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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장미뿌리를 깍으면서

2011.07.01 02:04

김창현#70 Views:6510

장미뿌리를 깍으면서 

 미인박명이랄까. 아끼던 백장미 나무가 이유도 모르게 죽어버렸다. 봄철마다 창 밖에서 하얀 향기 풍기던 미인이 떠나갔다. 나는 늘상 식탁에 앉으며 아내에게 이렇게 말 하곤 했었다. 러시아 국민가수 알라푸카체프의 노래 가사처럼 '백만송이 장미'는 선물 못해도, 아침마다 이리 싱싱한 장미꽃을 바치는 남편이 세상에 어딧겠소?'  창 밖에서 안으로 장미향이 날라오던 식탁이다. 그 식탁에 매일 아침 한송이 싱싱한 백장미가 놓여졌다. 크리스탈 잔에 백장미 한송이를 꽂아보라. 마시는 차는 더 향기롭고, 빵과 우유 한 잔의 조촐한 식사도 더 격조 있다. 앞마당 뒷마당 장미꽃 구경하라고 친구 부르는 일도 장미 키우는 사람의 보람이다. 어쨌던 장미 키우는 일은 우아한 일이다. 그 우아한 취미 살리느라 봄마다 일산 상일동 양재동 종로5가 장미 파는 집 순례하는 고행을 즐겨 감수해왔다. 덕분에 이브닝가운 보다 하얀 백장미, 노랑 치마에 빨간 레이스 피스장미, 양장 여인같이 단아한 아이보리장미, 검붉은 루즈빛 흑장미, 황금빛 주황장미, 핑크레이디 핑크장미, 텍사스 기병대 생각나는 노랑장미가 내 뜰에 화려하다.

 간혹 가위로 장미 다루다가 손가락을 찔리기도 한다. 그땐 론강(江) 근처 한 고성(古城)에서 장미를 키우며 시작(詩作)에 몰두하던 릴케 생각한다. 알다시피 릴케는 장미가시에 찔려 죽었는데, 그의 비에는  미리 써놓은 유언장대로 장미를 읊은 시가 새겨졌다고 한다. 이태백은 채석강의 달을 건지려다 물에 빠져죽었다. 두사람의 죽음이 다 시인다운 낭만적인 데가 있다.

 하여튼 죽은 장미를 어떻게 하겠는가. 모든 만남은 반드시 헤어짐이 있는 법. 애석한 마음으로 삽으로 장미나무를 캐내고, 그 자리에 옥잠화를 심었다. 그런데 땅 속에서 생각지 못한 보물을 만났다. 장미 뿌리다.

 나는 기자 시절 파이프에 '하루방' 잎담배를 담고, 편집국 안을 겁도없이 물고다녔다. 옛날 명동에는 라이타와 파이프 파는 노점들이 많았다. 신사는 파이프를 입에 물어야 더 멋 있는 법이다. 라이타는 지포라이타, 파이프는 장미뿌리 파이프가 최고의 물건이었다. 장미파이프는 얼마나 멋떨어진 신사용 고급 액서세리 였던가. 나는 명동 거리를  오가며 몇번이나 장미파이프를 손가락으로 만지락거리며 미끄러운 감촉을 느껴보고, 입에 물어도 보고, 장사꾼에게 가격을 묻곤 했던가. 그러다 한숨을 쉬며, 어느 항구 목로주점 어떤 마도로스가 쓰던 파이프인지, 아니면 동두천 미군부대 어느 군인이 쓰던 것인지, 족보도 알 수 없는 싸구려 파이프 하나를 골라와서 애용한 적 있다.

 만약 임어당이나 보들레르가 자기 정원에서 어느 날 나처럼 멋진 장미 뿌리를 발견했다고 가정해보자. 틀림없이 그들은 기겁을 하며 반가워했을 것이다. 헤밍웨이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고, 꽁초 오상순 선생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모든 존경할만한 작가들은 당연히 담배를 피웠고, 장미뿌리 파이프의 가치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 장미파이프의 소재가 될 커다란 뿌리를 땅속에서 발견한 것이다. 나는 뜰에서 보물을 발견한 사람처럼 흥분하고 말았다. 죽은 장미나무는 실망도 주었지만, 뜻밖의 커다란 선물도 준 것이다. 묻혀있던  장미뿌리 모습은 정말 훌륭하였다. 흙을 털어내자, 퉁퉁한 둥치는 오래된 향로처럼 생겼고, 문어 다리처럼 이리저리 얽힌 잔뿌리는 충분히 기괴하였다. 피부가 발가스름한 것, 뿌리가 향기로운 점도 끝없는 나의 상상을 자극하였다. 도대채 이 뿌리 어느 구석에 그처럼 순결한 흰빛과 미묘한 향기를 감추고 있었더란 말인가. 장미뿌리를 이리저리 한참 뒤척이면서, 장미뿌리가 시인과 비슷한 점도 발견했다. 오랜 시간 땅 속에서 향기로운 시심을  길러 끝내 꽃을 피우는 점에선 장미도 시인이었다. 분재용 굵은 구리철사로 얽힌 뿌리 속의 흙을 하나하나 털어내는 작업 자체가 무쌍의 즐거움이었다. 고고학자가 땅속에 묻힌 유물을 조심스레 만지는 신비한 체험 같은 것이었다. 

  나는  설악산에 가면, 산도 산이지만, 기념품 가게 앞을 서성거리기 좋아한다. 기묘한 나무 뿌리나 죽은 소나무 옹이로 만든 목각들을 보기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풍우에 씻겨진 오랜 세월과 나무가 간직한 신비한 산의 향기를 풍기고 있다. 나는 거기 오래된 대추나무로 만든 달마상에 대한 애착을 지금도 버리지 못한다. 비싸서 가난한 서생의 서재에 옮겨지 못했음을 지금도 애석해 한다. 알다시피 벼락을 맞아 속으로 심하게 금이 가고 타죽은, 벽조목 염주는 스님들이 가장 아끼는 염주이다. 우주의 기를 지녀 사업 발복의 효험을 준다는 벽조목 도장은 알만한 호사가들이 가장 애끼는 물건이다.

 지리산 청학동 목계마을에도 목조각을 잘하는 한사람이 산다. 그는 자칭 산에 미쳤다는 기인이다. 그는 계곡에 떠내려온 갖가지 기묘한 나무조각을 주워와서, 나무의 생긴 모습을 그대로 살린 수백개의 찻숟갈을 만들어 벽에 진열해놓았다. 그 찻숟갈 하나하나는 지리산 골짝골짝의 물소리 바람소리를 담고있다. 그 작품들은 나무의 자연 결이 그대로 살아있어 신비스럽고, 조각가의 소재를 다루는 안목과 재치가 넘쳐있어 감탄할만 하다. 그 찻숟갈은 아마 찻잎 담는 숟갈로는 최상의 운치를 간직한 작품일 것이다.

 나는 한참 무아의 경지에 들어 장미 뿌리 사이의 흙을 제거하고, 물에 깨끗이 씻고, 이리저리 뒤척여 보다가, 그늘에 말려두었다. 나의 나무를 다루는 예술적 안목과 창의력은  다소 미홉하겠지만, 나도 설악산 지리산의 목조각 예술가처럼 한번 도전해볼 생각이었던 것이다. 백장미와 나와의 그 오랜 인연은 너무나 아름답지 않은가. 봄마다 그토록 순결한 하얀 향기로 감동을 주던 장미가 아니였던가. 장미파이프는 그 추억의 증인이 될 것이다. 하얀 향기 풍기던 백장미는 죽어 하얀 연기 풍기는 파이프가 될 것이다. 파이프가 완성되면 나는 그 파이프를 서가에 놓아둘 예정이다. 서가엔 내가 인사동서 가져온 상형문자가 새겨진 청동 향로, 에밀레종을 축소한 범종, 청옥으로 만든 문진, 홍옥으로 조각한 달마상, 칼날에 푸른 녹이 쓴 옛날 보검, 비단띠 두른 대나무 단소 등이 놓여있다. 그 옆에 장미파이프는 놓여질 것이다. 나는 앞으로도 계속 수필을 쓸 것이다. 그때 그 장미파이프로 고요한 흰 연기를 내품으면서, 나는 백장미같이 향기로운 작품을 구상해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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