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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강민숙의 연재수필] 홍천댁 15 - 들밥

2011.08.30 03:02

이기우*71문리대 Views:5731

[강민숙의 연재수필] 홍천댁 15



15. 들밥


농촌에서 논이나 밭에서 일하다가 먹는 밥을 들밥 이라고 했고
일밥 이라고도 했다.
여럿이 모여서 일 하는 날 음식 준비 하는 것을 일밥 한다고 했다.

외숙모와 이모가 점심을 준비 하는데 갑자기 함지박을 머리에 인
홍천댁이 외갓집 부엌으로 들어섰다.
헝클어진 옷 매무새며 발도 적시고 벌건 얼굴색이 예사 일이 아닌 것
같았다.

외숙모님이 자네 왠일인가 하며 우선 머리에 이고 있는 크지 않은
함지박을 받는다.
통나무를 파서 만든 함지박들은 참 정겹다.
통나무 결대로 파서 이음새 없이 만든 함지박은 대부분 동그랗기
보다는 직사각형에 가깝고 모서리와 양쪽 손잡이 전만 둥굴린다.
나무 길이로 길게 잡은 양쪽에 손잡이로 넙죽한 전을 붙여 깍고
통나무의 굵기를 살린 다른 양쪽은 짧은 전의 시늉만 붙여둔다.
듬성 듬성 파낸 자국이 보이는 투박스러운 거무틔틔한 나무결이
닳고 닳아 반지르르 하게 기름이 흐르는 크고 작은 층층의 나무
용기는 쓸모도 많다.
떡 반죽도 하고 김치를 버무리기도 하고 들에 음식 나를 때는
작은 함지박에는 음식을 담고 큰 함지박은 광주리 처럼 그릇을
담아 나르고 푸성귀를 뽑아 담기도 하고 빨래를 담아 나르기도 한다.
그릇이 귀한 그때 시골에서는 혹시 갈라진 함지박이라도 버리지 않고
헝겊을 풀칠해 바르고 발라서 마른 곡식을 담아 쓰고 했다.

외숙모님이 받아든 함지박 안에는 밥과 몇 개 안되는 반찬이
그릇들과 뒤죽박죽 업으러져 있었고 홍천댁의 흐트러진
머리위의 똬리 마저 축축히 젖어 있었다.

“들밥 이고 나가다 넘어 졌구만. 다친데는 없는가” 하고 외숙모가 물으시니
“성님 다친데는 없는데 저어.. 저어.. 큰 아주버님..” 하며 홍천댁이
말을 잇지 못하며 울먹인다.
이모가 무슨 낌새를 챘는지 재빠르게 나서며 흥미롭게 홍천댁을 다구친다.
“언니 잔 언니 우리 큰오빠 앞에서 넘어 졌수?”
홍천댁은 말도 못하고 눈물이 그렁하며 고개만 주억 거린다.
“언니 어쩌다 호랑이 같은 오라버니 앞에서 넘어 졌수?
저런 쯔쯔쯔....우리 오라버니가 떠다 밀었수?”
모두들 말 같지도 않은 이모 말에 헛 웃음을 흘리고 홍천댁은
이모한테 눈을 흘긴다.
“언니 잔 언니 빨리 말해 봐요. 어떻게 넘어졌나. 시아버지 보다 더
어려운 시아주버님 앞에서 넘어지다니 잉 호호호..”
이모는 새로울 것이라고는 없는 이 무료한 농촌의 한나절에 어디 큰
구경이라도 보려는 듯 콧소리도 섞어 응석까지 부린다.

홍천댁이 들밥 함지박을 머리에 이고 목화밭 김매러 가신 시어머님 점심을
이고 논두렁을 걸어가는데 공교롭게 나의 큰 외숙과 마주치게 되었단다.
그냥 되돌아 서기도 쑥스럽고 좁은 논두렁에 마주 보고 다가가는 것도
민망 하여 큰댁 시아주버님께 인사드리며 조금 옆으로 비껴 서려고
하던 차 그만 논두렁 가장자리로 발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기우뚱 중심을
잃고 함지박을 쏟아 뜨리며 머리의 똬리까지 논물에 적시고 말았단다.

나무 광이 딸려 있는 안방 폭의 갑절이나 되는 외갓집 부엌은 넓었다.
대문 같이 빗장 달린 부엌 앞문을 열고 들어가면 부엌을 반쯤 가릴 수
있는 나무 창살 칸막이가 있는 조그만 공간이 있어 황토벽에는 소쿠리나
바가지를 매달아 놓았고 씨갈무리로 마른 옥수수가 흰 껍질을 머리
따여서 매달려 있고 용트림 하듯 잘 여문 누런 조이삭이 휘청거리는
보라색 수수 이삭들과 치마 저고리 같은 조화를 이루며 매달려 있다.
높이 매달아 논 마른 쑥이나 국화 같은 건재는 동네 약방 노릇도 한다.
손쉽게 똬리를 걸어 놓을 수 있게 대못도 몇 개 박아놓았다.

부엌은 여자들의 전용이니 이 공간은 일꾼이 나무 지게나 물 지게를
부릴 수 있으면서 남녀 내외를 할 수 있는 공간의 여유를 주고 있다.

부엌 바닥은 높고 낮은 서너 개의 층이 있다.
부뚜막에 여러 개의 가마솥을 걸고 불을 때는 아궁이는 한 단계 낮게
있고 부엌 바닥의 가운데는 제일 넓으며 통로처럼 뒷문까지 곧게 나 있다.

아궁이 반대편 집의 가장자리 쪽으로는 한 단계 높여서 나무광이
있는데 장작보다 검불을 많이 때든 6.25때는 천장까지 쌓인 검불도
이삼일에 다 없어지니 넓은 공간이 필요 했다.
나무광 옆으로 항아리들을 땅속에 파묻어서 김장 말고도 겨울에 물이나
음식이 얼지 않게 보관 했고 그 옆 끝으로 살광이라고 찬장이나
선반을 층층으로 만들어 그릇들과 반찬을 보관했다.

이모는 얼른 빈 함지박을 머리에 이고 홍천댁 미끄러지는 시늉을 낸다.
“언니 잔~언니 저 좀 보세요”
이모는 한 계단 낮은 아궁이 부엌바닥을 논바닥으로 보라고 하면서
연기를 한다.
함지박을 머리에 이고 살랑살랑 걸으며
“아주버님 안녕 하~세~~~ㅇㅇ 미끄덩!! 했지요?”
하면서 허리를 구부정하니 함지박을 쓸어 안으며 부엌바닥에서
한 계단 아래로 발을 쩔룩 내려 놓는다.
외숙모는 여전히 빙그레 웃으시고 이제는 홍천댁도 안 웃고 못 배긴다.
이모는 리허설도 한 두번 해가지고는 모자라는 듯 또 하고 웃기고 젖은
똬리 까지 머리에 얹고 반복 할 때마다 대사도 덧붙여지고 몸짓도 더
우스꽝스러워 진다.
“잔 언니 그래 우리 큰 오빠가 메다친 그릇 좀 주워 담아 줍디까?”
이모가 다시 짓꿎게 홍천댁에게 묻는다.
“아니요. 잔 아씨 차라리 그냥 모르는 체 빨리 지나 가시는 게 더 나았지요”

그 시절에 양반 체통을 유지하려면 큰 외숙의 입장은 어떠해야 했을 가.
지금도 나는 가끔 그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 했어야 좋았을 것인가
고민 할 때가 있다.
아무리 남녀유별 체통 앞세우는 미풍양속이라 해도 곤경에 빠진 사람
거들어 주는 것이 불편한 풍습 이라니 가슴이 답답하다.

얘기 하나 보태자면 미국 살러온 어느 분이 미국에서 살자면 흔히 써야 할
“May I help you?" 를 소리내어 연습하고 살면서 때때로 요긴 하게 썼단다.
하루는 운전도중 경찰에게 과속으로 정지를 당했단다.
경찰이 차문 앞으로 다가오자 이분이 차 창문을 열고 자기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경찰에게 한 말이 “May I help you?" 이었다나.
경찰이 기가 막혀 대답은 안하고 하늘을 보고 웃었다고 했다.
서양 풍속은 남자들이 여자들을 잘 도와주는 것 같다.

어느새 외숙모는 갈아 신을 깨끗한 홋버선도 가져다주며 홍천댁 함지박에
점심을 챙겨 빨리 들고 나가라고 하신다.
이모도 작은 어머니 보러 간다고 나선다.
그냥 조용히 나갈 이모가 아니다.
“시앗을 보면 돌부처도 돌아앉는 다는데 우리 생불 잔어머니께서
어찌 앉아 계신가 보고 올께요. 잔 언니 새시엄씨 사랑 많이 받아요?”

또 하나의 희극이 연출될 판이다.
외숙모야 그저 웃고만 계시니까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다.
오죽하면 내메친 함지박을 이고 집으로 안가고 큰댁으로 찾아 왔을가.
홍천댁은 시앗 시어머니 계신 내집 부엌보다 친정 같은 큰집 부엌이
훨씬 마음이 편했을 거다.

이모는 울던 사람도 웃기는 재주가 있다.
망신스럽고 어색했던 홍천댁도 울고 웃다가 이제는 얼굴이 환해졌고
앞으로 두고두고 되씹으며 추억의 명화를 회상 하듯 그 날들을 그리워 한다.
시앗을 본 작은 할머니도 비극의 주인공이 아니라 이모의 각색으로
곧 희극의 주인공으로 등장할 것 같다.

이모는 홍천댁을 따라가서 들밥을 먹기로 했다.
물론 나도 따라 나섰다.
나는 찌그러진 양은 물주전자에 시원한 우물물을 길어 들고.

2011.4 강민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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