. 나중에는 무슨 핑계를 댈 기든고?"

 그러나 김서방을 넘보고 있는 상대는 "내가 핑계를 댄다믄 벼락을 맞일 거요. 그런 애맨 소리는 안 하는 기이 좋겄구마."

 볼멘소리로 대꾸했다.

"이래가지고는 못해묵는다 못해묵어. 양새 낀 나무맨치로 어디 사람이 할 짓이가."

 저마다 이러고 저러고 통사정해오는 작인들을 상대하다 보면 유순한 김서방도 짜증이 나는 모양이다.

 며칠 전부터 최참판댁은 안팎이 시끄러웠다. 늘비하게 이어진 고방에는 끊임없이 볏섬이 들어갔다. 한편 읍내로 곡식을 실어내는 바람에 하인들도 지치지만 근력 좋은 마구간의 말과 외양간의 살진 황소도 몸살이 날 지경이었다. 행랑은 행랑대로 먼 곳 가까운 곳에서 모여온 마름과 작인들이 득실득실 판을 치고 있었으며 그들을 위해 큰 가마솥은 쉴새없이 밥을 삶아내야만 했다.

 "여보시오. 내 말 좀 들어보라니께!"

 "들으나마나 뻔하지 머. 축이 난 것만은 틀림이 없인께."

 "아 그러매 하는 말 아니오."

" 만 분 해봐야 그 말이 그 말이지 머."

 "이런 딱할 데가 있나. 돌 하나라도 들어가는가 싶어서 올빼미겉이 눈을 크게 뜨고."

 "크게 뜨믄 소용 있소? 눈이 뵈야 말이지."

 "그래. 그라믄 우리가 거부지기를 쑤셔넣었겄소? 축이 날 리가 없단 말이요!"

 담장 밖에서 다투는데 막걸리 사발이나 들이켠 걸걸한 목소리였다.

 "봉순아 흐흐흐... 흐, 나 여기이 있다아!"

 볏섬을 져나르는 구천의 다리 뒤에 숨어서 살금살금 걸어오던 자그마한 계집아이가 얼굴을 내밀었다. 앙증스럽고 건강해 보이는 아이의 나이는 다섯 살. 장차는 어찌 될지, 현재로서는 최치수의 하나뿐인 혈육이었다. 서희는 어머니인 별당아씨를 닮았다고들 했으며 할머니 모습도 있다 했다. 안존하지 못한 것은 나이 탓이라 하고 기상이 강한 것은 할머니 편의 기질이라 했다.

 서희를 찾아서 두리번거리고 있던 봉순이 건너오려 하는데 서희는 맴돌아 구천이 앞으로달아나며 끼룩끼룩 웃는다.

 "넘어지믄 큰일난다 캤는데, 애기씨!"

 봉순이 울상을 지었으나 날개짓을 배우기 시작한 새새끼처럼 서희는 이리 뛰고 저리 뛰어다니며 좀체 봉순이에게 잡히려 하지 않는다. 유록빛에 꽃 자주신을 두른 조그마한 꽃신은 퍽으나 날렵하다.

 "애기씨!"

 일꾼들 발에 걸려 넘어지지나 않을까, 이 광경을 마님한테 들키면 큰일나겠다 하며 조마조마하는 봉순이를 곯려주려고 서희는 다시 구천이 다리를 방패삼아 뒤에 숨는다.

 "애기씨, 이러심 안 됩니다."

 이번에는 걸음을 멈춘 구천이가 말했다.

 "넘어지지 않아!"

  깡충 뛰며 구천이의 땀에 젖은 잠방이 뒷자락을 심술궂게 잡아당긴다.

  "이러심 안 됩니다."

  나지막한 소리로 타이른 구천이는 볏섬을 진 채 몸을 돌리며 봉순이에게

"애기씨 뫼시고 별당,"

 한참 만에 다시

 "별당에 가서 놀아라."

하고 말을 끝맺었다. 서희는 구천이의 잠방이를 잡고 늘어지며 오도가도 못하게 방해를 한다.

 "애기씨, 가서 사깜(소꿉) 사입시다."

 꾀듯이 봉순이 손을 잡는데 뿌리치고

 "나 여기서 놀 테야."

 "일질에 넘어지십니다."

 구천이의 목소리는 역시 나직했다.

 "싫어. 안 갈 테야!"

 "마님께서 보시면 꾸중하시지요."

 "나 할머니 무섭지 않다!"

 잠방이자락을 겨우 놓아준 서희는 구천이를 노려보면서 제 주장을 뚜렷이 나타내었다. 그러나 할머니가 무섭긴 무서웠던 모양으로

 "구천이는 바보 덩신! 중놈!"

 욕을 하며 달아난다. 봉순이 그 뒤를 쫓아 뛰어간다. 짧은 저고리 도련 밑에 늘어진 빨강댕기가 찰랑찰랑 그네를 뛰더니, 아이들의 모습은 사라졌다.

 볏섬을 짊어진 채 아이들 뒷모습을 우두커니 바라보던 구천이는 고방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으윽!"

 힘주는 소리와 함께 볏섬은 고방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장골이 나락 한 섬을 지고 맥을 못 추니 우찌 된 일고."

 들여다주는 볏섬을 돌이와 함께 맞잡아서 고방에 쌓아올리던 삼수는 갈고리를 볏섬에 걸며 말했다.

 " 땀 좀 닦아라."

 이번에는 돌이가 딱해하며 말한다. 구천이는 지푸라기가 엉겨붙은 잠방이 소매를 끌어당겨 땀을 닦는다. 얼굴빛이 푸르고 눈은 움푹 패어 있었다.

 갈고리를 걸어놓기는 했으나 돌이는 땀 닦는 구천이를 멍청히 쳐다보고만 있었으므로 삼수는 코를 힝 푼다. 콧물 묻은 손을 옷에 문지르며

"니 그라다가 몸 베릴라?"

 땀을 닦다 말고 구천이는 삼수의 입매를 쳐다본다. 삼수는 다시

 "무슨 짓을 하는가 우리도 좀 알고 싶구마."

 멀리서 무슨 소리가 나는구나 하듯 서 있던 구천이의 눈이 다음 순간 거칠게 빛났다.

 삼수는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돌이도 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영치기!"

 볏섬을 들어올린다. 그러고는 날씨 이야기며 부춘서 벼 싣고온 박서방의 혹이 금년에는 더 커졌다는 둥 하며 삼수보다 돌이가 무관심한 척하려고 애를 쓴다. 삼수는 곁눈질로 구천이의 기색을 살피면서

 "어서 가서 나락 져오라고. 아무도 해를 잡아 매놓지 안 했인께."

했다. 등받이로 쓰는 마대를 고방 바닥에서 주워 어깨 걸치고 구천이는 긴 팔을 늘어뜨리며 돌아서 나간다.

 "싫대두, 싫어! 아버지가 싫단 말야."

 서희가 발을 동동 구르고, 침모 봉순어미는 옷고름을 여며주며 달래고 있다. 구천이는 눈을 내리깔며 그들 옆을 지나간다.

 "마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으리께 문안드리라고."

 중년으로 접어든 봉순네는 살빛이 희고 좀 비대한 편이었는데 서희는 봉순네 치맛자락을 잡으며

 "두만네 집에 강아지 보러 갈 테야."

 "마님께서 아시믄 큰일나지요. 꾸중하십니다. 봉순아, 어서 애기씨 뫼시고 사랑에 가거라."

 서희 등을 도닥거리며 봉순네는 딸에게 이른다.

 "아버진 싫다는데두, 고흠! 고흠! 하고."

 목을 뽑고 기침하는 치수의 시늉까지 낸다. 봉순네는 웃음을 참는다.

 "큰일날 소리, 봉순아, 어서."

 "애기씨, 가입시다."

 봉순이도 싫은지 부스스 말했다.

 "그라믄 사랑마당에까지 지가 데리다 디리지요."

 봉순네는 병아리를 몰 듯 뒤에서 아이들을 몰아낸다. 서희는 민적민적하면서도 가기는 간다.

 "이제 가시지요?"

 고개를 끄덕이고 봉순네를 올려다보는 서희 눈데 겁이 잔뜩 실린다.

 사랑의 앞뜰에는 햇빛이 화사하게 비치고 있었다. 돌담 용마루 높이만큼 키를 지닌 옥매화, 매초롬한 회색가지를 뻗은 목련, 삼화에 석류나무, 치자나무는 마치 봄날의 햇빛을 받아 노곤한 것처럼 보였으나 이미 순환은 멈추어졌을 것이며 메말라버린 나뭇잎도 얼마 남지 않았다. 잎을 추려버린 파초 역시 누릿누릿 시들고 있는 것 같았다.

 긴장하여 땀이 나는 손을 잡고 마주보고만 있던 아이들은 결심을 하고 치수가 기거하는 방 앞에까지 간다. 목소리를 가다듬은 봉순이

 "나으리마님. 애기씨께서 문안오셨습니다. 마님께서 문안드리라 하시어 오셨습니다."

몇 번이나 입 속으로 굴려보았던지 줄줄 외듯 나왔다. 방안에서 밭은기침 소리가 났다. 기침이 멎은 뒤,

 "들어오너라."

 음산하게 울리었다.

신돌 위에 작은 신발을 나란히 벗어놓고 서희는 마루로 올라간다. 서희의 얼굴은 해쓱해져 있었다. 봉순이 열어주는 방문에서 서희가 방안으로 들어갔을 때 방금 일어나 마주했는지 치수는 서안 앞에 앉아 있었다. 아랫목에 깔아놓은 이부자리는 반쯤 걷혀져 있었으며 벼룻집의 벼루랑 연적, 붓, 두루마리에 먼지가 뿌옇게 앉아 있었다. 문갑 위의 상감청자 향로와 아무렇게나 쌓아 올려 놓은 서책 위에도 먼지는 뿌옇게 앉아 있었다.

"바깥 날씨가 차냐?"

 길게 찢어진 눈이 서희를 응시하며 물었다. 서희는 그 말이 귀에 닿지도 않았던 것처럼 붉은 치마를 활짝 펴면서 나붓이 절을 한다.

 "요즘에는 아버님 병환에 차도가 있으신지 문안드리옵니다."

 봉순이가 그러했던 것처럼 목청을 가다듬고 외는 투의 억양 없는 소리를 질렀다.

 "괜찮다. 서희도 밥 잘 먹고 감기는 안 들었느냐?"

 갈기갈기 갈라진 여러 개의 쇠가 서로 부딪칠 때 나는 것 같은 목소리는 여전히 음산했다.   그는 서희의 공포심을 충분히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그것을 풀어주려는 노력이 없는 싸늘한고 비정한 눈이 서희를 응시하고 있는 것이다. 서희는 아버지의 눈을 피하기만 하면 당장에 천둥이 치고 벼락이 떨어질 것처럼 애처롭게 그를 마주본 채 고개를 저었다. 치수는 웃었다. 그 웃음은 도리어 서희의 마음을 얼어붙게 했다. 서희로부터 시선을 돌린 치수는 서안 위에 펼쳐놓은 책의 갈피를 넘긴다. 허약한 체질에 비하면 뼈마디는 굵은 편이었다. 그러나 가엾을 만큼 여위고 창백한 그의 손이 책갈피를 누르면서 눈은 글자를 더듬어 내려간다. 손뿐인가, 뜰 아래 물기 잃은 목련의 앙상한 가지처럼, 그러나 동정을 받을 수 있는 비참한 느낌이기보다는 도리어 상대에게 견딜 수 없는, 숨 막혀서 견딜 수 없이 결국은 공포심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강한 분위기를 그는 내어뿜고 있었다. 어떤 일에도 감동되지 않을 눈 빛, 철저하게 스스로를 거부하는 눈빛, 눈빛에서만 그랬던 것이 아니다. 뼈만 남은 몸 전체가 거부로써 남을 학대하는 분위기의 응결이었다.

 일단 방에 들어온 뒤에는 나가도 좋다는 말이 떨어지지 않는 이상 서희는 일어설 수 없다.  숨소리를 죽이며, 그래서 가냘픈 가슴이 더 뛰고 양 어깨로 숨을 쉴 수밖에 없었는데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은 어린것에게 얼마나 큰 고통인가.

 이따금 책장 넘기는 소리가 났다.

 "길상아!"

 별안간 귀청을 찢는 것 같은 고함에 서희는 용수철같이 앉은자리에서 튀었다.

 "길상아!"

 "예에!"

 대답과 함께 급히 뛰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뜰 아래서

 "나으리마님 부르셨습니까."

 앳된 소년의 목소리였다.

 "방이 왜 이리 차냐!"

 "곧 불을 지피겠습니다."

 "내가 지금, 방이 왜 이리 차냐고 묻지 않았느냐!"

 푸른 정맥이 이마빼기에서 부풀어올랐다. 서희의 얼굴이 질린다.

 "예, 지금 곧, 불 지피겠습니다."

 "이놈! 방이 왜 이리 차냐고 물었겠다! 고얀 놈!"

 "잘못했습니다. 나으리마님."

 소년은 겁을 먹은 소리를 냈으나 매양 당하기 때문인지 길들은 사냥개처럼 뒤쪽으로 달려가서 장작 한아름을 안고 뛰어온다.

"으흐 컥!"

 신경질은 심한 기침을 유발했다. 치수는 수건을 꺼내어 입을 막았으나 기침은 멎지 않았다. 눈이 활짝 벌어지면서 붉은 눈알이 불거져 나온다.

 기침은 잠시의 틈도 용납치 않고 그에게 달겨든다. 입을 막고 상체를 흔든다.

 고독한 모습이었다.

 "나, 나, 나가거라."

질식하는가 싶더니 기침은 멎고 가래가 끓어 분간하기 어려운 목소리로 간신히 치수는 말했다.

 방문을 열고 마루에 나왔을 때 서희는 토할 것처럼 헛구역질을 했다.

 마루에서 기다리고 있던 봉순이는

 "애기씨."

 감싸듯이 서희를 안았다. 헛구역질은 딸꾹질로 변했다.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돌았다.

 "애기씨."

 치마를 걷어서 봉순이는 서희의 눈물을 닦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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