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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연속 단편] 죽음 앞의 삶 - 전지은 (4)

2011.07.01 09:07

전지은#76 Views:5243

죽음 앞의 삶 - 전지은 단편 연재

죽음 앞의 삶 (4/6)
전지은


일러스트·조은명

허들 넘기

한번 삐걱거리기 시작한 병원 일은 일거수일투족이 모니터되는 것으로 이어졌다. 예전 같으면 환자를 간호하는 것은 의사 처방 내에서 내 나름대로 노하우를 쓰면 되었다. 그러나 일일이 간섭하고 약 하나를 더 쓰거나 뺄 때도 왜 그렇게 했느냐고 꼬치꼬치 묻고 따졌다. 생명을 다루는 직업은 상호 신뢰가 관건이다. 믿지 못한다면 누구도 안심하고 환자를 맡길 수 없다. 주임 간호사가 사사건건 질문을 하는데 답을 안 할 수도 없고, 일일이 답을 하자니 일은 점점 힘들어졌다. 또한 보이지 않는 불평등을 감지했다. 몸무게가 가장 많이 나가는 무거운 환자, 행려 환자, 담당 의사가 아주 까칠해 일하기 까다로운 환자들만 내게 맡겼다. 그러나 그런 조치에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었다. 내가 맡지 않으면 다른 간호사들이 돌보아야 하는 환자이기에 직업 윤리상 특별한 이유 없이 그들을 거절할 수 없는 것이다. 마음을 다잡고 묵묵히 견뎌보기로 했다. 이전의 경험과 떠나온 캘리포니아에서 받은 대우 등은 빨리 잊는 것이 편했다. ‘새 나라 새 땅에서 처음 적응하는 새 이민자일 뿐이다’라고 마음을 추스르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자세가 되었다.

나이가 들어 새로 겪는 텃세에 가슴 시렸고 조금은 서글펐다. 이 나이에 이런 대접 받으려 여기까지 왔던가 싶고, 그렇다고 누구 아는 사람에게 하소연을 할 수도 없었다. 내가 늘 어딜 가든 잘하는 줄 믿는 남편에게 실망을 주기도 싫어 끙끙거리며 속병을 앓았다. 혼자 극복해야 하는 외로운 싸움이었다.

불평 않고 묵묵히 주어진 일만 하며 1년이 지났다. 까칠했던 간호사와 관계도 조금 나아졌다. 퇴근 후 함께 저녁을 먹거나 시원한 생맥주 한 잔에 인생을 논하고 병원을 떠도는 가십들을 안주 삼아 수다를 떠는 일도 가끔 생겼다. 시간은 만병통치약이다. 사람의 관계란 주는 만큼 받게 돼 있었다. 새로 들어온 간호사가 모든 기구를 다룰 줄 알고 모든 중환자도 간호할 수 있다고 하니 기존 간호사들은 일종의 시기심으로 텃세를 부렸던 것 같다.

어느 날 컴퓨터를 보다가 병원 내에만 공고를 하는 ‘R.N. Case Manager’ 자리가 눈에 띄었다. 일반 간호사 경력 5년 이상, 최소한 간호학사(BSN) 이상, 시간제 수당이 아닌 연봉제 월급, 중간 매니저급을 뽑는다는 것이었다. 호기심이 생겼다. 중환자실 케이스 매니저에게 어떻게 해야 그 일을 할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그녀는 함께 점심을 먹으며 친절하고 자세하게 알려주었다.

제일 먼저 입원 환자가 병원 입원의 기준에 맞게 입원했는지를 살피고, 입원 기준에 맞지 않으면 즉시 주치의한테 연락해 퇴원시키거나 요양원이나 재활 치료병원 등으로 옮겨갈 수 있게 주선해주고, 둘째 입원환자의 의료보험을 확인하고 보험회사에 환자의 병명과 입원 사실을 통고한다. 그 다음 환자가 사(私)보험을 갖고 있을 경우, 매일 환자의 상태를 알려주어, 의료 보험회사로부터 병원으로 의료수가가 제때에 지급되게 한다. 또한 의사와 간호사, 약사, 영양사, 물리치료사, 사회복지사 등과 함께 라운딩을 해 환자 상태를 살펴 그날 환자를 위해 꼭 해야 하는 치료는 무엇이며, 환자들이 최적의 간호와 치료를 받는지 서로 의견을 주고받으며, 진행상황을 기록한다. 만약 환자가 최적의 치료를 받지 못한다는 의견이 있으면 즉시 의료부장에게 보고해 조치를 취한다. 그리고 매주 수요일 오전에는 병원 재정팀과 미팅을 해 환자들 진료비 상황을 숙지하고 의료비가 오래 연체되었거나 보험회사에서 지급되지 않았으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보고 최선의 조치를 취한다.

참 흥미로웠다. 환자의 증상만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환자의 전체적인 상황을 고려해서 전인간호와 최대의 치료를 제공해주며 환자의 퇴원까지 책임 있게 살펴주는 특별 간호사 제도였다. 도전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력서를 준비해 케이스 매니저들의 디렉터를 찾아갔다. 디렉터가 내 이력서를 보고는 임상 경험이 풍부해 좋을 것 같다며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디렉터는 중환자실 매니저에게 연락을 했는데, 중환자실 매니저는 책임감 있고 경력이 많은 간호사이기는 하지만 이민을 온 외국인 간호사여서 미국 문화도 서툴고 말도 아직 악센트가 있는데 괜찮겠느냐고 했단다. 물론 아주 뒤에야 들은 이야기이지만.

같이 일했던 동료 간호사들은 외국인 간호사인 내가 케이스 매니저에 도전하리라고는 감히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인터뷰가 끝나고 자릴 옮겨가자 놀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것처럼 신나는 일은 없다. 더구나 이번처럼 동료들의 시선을 뒤로하고 ‘짠’ 하고 옮겨가는 것. 조금 더 높은 자리로 승진해 가는 것은 참 신나는 일이다. 더 이상 간호사 유니폼을 입는 일은 없을 것 같아 유니폼을 정리했다. 커다란 상자로 두 개나 되었다. 색이 누렇게 변한 흰색 원피스, 무릎 나온 바지, 색깔도 낡고 소매 끝도 해진 긴 소매 재킷, 이웃이 손수 만들어준 꽃무늬 유니폼 그리고 치마바지. 내 삶의 일부분인 세월은 고스란히 상자에 담아 창고에 보관했다.

케이스 매니저

케이스 매니저로 처음 배치받은 곳은 정형외과 병동이었다. 중환자실과는 사뭇 달랐다. 대부분 고관절이나 무릎관절 수술을 하고 재활이 필요한 환자들이었다. 거의 독거노인이었는데 회복을 위해 재활 병동이 있는 노인요양원으로 옮겨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곳에서 처음 만난 환자는 101세였다. 할머니는 입원 직전까지 단독주택에서 혼자 살았다. 식사는 물론 간단한 청소까지 남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 창가에 만들어놓은 작은 화분에 박하와 민트, 타임 같은 향기 나는 채소를 기르며 소일했다는 할머니. 며칠 전 봄눈 내리던 날 베란다로 나갔다가 미끄러져 넘어졌고 대퇴골이 골절돼 실려 왔다. 할머니는 넘어짐과 동시에 심한 통증을 느꼈고 움직일 수 없었지만 다행히 응급호출기(Life Line) 목걸이를 걸고 있어 바로 눌렀다. 응급실에 도착, X-Ray와 CT 촬영을 했는데 출혈 가능성이 큰 복합 골절로 판단돼 바로 수술을 했고 수술 후 병동으로 옮겨왔다.

기록에 의하면 운전을 하지 않았던 것말고는 모든 일상을 독립적으로 해결했다. 한 블록 떨어진 곳에 80세의 딸이 살고 있고 또 두 블록 건너에는 70이 넘은 아들이 살고 있어 할머니 집을 매일 들렀다고 한다. 주말이면 할머니를 태워 가까운 마켓에서 일주일치 식재료를 사고 소소하게 필요한 물건들을 구입했다. 매주 토요일, 가족이 모두 모여 아침 겸 점심의 브런치를 하는데, 할머니는 시나몬 뿌린 프렌치 토스트와 달걀 반숙을 좋아했다. 구수한 구전 동화처럼 풀어놓는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는 80세의 딸이 수술을 마친 어머니 곁에 서서 독백처럼 들려준 것이었다.

마취가 풀리자 할머니는 육두문자로 통증을 호소했다. 진통제를 많이 주면 호흡곤란이 올 것 같고 소량만 주면 통증이 너무 심해 재활 치료를 바로 시작할 수 없었다. 할머니의 언어폭력에 딸이 민망하게 웃으며 ‘미안하다’는 표시로 윙크를 해 보였다. 이틀 후, 통증이 많이 사라지자 물리치료를 시작했다. 그러나 다친 쪽 다리는 힘을 줄 수가 없어 다치지 않은 쪽만 이용해 움직이는 일은 여간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5분도 못되어 가쁜 숨을 몰아 쉬며 더 이상은 못하겠다며 두 팔을 내저었다.

환자가 자신의 상황을 잘 인지해 바로 집으로 퇴원하는 것이 힘들고, 퇴원시 도움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가 바로 내가 이야기하기 시작할 차례다.

“할머니, 수술은 잘 끝났습니다. 이제 재활 치료가 반드시 필요한데 퇴원 후 집엔 간호해줄 사람이 없네요. 젊은 사람들은 모두 일을 나가고 딸은 증손자를 보기 위해 손자네 집으로 가신다면서요. 그래도 자식들 집으로 퇴원해 가실래요, 아니면 재활 간호를 할 수 있는 노인요양원으로 보내드릴까요?’

“아, 거기. 예전에 한 번 간 적이 있지. 그땐 폐렴이 걸렸었을 땐데 말이야. 회복되는 시간이 좀 길었지. 거기, 나쁘지 않더라. 호텔 룸서비스처럼 잘 차려진 밥상을 내 코앞까지 갖다주질 않나, 스크린 텔레비전도 있지, 널따란 독방이지, 게다가 물리치료실에 가면 사방이 유리로 돼 있어 그 옛날, 남편과 함께 추던 탱고 생각도 나고 말이야, 댄스홀이 멋졌거든. 그래, 거기 가지 뭐. 사람들은 요양원이라고 다들 우중충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건 아니야. 난 거기 있었을 때 아주 편했어. 청소할 필요가 있나, 끼니 걱정할 이유가 있나. 하하하.”

옆에 서 있던 80세의 딸이 어쩔 줄 모른다.

“그러니까 엄마. 제가 우리 집에 모신다고 했잖아요. 말을 안 들을 땐 언제고….”

“너희 집보다는 내 집이 낫고, 거긴 말이야 일종의 호텔 서비스 같은 게 항상 있다는 거야. OK! 퇴원할 때가 되면 그곳으로 보내줘. 그런데 한 가지 더 부탁할 것은 말이야. 이제 무슨 일 있어도 다시는 수술 같은 것 안 할 거야. 그냥 갈 수 있게 해줘. 내가 가야 할 곳은 저 산 넘어 평화로운 그곳뿐이야. 하느님이 날 목 빼고 기다리신단 말이지.”

환자에게 위급한 상황이 생겨도 심폐 소생술이나 인공호흡기 다는 것을 하지 말고,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돌아가실 수 있도록 해달라는 ‘어떤 경우에도 응급조치를 취하지 말라’는 의미인 보라색 DNR(Do Not Resuscitation) 스티커를 찾아 차트에 붙이고 보라색 팔찌를 채워드렸다.

컴퓨터에 입력돼 있던 할머니에 관한 병력을 요양원에 송고하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어느새 춘설은 사라지고 앙상했던 나뭇가지에 작은 잎들이 봉곳이 얼굴을 내밀고 있다. 계절은 또 이렇게 오고 있었다. 퇴근 후에 봄옷들을 챙겨 먼지를 털어놓아야 할 것 같다.

콜로라도의 폭설

3월이 되자 봄기운이 제법 따스하다. 성급한 마음으로 봄을 준비한다. 내가 기억하는 한국의 봄은 색깔이 참 곱다. 흰 꽃잎 뚝뚝 떨구는 백목련, 멀리서 보면 노랑의 폭포를 이루는 개나리, 산 전체를 붉게 물들이는 진달래, 함박꽃눈을 선사하는 벚꽃, 나지막하게 핀 연산홍까지 초록과 연두를 바탕으로 한 폭의 고운 유채화를 그린다.

산 아래 동네의 봄은 고개를 내밀고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겨우 온다. 죽은 것 같았던 고목에서 새순이 돋는 것으로 시작하다가는 봄을 시샘하는 춘설이라도 내리면 어리고 연한 잎은 금세 얼어버린다. 늦된 것들만 여름을 맞으며 금세 웃자라 한 순간 진초록 함성을 내지르고 만다. 순간, 계절을 바꿔버리는 이곳의 봄은 낯설기만 하다.

폭설이 내렸다. 차고 문을 올리니 눈이 무릎 위까지 빠질 만큼 쌓였다. 차를 뺄 수 있게 눈을 치우고 남편은 길이 좋지 않아 위험하다며 날 데려다주겠단다. 눈이 왔다고 일을 안 가는 것을 상상해본 적이 없던 나는 조금 늦기는 했지만 남편이 데려다준 덕택에 출근을 했다.

그러나 12층 사무실은 유령의 집처럼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아무도 출근을 하지 않았다. 폭설로 도시 교통이 마비되어 입·퇴원이 안 되는 것은 물론, 아주 급한 환자나 대형 사고가 아니면 응급실로 올 경우가 거의 없으므로 이런 천재지변 이상기후에는, ‘폭설로 인한 결근’이 용납된단다. 폭설로 도시 전체가 설국(雪國)으로 변하며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면 결근을 해도 되는 충분한 핑계가 된다는 것도 나중에야 알았다.

케이스 매니저가 된 지 겨우 석 달이 지난 새내기가 혼자 처리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환자 입·퇴원도 없고 의사들 지각사태가 속출해 예정됐던 모든 수술은 전면 취소되었다. 응급실도 음산하리만큼 조용했다. 거리에는 차도 사람도 없어 눈사태로 인한 사고도 거의 없었다. 각 병동도 현재 입원해 있는 환자들만 계속 돌보면 되었다. 시간을 보내기 위해 컴퓨터를 켜니 이곳의 기후 상황과 눈사태의 심각성을 모르는 곳에 본부를 둔 의료 보험회사들로부터 온 메시지들이 있었다. 환자들이 왜 퇴원하지 않았느냐? 임상적으로 무슨 문제가 있느냐? 언제 퇴원시킬 것이고, 어디로 퇴원시킬 것이냐 등등. 내가 맡은 병동의 환자가 아니어도 일일이 답을 했다. 현재 천재지변의 비상사태이므로 아무도 퇴원할 수 없다는 것과 다음 날 기상상태가 좋아져 각 층 케이스 매니저가 출근하면, 환자의 상태를 자세히 알려줄 것이고 퇴원 정보 등도 보내주겠다고. 그리고 각 층을 돌아다니며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은 없는지 알아보았다.

그래도 시간은 겨우 오후 2시를 지나고 있었다. 남편이 날 데리러 왔다. 집들도 거리도 낮은 언덕들도 온통 순백색인 도시. 차선이 어디인지 신호등은 무슨 색깔인지 구분이 안 되는 거리를 거북이걸음으로 퇴근했다. 다음 날, 디렉터는 내가 출근했었다는 것을 알고는 깜짝 놀라는 눈치였다. 그런 기후 속에서 출근하다 다치면 더 큰 문제가 될 수 있으니 그럴 땐 집에서 쉬어도 좋다는 것이다. “내 사전에는 눈 때문에 출근을 안 하는 일은 없다”고 하자, 이 도시는 다르단다. 여기서는 그런 이유가 통한다고. 목숨을 담보하는 출근은 제발 하지 말란다. 그러나 보험회사에서는 현지의 상황을 알려줘서 고맙다고 속속 연락해왔다. 눈 속을 뚫고 갔던 출근길, 새로 시작한 도전에 점수를 보태는 일이 되었다.

폭설은 아직도 이 도시가 낯선 이들에게 계절을 지나는 길목에서 두려운 복병이 되어 기다리고 있다.

다시 돌아온 중환자실

내가 근무하는 병원은 두 개의 병동을 갖고 있다. 하나는 산부인과와 소아과를 중심으로 하고, 또 하나는 중환자실을 중심으로 층마다 일반내과, 일반외과, 정형외과, 신경외과, 심장내과 등으로 나뉜다. 병동마다 매니저가 있고 케이스 매니저는 병동의 매니저 및 의사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환자 돌보는 일을 한다. 의사가 환자의 치료에 중점을 둔다면, 병동의 매니저는 간호사들의 질적인 간호에, 케이스 매니저인 나는 환자의 경제적인 측면까지 염두에 두고 최적의 치료와 간호를 받아 최상의 결과를 갖고올 수 있느냐는 것에 중점을 둔다.

정형외과 병동에서 2년쯤 지나자 새로 시작한 케이스 매니저 역할에도 이력이 붙었다. 어떤 경우도 당황하지 않고 차근차근 풀어가다보면 해답은 늘 있었다. 도시 곳곳에는 주민들이 이용할 수 있는 유용한 프로그램이 많아 행려환자나 궁핍하고 무보험인 환자에게 적지 않은 도움을 준다. 비싼 약을 구입해야 하는 경우 최소한의 금액으로 살 수 있게 도와주는 프로그램도 있다. 또한 커다란 제약회사들은 환자를 보조하는 프로그램이 있어 비싼 신약을 공짜로 공급해주기도 한다. 보건소 같은 곳은 주민이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다. 이런 프로그램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거나 그곳에 직접 연결해 주기도 한다.

환자가 퇴원한 뒤 갈 곳이 없다면, 무숙자 홈을 소개해 주기도 한다. 주민이면 공공 보건기관을, 사회보장번호가 없는 불법체류자이면 병원 안의 프로그램을 이용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군 퇴직자이면 가장 가까운 곳의 군인병원을 이용하게 주선한다.

환자들이 입원해 있는 동안 완벽한 퇴원준비가 되어야만 퇴원 후의 혼란을 막을 수 있다. 퇴원 준비를 위해서 하루에도 몇 통의 전화를 해야 하는지 모른다. e메일도 물론이다. 병원 내에서 쓰는 휴대전화를 점심시간은 물론 화장실에 갈 때도 들고 다닌다.

그러던 중 중환자실 케이스 매니저 자리가 비었다. 중환자실의 임상 경험이 제일 많았던 나는 자동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늘 까칠하게 대했던 젊은 간호사도, 나의 악센트와 문화의 차이를 염려했던 중환자실의 매니저도 그대로 자리에 있었다. 직장 생활에서 관계는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므로 중환자실 케이스 매니저가 되어 돌아가는 데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중환자실로 돌아가 케이스 매니저 일을 이렇게 잘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욕심도 동시에 생겼다.

돌아온 곳. 촉각을 다투는 곳. 다시 심호흡으로 마음을 다잡고 일을 시작했다. 매일 오전 9시30분, 라운딩이 있다. 환자를 직접 간호하는 간호사로부터 환자 상태를 듣고, 문제를 지적하고, 다른 분야의 의료팀과 의견을 나누고, 기록해 컴퓨터에 입력한다. 36개의 중환자실 침상, 라운딩에는 한 시간 이상이 족히 걸린다.

라운딩을 마치면 환자들의 상태에 따라 일의 경중이 결정된다. 이제 중요한 것부터 처리해간다. 중간 중간 환자와 보호자, 의사들과 미팅하고, 퇴원 준비시키고, 의료 보험사와 전화와 e메일을 주고받는다. 하루는 너무 짧고, 시간은 빠르게 간다.

일하는 동안 만나는 이야기들은 저마다 각각의 사연이 있다. 내 인생 이야기일 수도 있고 이웃이나 사랑하는 사람, 혹은 지나가는 행인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들의 이야기를 만나며 함께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한다. 그리고 최대한 환자의 입장이 되어 최고의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중환자실로 돌아와 몇 달 지난 뒤부터 까칠했던 간호사나 내 능력을 의심했던 매니저와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듯 잘 지내게 됐다. 또 한 번 ‘시간은 약이다’라는 생각을 했다. 최선을 다하는 나 자신의 등을 두드려주고 싶다. 이젠 누구도 내 영어를 흠잡거나 내가 준비한 퇴원 계획에 트집을 잡지 않는다.

(다음에 계속)

Source: 신동아 2010년 11월 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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