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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연속 단편] 죽음 앞의 삶 - 전지은 (3)

2011.06.28 05:30

전지은#76 Views:5973

죽음 앞의 삶 - 전지은 단편 연재

죽음 앞의 삶 (3/6)
전지은


일러스트·조은명

로키산맥을 찾아서

그 무렵 남편은 잘하던 사업을 그만두고 싶어했다. 난 10년이 넘도록 같은 일을 해도 싫증나지 않는데 남편은 왜 전업을 생각할까 싶었지만 더 늦기 전에 업종을 한번 바꿔보는 것도 좋을 듯싶었다. 샌타크루즈에서 샌디이에고, 뉴멕시코의 샌타페이까지 돌아다니며 다른 일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병원 일은 앞뒤로 몰아 쉬는 날을 늘려 남편을 따라다녔다. 그러나 넉넉지 않은 자금 탓에 꼭 하고 싶은 것은 그리 쉽게 결정되지 않았다. 6개월쯤 거리에 돈과 에너지를 소비하고 나자 남편은 초초해 했다. 그때 마침 로키산맥 끝자락에서 친척이 경영하는 물 공장의 책임자가 필요하다는 연락을 받았다. 친정 쪽 일이었기에 선뜻 나서지 못하고 좀 더 천천히 생각하라고 말렸지만 남편은 콜로라도행을 고집했다.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로키산맥. 그곳을 방문하기 위해 탄 비행기 상공에서 내려다보이는 풍경은 경이롭다고 느껴질 만큼 아름다웠다. 비행기에서 내리자 도도한 산세는 너르게 팔 벌리고 서서 도시를 병풍처럼 감싸안았다. 주홍으로 하늘을 물들이며 지는 석양은 산 위에 걸리며 신비한 오로라를 만들어냈다. 붉은 기운은 낯선 도시와 만나는 첫 대면을 포근하게 해주었다.

며칠 간의 콜로라도 방문 후 남편은 혼자 남았다. 나는 다시 캘리포니아로 돌아와 또 혼자 이사 준비를 해야 했다. 신문에 ‘집을 세놓는다’는 광고를 하고, 살림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병원 일을 쉬는 날이면, 책같이 깨지지 않는 물건들을 하나씩 묶어두고, 쓰지 않는 물건들은 팔고, 이웃에게 나누어주기도 했다.

콜로라도에 새로 살 집을 구하고, 이사 준비가 끝난 것은 거의 추수감사절이 가까운 늦가을과 초겨울의 입구였다. 병원에 사표를 내자, 병원에선 나만한 경력 간호사를 구하기 쉽지 않다며 한 달에 한 번, 열흘 정도씩 일을 묶어줄 테니 비행기를 타고 와 일을 계속해줄 수는 없느냐고 물어왔다. 병원 뒤쪽에 있는 아파트의 방 하나를 제공하겠다는 조건도 함께였다. 그러나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떠난 것에 미련을 두면 안 된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완전히 떠나지 않으면 자꾸만 뒤돌아보게 되고 새로운 곳에서 적응하기보다는 미련이 남는 곳에 마음이 더 쓰인다. ‘떠날 때는 말없이’ 매몰차게 떠나야지만 새로운 곳만 바라보며 적응하려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눈이 푸슬푸슬 오던 추수감사절 이틀 전, 콜로라도 새집으로 이삿짐이 도착했다. 너무도 오랜만에 만나는 눈에 꼬리를 흔들며 돌아다니는 강아지처럼 서성거리다 시간을 다 버렸다. 이삿짐은 천천히 풀자며 숨을 돌리고 있는데 마당으로 찾아온 이가 있었다. 백발의 할아버지는 카드 한 장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앞집에 사는 노인이었다. 할아버지는 제2차 세계대전 때 파일럿이었고 이 동네 공군사관학교에서 오랫동안 일을 했단다. 팔순이 넘었고 할머니는 보행기에 의지해야만 걸을 수 있어 오늘처럼 눈이 오는 날은 바깥출입을 못해 함께 못 왔단다. 카드에는 ‘이웃이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라도 연락해’라며 전호 번호도 적어놓았다. 잘 정리된 마당, 잘 가꾸어진 나무들, 환영 카드까지, 낯선 곳에서 좋은 이웃을 만난 것 같아 다행이었다.

겨우 이삿짐이 정리되고 크리스마스와 신년까지 이어지는 휴일이 지나자 다시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도 가까운 곳에 가톨릭재단에서 운영하는 병원이 있었다. 이력서를 내자 바로 연락이 왔다. 중환자실에서 쓰는 모든 기구를 사용할 줄 아는 자격증이 이렇게 많은 간호사는 처음이라며 매니저는 싱글벙글했다. 또다시 새로운 곳에서의 출발이었다. 병원 전체와 중환자실의 오리엔테이션이 끝나자 곧바로 혼자 일을 하게 되었다. 늘 하던 일이라 어렵지는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한 간호사가 태클을 걸어왔다.

“지은, 네가 하는 말은 무슨 소린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어. 오늘부터 나한테 인계해줄 때는 모든 것을 적어주면 좋겠어.”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젊어도 한창 젊은, 서른이 채 안 돼 보이는 깡마른 백인 간호사였다.

“못 알아듣다니?”

“네 악센트 말이야. 난 도저히 안 되겠다고.”

지난 10년 동안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소리였다. 캘리포니아를 떠날 때 친구들이 근심스러운 얼굴로 일러주던 말이 생각났다.

“콜로라도에는 ‘Red Neck’이 많아. 네가 힘들 수도 있어.”

교육을 많이 받지 않은 농부나 복지수당을 타는 빈민층이면서도 백인이라는 사실만으로 자신이 최고라고 여기고 뻐기며 이민자들을 무시하고 잘난 척하는, 뭐 그런 부류를 일컫는 말이었는데, 그 말이 딱 맞았다. 그 간호사는 백인 우월주의자가 확실했다. 자존심이 무척 상했지만 악센트가 있는 것이 사실이고, 파르르 하며 따져봐야 내 속만 끓일 것 같아 한 번은 참기로 마음먹었다.

“매일 네가 꼭 인계받으라는 법은 없잖아. 네가 인계를 받게 되면 그때는 내가 써 줄게. 네가 못 알아듣는다니까 말이야. 그러나 다 쓸 때까지 너는 기다리고 있어. 내가 쓰는 동안 방해하지 말란 말이지. 쓰는 일이 그리 쉽냐? 난 일이 좀 늦게 끝나겠네. 장문을 써야 하니 말이야. 너한테 인계를 주는 한 오버타임은 맡아놓았네. OK. 그러지 뭐.”

그는 나의 차분한 대응에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옆에 앉아 기다렸다. 그러나 문제는 몇 주일 뒤였다. 내 오버타임의 원인이 그에게 인계를 주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알자, 매니저가 우리 둘을 불렀다. 그 자리에서 분명히 말했다.

“상대방이 나 때문에 불편하다니, 그가 원하는 대로 인계해야 할 것들을 종이에 적어주었어. 인계란 일이 끝나야 할 수 있는 것 아니야. 그래서 난, 일이 끝나야 종이에 적을 수 있었고, 그러다 보니 늦고 말았네. 일이 안 끝나서 오버타임을 했던 것은 아니고 순전히 인계할 상황들을 적다보니 시간이 많이 갔을 뿐이야.”

매니저가 덧붙였다.

“나는 지은이 하는 말을 다 알아듣겠는데 네가 이해가 안 된다는 부분은 어디야?”

“글쎄, 지금은 이해할 만하네.” 그는 슬며시 꼬리를 내렸다.

“그러면 오늘부터는 말로 인계를 주어도 괜찮겠어?”

“그래, 그러지 뭐.”

그가 나가고 매니저는 나를 따로 불렀다.

“너무 상처 받지 마. 살다보면 이런 일 저런 일 다 있잖아. 쟤는 누구든 새로 오면 꼭 한번쯤 꼬투리를 잡는 아이야. 난 너의 능력을 믿어. 열심히 해줘.”

등을 툭툭 두드려주었다. 새로 시작한 곳에서 엉뚱하게 한 방 맞았다. 그의 꼬투리 잡기가 아니라도 외국인이 하는 영어는 악센트가 있게 마련이다. 아무리 영어를 잘한다 해도 원어민하고는 다를 테니까. 조심, 또 조심하기로 했다. 따뜻한 이웃을 만나며 기대했던 것과는 영 딴판인 직장생활이 시작되었다.

(다음에 계속)

Source: 신동아 2010년 11월 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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