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실둥실 떠오르니, 마치 세상을 떠나 홀로 서서,
날개가 돋아 신선이 되어 오르는 듯 하도다.
이에 술을 마시고 매우 즐거워서,
뱃전을 두드리며 노래하였다.
노래에 가로되: [계수나무 노여;
목란의 상앗대로다.
물속의 밝은 달을 때림이여;
흐르는 달빛이 물결을 거스르네.
멀고도 아득하네; 나의 정회여.
미인을 바라봄이여; 하늘 저 편에 있도다.]
객중에 통소를 부는 사람이 있어서,
노래에 따라 가락을 맞추니
그 소리는 구슬퍼서 원망하는 듯,
그리워하는 듯, 흐느끼는 듯, 호소하는 듯 하고,
남은 소리는 가늘고 길어,
실같이 끊어지지 않았다.
깊은 골짜기에서 물에 잠긴 교룡을 춤추게 하고,
외로운 배의 과부를 흐느껴 울게 하도다.
소자가 추연해져서 옷깃을 바로하고,
단정히 앉아 객에게 묻기를 "어찌하여 이러한가?"
객이 가로대, "달이 밝고 별이 드물어,
까막까치가 남으로 날도다."하니 조맹덕의 시가 아닌가?
서쪽으로 하구를 바라보고,
동쪽으로 무창을 바라보니,
산천은 서로 뒤얽히고,
수목은 울창하여,
이는 조맹덕이
주랑으로부터 곤경을 겪음이 아닌가?
방금 형주를 파하고
강릉으로 내려와
순류를 타고 동으로 가니,
배는 꼬리 물어 천리에 이르며 정기는 하늘을 가리고,
강에 임하여 술잔을 기울이며,
창을 빗겨들고 시를 지으니
진실로 일세의 영웅이었건만,
지금 어디 있는가?
하물며 나와 그대는
강가 위에서 물고기나 잡고 나무나 하며,
물고기, 두꺼비와 짝하고
고라니, 사슴과 벗하네.
잎 파리 같은 조각배를 타고,
바가지 술을 서로 권하네.
천지에 떠다니는 하루살이요,
아득하고 큰 바다위의 좁쌀 한톨 신세로다.
나의 삶의 잠시임을 슬퍼하고,
장강의 무궁함을 부러워하며,
나는 신선과 더불어 노닐고,
밝은 달을 껴안고 오래 하고자 하나,
(이를) 신속히 얻을 수 없음을 알기에,
여음을 슬픈 바람에 붙이네."
소자가 가로되:
[그대는 또한 무릇 물과 더불어 달을 아는가?
가는 것은 이와 같아서
일찍이 갔음이 없도다.
'차다', '비다'하는 것은 저와 같아서,
마침내 사라지고 길어짐이 아니로다.
무릇 장차 그 변하는 것으로부터 본다면,
천지도 일찍이 능히 한 순간으로써 다하지 못하고
그 변하지 않은 다하는
관점으로 본다면,
물체와 나는 모두 다함이 없으니,
또한 그 무엇을 부러워 할건가?
또한 무릇 천지지간에
물체는 각각 주인이 있도다.
진실로 내가 가진 것이 아니면,
비록 털끝이라도 취하면 아니 되도다.
오로지 강 위의 맑은 바람과
더불어 산간의 밝은 달은,
귀로 얻으면 소리요,
눈으로 만나면 색이로다.
갖는 것을 금하지 아니하고,
써도 다 하지 않도다.
이는 조물주의 무진장이요,
나와 그대가 함께 즐겁게 받을 수 있도다.]
객이 기쁘게 웃으며
잔을 씻어 다시 술을 붓고,
안주가 이미 다하니,
잔과 쟁반이 낭자하게 흩어져 있었다.
서로가 서로를 베개 삼아 배 속에 누우니,
동방이 이미 밝아 옴을 알지 못했도다.
賞釋(상석)
본문은 옛 서정적 수법에 기탁함으로써,산수를 대면하고, 역사적 인생감촉을 아득히 생각한다. 전문은 가히 오단으로 나누어진다.
수단은 작자가 객과 더불어 적벽에서 즐거이 놀고, 허공을 타고 바람을 다스리어, 표연히 세상을 떠난 감과, 아울러 강, 바람, 물, 달을 점찍어 들어내어 아래의 노래와 시가 의론과 화하게 되도록, 미리 숨긴 붓을 아래에 내려놓았다.
이단에서 술 마시고 즐거움이 대단하여 뱃전을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니,객은 통소로 서로 화하여 그 소리가 흐느껴 우는 듯하여,극히 원망하고, 그리워하고, 울음을 삼키며 호소하는 듯 함을 감염시키는 힘이 있었다.
삼단에서 주객 문답을 빌리어, 객은 옛날을 조상하고, 오늘을 슬퍼하며,인생의 지극히 짧음과 지극히 작음을 슬퍼하고 개탄한다.
사단은 주제가 있는 바를 위함이니, 작자는 물과 달을 빌려서 비유를 하니,常(항상 있는 것)과 變(변하는 것)의 이치로써 객에게답하니,태도는 낙관과 활달이며, 전단과 같이 대비를 형성하여,기세는 전단에 비하여 장활하였다.
말단은 객으로 하여금 즐겁게 매듭을 짓고, 작자의 인생관을 긍정하며 끝넸다.
鑑賞(감상)
글로써 부(賦)를 만든 체제형식.
전문(全文)이 서정만 논하지 않았고, 돌이켜 시종 강상 풍광(江上風光)과 적벽고사(赤壁故事)를 떠나지 않고 의론하였다.
이리하여 정서, 경관 그리고 이론의 융합을 하고, 시의 정감과 그림속의 뜻을 충만하고 인생의 현묘(玄妙)한 이치와 그 예술 경계를 포섭하였다.
본문은 전통적 부(賦) 체제(體制)의 시적(詩的) 특질과 더불어 정운(情韻)을 보존하고, 동시에 산문적 수법을 흡수하여서, 부(賦)의 형식을 타파하고 성률(聲律) 의 대우(偶等) 방면을 속박하여,거듭 산문적 형식이며 문장으로 하여금 시가의 정신적 운치(韻致)를 구비하고 또한 산문적 관통이념(透闢理念)을 구비했다.
전편(全篇)의 문정(文情)의 우울과 좌절로 하여금 엄청난 양의 샘물이 용출함과 같았다. 대우(偶等)를 강구함이 동등하지 않아서 상대를 자유롭게하니, 시작에 일단 “임슬지추, 칠월기망, 소자여객범주어 적벽지하”라, 이는 오로지 산문의 구이고, 들쭉날쭉하고 흩어져 있는 속에 정돈된 성취를 갖는다.
이하 곧장 끝으로 내려 와서, 거의 모두 압운(押韻) 즉 규측적 운률이고, 오로지 운을 바꿈이 경쾌하여, 바꿀 때 왕왕 문장의 뜻이 일단락을 하고, 이에 본문으로 하여금 특별히 읊으도록 하니, 아울러 성운의 아름다움이 극히 풍부하고, 운문의 장처(韻文的長處)를 체현하였다,
형상이 특별히 아름답고 비유를 취한 언어의 특색
통소소리의 그윽하고 목메이며 애닯고 원망하듯: “그 소리는 울쩍이는 듯, 원망하며 그리워하는 듯, 느껴울며 호소하는 듯, 남은 음(音)은 가냘퍼 실처럼 끊이지 않도다.” 그윽한 골짜기의 잠긴 교룡(潛蛟潛蛟)의 춤이며, 외로운 배안에 과부(嫠婦)의 울음이로다.
여섯개의 비유를 잇달아 사용하니, 통소소리의 슬픔을 장식하고, 쉽지 않게 성음(聲音)을 잡아 독자의 시청각에 호소하여 추출(抽出)하니, 이는 구체적으로 그리어 그 효과가 극히 아름답다.
註釋(주석)
明月之詩(명월지시): 詩經.陳風.月出 (시경. 진풍. 월출)에 나온다.
달이 떠서 밝음이여, 아름다운 사람과 같이 함이여.아름다운 모습을 열림이여, 나의 마음이 근심스럽도다.
徘徊於斗牛之間(배회어두우지간): 서서히斗宿(두숙)과牛宿: (우숙) 사이로이동하다. 여기에 나온 두우란 二十八宿 (이삽팔숙)중에 속한 두 별을 의미한다.
縱一葦之所如(종일위지소여): 갈대 잎의 모양의 작은 배에 맡기어 자유로 표류하다.
馮虛御風(빙허어풍): 공중에 올라 바람을 타고 가다.
桂棹兮蘭槳(계도혜난장): 계수나무 노여, 목란의 상앗대로다.
擊空明兮泝流光(격공명혜소류광): 물속의 밝은 달을 때림이여, 강 수면이 물결 따라 번쩍 번쩍하며 움직이는 달빛이 물을 거슬러 올라오네.
望美人兮天一方(망미인혜천일방): 아득히 멀리 미인을 바라봄이여, 그녀는 오히려 하늘 다른 한 편에 있도다! 미인은 마음속의 사람이고, 하늘 한 모서리는 먼 곳을 표시.
此非曹孟德之詩乎(차비조맹덕지시호): 이는 조맹덕(즉 조조)의 시가 아닌가?
破荊州下江陵 (파형주하강릉): 건안 십삼 년에 형주자사 유표가 죽으니 조조의 대군은 신야에 이르렀고, 유표의 둘째 부인 채부인은 아들 유종을 유비에게 상의하지 않고, 저의 외삼촌 채모와 그 일당의 말만 듣고 조조에게<투항하였고, 그 후 유종과 채부인은 조조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이리하여 웅거할 땅을 잃은 유비는 번성에서 나와 강릉으로 달아났고, 조조는 쫓아서 당양에 이르렀고, 다시 유비는 하구로 달아났고, 조조는 강릉으로 병사를 진격하여 순류를 타고 장강으로 내려왔다.
舳艫千里(축로천리): 전함의 머리와 꼬리가 서로 접하여서 천리에 이어졌다.
橫槊賦詩(횡삭부시): 장창을 빗겨들고, 시를 읊으니, 그의 영용한 무력은 세상을 덮었다.
賦(부): 漢代(한대)에 번성한 운문의 하나로 辭賦(사부)라고도 일컬으며, 초사로부터 생겨났고, 그 중에도 屈原(굴원)의 離騷(이소), 九章(구장)등은 부라고 불리었다.
특징은 敍述的(서술적)이긴 하지만 반드시 直敍(직서) 하는것은 아니고, 사물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되, 화려하고 정교하게 표현한다.
따라서 부에는 敍事(서사), 敍景(서경)에 뛰어난 작품이 많으며 이야기나 신화적 공상을 기술한 낭만적, 서정적 작품도 적지 않다.
그럼으로 부는 직서하는 것은 아니지만, 역시 서술하고 나열하는 문학이라 할 수 있다.
작자: 蘇東坡(소동파1037~ 1101)
그의 자(字)는 자첨(子瞻)이고 호는 동파거사(東坡居士)였다. 흔히 소동파(蘇東坡)라고 부른다. 현 쓰촨성 미산(眉山)현에서 태어났다. 시(詩),사(詞),부(賦),산문(散文) 등 모두에 능해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으로 손꼽혔다.소동파는 송시의 성격을 확립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 대시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대문장가였고 중국문학사상 처음으로 호방사(豪放詞)를 개척한 호방파의 대표 사인(詞人)이었다. 그는 또 북송사대가로 손꼽히는 유명 서예가이기도 했고 문호주죽파(文湖州竹派)의 주요 구성원으로서 중국 문인화풍을 확립한 뛰어난 화가이기도 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 천재 예술가요 못 하는 것이 없었던 팔방미인으로서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천 년이 다 돼 가는 지금까지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중국문예사상 가장 걸출한 인물이었다. 송나라 때 저명한 문인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인 소순(蘇洵)이었고, 그 아우도 소철(蘇轍)로 유명한 문인이다. 이 세 부자를 사람들은 삼소(三蘇)라고 불렀는데, 모두 당송팔대가로 손꼽혔다.
KwanHo, I have to confess that I really didn’t know much about 소동파 (蘇東坡), other than his famous poem, 赤壁賦 (적벽부) we heard so many times and tasty Chinese pork dish 동파육(東坡肉) named after him, until I visited Hangzhou- four times so far! -.
Indeed, all I knew about him til then was so limited to the one I read through Lin Yu Tang/林語堂, (임어당) essays, no more no less.
I vividly recall that till after we arrived at West Lake/서호(西湖) on my first visit to Hangzhou and got off the car to reach to the water front, I didn’t know they have a separate museum dedicated to 蘇東坡 - I am sure many of you visited! -. And I also didn’t know one statue on its foreground with name plate 蘇堤 which was same person 蘇東坡 till I went through the museum. On each visit to Hangzhou through years, I read about him ahead of time and learn more how much he struggled to keep his principles as idealist with admiration.
Indeed, we all learn through the history like his.
Not much stuffs with such historical value, KwanHo, but certainly was worthy to visit to get the first hand information so to speak. Indeed, I do have a few photos I took when I visited for the first time though I cannot locate the second sets I took on next visit. Will attach to see whether worthy to make them posted.
KwanHo, I have to confess that I really didn’t know much about 소동파 (蘇東坡), other than his famous poem, 赤壁賦 (적벽부) we heard so many times and tasty Chinese pork dish 동파육(東坡肉) named after him, until I visited Hangzhou- four times so far! -.
Indeed, all I knew about him til then was so limited to the one I read through Lin Yu Tang/林語堂, (임어당) essays, no more no less.
I vividly recall that till after we arrived at West Lake/서호(西湖) on my first visit to Hangzhou and got off the car to reach to the water front, I didn’t know they have a separate museum dedicated to 蘇東坡 - I am sure many of you visited! -. And I also didn’t know one statue on its foreground with name plate 蘇堤 which was same person 蘇東坡 till I went through the museum. On each visit to Hangzhou through years, I read about him ahead of time and learn more how much he struggled to keep his principles as idealist with admiration.
Indeed, we all learn through the history like his.
BB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