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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가을이 가기 전에

2009.09.14 16:25

유석희*72 Views:7693

 

가을이 가기 전에                     
                                     


아침저녁으로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이 맘쯤이면.
 
이 만희감독의 영화 “晩秋”가 보고 싶다.
특별휴가로 교도소를 나 온 문 정숙과 경찰에 쫓기는 위조지폐 제조범 신 성일.
짧은 만남 후 1년을 기약하고 출옥한 문 정숙은 약속대로
다시 처음 만났던 창경원을 찾았으나 신 성일은 이미 잡혀 나올 수 없었고,
벤치에 앉아 하염없이 기다리는 여인 위에 늦가을의 낙엽이 흩날린다.
그 시절 같이 본 소위 누벨바그 영화인 “히로시마, 내 사랑”
폐허 위에서 사랑을 속삭이는 장면들. 둘 다 모두 대사가 크게 필요하지 않은 영화다.

바깥 가을의 기운 빠진 햇살이 넘어가는 오후에는 턴테이블에 LP판을 걸고
오래된 김 민기의 白版이나, 유진 올만디가 지휘하는 필라델피아 교향악단 연주의
챠이콥스키의 “悲愴”, 아니면 감미로운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 E단조를,
내가 처음으로 듣고 감동하였던 루찌에로 리찌의 연주로 듣고 싶다.
한번씩 스피커에서 덜커덕거리는 소리도 전혀 귀에 거슬리지 않구나.
밖에는 바람 불어도 나무로 때는 난로에는 “탁 탁”하며 불꽃이 타들어가고. 

커피를 볶아 손으로 돌려 갈고, 뜨거운 물을 부어내린 커피를 마시고 싶다.
한잔 또 한잔. 시간이 걸려도, 또 시간이 걸리면 어떠랴!
논물을 빼면서 받쳐 놓은 통발에 잡힌 미꾸라지로 배추 거친 겉잎을 넣고,
푹 고아서 산초가루 듬뿍 쳐 먹는 鯫魚湯이야 말로 글자 그대로 가을의 맛이 아니던가?
초가지붕위에서 익은 누렁호박으로 만든 범벅도 먹고 싶고,
추수 끝난 논에서 캐어 낸 고동을 넣고 끓인 맛이 센 강된장도 어떠한가.
여기에 農酒 한잔을 곁들이면 또 다른 호사가 아니겠는가.


이런 계절 山行에는 사람 진 빠지게 하는 雪嶽山의 恐龍稜線보다는
힘들지 않게 좌우의 가을 풍경을 보며 智異山의 주능선이 산을 타기에 좋다.
아니면 이른 아침 서리 내린 과수원 사이 길을 고물 자전거를 타고
나무에 달린 붉은 사과 구경하며 쉬엄쉬엄 밟아 가자.
살아가는 길에 바쁜 일이 그 무엇이 있으랴!


 편리하고 빠른 전자통신이나 전화보다도 오래된 萬年筆로 가을이 가기 전에
異國에 있는 친구에게 비록 못난 글씨나마 情이 느껴지는 편지를 써 볼까?
가는 데 시간이 걸려도, 또 시간이 걸리면 어떠랴!
“부모님 殿上書”로 시작되는, 이 세상에서 받을 수 없는 問安편지는.


문득 고개 들어 하늘을 바라다보니 종달새 노래하던 봄의 그 하늘에는
기러기 떼 일렬종대로 남쪽을 찾아 나르고 있구나.


 악을 쓰며 늘 바쁘게 살아가는 세상에서 이번 가을은,
차라리 세월을 뒤따라가며 천천히, 천천히 느리게 살고 싶어라.


 2009 년 9월, 서울에서 - 유석희





내마음갈곳을 잃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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