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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물망초

2011.09.15 00:57

오세윤*65 Views:5123





         


         

        물망초


                                                                  오 세 윤


         지난 칠월, 어렵게 신미자선생을 봤다. 대학병원 구내 함춘회관 1층 로비. 미국에서 산부인과 전문의로 살고 있는 채도경 동문의 고국방문 환영모임이 2층 중식당에서 6시에 예정되어 있었다. 모임 시작 20분을 남겨두고 회관에 들어섰을 때 로비에는 신선생이 채동문 부부와 삼성병원의 박승철 동문과 자리를 같이하고 앉아 한창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졸업 후 처음 만나는 채동문도 반가웠지만 나는 이 자리에서 신 선생을 볼 수 있는 게 더 기뻤다.
         

         신선생은 지난 1월, 같은 급우였던 남편을 잃은 후 전화조차 끊고 두문불출해온 터라 모임에 나올지는 번신반의하고 있던 참이었다. 발병 불과 석 달 만의 불의의 불상사였다. 고 조강희동문과 신선생은 117명 대학 졸업 동기 중 유일한 클래스커플이었다.
         

         이야기를 주고받던 신선생이 들어서는 나와 박병일 동문을 보자 까딱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그만 가야겠다며 몸을 일으켰다. 조금 기다렸다 모임에 참석해야하지 않겠느냐는 만류에 그녀는 동기들을 보면 볼수록 더 조선생이 생각나 힘들다며 그냥 걸음을 옮겼다. 평소 신선생의 매운 성정을 아는 터라 더 이상 붙잡을 수 없었다. 짙은 회색 슈트 차림, 흐트러짐 없이 꼿꼿한 자세로 걸어가는 뒷모습에는 슬픔을 이겨내려는 강인한 의지가 그대로 나타나 있었다. 소아과 전문의 신선생, 우리는 예과에 입학해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녀를 ‘신군’이라 불러오고 있다.
         

         신군을 처음 본 건 대학 입학시험장에서였다. 의과대학 캠퍼스엔 교실이 모자라 건너 성균관대 교실을 빌려 시험을 치렀다. 내 옆줄 서너 좌석 앞, 검정에 가까운 진 감색 헐렁한 교복을 입은 비리비리한 여학생, 얼굴이 백짓장처럼 파리한 그녀를 가리키며 누군가가 이화여고 수석이라고 했다. 그리고 입학해 예과교실에서 다시 보게 됐다.
         

         120명 정원인 의예과에는 여학생이 둘이 입학했다. 예의 수재 신군과 산부인과 김석환교수의 따님 김명자선생, 피아노를 전공하려던 그녀는 부친의 강권에 못 이겨 마지못해 의과대학에 입학했다. 둘은 항상 붙어 다녔다. 교실에서도 교정에서도, 심지어 화장실까지도 함께 다녔다. 달걀형 얼굴을 한 마른 체형의 신군과 아직 여드름자국이 선명한 맏며느리타입의 김 군, 동료들은 두 사람을 위하면서도 놀렸다. 여름이면 코티 분 빈 곽에 두꺼비를 넣어가지고 와 책상서랍에 넣는가하면, 때로는 달걀을 종이에 싸가지고 와 가방에 넣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몇몇이 기사도를 발휘해 범인을 색출해 분을 내기도 하고 그녀들을 위로하며 대신 용서를 빌었다.
         

         본과에 올라가서도 신군은 항상 최 상위권의 모범생이었다. 심심치 않게 재시험에 걸리는 우리들 몇몇, 르네상스나 돌체 등을 돌며 음악에 젖거나 테니스를 하고 당구장을 전전하는 하위그룹과는 차원 다른 모범 학구파였다. 그녀만은 못했지만 조강희동문도 신군이나 같은 상위 그룹으로 우리들과는 별로 어울리려하지 않았다. 모범생이거나 아니거나를 막론하고 우리들 어느 누구도 재학 중 그녀들과 염문을 만들지 않았다.
         

         우연찮게도, 서울대학병원에서 인턴을 마친 신군은 재학 중 미국의사시험에 합격해 졸업한 그해 8월 미국으로 건너 가 수련을 받고 있는 조동문이 있는 클리블랜드에 가게 됐다. 수련하는 병원을 달랐어도 만리타향 낯선 이국땅에 와 같은 지역에 근무하면서 둘은 클래스메이트에서 짙은 우정으로, 그리고 연인사이로 발전했다. 자연스러운 경과였다.
         

         하지만 생각지도 않던 난관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상주가 고향인 조동문은 풍양 조씨  종손 가문 태생으로 집안이 완고했다. 부모는 근본 모를 서울태생 며느리는 못 맞겠노라며 둘의 결혼을 한사코 불허했다. 타도사람과의 결혼도 허하지 못할 터에 연애결혼이 웬 말이냐며 완강하게 혼인을 반대했다. 결국 두 사람은 부모의 허락 없이 멋대로 결혼날짜를 잡았다. 1967년 9월 30일, 마음이 편치 않았던 조동문은 급히 같은 동문인 국내의 박승철과 채도경 동문에게 편지를 띄워 도움을 청했다. 셋은 재학시절 같은 산악회원으로 함께 산을 다니며 우정을 쌓은 돈독한 사이였다. 박승철 동문이 흔쾌히 앞에 나서 조동문의 부모를 만났다.
         

         박승철동문이 누구인가. 항상 웃는 얼굴에 입심 좋고 인품 후덕한 내과의사, 차분한 어조로 조리 있게 풀어가는 그의 언변에 설득당하지 않은 사람이 이제껏 단 한 사람이라도 있었던가. 예의바르면서도 단도직업으로 상황을 설명했다. 서울대 의대는 아무나 들어 가냐, 초등학교에서부터 이화여고 졸업까지 수석을 놓친 적이 없는 재원이다. 머리만 좋은 게 아니다. 전국의 수재들만 모였다는 의대 졸업을 수석으로 했다면 보통 노력 형 인간이 아니지 않느냐. 재학시절 단 하나의 스캔들도 없었다면 품행은 증명된 것 아니냐. 인물이 남만 못 하냐 몸 어디 모자라거나 비틀린 데가 있냐. 그런 재원을 대한민국 어디 가서 맞아올 수 있겠느냐며 차근차근 신군의 인물평을 늘어놓았다.
         

         임무 120% 완수, 참으로 기이한 일은 부모님이 정해 통보한 길일이 같은 9월 30일이었다는 것. 둘은 지극히 편안한 마음으로 혼례를 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해 군복무를 마친 채동문이 미국에 들어가면서 부모님이 마련한 예단을 조·신 부부에게 전했다.
         

         전문의과정을 마친 조동문이 보증을 서준 국내 친척에 대한 신의를 지키고자 군복무를 위해 고지식하게 귀국하면서 함께 나온 신군이 내가 수련중인 J병원 소아과에 입국入局했다. 3년차가 되는 내 위 수석전공의 자리였다. 그리고 나는 그녀가 근무를 시작한 달에 메디컬센터로 자리를 옮겼다.

         지금도 혹자는 말한다. 내가 그녀 밑에서 근무하는 걸 원치 않아 병원을 옮겼노라고 -. 천만의 말씀이다. 하루 온종일을 가도 말 한마디 안하던 과장님과 그 자리를 이어받은 의욕 없고 무책임했던 선배. 그 분으로 하여 나는 응급환자를 교과서를 보며 스스로 치료해야 했고 파상풍이 걸린 신생아를 일제 강점기 때에나 쓰던 원시적 방법으로 치료해야 했다. 배울 게 없는 답답함에 나는 신선생이 오기 두 달 전부터 자리를 알아보고 결국 메디컬센터로 옮겨가게 된 거였다.
         

         신선생이 온다는 걸 미리 알았더라면 나는 그대로 J병원에 남아 수련을 계속했을지 모른다. 6·25전란으로 피란 가 3년을 허송한 나로서는 불치하문에 익숙해져 동기에게나 후배에게 배우는 게 수치스럽다는 따위 정말 논할 가치조차 없는 사치스런 체면은 벗어던진 지 오래였다.
         

         멀어져가는 신동문을 바라보며 옛 일을 더듬는 내게 그녀는 참 오상·고절五常·高節한 여인이구나 하는 깨달음이 새삼스러운 감동으로 다가섰다. 그런 존경스러운 여인이 왜 슬퍼져야 하는지 가슴이 아팠다. 이 모두 신의 질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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