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7.13 05:53
여러분들이 쓰신 6.25의 회상록을 읽으며 저도 머리에 파노라마되어 떠오르는 장면을 써봅니다. 그러니까 1950년 6.26일, 월요일이였지요. 학교에 갔더니 선생님께서 모두 바로 집으로 돌라가라고 하교를 시키셨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시장엘 다녀오시면서 물건들이 동이나고 가게들이 문을 닫는다고 걱정을 하시면서 쌀을 담그고 미숫가루를 만드시고 우리 일곱형제들의 겨울옷 상의 안쪽에 이름, 부모님 성함, 본적, 현주소를 꼬매 넣어 주시고 여느때보다 일찍 퇴근하시는 아버지는 과자봉다리를 한아름 안고 오셨습니다. 퇴근하시는 길에 명동의 과자집에 들려서 남아있는 과자를 몽땅 담아 오셨노라고 하시면서 아버님도 한발 늦었더라고 하셨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함께 과자봉다리, 미숫가루 봉당리, 돈주머니를 만들어서 우리 형제들의 륙색에 각각 담아 주시고 모두 한자리에 불러 놓고 주의사항을 주셨는데 누누히 다짐하시기를 혹시 우리 가족이 해산되어 뿔뿔이 헤어지는 경우에는 순경아저씨를 찾아서 우리집 주소를 드리고 데려다 달라고 부탁하라고 일르셨습니다. 그리고 한여름인데도 겨울옷을 입힌 이유는 만약에 헤어져서 방황을 하더라도 따스한 옷으로 계절을 견딜 것을 계산하신거라고 설명을 하셨는데 우리들 어린 마음에도 무슨 예감이 있었는지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무슨 난리가 어떻게 났는지는 우리가 어려서 설명을 해주시지 않았지만 안방 침대옆에 서재에서 큰 책상을 옮겨다 놓으시고 사방을 다다미로 막으시고 우리들에게 모두 외출복을 입히고는 륙색을 가진채로 침대밑과 책상밑에 자리잡고 밤을 지내도록 준비를 하셨지요. 부모님은 우리 어린 칠남매(만 13세 큰언니에서부터 8개월된 막내동생)에 일돕는 언니들 둘, 도합 9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길떠날 마음을 먹지 못하고 쿵쿵 포격이 지붕위로 나르는 속에서 밤을 지내실 준비를 하셨습니다. 6월 28일 새벽, 아침밥을 지으려고 부엌에 나가신 어머니가 머리위로 지나가는 포탄소리에 혼비백산하여 방으로 뛰어들어 오시자 당시 37세이셨던 아버지께서 우리들을 깨우시고는 조용 조용히 아버지 뒤를 바짝 쫒아오라고 소근거리셨습니다. 대단히 위험한 난리가 일어났음을 눈치챈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아버지의 뒤를 따라 길로 나섰습니다. 아버지는 커다란 륙색을 메시고 네살짜리 남동생의 손을 잡으시고, 36세의 어머니는 8개월된 막내동생을 업고 쌀가방을 머리에 이시고, 열여덟살이였던 식모언니가 두살 반짜리 동생을 업었다고 기억합니다. 벽돌집 담밑을 따라서, 신작로 길을 건너고 어둑 어둑한 새벽길을 걸어가는 식구들은 우리식구 뿐만이 아니였습니다. 얼마를 걸었는지 한강이 보이고 강뚝을 따라서 걸어 가는데 머리 위로 날카로운 금속소리가 쌩쌩 지나가고 그럴때마다 아버지는 우리들 선두에 스셔서 "엎드렷!" 하고 호령을 하셨습니다. 그럴때마다 우리는 미리 훈련을 받은 군인인듯이 구덩이쪽에 머리를 박고 엎드렸지요. 때로는 거름을 준 호박구덩이기도 했지만 냄새고 쇠파리고 가리지 않았습니다. 한참 엎드려라, 빨리 움직여라, 명령하시는대로 우리는 열심히 따라가는데 어느 쩔뚝거리며 지나가는 군인을 만나자 아버지는 "수고하십니다"라고 인사를 하셨는데 한 군인이 한강다리가 이미 끊겼다고 알려 주고는 그래도 한강물쪽으로 절름거리며 뛰어가는걸 보았습니다. 가다가 동생을 업고 가시던 어머니가 이고 가시던 쌀가방이 너무 무겁다고 길에 놓고 가려니까 그 뒤를 따라가던 아홉살인 제가 우리 배고프면 밥해먹어야 한다고 질질 끌고 따라갔던 기억이 납니다. 할수 없이 어머니가 쌀가방을 다시 머리에 이고 가는데 이미 해는 중천에 뜬 여름날 아침은 뜨거워지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그때 상황을 판단하시고 한강다리쪽으로 가기를 포기하시고 되돌아서 집으로 돌아 가기로 작정하시고 뚝밑에 자리잡은 어느 초가집 뒷담아래에서 주인의 부엌을 빌려 밥을 지어 먹고 성신여학교 산아래 있는 돈암동 집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그 후 석달동안은 괴뢰정권 아래에서 무섭고 배고픈 생활을 이겨 냈지요. 돌이켜 보면 37세의 청년이나 다름없는 젊은 아버지가 어린 소대를 이끌고 얼마나 당황하고 당혹하셨을가 생각하면 참으로 끔찍하기만 합니다. 또 유월 하순 여름날이였는데 겨울옷을 입고 아버지를 쫒아가던 우리는 조금도 더운줄을 몰랐습니다. 집으로 돌아와서 륙색에서 꺼내어 먹었던, 아버지가 사오셨던 명동 제과점의 우유과자처럼 맛난 과자는 다시 맛보지 못했지요. 더 잊혀지지 않는 것은 쩔뚝거리며 한강쪽으로 홀로 뛰어가던 국군아저씨의 뒷모습입니다. |
2016.07.13 06:05
2016.07.13 06:44
Mrs. 조, 육이오 이야기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어린 소녀였군요. 물론 회고할 건 많지 않았겠지요. 댁이 돈암동이라고 하셨지요? 그럼 돈암국민학교에 다니셨겠군요. 우리집은 삼선교 전차정거장에서 가까운 곳이었지요. 혜화국민학교를 졸업했지요. 륙색이라고요? 내가 쓰는 리꾸사꾸보다 영문화된 이름입니다. 하여간 지난 일이 엊그제같이 떠 오름니다.
참, 웹페이지 올리는 데 힘드시면, 나의 방법을 사용해보세요.
전에 쓰시던 HTML-coded format을 완성한 후, 이곳에서 Write-Category- 그옆 공간에 제목을 쓴 후, 그 다음줄의 우측 끝에 "Source" 를 클릭하신 후, 이 공간에 작업한 걸 모두 Paste하고, "Submit"을 누르면 나옵니다. 만일 간단한 교정할 게 있으면, 아래에 Update을 누르고 들어가서 직접 교정하고 Add Comment를 누르면 끝납니다.
2016.07.13 07:31
저도 정선생님께서 설명하신대로 했는데 제가 쓴 code에 문제가 있는것 같습니다.
다시 교정해 보겠습니다.
말씀하신대로 저는 돈암국민학교 4학년에 올라가서
한창 주판을 재미있게 배우고 구구법 외우기 시합하다가
육이오바람에 얼렁뚱땅 하고 1.4후퇴때 부산으로 피란갔습니다.
성신여고가 있는 뒷산이 우리들 놀이터였습니다.
아드님댁에서 줄겁게 지나시고 귀가하셨군요.
덧글, 감사합니다.
2016.07.13 13:31
육이오 때 이야기를 쓰자면 수백만권의 소설이 나올 것입니다.
저도 서울에서 오산까지 걸어가며 죽을 고비를 여러번 겪었고
오산에서는 간신히 기차 지붕위에 기어 올라가 아슬아슬한
곡예를 하며 부산까지 내려 갔지요.
전쟁은 인생관을 바꾸어 놓는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세대가 겪은 경험을 후세들은 알려고도 하지 않는데
문제가 있는것 같습니다.
2016.07.15 22:06
Mrs. 조, 내가 오늘 마음먹고 성신여대 뒷동산을 찾아 보았지요. 네이버 지도를 이용해서. 돈암동 출신인 본인이 아직도 성신여고를 가 본적이 없었지요. 그런데 그곳이 돈암국민학교, 돈암동 전차 종점에서 멀지 않고, 게다가 나의 고교 단임 선생님댁에 가까웠습니다. 고교시절에 선생님댁을 찾은 게 아니고 대학시절에 선생님댁을 찾은 이유는 가정교사 자리를 구하려고 하였기 때문이지요. 그때 선생님 자택이 성신여고 옆이라고 하였지만 성신여고를 가본적이 없었어요. 돈암국민학교는 우리 혜화국민학교 선생님과 돈암국민학교 선생님과의 배구경기시합이 있어서 한번은 혜화국민학교에서, 또 한번은 돈암국민학교에서 하였기에 하교후에 우리가 모여서 응원을 하려고 갔지요. 결과는? 혜화가 대승하였습니다. 같은 돈암동 출신이네요. 여기 한시 한 수를 우리말로는 보냅니다..."당신은 어디 사세요? 나는 횡당에 산답니다. 배 멈추고 감히 물어 보려니, 두렵건대 동향인이 아닌가요?" 두 남녀 뱃사공이 주고 받던 첫 수이며, 성당시인 최호의 작입니다.
Back ground, border color를 넣고 싶은데 잘 되지가 않았습니다.
I will try aga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