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7.10 12:16
This is from our high school home page that I would like to share with you. * * * * * * * * * * * * * * * * * 아름다운 청년이군!대학 교단에 30 여년 서다보니 이런 저런 제자들과 얽힌 일화가 많다. 거기에도 어쩔 수 없이 인간의 희노애락과 삶의 명암이 얽혀있다. 그러나 그 대부분은 시간과 더불어 미화되어 아름다운 추억으로 뇌리에 남아있다. 아래 소개하는 일화는 오래전 내 첫 번째 장관하던 때에서 시작해서 이후의 교수시절, 그리고 오늘까지 이어지는 긴 드라마 이다. 이야기가 길어 독자들이 지루하지 않을까 걱정인데, 나에게는 인연(因緣)이라는 개념을 생각하게 하는 매우 아름답고, 소중한 삶의 체험이다. II. 내가 교육부장관에 취임한지 두어 달 지난 1996년 초, 나는 MBC TV의 “어린이에게 새 생명을”이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소아암, 백혈병 어린이들에게 희망을 심어주기 위한 일종의 ‘디너 쇼’ 였는데, 투병 중의 어린이들과 더불어 유명 연예인, 정치가, 사회인사 등이 함께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행사 도중 나는 바로 옆에 앉았던 까까머리, 하얀 얼굴, 가녀린 몸매의 소년과 얘기 를 나눴다. 얼핏 10살 미만으로 보였는데 나이를 물어보니 15살이라서 깜짝 놀랐다. 뇌종양으로 수술 후 항암치료를 받고 있었는데, 무척이나 연약해 보여 애처로운 모습이었다. 그러나 밝게 웃 고, 이야기도 곧잘 했다. 프로가 끝날 무렵, 나는 이경용이라는 이름의 그 꼬마에게서 전화번호와 주소를 받았다. 그 날 이후, 경용이의 핏기 없는 해맑은 얼굴이 자주 떠올랐다. 눈에 밟힌다는 얘기가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그래서 이따금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걸 때 마다, ‘혹 그의 병세가 악화되 면 어쩌나’ 하는 걱정 때문에 가슴이 조였다. 그러나 경용이는 언제나 반갑게 전화를 받으며, 낭랑한 목소리로 “괜찮아요, 나아지고 있어요”라고 대답했다. 경용이 엄마와도 대화를 나눴다. 다행히 조금씩 차도가 있다는 말씀이셨다. III. 이후 나는 장관을 그만두고 대학으로 돌아왔다. 1998년 9월 학기 학부 강의는 1학년 <한국정부론>이었다. 수강학생이 100명이 훨씬 넘어 대형 강의실에서 마이크로 강의를 해야 했다. 그래서 첫 시간에 학생들에게 “누가 한 학기 동안 마이크를 책임져 주어야 하는데, 어디 자원병 없나”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내 얘기가 떨어지기 무섭게 한 학생이 손을 번쩍 들며, “제가 맡겠습니다” 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런데 실제로 강의 마이크를 책임진다는 일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 강의시간에 앞서 매번 대학 사무실에서 마이크를 받아와 강의에 차질이 없게 장치를 해야 하고, 강의가 끝나면 마이크를 사무실에 되돌려 주어야 하기 때문에 여간 부지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원강이라는 이름의 사회과학계열 1학년 학생은 무척 세심하게 이 일을 성실히 수행했다. 강의 탁자위에 마이크는 언제나 볼륨이 제대로 조율이 되어 있었고, 강의 도중 어쩌다 마이크에서 잡음이 들리거나 문제가 생기면면 부리나케 뛰어 와서 적절히 손을 보았다. 완벽한 ‘기계치’인 내게 없어선 안 될 존재였다. 그 학기 강의를 하면서 나는 이 친구가 이렇게 고생을 했는데, 혹시 성적이라도 나쁘면 미안해 어쩔까하는 걱정을 자주 했다. 나는 언제나 이름을 가리고 채점을 하기 때문에, 점수에 사적 감정 이 개입될 수 없고, 혹 그것이 가능하더라도 마이크 수고를 점수에 가산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내 우려는 기우에 불과했다. 이원강 군의 한국정부론 점수는 당당히 A학점이었다 . 그 학기 이후 이원강군은 눈에 띠지 않았다. 1학년을 마치고 군에 갔으려니 생각을 했다. 그리고 두 해가 흘렀다. 2001년 8월, 여름 방학 때라 가끔 연구실을 걸렀다. 그 날도 하루를 쉬고 다음날 연구실을 나갔다가 대학 사무실에 들렸더니, 여직원이 “그러잖아도 연락을 드리려했어요. 어제 학부형이라는 아주머니 한 분이 어린 자제와 함께 오셔서 케이크를 놓고 가셨어요”라며, 내게 조그만 쪽지를 건넸다. 거기에는 전화번호와 함께 <이 원강 엄마>라고 쓰여 있었다. 마이크 수고를 했던 이원강 군이 떠올랐다. 원강이 어머님이 웨 나를 찾아 오셨을까 무척이나 의아해 하면서, 곧바로 전화 다이얼을 돌렸다. 그런데 웬걸 전화를 받는 쪽 여자 분 목소리가 무척 귀에 익었다. 의아했다. 그래서 내가 그녀에게 원강이 어머님이냐 확인을 하자, 저쪽에서 “ 네, 맞아요. 교수님, 경용이가 병원에 왔다가 꼭 선생님 뵙겠다고 해서 찾아뵙던 거에요”라는 게 아닌가. 나는 잠시 혼란스러워져서 머뭇거렸다. 그리고는 “아니 그럼 이원강 군이 경용이 형이란 말씀이세요”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저 쪽에서 “ 그럼 교수님 아직까지 원강이가 경용이 형인 것을 모 르셨었어요”라며 되묻는 게 아닌가. 나는 너무 놀라 “세상에 이런 일이, 저는 전혀 몰랐습니다. 거짓말 같은 인연이네요”라고 대답했다. Ⅳ. 그 해 10월, 이원강 군이 제대를 하고 내 연구실을 찾았다. 그리고 아래와 같이 그 간의 내력을 이야기 했다. 원강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그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동생 경용이가 뇌종양을 앓게 되었다. 계속 생사를 넘나들었다. 가뜩이나 가난한 살림에 동생마저 중병에 걸리니 집안이 말이 아니었다. 세상이 원망스럽고 삶의 의욕도 떨어져 방황하기 시작했다. 그 전까지 1,2 등을 다투던 원강이의 성적은 크게 떨어졌다. 그런 가운데, 무엇보다 기득권세계에 대한 불만이 증폭되어 마음속에는 늘 모든 기성권위와 권력과 부를 가진 자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차게 되었다. 그럴 즈음, 병원에 입원 중이던 경용이가 “어린이에게 새 생명을”에 출연했다. 경용이가 그곳에 다녀 온 후, “교육부 장관님이 전화하셨어”라고 말할 때도, 원강이는 “흥, 인사치례로 한번 전화 한 거야. 분명 또 연락하지 않을 거야”라고 단언했다. 그러나 안 장관이 가끔 연락을 하여 경용이를 위로하고 크리스마스 때는 작은 선물을 보내자, 마음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당시의 생각을 원강이는 이렇게 표현했다. “대한민국의 명문대 교수이자, 장관까지 하는 사람이 왜 어쩌다 스치듯 만난 죽어가는 아이에게 이렇게 따듯한 관심을 보일까? 이 나라의 많이 배우고 많이 가진 사람들은 다들 자기들 잘 먹고 잘사는 데에만 관심이 있는 줄 알았는데, 다 그런 것은 아닌가 보다” “제게 교수님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였어요. 교수님을 보면서 왠지 대한민국에 희망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나도 공직자의 길을 걸으면 어떨까. 공직자가 되어 대한 민국을 더 아름답게 만드는데 기여할 수 있으면 보람된 일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샘솟았어요. ”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리고 새 꿈이 피어오르면서, 인생의 새로운 이정표가 그려지는 듯 했다. 칠흑 같이 어둡게만 느껴졌던 세상도 다소 밝게 보이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다. 원강이는 마음을 단단히 다잡고 다시 공부에 매진했다. 무엇보다 경용이의 병세가 호전되어 회생 가능성이 높아 진 것도 그가 생각을 바꾸는데 크게 작용을 했다. 성적 은 다시 가파르게 올랐고, 수능시험도 곧장 치렀다. 지망대학과 학과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를 고려하던 중, 자신의 마음속에 공직에 대한 열망이 크게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면서 기왕이면 아픈 경용이에게 위로가 되었던 안 교수가 재직하는 연세대로 가기로 작정했다. 다행히 원강이는 행정학과가 속해있는 사회과학계열 98학번으로 합격했다. 부모님과 경용이가 안 교수를 찾아가 꼭 인사를 드리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교수 앞이 어려웠고, 개인적으로 인사를 드리는 것이 민망한 어린 20살이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 러다가 1학년 2학기에 안 교수 강의를 신청했다. 그 첫 시간에 안 교수가 마이크 책임 질 학생을 찾기에 이게 기회다 싶어 손을 번쩍 들어 자원을 했다. 그렇게라도 자신이 마음에 품었던 고마움 을 표현하고 싶었다. 그러자 안 교수는, 만면에 웃음을 띠우며, “아름다운 청년이군” 이라고 화답을 했다. 그 말이 꽤나 인상적이었다. 한창 1학년 때라 노는데 정신이 없었으나, 안 교수 마이크 심부름은 성실히 했고, 안 교수 과목만은 열심히 공부했다. 그래서 성적이 인색하기로 이름난 안 교수 과목에서 A 학점을 따서 친구들 의 부러움을 샀다. 이듬해 4월 원강이는 군에 입대했다. 군대에 가기 전에 안 교수를 찾아 자신이 경용이 형이라는 것을 밝히려 했으나, 끝내 부끄러워 그러지 못했다. ⅴ. 이원강 군은 이후 3학년 때 내 과목을 하나 더 들었다. 그 때는 강의 첫 시간에 내가 아예 그를 똑바로 처다 보며, “그럼 누가 마이크 심부름을 하지”라고 물었다. 원강이는 기다렸다는 듯이, “제가 맡겠습니다”라고 크게 대답했다. 나는 속으로 “뭔지 짜고 치는 고스톱 같네”라고 생각하며 웃었다. 이후 이원강 군은 2005년 12월에 행정고시 일반행정 서울시직열에 당당히 합격했다. ‘고시계’에 합격수기를 쓰면서 나와의 인연도 언급했다. 졸업까지는 아직 한 학기가 남았기 때문에, 그는 연수에 들어가지 않고 학기 내내 낮에는 강의를 듣고, 저녁이면 신림동 고시촌 학원에서 ‘행정학’을 가르쳤다. 인기가 드높아 수강생이 미어진다는 소문을 들었다. 어려운 집안 경제에 보탬이 되기 위해 불가피하다는 얘기도 함께 들었다. 그동안, 원강이 동생 경용이는 오랜 투병 끝에 뇌종양을 극복했다. 아직 호르몬 치료 등을 받고 있으나 이미 완쾌됐다는 판정을 받았다. 그는 아동 암병동에서 함께 암과 싸우던 어린 환우 20명 중 유일한 생존자였다. 힘든 가운데 경용이는 그간 전문대학을 졸업하고, 공인중개사 자격시험도 합격해서 생활전선에서 열심히 뛰고 있다. 씩씩하고 사내다운 형과 달리, 30이 넘었는데도 경용 이는 아직도 미소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이들 형제들과의 인연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이원강 군은 2008년에 같은 해 행정고시 재경직에 합격한 서울대 경영학과 출신의 재원과 결혼했고, 내가 주례를 섰다. 줄곧 서울시청에 근무하면 서, 2년간 미국에 유학, 석사를 취득했고, 그동안 두 아이의 아빠가 되었다. 시청에서도 유능한 중견 공무원으로 정평이 나있다. 그는 국세청에 근무하는 아내와 함께 공직자로서의 삶에 보람을 느끼며 열심히 살고 있다. 며칠 전 경용이와도 통화를 했다. “건강해요, 교수님 아무 걱정 마세요”. 경용이의 목소리는 여전히 맑고 밝았다. ⅵ. 이원강, 이경용 형제는 한 때 어둠 속을 해매였으나, 절망을 극복하고 희망의 빛을 쫓아 힘차게 앞날을 개척한 대한민국의 ‘아름다운 청년들’이다. 이들 우애깊은 형제들의 오늘의 모습은 너무 나 대견하고, 자랑스럽다. 내가 그들에게 준 것은 보잘 것 없는데, 그들은 그 작은 것을 크게 받아 들였고, 아름다운 성취를 통하여 내게 너무 큰 기쁨을 선사했다. 내가 공직, 교직 생활 속에서 그들을 만난 것은 행운이자,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 이 글을 쓰면서, 내 편의대로 기억을 재구성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래서 이원강 군에게 글을 미리 보내 감수(監修)(?)를 받았다. 2014년 6월 9일 |
2014.07.10 12:36
2014.07.10 13:25
안교수는 학창시절에 가까이는 지나지 안었지만 희미하게 기억이 납니다.
아주 조용했던 친구였고 문과반에 속했었기에 자주 볼 기회는 없었지만
He himself was a "아름다운 청년"으로 기억하지요.
위 comment난의 근황 사진을 보니, He still looks like a "아름다운 청년".
서울에서 담배, 술, 오염된 대기에 찌들고 꾸겨진 동기들 보다는 훨씬 젊고 건강하게 보입니다.
Now, we know that his attitude in life is the way to go !!
드믈게 보는 Korean의 하나입니다.
2014.07.10 21:05
A beautiful mind and precious 'In-yeon" as Beup-jeong said in the following video;
http://www.youtube.com/watch?v=RuOTuTNyHvM
( in full screen mode )
PS;
The child is father of the man.
2014.07.11 11:08
2014.07.11 12:21
현재형!
오랫만이네요.
이런 좋은 이야기를 우리들에게 나누어 주신것에 감사드립니다.
이런 좋은 마음을 가진분들이 만날때는 악연이 아닌 인연이 되는군요. 규정
2014.07.13 0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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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교수를 잠간 소개합니다.
For a Korean, he is a rather remarkable person among us.
은퇴후에는 서울을 흘적 떠나 강원도 속초부근의 산골로 이사가서 살고있읍니다.
1972.03 : 한국외국어대학교 조교수
1975.09 : 연세대학교 행정학 부교수
1986.03 : 연세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장
1988.08 : 연세대학교 교무처장
1991.01 : 한국행정학회장
1995.12 : 교육부 장관
1997.08 : 연세대학교 행정학 교수
1998.03 : 한국사회과학연구협의회장
아시아사회과학연구협의회장
2003.12 :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
2012년 6월 <연세동문회보> 인터뷰
인터뷰/기사/카툰 2012/06/11 17:25 |2012년 6월 <연세동문회보> '만나고 싶었습니다'에서
미시령고개를 지나 설악산 울산바위가 손에 잡힐 듯 풍광이 아름다운 강원도 고성에서 낙향생활을 즐기고 있는 안병영(정외 59입) 모교 행정학과 명예교수. 한 번도 되기 어려운 교육부 수장을 그것도 다른 정부에서 두 번이나 역임한 안병영 명예교수를 찾아 최근 근황에 대해 들어봤다.
퇴임하신 이후고향이 아닌 강원도에 터전을 마련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제가 산행을 좋아해서 설악산 자락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서울을 떠나 살고 싶었고, 제가 제 생활에 주인이 되고 싶어 이곳을 찾았습니다”
이외에도 1982년 서울과 지방의 교수 교류를 통해 강원대에서 1년간 생활했으며, 원주캠퍼스 초창기를 비롯해 강의 등으로 원주를 찾았고, 장관 재임 시에 교육부 워크숍을 남설악에서 개최하는 등 강원도와의 남다른 인연들을 설명했다.
요즘 어떻게 생활하고 계신가요?
“작은 농사짓고, 산에 가고, 글 읽고 글 쓰고 그렇게 지냅니다. 농사라야 나무 가꾸고 텃밭 일구는 일이지만, 봄부터 가을까지는 하루에 서너 시간 일을 하게 됩니다. 농한기인 겨울에는 공부를 많이 합니다. 아직도 ‘교수에게는 정년이 없다’는 생각입니다”
안병영 명예교수는 가끔 일이 있을 때 서울을 찾지만, 곧바로 돌아오고, 아주 드물게 특강을 하기도 하지만 가능한 대외적인 활동을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자신의 호 ‘현강(玄岡)’을 따서 만든 블로그 ‘현강재(http://hyungang.tistory.com)’를 통해 다양한 의견을 지인들과 나누고 있다.
교육부 수장으로 두 번 취임하시면서 감회가 달랐을 것 같습니다. 어떠셨나요?
“저는 김영삼 정부와 노무현 정부, 두 정부에서 교육부 장관으로 일했습니다. 첫 번째 문민정부는 민주화와 세계화의 격류 속에 있었고, 두 번째 참여정부는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성향이 강했습니다. 저는 어느 경우에나 교육의 수월성과 형평성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철학이었고, 그런 맥락에서 시대의 흐름이나 정권의 이념적 성향보다 교육의 본질에 충실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지금 교육 현실을 볼 때, 추진하길 잘했다고 생각하시는 것은 무엇이며, 반대로 아쉬운 것은 무엇인가요?
“1995년에 ‘5.31 교육개혁안’을 정책프로그램으로 만드는 역사적 작업을 주도했던 일이 크게 보람 있었습니다. e-러닝 활성화 특히 EBS 수능 방송 및 인터넷서비스를 시작한 일, 대안학교를 활성화한 일, 초등학교 영어교육을 도입한 일, 학교운영위원회를 제도화한 일이 제가 열심히 했던 일들입니다. 그간 금기시했던 교원평가 문제를 이슈화하고, 그 방안을 강구했던 일도 기억에 납니다.
아쉬운 일은 한둘이 아니지요. 요즈음 문제가 되고 있는 학교폭력 문제도 그중에 하나입니다. 고심을 많이 했고, 정책도 마련했지만 제대로 성과를 거두기 어려웠습니다”
안병영 명예교수님께서는 어떤 철학을 가지고 교육 정책을 추진하셨나요?
“1992년 저는 <자유와 평등의 변증법>이라는 책을 썼는데, 그게 제 기본 철학입니다. 자유가 넘칠 때는 평등을 생각해야 하고, 평등이 흐름을 주도할 때는 자유를 기억해야 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제 교육철학은 수월성과 형평성의 조화입니다. 신자유주의의 흐름이 거세었던 김영삼 정부에서 대안학교 운동 등 ‘교육복지’에 열을 올렸던 것도, 진보성향의 노무현 정부에서 교육부 최초의 ‘수월성 대책’을 마련한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교육개혁은 보다 장기적 관점에서 모색되어야 하며, 극단적인 변화보다는 점진적인 변화를 추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육개혁은 어느 정권의 정치적 수명을 뛰어넘어야 하며, 그 때문에 교육개혁에 정치논리의 개입은 저지해야 한다는 게 제 입장입니다”
모교 재학시절 어떤 학생이셨나요? 만약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해보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요?
“대학교 2학년 때 ‘4·19 혁명’을, 그리고 그 이듬해에 ‘5·16’을 경험했던 세대입니다. 질풍노도의 시대였으니 나라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대체로 착실한 공부 꾼이었던 것 같습니다. 연세춘추 기자를 1년여 했는데, 연세춘추에 ‘이 주일의 시사’라는 칼럼을 자주 썼습니다.
요즈음 해외봉사를 나가는 젊은이들을 보면 대견하고 부럽습니다. 학창시절로 돌아간다면 저도 그 대열에 합류하고 싶습니다”
기억에 남는 스승님이 계신다면 어느 분이셨나요?
“직접 가르치셨던 선생님은 물론 이거니와 책을 통해서, 그리고 그분들의 행동을 통해서 많은 분을 마음에 스승으로 모셨습니다. 생전에 한 번도 뵙지는 못했으나 장기려 박사님이 제게 큰 스승이었습니다”
인생을 삼모작에 비유하신 적이 있으신데, 시작하신 세 번째 못자리는 잘 진행되고 있나요?
“인생 일모작은 한창나이에 열정을 다해 비교적 힘든 일을 하는 시기이고, 이모작은 보람을 찾는다든지 내면으로부터 좋아하는 일을 하는 단계입니다. 마지막은 자연에 더 가까이하는 삶의 단계라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둘째와 셋째가 함께할 수 있고,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저는 정년까지 학자로 살았으며, 두 번 장관은 본업이 아니라 나라에 봉사한 것입니다. 여기 찾아온 것도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은 것과 자연 가까이에서 자연을 닮아가며 살고 싶어 온 것입니다. 지금 자연을 닮아가는 생활에 점차 익숙해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편안하고 즐겁습니다”
현재 읽고 계신 책이나, 후배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사람에 따라 그때그때 필요로 하는 책이 다른 것 같아요. 그래서 어느 책을 추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저는 나이가 드니 전공서적보다, 역사와 철학에 관심이 커지고 주로 그 분야 책을 많이 읽습니다.
지난겨울에 책을 하나 썼습니다. 초고를 끝내고 수정작업을 하고 있는데, 가을에 출판될 것 같습니다. 근년에 ‘스웨덴 모델’, ‘네덜란드 모델’ 등을 많이 얘기하는데, 저는 ‘오스트리아 모델’에 관해 썼습니다. 그 나라의 근현대사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너무 커서 그 ‘보물 캐기’ 작업을 해보았습니다”
연세 동문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과 지방 생활에 대한 조언을 부탁합니다.
“인간이 원래 불완전하고 모순덩어리이지만 ‘사람다운 삶’이 무엇인지 고민하며 살았으면 합니다. 인생의 길목에서 가끔 ‘내가 왜 사는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자기성찰적 맥락에서 자문해 볼 것을 권합니다.
지방 생활이 쉬운 것은 아닙니다. 우선 건강해야 하고, 부부가 뜻을 같이해야 하며, 할 일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세속적인 욕심을 많이 정리해야 합니다”
앞마당 텃밭과 아내가 설계한 집(사진)의 곳곳을 소개하는 안병영 명예교수의 모습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 자연과 함께 생활하며 인생의 세 번째 못자리를 즐기는 안병영 명예교수의 모습을 보면서 지금까지 걸어온 길과 앞으로 걸어갈 길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다.
강원도 고성에서 박원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