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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45년 전에 다녀온 <풀이섬> 이야기

2011.08.25 15:28

김창현#70 Views:5645

    



45년 전에 다녀온 <풀이섬> 이야기

욕지도 사람들은 그 섬을 <풀이섬>이라 불렀다. 한문으론 草島였는데 풀이 많아 그러나 싶었다. 내가 하숙하고 있는 동항리 집 안주인은 풀이섬에서 시집온 여인이다. 나이 서른 중반으로 동네 여인들 중에서 꽤 예쁜 편이다. 풀이섬은 사람 사는 집이 넷이고, 경치가 퍽 좋다고 했다. 날더러 같이 가보자고 자주 말하는 바람에 어느날 따라갔었다.포구에서 뗀마를 저어 외해로 나가자 파도가 무척 거세었다. 대학서 미식축구 라이트가드 한 내가 얌전한 색씨마냥 꽉 뱃전만 붙들고 있게 만들었다. 서울 남자는 건장해도 소용없었다. 체구가 작아도 섬여인은 연약한 손목으로 능숙하게 노를 젓는다. 남쪽으로 한시간 거리에 그 섬이 있었다. 투명한 물밑에 헤엄치는 팔뚝만한 고기들이 보였다. 바람은 부드럽고, 공기는 싱그러웠다. 선착장 부근은 둥그런 만(灣)이 형성되어있었다. 언덕은 아름들이 동백나무가 무성하였다. 배가 닺자, 물끼 머금은 보석같은 자갈이 쫘르르 짜르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반짝이는 동백나무 아래 떨어진 동백꽃은 아예 붉은 카펫을 깐 것 같았다. 고갱이 타이티에서 본 풍경이 분명 이런 원색이었을 것이다. 화가가 거친 텃치로 땅바닥에 붉은 물감을 잔뜩 칠해놓은듯 싶었다.

그리운 카프리에 섬나라에,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하고,
수정처럼 맑은 바닷가에
처녀들 향기가 풍기네.

Crystal water(수정같은 맑은 물)란 표현이 문학적 수식어가 아니란걸 이곳에서 알았다. 빈 배 하나 파도 위에 한가히 흔들리고 있었다. 동백나무 숲 사이에 담 없는 집 서너개가 보였다. 장독대엔 앵두가 붉게 익어가고 있었다. 오수를 즐기던 소가 사람 기척에 고개를 들자 딸랑! 방울소리가 정적을 깬다. 호박줄기만 소리없이 초가 위로 싱싱하게 뻗어가고 있었다.
'있나?'
언니가 동생을 부르자,
'언니야!'
황토벽에 달린 방문이 열리고, 반가움 가득한 처녀 목소리가 들렸다. 미리 올 것은 알고 있던 듯 싶었다. 뜰에 내려선 처녀를 보자, 퍼뜩 언니가 왜 자꾸 나에게 풀이섬 가자고 했는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처녀는 천부적인 남국 미녀였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오뚝한 콧날, 진한 눈섶과 늘씬한 몸매. '고독'이란 영화 속의 엘리자벹태일러가 저랬다. 치렁치렁 늘어진 머리칼과 가늘고 짙은 눈섶은 리즈보다 더 예뻤다. '듀마휴이스'의 소설 여주인공 '춘희'가 저랬을 것이다. 동백꽃은 지천으로 피었겠다. 귓가에 동백꽃 꽂으면, 동백나무 춘(椿), 계집 희(姬), 춘희 아니던가. 처녀는 나에게 보들레르의 '식민지 태생의 한 부인에게'란 시를 생각나게 했다.

태양이 쓰다듬어주는 향기로운 나라에서, 나 알았었나니,
남모를 매력 지닌 식민지 태생의 한 부인을.
사람들 눈에 게으럼 뿌리는 종려나무와 나무들 뒤얽힌 아래서,
그 얼굴 핼쓱하고도 훗훗해.
이 밤색의 미녀는,
목을 점잖게 도사린채 걸으면 사냥의 여신마냥 드레지고 날씬해.
그 미소는 고요하고, 그 두 눈은 으젖.
마담, 그대 만일 영광의 쎄느강이나,푸른 르와르강가로 가신다면,
고풍의 성을 아름다이 함직도 한 미녀.

나를 보자,살짝 피해버리는 모습이 영판 사슴 같았다. 저 늘씬한 몸매로 산에서 나무하고, 바다에서 뗀마 젓고, 물속에 자맥질하며 살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부지는?'
'밀감나무 심으러 산에....'
대답하면서 나를 의식한 처녀의 얼굴이 붉게 물든다. 수줍음이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이었던가. 계산된 교태와 수줍음의 차이였다. 인공과 자연의 차이였다. 동백꽃같은 처녀에게 동백새처럼 날개 퍼덕이며 힘차게 날아가고 싶었다.
'나 아부지 보고 오께.'
언니는 단한마듸 이 말만 남기고 산으로 가서 종일 돌아오지 않았다. 마치 흘레 시킬 암말 옆에 종마를 데려다놓은 셈이었다. 나는 대학생, 그것도 서울에 있는 이름난 대학교 학생이었다. 군대 제대한 23살 청년이었다. 글 쓴다고 원고지와 성경만 들고 섬에 나타났으니, 욕지군 전체에 나 보다 고급 신랑감은 별로 없었다.

점심 때 되자 굴뚝연기가 마당에 낮게 깔렸다. 처녀가 부얶에 들어가 불을 부친 것이다. 얼마 후 한 종지 게장과 돌나물 찬, 삶은 고구마 담긴 소쿠리 놓인 상이 내 옆에 놓였다. 처녀는 저만치 물러가 대청 끝에 앉는다.
''보이소 예! 같이 식사 좀 하입시더.'
한마듸 던지자 기척이 없다. 잠시 후 살짝 집 뒤로 돌아가버린다. 숲매미 소리만 빈 뜰을 지나간다. 뒷뜰로 따라가보니, 봉선화 옆에 선 처녀 얼굴이 봉선화보다 더 붉다. 욕지도는 주식이 고구마다. 혼자 고구마 몇 개 먹고, 날개 달린 사자가 그려진 비사표(飛獅標) 통성냥에서 성냥을 꺼내 담배 한 대를 부쳤다. 처녀는 하얀 사기대접에 물 한그릇을 뜨와 내곁에 가만히 놓더니 저만치 대청 끝에 앉는다.
'저 꽃 이름은 뭐라꼬 합니까?'
그러자 처녀는 얼굴만 빨개진다. 말은 없다. 사실 그 꽃이름은 유도화다. 나는 그걸 안다. 잎은 버들같고 꽃은 복숭아꽃 같다고 유도화(柳桃花)다. 인적 없는 섬에 핀 유도화는 너무 고왔다. 고추잠자리 몇마리 이리저리 뜰 위로 날아다녔다. 처녀는 삶은 볏짚을 바가지로 소에게 갖다주었다. 소는 코뚜레 위로 혀를 날름 내밀어 처녀의 손을 햟는다.
'소가 몇 살 짜리요?'
처녀는 다시 얼굴만 붉힌다. 박목월의 시가 생각났다.

산이 날 에워싸고 씨나 뿌리고 살아라한다.
밭이나 갈고 살아라한다.
어느 산자락에 집을 모아 아들 낳고,
흙담 안팍에 호박 심고,
들찔레처럼 살아라한다.
쑥대밭처럼 살아라한다.
산이 날 에워싸고, 그믐달처럼 사위어지는 목슴,
구름처럼 살아라한다.
바람처럼 살아라한다.

지붕까지 추욱 가지를 덮은 마당의 감나무는 풋감을 주렁주렁 매달았다. 저 처녀와 여기서 들찔레처럼 살아볼까? 온갖 생각이 오갔다. 해거름에사 산에서 내려온 노인은 나에게 매우 친절하였다.
'면에서 밀감나무 무상으로 갖다주면서 심으라캐싸서....'
묻지도 않은 설명을 나에게 했고,
'아부지! 제주도는 밀감 심은 집은 자식 대학공부 시킨다 않캅디꺼? 3년만 있으모 우리도 수확하제요?'
언니는 누구 들으라는 것인지 해설을 단다. 당시는 밀감재배를 관에게 권장하던 때다.

늦게사 뗀마선 타고 바다로 나오니 섬 꼭대기 구름은 주황빛이다. 그 황홀하던 누리의 금빛은 지금도 생각난다. 파도가 금빛 어둠 머금자, 어느새 저멀리 처녀네집 등불이 빤짝이고 있었다. 아주까리 장명등일 것이다. 등불빛은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나에게 손짓하고 있었다. 달빛은 노 저을 때마다 하얀 은파를 일으켰다. 처녀를 생각하며 장만영의 시를 생각했다.

순이 벌레 우는 고풍한 뜰에
달빛이 조수처럼 밀려왔구나.
달은 나의 뜰에 고요히 앉았다.
달은 과일보다 향기롭다.
동해 바다물처럼 푸른 가을 밤 포도는 달빛이 스며 곱다.
포도는 달빛을 머금고 익는다.
순이 포도넝쿨 아래 어린 잎새들이 달빛에 젖어 호젓하구나.

 저 섬은 멀지않아 오렌지 향기 바람에 날리는 낙원이 될 것이다. 아름들이 동백은 해마다 붉은 카펫을 깐듯 해변을 수놓을 것이다. 내가 지금 만약에 마음만 먹는다면, 저 섬에 서식하는 소라 전복 미역과 조개와 게와 해삼 멍게, 혹돔 감성돔 우럭 그 모든 자원들이 누구 것이랴. 노인이 심은 밀감나무는 누구 것이랴. 만약 그때 내가 마음만 먹었다면, 풀이섬은 나만의 유토피아가 될 수 있었다. 노를 저으며 계속 나의 눈치를 살피는 그의 언니에게 그때 내가 만약 살짝 한마디 언급만 했더라면, 나는 평생 낙원의 연인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처녀는 외모도 아름다웠지만, 그 마음은 도시의 오염된 그 아무 것도 그려지지않은 그야말로 Tabula rasa(白紙) 아니던가. 철학도로서 아름다운 섬처녀와 꽃과 약초를 가꾸는 인생도 시도해볼만한 한 아름다운 인생이었다.

아! 그러나 나는 끝내 실수하고 말았다. 황야에 핀 한송이 백합을 외면하고, 솔로몬의 영화에는 아예 미치지도 못할, 그 번잡하기만한 도시로 무얼 바라고 나왔던지 모르겠다.



바위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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