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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Essay] 막걸리 - 제 1장

2010.01.27 18:06

오세윤*65 Views:7651




         

                                    막걸리 - 제 1장

                                                                     오 세 윤

         아내의 술 취향이 백팔십도 달라졌다. 내 입엔 포도주가 맞아, 하며 십여 년이 넘게 시종여일 와인만을 고집하던 아내가 홀연 하루아침에 막걸리 애호자가 돼버렸다. 금년 들어 들불처럼 번지는 막걸리 붐이 아내에게도 어물 슬쩍 옮겨 붙은 모양이었다.

         원래 아내는 술을 못했다. 무더운 여름날, 주말산행을 마치고 내려와 맥주를 찾으면 지체 없이 대령하기는 하지만 그 쓴 걸 무슨 맛으로 마시냐며 곁에 앉으려들지도 않았다. 한잔만 하라고, 혼자 무슨 재미로 마시냐며 대작이라도 해야 할게 아니냐고 우격으로 억지를 부릴 참이면 마지못해 냉장고에서 과실주를 꺼내들고 와 겨우 한잔 홀짝거리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던 아내가 중년 들어 대학동창모임이다, 아파트 엄마들 모임이다 하며 하루가 멀다 하고 뻔질나게 밖으로 나돌더니 어느샌가 사람이 달라져 소주도 제법 하는 호주숙녀(好酒淑女)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여고동창회 서무 일을 맡아 하면서부터는 은연중 격상하여 이 저런 술 다 마다하고 오로지 와인만을 마셨다. 하긴 와인에 빠지기 전 잠시는 복분자술을 즐긴 때도 있었지만 심장병 예방에도 효과가 있고 장수에도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부터는 더더욱 와인만을 편애했다. 

         명절이나 식구들 생일 때는 물론이요 별것도 아닌 조그만 일에까지 의미를 붙여 아내는 와인 판(?)을 벌렸다. 베란다 창밖으로 초저녁비가 추적추적 가슴을 적시며 내린다거나, 앞 개울가 수양버들이 봄바람에 는실난실 춤추듯 한들거린다거나, 모처럼 곤줄박이가 산수유나무에 날아와 빨간 열매를 방정맞게 쫀다거나, 뭐 그런 하찮은 일 따위로 아내는 냉장고에서 와인 병을 꺼내 들고 와 나를 거실로 호들갑스럽게 불러내 앉히고는 했다.

         그냥 마시는 것도 아니었다. 앞산 마루로 해가 뉘엿이 넘어갈 때면 공연히 슬픈 감정이 든다며 그런 땐 가넷빛이 도는 레스 꽁플리스 드 뭐라나 하는 레드와인이 마음을 포근하게 달래준다는 둥, 달무리 진 밤 촉수 낮은 백열등 불빛 아래에선 여운 은밀하게 과일 맛이 나는 진한 루비색의 까버넷 프랑이 기분을 한결 아늑하게 풀어준다는 둥 제법 로맨틱하게 사설을 늘어놓으며 분위기를 잡고는 했다. 

         그뿐이면 그래도 들어줌직 하겠는데 이에 더하여 “와인은 신이 인간에게 준 가장 고귀한 선물”이라고 플라톤이 말했다는 둥, “와인 없는 식탁은 꽃이 없는 봄”이라고 서구인들은 말한다는 둥 하며 그럴듯하게 유식을 떨 때는 이 사람이 진짜 배달민족의 후예가 맞나싶게 밸이 편치 않게 뒤틀려지고는 했다.

         그런 아내에게 돌연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지난 시월, 여고졸업 50주년 기념여행으로 2박3일 증도를 다녀오더니 하루아침에 막걸리 마니아로 어마지두 돌변하고 말았다. 사연도 간단했다. 첫날을 몇몇이 가져온 와인으로 기분들을 낸 일행이 다음날 저녁엔 그 중 두엇의 발의로 막걸리파티를 열었단다.

         오늘이 자기가 막걸리를 사랑하게 된지 팔십팔일 째 되는 날이라며(명백히 고백컨대 세상에 하고많은 기념할 날 중에 이런 날이 생길 줄 난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다.) TV화면 속 창극 ‘춘향’ 공연 녹화방영에 한창 넋을 빼앗기고 앉아있는 내 앞에 막걸리 술상을 차려 놓으며 그날의 감흥을 녹음기 틀듯 재차 풀어놓는다.

         “글쎄 난 막걸리가 그렇게 내 입맛에 맞을 줄은 정말 몰랐어요. 첫잔부터 벌써 입에 착 달라붙어 혀에 달착지근 감기더라고요. 빛깔도 무던해 까탈스럽지 않고-. 와인은 어떨 때보면 요염하고 매혹적이긴 해도 왠지 도도하고 차갑다는 느낌을 주지 않아요? 그에 비하면 막걸리는 꾸미는 것도 없이 소탈해서 더 정이 가는, 정말 우리네 술이란 생각이 들어요. 탄산이 많이 섞여서 그런지 시큼한 맛도 거의 안 나고요. 예전 것과는 사뭇 달라요. 안 그래요?” 

         동의를 구하는 아내의 시선을 관자놀이로 받으며 나는 여전히 TV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화면에서는 바야흐로 사또의 분부를 받들어 한양을 향해 떠나는 이도령을 남원고을 밖 오리정(五里亭)에서 기다렸다 만난 춘향이 한바탕의 넋두리를 애간장 미어져 내리게 소리하고, 이어 월매가 건네주는 한소주(寒燒酒)를 이별주로 따르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순간, 갑자기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면서 화면에 옛날의 어느 한 장면이 오버랩 되어 어른어른 떠올랐다. 주포면의 ‘월매 주점’과 치마폭에 시큼한 막걸리냄새를 은은하게 묻히고 서성이던 주모가 오리정을 배경으로 현실처럼 재현됐다. 

         월매란 별명의 주모와 사이에 있었던 일, 하긴 자신도 확신 못하는 해프닝이라 고백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고 스스로를 변명하며 비밀로 지켜오고는 있지만 누가 알랴. 우연한 기회에 다른 루트를 통해 비밀이 아내에게 알려지든가, 혹 취하여 비몽사몽간에 발설하는 실수가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누가 감히 장담하랴. 세상엔 밝혀지지 않는 비밀이 거의 없다고들 하지 않던가. 슬그머니 속이 켕겼다. 혹 알게 되면 아내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무슨 일이 벌어질까. 아득히 지나간 일이라고 그냥 흘려버리고 말까. 아니면 보따리를 싸서 친정으로 가버리고 말까. 마침 기회도 좋으니 이 자리에서 고백을 하고 용서를 빌어? 

         아니다.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이다. 암, 아니고말고. 증거불충분의 확실치도 않은 범죄는 고백하는 게 아니지. 공연히 긁어 부스럼이 될 짓을 왜 한담. 바보같이-. 가슴 저 밑바닥에서 그 옛날의 내가 회회 손사래를 친다.

         14살 때, 빈속에 멋모르고 얻어 마신 막걸리 두 사발에 흠뻑 취하여 대낮 신작로를 비틀거리며 활보하고, 이틀 동안이나 인사불성으로 토하고 난리를 친 기억 때문에 막걸리를 멀리한다고만 알고 있는 아내. 하늘이 두 쪽 난다해도 결코 발설 못할 나의 이 막걸리에 얽힌 미스터리를 깊은 심호흡으로 뱃속 저 깊숙한 곳에 가라앉혀놓고 나서야 나는 평시의 얼굴로 아내를 돌아다봤다.

         보일 듯 말듯 발그레 뺨이 물든 아내의 맥맥한 눈길이 뜨끔하게 내 속 깊은 곳을 찔렀다. 갑자기 추워졌다. 얼른 막걸릿잔을 들어 올려 얼굴을 가리듯 한껏 기울여 벌컥벌컥 단숨에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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