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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무의촌 시절의 회상

2009.09.19 12:21

유석희*72 Views:7019

무의촌 시절의 회상

우리가 전문의 자격 시험을 볼 때(1970년 대)는 전공의 과정 중 6개월간 무의촌 파견 근무를 하여야 했었다.
당시 74년은 살벌한 해, 시골 지서의 공개 수배 사진에 "이 철, 강 구철, 유 인태"가 붙어 있었고, 현상금이 월 수당 5만원인 나의 봉급에 비하면 천양지차가 나는 100만원이었다.
                          
내가 전남 광산군 본양면이란 무의촌에 부임해간 날은 봄기운이 막 어깨를 펴기 시작한 4월 어느 날 이었다. 그러나 봄답지 않게 스산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마구 흩트려 까치집을 만들고 하늘은 금방이라도 눈발을 뿌릴 것처럼 낮게 내려와 있었다.

나와 신혼 3개월의 아내만을 덩그렇게 내동댕이친 채 떠나버린 트럭을 망연히 바라보다가
흙먼지가 시야에서 한 껍질 벗겨지고 나니 반년 남짓 우리들의 생활터전이 될 마을 모습이 서서히 눈앞에 다가와 섰다.
만만해 보이지 않는 산세가 낙타 등같이 몇 굽이 휘어 내려 마을 뒤쪽으로 둘러쳐 있고,
무릎 높이만큼 기세 좋게 자라난 보리밭이 마을 앞으로 부챗살처럼 펼쳐져 마을은 흡사 초록 융단에 놓인 조가비들 같다.
그런가하면 면의 외곽을 영산강의 지류가 포옹하듯이 감싸고 흘러 영문 모르는 나그네에겐 가히 수려한 풍광일 수밖에.
그러나 이곳 촌로들의 말씀에 따르면 옛날엔 유배지였다고 한다.
작은 홍수에도 강물이 범람하여 육지의 고도가 된다고 한다.  

진료소는 반년 남짓 주인 없이 비워두어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다.
거미줄이 엉기성기 어지럽게 설케 있고 바닥과 책상 등의 집기에는 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었다. 병원 특유의 소독약 냄새 대신 퀴퀴한 곰팡내가 기분 나쁘게 후각을 자극한다.
피난보따리 같은 단출한 세간을 대충 정리하고 창고에 쳐 박아 두었던 “농협진료소”현판을 깨끗이 닦아 현관에 걸고 나니 훨씬 기분이 새로워 졌다. 청소하느라 뒤집어 쓴 먼지로 눈만 빠끔하게 빛나는 깜둥이 얼굴들을 서로 쳐다보며 우리는 즐거워했다.

다음날 본양면의 최연소기관장이 된 나는 면장님을 앞세워 인사를 다니는데 웬 기관장들이 그리 많은지.
온 마을 사람들이 다 한자리씩 하는 것 같았다. 문을 연지 며칠이 지나도록 환자가 없어 흡사 내가 적막강산에 유배되어 온 심정이었다.
온종일 진료소 창 밖을 통해 보고 있어도 사람 구경하기란 그리 쉬운 노릇이 아니었다.
서너 마리의 동네 개들이 이쪽저쪽으로 우르르 몰려다니며 싸우고 짖고 한바탕하고 나면
또 오리 떼들이 줄지어 지나가고 마치 서부영화에 등장하는 한적한 마을 모습을 연상시킨다.

신혼 3개월 만에 멋모르고 따라온 나의 아내는 살림살이가 아직 손에 익지 않아 애들 소꿉장난하듯 꾸려 나가며 그래도 남편 세끼 더운 밥 해 먹이느라 요리 책을 아예 부엌에 펼쳐 놓고 식단을 짜느라 부산스럽다.
사소한 일로 결혼 후 처음 다투었던 날. 모처럼 찾아온 환자를 진료하고 들어가니 아내의 모습이 보이질 않는다.
손바닥처럼 빤한 동네를 헤매어 다니다 햇살 바른 뒷동산에서 아내를 찾았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지천으로 돋아난 클로버들을 뒤지며 행운의 네잎 클로버를 찾았다.
지금도 우리의 책갈피 속에는 그때 딴 일곱 개의 네잎 클로버가 노랗게 퇴색된 체 우리의 추억을 새롭게 하여 준다.

시계바늘처럼 바쁘게만 돌아다닌 1년 차 내과 전공의생활-자명종 울리는 소리에 허겁지겁 깨어나 아침 굶고 출근하기 십상이던 때, 입원환자 보랴,
아침에는 회의, 병실회진, 오후에는 집담회로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바쁘던 생활을 떠나 기상시간이 곧 출근시간이요, 해가 지면 퇴근이니 이 얼마나 자유스러운가.

그곳의 아침태양은 도회지에서 늘 상 보아왔던 빛바랜 태양이 아니었다.
눈이 시리도록 현란한 색채로 용트림하듯이 그렇게 태양은 힘차게 솟아올랐고,
저녁에는 긴 그림자를 끌며 고개를 넘는 낙조의 황홀함을. 밤이면 보름달의 부드러운 흰빛과 
칠흑 같은 그믐밤에는 수많은 별이 빛난다.  이런 밤이면 호젓한 신작로를 따라 거닐면서 우리는 별보다 맑은 가슴을 열고, 그리고 별보다 영롱한 우리의 미래를 이야기하였다.
멀리 꼬리를 끌며 사라지는 별똥별에 서로의 행복을 빌어도 보고 여울목에서 부나비처럼 떠다니는 반딧불이를 잡아  밤새 자그마한 우리들의 보금자리를 밝혀 주기도 하였다.
산책 뒤에 마시는 한잔의 차에 기분 좋게 퍼져오는 피곤을 씻으며 우리는 행복을 맛보았다.

그때 우리는 자주 산책을 나갔었다. 마을 뒤 느티나무를 돌아 달구지 길을 한 시간 남짓 따라 걸으면 산 그림자 잔잔히 비치는 호수가 나타나고 수양버들 심어진 둑을 따라 거닐면 한폭 동양화같이 저편 골짜기에 자리 잡은 마을에 저녁 짓는 연기 피어오르고.

요즈음도 널찍한 호박잎으로 쌈을 싸먹을 때마다 무의촌 시절이 절로 생각난다.
진료소 뒤쪽 공터에 심어 두었던 호박 두어 포기가 여름 내내 우리들의 식탁을 풍요하게 만들어 주었다.
여린 잎은 밥 위에 쪄 쌈으로 먹고, 봉우리 진 수꽃은 된장 뚝배기에 넣어 맛을 돋우고,
애호박은 천렵 나갔던 이웃이 나누어 준 물고기에 쑹덩쑹덩 썰어 넣어 매운탕을 끓이면 그 맛이야 천하별미이었다.
게다가 걸쭉한 막걸리 한 사발에 안주 삼아 걸치면 주선 이태백을 누가 부러워하랴!
원래 술맛이야 물맛이 좋아야 제격이 나는 법. 시원한 샘물을 길어 올려 빚은 막걸리는 도회지의 막걸리 맛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하물며 양조장 젊은 주인과 터놓고 친하게 지내 진짜로만 들이켰으니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술맛이다.

9월말 우리들의 6개월간 무의촌생활은 끝이 났다.
몇 가지 더 불은 세간을 차에 싣고 떠나려하니 지서 이순경부인은 마을 어귀까지 따라와 눈시울을 붉히며 전송해주었고, 진료소 앞 주막집 김씨는 박카스를 한 박스나 안겨준다.
아내가 한 학기 동안 미술과 가정 선생 노릇을 한 학생들의 전송을 뒤로하여 떠나올 때는 길가엔 코스모스가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그리고 벌써 35년이나 흘렀다.
어둠 속에서 보석이 빛나듯이 우리들의 생활에 여유가 그리워질 때면
그때의 무의촌 시절이 은연중에 되살아나 행복이 어떠한 것인지를 일깨워준다.

몇 년 전 의협신문의 청탁을 받고 쓴 글이 컴퓨터의 하드에 남아 있어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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