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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연속 단편] 죽음 앞의 삶 - 전지은 (2)

2011.06.25 08:11

전지은#76 Views:5282

죽음 앞의 삶 - 전지은 단편 연재

죽음 앞의 삶 (2/6)
전지은


일러스트·조은명

평행선

영주권이 해결되어서일까. 자연스럽게 귀국을 포기했고, 남편은 박사 학위와 전혀 상관없는 사업을 시작했다. 아들은 이미 완전한 미국 아이가 되어 어눌한 한국말로 나를 당황케 했다. 의사소통 문제는 직장에서만 부딪치는 게 아니었다. 아이와의 문화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또 다른 노력이 필요했다. 이번엔 언어 문제만이 아니었다. 엄마 아빠 모두 미국에서 초·중·고를 다녀보지 않았으니 아이의 학교생활을 이해 할 수 없었다. 다행히 나와 같이 근무했던 병원 친구가 또래의 아들 둘을 두고 있어 그녀를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 방과 후 운동 프로그램이라든지 학교 내 활동, 아이들 파티, 운동 게임이 있으면 팀 마더가 되어 간식 챙기기 등등. 사춘기가 지나는 아이는 때론 조금 거칠고 반항을 해왔어도, 내 친구는 늘 아이 편이었다.

“내가 볼 때 네 아들은 참 착한 아이야. 그리고 아이들은 누구나 자신의 실수로부터 무엇인가를 깨달아야 해. 네가 아무리 잔소리해도 소용없어. 아이들도 무엇이 나쁜지 좋은지 다 알거든. 내가 볼 때는 너와 네 남편은 너무나 한국식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 그런데 네 아들은 미국 아이거든. 두 개의 다른 문화가 공존하고 있는 네 가정을 스스로 인정하고, 아이를 내버려둬. 혼자 잘할 수 있어. 너희 부부가 아이를 믿어주고 격려해준다면 다 잘될 수 있어.”

대충 이런 이야기였다. 이야기를 들을 때는 이해가 되다가도 아이를 보면 “공부해라” 라고 잔소리만 했던 나. 두 개의 문화가 팽팽한 긴장감을 형성하면서 접점을 찾지 못한 채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다.

그 와중에서 간호학 석사과정에 입학했으나 한 학기를 겨우 마치고, 스스로 ‘천천히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음 학기에 휴학을 하며 ‘꼭 이렇게 악착같이 살아야 할까’ 라는 물음에 직면하자, 내가 짊어진 삶이 갑자기 버거워지며 쉬엄쉬엄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당분간 새로운 도전은 미루어둔 채 그냥 그렇게 안주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갔다. 그래도 병원 일은 많이 익숙해져 중환자실에서 사용하는 기계 모두를 다룰 줄 알게 되었고 기계 사용법에 대한 자격증도 획득했다. 중환자실의 주임간호사가 되었고, 새 간호사의 훈련을 책임지는 교육 간호사가 되었다.

그러는 동안 아들도 훌쩍 커 대학에 들어갔다. 1년이 지난 후 아들은 연세대로 어학연수를 떠났고 여름 방학 동안만 갔다 온다던 것이 1년으로 길어지더니, 제법 한국청년이 되어 돌아왔다. 아들은 아직 한국어가 서툴고 쓰고 읽는 것은 더욱 힘들어 하지만 제 뿌리를 찾는 데는 나름대로 성공한 것 같다. 요즘은 제 뿌리에 대해 관심이 많아 족보가 어떻고 집안 어른이 누군가에 부쩍 신경을 쓴다. 제 한국 이름을 다시 찾아 쓰고, 어른을 모실 줄 아는 것도 기특하다. 한국에서 술만 마셨는지 어른 앞에서 고개를 돌리며 술을 마시는 것을 볼 때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싶어 흡족하다. 물론 술 마시는 태도 하나만으로 아들이 한국인이 다 되었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작은 것이라도 이해하고 따라 하려고 노력하는 자세는 인정하고 싶다.

8주간의 휴가

한 직장에 10년간 근무하며 한 번도 결근을 안 했다면 사람들은 믿을까? 필요할 때마다 신청했던 휴가는 충분했고 몸도 건강했기에 ‘결근’이란 것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허리가 심하게 아팠다. 그간 특별히 아픈 적이 없었던 나는 한동안 물파스를 바르며 견뎌보려 했지만 통증은 점점 심해져 나중엔 앉아 있는 것조차 힘들었다. 남편은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을 때까지 병을 키우는 것 아니냐’며 걱정했다.

내 작은 체구에 비해 대부분 거구인 중환자들을 다루는 일은 힘에 부쳤다. 자세를 바꿔주거나 목욕을 시켜야 하면 의식이 없는 환자들의 몸무게는 배로 커진 듯하다. 동료 간호사들과 협동해 일을 하지만 급할 땐 혼자 애를 쓰다보니 그 무게 때문에 요통이 점점 심해지는 것 같아, 척추운동도 하고 파스도 붙이고 침도 맞고, 물리치료도 받았지만 나아지지 않았다. 버티다 못해 의사를 찾았고 몇 가지 검사를 하자 결과는 생각지도 않은 ‘자궁 내 근종’이었다.

근종이 너무 자라서 허리 뒤쪽을 눌러 생긴 요통이라며 서둘러 수술 날짜를 잡자고 했다. 수술 후 회복에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아 친정어머니께 연락을 했고 어머니는 즉시 달려왔다. 가벼운 수술이라고는 하나 여성성을 상실하는 것이라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남편과의 관계를 걱정했고, 혹 중환자실에서 보아왔던 최악의 시나리오인 악성 종양은 아닌가 쓸데없는 걱정이 되었다. 병가 신청을 하자, 인사과에서 연락이 왔다.

“정말 한 번도 결근을 안 했단 말이에요? 이렇게 오래 일했는데?”

“물론입니다.”

“그런데 병가 신청은 6주 하셨네요? 혹시 수술하시나요?’

“자궁근종 절제 수술요. 우리 병원에서요. 한 이틀 입원하면 된다네요.”

“수술 후 퇴원하면 누가 도와줄 사람이 있나요?”

“그럼요. 한국에서 친정어머니가 오기로 돼 있어요.”

“그래요. 그럼 어머니와 함께 지낼 휴가도 필요하겠네요.”

“아, 예. 제 회복 기간 동안 엄마와 함께 있는 것이 휴가지요 뭐.”

“휴가는 말 그대로 쉬는 거고, 병가는 아파야 쉬는 거잖아요? 이왕 쉬는 김에 한 두어 주 더 쉴래요? 휴가 처리해드릴게요. 이렇게 장기 근속하면서 한 번도 결근 안 한 사람은 처음이라 특별 처리해드리려고요. 중환자실 매니저한테는 인사과에서 직접 연락을 할 거니까, 병원 일 걱정은 말고 충분히 쉬다 나오세요. 엄마하고 좋은 시간도 갖고요.”

전화를 끊고, 조금 의아했다. 병가 신청은 6주를 했는데 8주나 휴가를 주겠다니. 남편과 병원 친구들은 그동안 열심히 일한 것에 대한 보상이라며 잘됐단다. 미국 생활 중 처음으로 마음 놓고 아무런 계획 없이 코가 노랗게 놀며 지낼 수 있는 핑계가 생겼다. 종양 조직 검사는 다행히 음성으로 판정되었고 수술 후 허리 통증도 사라졌다.

한 시간쯤 운전을 해 큰 도시로 나가면 한국 서점이 있다. 사는 것에 쫓기면서 미뤄두었던 한국 책들을 박스로 사 왔다. 소설이며 시집, 수필집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휴가 내내 막히는 곳 없이, 사전을 찾지 않고도 술술 읽히는 한국 문학만 들여다보자 눈앞이 환해지는 느낌이었다. 머릿속에서는 고운 물소리가 들리고, 아름다운 꽃밭이 만들어졌다.

한국문학을 탐독하는 동안 다시 일기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학생 시절 내내 쓴 가계부는 가벼운 메모들도 적혀 있어 일기를 대신했었다. 메모가 적힌 가계부는 광채를 발하는 보석은 아니라도 청운의 꿈을 품었던 젊음의 원석, 지난 시간들을 파노라마처럼 보여주었다. 상추 한 단, 바나나 한 무더기의 값은 그리 변하지 않았는데 내 삶의 초심은 중심을 잃은 채 흔들렸던 것은 아닐까.

8주간 휴가 동안 난 나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두고 왔던 것들, 잊고 살 수 있다고 믿었던 것들은 가슴속에 앙금이 되어 침잠되어 있었을 뿐이었다. 표면에 떠 있던 뿌연 물을 쏟아버리고 새 물을 부어 감정들을 골고루 섞어 저었다. 오랜만에 만난 내 삶의 여유는 작은 무늬들을 그리며 올라왔다.

한국, 한국인

내가 없으면 안 될 것이라고 믿었던 중환자실. 8주가 지나고 돌아와도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중환자실 매니저와 동료들은 회복되어 돌아온 것을 반가워했지만 내가 없다고 병원 일이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빠진 자리는 예전의 나처럼 ‘Float’간호사가 대치하면 되었다. 최선을 다해 임무를 수행했고 꾀부리지 못했고 결근 한 번 하지 못했던 것은 성격 탓이었다. 더구나 외국인 간호사였고 아직도 악센트 있는 영어를 구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심한 강박관념을 갖게 했고 완벽주의를 고집하게 만들었다. 일종의 열등감 같은 것이 한 번의 실수와 게으름도 용납하지 못하게 했던 것은 아닐까.

멀리 떠나 바라보면 안쪽의 것들이 좀 더 객관적으로 보인다. 쉬면서 중환자실, 그 안을 들여다보니 내가 서 있던 자리가 어디쯤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열심히 일하는 한 간호사. 경험이 꽤 오래된 중환자실의 간호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내 모습이 보였다. 작은 한 부분에 자리매김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다고 지금까지 하던 일에 게으름을 피울 수는 없었다. 그건 내 생활 속의 어느 부분에도 용납되지 않는다. 내 자존심이니까. 성실하게 일하고 남편 챙기고, 가끔 대학에 나가 있는 아들도 챙기는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왔다.

샌타크루즈는 아주 작은 동네여서 한국 사람이 많지 않았다. 우리끼리 모이면 늘 가족 같은 분위기였다. 한국과 미국 명절이면 함께 모여 바비큐 파티를 하고, 음식을 한 접시씩 해 와 나누어 먹으며 즐겁게 지냈다. 모이기만 하면 애국자가 되고, 두고 온 고향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한국 환자들은 병원에 입원하면 종종 날 찾았다. 생경한 의학 용어들이 불편할 때 도움을 청해오는 한국 환자들. 병원에서 근무 중이거나, 쉬는 날이라도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라도 시간을 내어 도와드렸다.

그날도 한국 환자가 있는데 나와줄 수 있느냐는 전화를 받았다. 특별히 하는 일 없이 쉬고 있던 터라 흔쾌히 나가겠다고 했다. 환자는 70세, 동네 한국 교회의 은퇴한 원로 목사였다. 뇌졸중으로 쓰러져 의식이 없고 인공호흡기를 달았다. 병명은 고혈압성 출혈성 뇌졸중이었다. CT상 출혈 부위가 너무 커 수술로 고여 있는 혈액을 제거한다 해도 소생할 확률은 거의 없었다. 담당의사가 나를 불렀다. 가족들을 모이게 해 환자의 상태를 설명하고 인공호흡기를 제거한 후 편안히 임종하게 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부인은 준비가 안 되었다며 좀 더 시간을 달라고 했다. 큰아들이 한국에서 오고 있으니, 그 시간까지는 반드시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만약 환자의 상태가 그때까지 못 기다리고 악화되면 어떻게 하실래요? 혹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 생명을 위협하면 인공 심폐 소생술을 쓰고, 전기 충격 요법과 각종 약물을 써서 끝까지 해볼까요, 아니면 편안하게 가시게 할까요? 인공 심폐 소생술을 하게 되면 갈비뼈가 부러질 수도 있고 가슴 부위에 시퍼런 멍이 들기도 하지요.”

“그래도 아들이 올 때까지는 할 수 있는 것을 다해서 살려줘요. 큰아들이 오면 그 다음은 그때 결정할게요.”

담당의사에게 부인의 의견을 전하자 “그래. 최선을 다해보지 뭐, 그러나 시간이 그리 많지는 않아. 아들이 도착하는 데는 얼마나 걸리지?” 하고 물었다.

“샌프란시스코까지 비행시간만 12시간이니까 한국에서 공항에 나가 미국행 비행기를 지금 바로 탄다 해도 최소한 24시간은 살아계셔야 할 텐데.”

“최선을 다하자고. 근데 넌 내일도 일을 나올 거야? 오늘도 쉬는 날인데 나왔다며?”

“필요하면 나올게. 내가 나오는 것이 더 낫겠어?”

“물론이지. 아들이 도착해 인공호흡기를 제거하고 혹, 바로 돌아가시게 된다면 네가 옆에서 자세히 설명해드리고, 가족들을 편하게 해주는 게 좋겠어.”

“그래, 그러면 내일도 근무하는 것으로 할게. 그런데 내일은 종일 오버타임이거든. 매니저가 OK를 해야 나올 수 있지. 비싸잖아. 하하.”

시간당 임금의 한 배 반을 받는 오버타임은 스케줄을 담당한 매니저의 허락이 필요하다. 그때 갑자기 환자 방 커튼 안 쪽에서 한국어로 커다란 합창 소리가 들렸다. 중환자실 면회 시간은 정해져 있고 방문객 숫자도 한 번에 두 명으로 제한된다. 직계가족이 아니면 들어올 수 없는데 무슨 일인가 싶었다. 더구나 중환자들은 자극을 주지 않고 최대한 조용하게 해주어야 하는데, 커다란 찬송가 합창 소리라니. 잰걸음으로 달려가 커튼을 열자, 열댓 명의 한국 교회 교인이 모여 찬송가를 부르고 있었다.

“쉿, 조용히.” 손가락을 입에 대며 조용히 시켰다.

“왜 찬송가 부르면 안 돼? 목사님이신데.”

“여긴 중환자실이에요. 조용히 하셔야 하고요. 옆에도 다른 환자들이 있잖아요. 근데 다들 어떻게 들어오셨어요. 가족밖에 안 되는데.”

“우리 모두 가족이라고 했어. 입구에는 전지은 간호사가 들어와도 좋다고 된다 말했어. 괜찮지?”

“예? 제가 언제 다들 오시라고…. 부인과 며느님만 남고 다 나가세요. 다른 환자 보호자들이 보면 뭐라겠어요. 누군 다 들어오라고 하고 또 누군 둘밖에 안 된다 하고. 밖의 대기실에서 기다리시든지 아니면 댁으로 돌아가세요. 무슨 일 있으면 교회 사무실로 연락드릴게요.”

까칠한 나의 질책에 교인들은 주섬주섬 찬송가와 성경책을 들고 중환자실을 빠져나갔다. 이런 경우 참 난감하다. 아는 분들이라 매정하게 할 수도 없고, 원칙대로 하다보면 까칠하다는 소리를 듣고.

다음날 다시 출근을 했다. 큰아들이 미국행 비행기에 탔다는 연락을 받았다. 환자 상태는 인공호흡기에 의존한 채, 더 나빠지지도 더 좋아지지도 않은 답보 상태였다. 열 명이 넘는 한국 분이 환자보호자 대기실을 점령해 밤새워 통성 기도를 했다며, 입구에서는 불만을 토로했다. 다른 사람들은 전혀 배려하지 않고 자기들끼리 기도하고 찬송가 부르고, 먹고, 여간 시끄러운 것이 아니란다.

“다들 집에 가셨다가, 제가 연락드리면 오세요. 여긴 병원, 그것도 중환자실입니다. 계속 기도하시려면 교회에 가서 하셔요. 무슨 일이 있으면 제가 교회로 연락 드릴게요. 다들 집에 돌아가셔서 좀 쉬고, 씻고 오셔도 좋을 것 같네요.”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한 후에야 설득이 되었고 큰아들이 도착하거나 환자 상태에 변화가 있으면 연락하기로 하고 교회 신자들을 돌려보냈다. 그제야 부인이 조용히 환자 침상 옆 자리에 앉아 작은 소리로 조용조용 하실 말씀을 남편한테 들려드린다. 둘째 며느리도 조금 눈을 붙였다.

오후 4시, 큰아들이 도착했다. 담당의사는 가족을 다시 불러 CT필름 등을 보여 주며 설명했고 나는 하나하나 한국어로 통역했다. 가족들이 환자의 위중함을 알고 곧 인공호흡기를 제거하는 데 동의했다. 그때 큰아들이 마지막 부탁이 있단다. 한국에서 가져온 한약인데 뇌졸중에 특효라니 한 번만 쓰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아무리 좋은 약이라도 성분이 뭔지도 모르고 미국 내에 시판도 허락되지 않은 약을 쓰게 할 의사는 아무도 없다. 의사가 날 처다보며 난감한 표정이었다.

“어차피 소생 못할 환자 아니냐. 우리 모르게 환자 가족들이 쓰게 하는 것으로 우리가 눈감아주면, 가족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보았으니 원망은 없을 거다.”

그렇게 이해를 시켰다.

“그래, 그러면 큰아들이 시술할 수 있게 준비해주고 우린 커튼 밖으로 나와 있자.”

10여 분이 지났고, 큰아들은 이제, 인공호흡기를 떼어도 좋다고 신호를 보내왔다. 인공 호흡기를 제거하면 5분 안에 운명할 것으로 보였는데, 내 퇴근 시간인 7시가 넘도록 환자는 혼자 숨을 쉬었다. 몰론 의식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담당의사가 참 이상한 일이라며, 큰아들이 갖고 왔던 약이 효험이 있긴 하나보다, 라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교회의 신자들이 또다시 보호자 대기실을 점령하고 큰 소리로 기도를 하자, 이번엔 매니저가 직접 나서서 중환자실의 제일 가장자리의 유리문이 있는 방으로 환자를 옮기자고 제안했다. 그러면 유리 문 안쪽이니 소리도 덜 들릴 것이고 뒷문을 이용해 다닐 수 있어, 교우들도 가족들도 편안하지 않겠느냐고. 마음을 써주는 매니저가 고마웠다. 가시는 길을 편안하게 해드리고 가시는 길을 잘 배웅하게 해주는 것도 임종 간호의 일부다. 환자의 방을 새로 옮겨 정리하고 가족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퇴근 시간도 자연히 늦어졌다.

“한국 환자만 너무 신경 쓰는 것 아니야?”

늦게 퇴근하자 남편은 걱정스럽게 한마디했다. 정말 그런 것 같았다. 한국 간호사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한국 환자들에게 필요 이상의 신경을 쓰는 것.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한국 환자들만 보면 내가 담당해야 할 것 같고, 내가 나서 처리해주어야만 할 것 같다. 쓸데없는 동포애인지 이민자들만 갖는 역차별인지 알 수 없지만 마음 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목사님은 그 상태로 3일을 더 견뎠다. 소천하기 바로 전날, 난 중환자실에서 10년 넘게 근무한 데 대한 근속상을 받고 부상으로 18K 팔찌를 선물 받았다. 또 그 달의 간호사로 뽑혀 병원에서 만드는 사보에 나의 이야기와 사진들이 실렸다. 파티복을 대신해 한복을 차려입고 남편과 함께 병원에서 베풀어준 근사한 파티에 참석했다. 어깨가 훤히 드러나는 드레스가 아니어도 고운 한복은 우아함으로 미국 친구들의 시선을 받기에 손색없었다.

(다음에 계속)
Source: 신동아 잡지,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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