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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일보]   [Daum Media]

특별한 날 먹던 자장면 / 박찬일


볼 미어져라 먹는 딸을 보다가, 부모님 생각에 울컥했다


“햄릿 이후 인류 최대의 고민 중 하나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였던 햄릿 이후 한국인은 오늘도 자장면이냐 짬뽕이냐를 놓고 고민 중이다. 햄릿 운운은 물론 농담이지만 우리의 고민은 자못 심각하다. 둘이서 각각 자장면과 짬뽕을 시켰을 때, 자장면 시킨 친구가 “어이, 국물 좀 남겨 주게” 하면 절대 사귀지 말라는 농담도 있다. 저 좋은 자장면은 물론이고 국물 때문에 시킨 짬뽕의 남은 국물까지 탐하니, 이 어찌 욕심 많은 친구가 아니겠느냐는 소리다.

htm_2011041823300530003010-001.JPG 이런저런 사연의 세월이 흐른 뒤 어떤 중식당계의 선지자께서 어느 날 ‘짬자면’을 내놓았다. 하나 이게 히트를 친 것 같지는 않다. 어느 하나를 그릇 바닥까지 끝장을 봐야 먹은 것 같은 우리네 혀의 오랜 습관이 남아 있어서가 아닐까 싶다.

 자장면은 눈가에 뿌연 안개를 맺히게 하는 소울 푸드(soul food)다. 대개 연로하거나 돌아가신 부모님과 관련 있다. 자장면을 볼이 터져라 먹고 있는 어린 나를 흐뭇하게 쳐다보시던 선친 생각이 난다. 새끼 입에 무엇이 들어간들 흐뭇하지 않겠느냐만, 자장면을 둘러싼 독특한 정서를 선친도 즐기셨던 것 같다. 입가에 자장 소스를 가득 묻히고, 서툰 젓가락질에 몰두하는 자식을 보며 이 땅의 아버지는 그렇게 삶의 의욕을 불태웠는지 모른다.

 그랬던 내가 이제 아비가 돼 어린 딸이 미어지게 자장면을 씹는 장면을 보게 된다. 삶이란, 핏줄의 대물림이란 아마도 이런 것인가 보다 하다가 울컥 목이 메었다. 자장면은 단순히 한 그릇의 음식을 떠나 우리 삶을 생생하게 투영한다. 스파게티나 햄버거를 먹을 때는 느낄 수 없는 생명과 생존의 숭고함마저 느껴지는 것이다. 언젠가 친구에게 ‘인생 최고의 기다림’이라는 질문을 던졌다. 대답이 걸작이었다.
“자장면이 나올 때까지 한 5분? 보풀을 비벼 낸 나무젓가락을 얌전히 11자로 탁자에 놓고 기다리던 순간이 생각나네.”

 누군가는 우울해지면 시장에 간다고 한다. 아주 좋은 처방이다. 거기에 하나 덧붙여 중식당에 가시라 하고 싶다. 이왕이면 가난한 서민 동네의 조촐한 중식당이면 좋겠다. 거기서 혼자 자장면을 먹는 일꾼을 보라. 그의 생명력 넘치는 왕성한 식욕을 느껴 보라. 면발을 향한 집념 어린 젓가락질을 보고 나면 ‘산다는 게 뭐기에’ 하는 삶의 희망을 사무치게 느끼게 된다. 그렇다. 다 먹자고 사는 일 아닌가. 그대도 한때는 자장 곱빼기를 너끈히 먹어 치우던 건강한 식욕이 있지 않았던가.

 자장면처럼 서민의 삶에 흔쾌하게 오랜 세월 깃들어 있는 음식도 드물다. 그 증거 중 하나가 곱빼기다. 캐비아나 푸아그라 곱빼기는 못 들어봤다. 먹고 살 만해진 세상인지라 곱빼기는 식당에서 자취를 감추는 중에도 꿋꿋하게 자장면만은 곱빼기가 인기 있다. 사리 하나만 추가해도 냉면 값의 절반 가까이 더 받지만, 자장면 곱빼기만큼은 여전히 단돈 500원만 더 내면 된다. 음식을 야박한 계산으로만 따지지 않았던, 배고픈 사람에게 베푸는 소박한 인정은 서민의 중식당에서 면면히 내려오는 빛나는 전통이다.

 ‘자장면은 좀 침침한 작은 중국집에서 먹어야 맛이 난다. 그 방은 퍽 좁아야 하고, 될 수 있는 대로 깨끗하지 못해야 하고, 칸막이에는 콩알 만한 구멍이 몇 개 뚫려 있어야 어울린다. 식탁은 널판으로 아무렇게나 만든 앉은뱅이가 좋고…’.

 정진권님의 수필 ‘자장면’의 일부다. 1970년대 이전 중식당 풍경이다. 이제는 사라진 게 이 풍경만은 아니다. 80년대 초반까지 있었던 나무로 만든 배달통은 민속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다. 한 손에 그 무거운 나무 배달통을 들고, 다른 손에는 짬뽕 국물 담은 노란 주전자를 여러 개 손가락에 끼우고 곡예하듯 자전거를 탔던 왕서방네 막내아들은 다 어디 갔을까.

 자장면 자체도 많이 달라졌다. 캐러멜 색소를 넣기 전의 자장 소스는 갈색이었다. 발효된 된장의 향이 강했다. 반찬도 특이했다. 파를 유달리 좋아하는 중국 산둥(山東)성 출신의 화교 요리사들은 대파를 툭툭 잘라 갈색 자장과 함께 반찬으로 내놓곤 했다.

 산천물색(山川物色) 다 변해서 갈색 자장면도 없고, 대파 반찬도 지금은 안주로 나오지만 그래도 구수한 자장면 한 그릇 시켜 먹고 싶다. 기왕이면 배고픈 당신과 함께 곱빼기로 말이다.

박찬일 음식 칼럼니스트 < chanilparknaver.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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