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9.22 11:41
올해 9.28 에 즈음하여,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종잡지 못하는 사람도 있으리라 생각된다. 8.15 또는 6.25 하면 알겠지. 짐작하건대 많은 사람은 7.27 이 무슨날인지 귀를 기우려도 뭔지 모 르겠다하겠지. 지금 대한민국 사람 중 몇이나 그날을 기억하고 있을까? 9-22-2016
|
2016.09.22 22:44
2016.09.23 03:29
나수섭 선배님이 한마디 하셨으니 나도 한마디 써 볼려한다.... 내 인생 여로의 한 Chapter, 1950년 그당시 9.28부근의 추억을 펼쳐본다.
부친이 정부 공무원이였던 이유로 인민군이 부친을 체포하려 다녔으나 부친의 선견지명에 우리는 이미 충남 시골의 외조부 집으로 피난간 후였다. 다행히도 시골 구석의 빨갱이 행위는 그렇게 악랄하지 않어서 우리 가족의 존재를 눈여겨 보지 않었고 서울 손님으로 대우해줬다. 동네 유지였던 외삼촌 덕이 컸을지도 모른다.
그해 9월 어느날 누런 군복의 패잔된 인민군이 사라지고 산뜻한 검은 초록색의 국군이 다시 돌아왔는데 그것이 어느날이였는지, 달력도 없는 시골이였으니 기억에 없다. 단지 가을 추수가 끝나고 보름달을 본후의 어느날이였었다. 그후 인민군과 마을의 공산당들이 뚜드려 맞어 죽거나 체포되어 읍 경찰서로 보내지고, 매일밤 수확이 끝난 넓은 평야의 빈 논에서 밤이면 남은 빨갱이들이 서로 연락하는 신호탄이 올라가서 등골이 써늘하게 겁내고 보던 기억이 난다. 얼마후, 아마 10월에 들어서자, 이 신호탄들도 사라지고 이 시골마을에 평화가 찾아왔다.
우리는 곧 서울로 가지 못하고 부친이 서울가서 다행히 남아있는 집들을 확인하고 그해 12월 어느날 서울 명동집 (시공관 옆의 음식점 동네의 뒷 골목)으로 돌아왔다, 옛 골목 친구들을 다시 만났는데, 이런 챙피하게, 자꾸 충청도 사투리가 나도 모르게 튀어 나와서 한때 명동 뒷골목 동네에서 충청도 "촌놈"이라고 웃음거리가 되었었다. 6.25 전에 동네 꼬마들 중에서 두번째 왕초였었는데 (첫번째 왕초는 나보다 두어살 많은 시공관 옆 냉면집 아들) 다행히도 다시 돌아온 충청도 촌놈에게 계속 두번째 왕초 자리를 주었고 나는 기꺼이 받어 유지했다.
두번째 왕초 자리가 쉽게 얻어진것은 아니었다. 6.25전에 처음 신교동에서 명동으로 이사가서, 약 일년간 몇번씩 골목에서 내 위에 군림하고 있었던 놈들과 주먹 싸움을 해서 눌르고 난후에, 마지막으로 두번째 왕초였던 "신영"와 붙어서 그녀석 코피를 터치게하고 얻은 영광이였지. ㅎ, ㅎ, ㅎ. 첫번 왕초는 원래 나보다 훨씬 크고 나이도 먹고, 나를 잘 돌보아 주었기에, 감히 도전할 생각을 못했다. 청계국민학교에서 공부를 잘했고, 주먹도 쓸 줄 알었고, 큰 집에서 산다는 이유로 밑에 똘만이들이 나를 좋아하고 졸졸 따라 다녔다. 그당시 시공관에 영화가 오면 한 똘만이의 집이 시공관 옆문에 붙어서 언제나 들어가서 공짜로 봤다. 그때도 지금처럼 영화는 좋아했지만 연극이나 음악 공연에는 전혀 흥미가 없었다. 나는 타고난 산골촌놈에 야만인이 틀림없지만 거기에 유감을 느낀적은 한번도 없다. 한국은행 앞 분수에서 빨개벗고 수영을 했고 (물이 꽤 더러웠고 바닥에 깔린 유리에 발바닥을 찟겼지만), 거기 동화백화점 앞과 남산을 맨발로 누비고 다녔지. 아마 6.25가 나지 않었다면 2-3년내에 내가 명동 뒷골목의 꼬마왕초가 되었을것고, 곧 깡패가 되었을것이 틀림없다. 허나 나의 운명의 여신은 무슨 이유에서 였는지, 그때는 몰랐었지만, 1.4 후퇴때 (1951) 거기를 떠난후 영원히 다시 명동 그집, 그 뒷골목에 돌아가지 못하도록 내 운명의 씨나리오를 써놨던 모양이라. 어쩌면 그게 무척 다행이였는지 모른다. 아니면 먼 나중에 명동의 타락된 "맨발의 청춘"이 되었을지도 모르지...
몇년후 나는 내 xx고등학교 교복에 모자를 쓰고 우연히 명동 뒷골목을 찾었더니, 그때는 이미 우락부락하게 깡패로 변해가는 옛날 왕초와 똘만이들이 나를 보지마자, "야... 임마, 니가 xx학교에 다니고 있어?"하며 놀래는것이 였다. "이 새끼, 내가 거기 못갈 줄 알었어?" 라고 간신히 엄포를 쳤다. 그때 이미 나는 도저히 두번째 왕초가 아니였음을 감지했다. 그때 학교 수업후 매일 수련했던 청도관 태권도도 소용없음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내가 그들중의 하나가 아님을 다행으로 생각했고 다시는 찾어가지 않었다 ("찾아가지 못했다"는 말이 더 정확하겠지). 서울의대 들어간후에 찾아갔다면 이 깡패들이 나보고 뭐라고 했을가? 그러나 정은 정이라, 그들이 그립고 한번 다시 보고 싶지만, 이미 세월은 늦었지. 고향은 거기에 있어도 그 사람들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슬픈 잊혀져야하는 고향이로다. 아... 기억에 아직 남아있는 추억은 순서없이 한없이 흐른다.
잠깐 얘기가 삼천포로 빠졌는데,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처음 며칠동안 옛 친구를 만나고 꿈같은 며칠을 즐기며 지나고 있는데, 압록강 건너 중공군의 개입이 일어났고 전세는 아주 불리하게 되자, 우리 식구는 다시 이번에는 화물추럭위에 타고, 눈보라치는 한강을 건너 남행길에 올랐다. 우리 식구의 역마살은 알아주어야 된다. 내가 그후에 그걸 그대로 이어 받어 세계를 무대로 방랑했었던 시작이 된것이다.
아마 1950년 12월 어느날이였지. 화물추럭위에서 꽁꽁 얼은 손발로 대전에 도착, 장동 (?)의 어느 조그만집의 별채에 방을 얻었다. 부친께서는 정부 이전을 따라 부산으로 떠나시고 어머님과 같이 한달쯤 지내다가, 어머님 결단에 대전발 남행열차에 올랐다. 두 누님은 화물차 지붕위에 타고 어머님, 나와 두 동생들은 화물차 곡간안에 산떼미 처럼 쌓인 짐위의 한쪽 구석에 간신히 자리 잡었다. 어머님이 차장에게 돈 좀 쥐어준 모양이다. 기차는 얼마후 그날 오후 부산을 향해 떠났는데.... 그러나....
더 쓰고 싶은데 오늘은 그만 쓸련다. 정말 생각나는대로 두서 없이 썼지만 누가 읽어준다면.. 감사 감사.
언제고 6.25때의 피난길에 대해서 쓰고 싶은데 도무지 시작하기 어렵다. 남들은 "시작이 반"이라고 큰소리 치지만..... 나도 나수섭 선배님 처럼 용기를 내어 펜을 잡고 시작하고 싶다. 그런데.... 내가 왜 이렇게 게을러졌을가?? 원래 그런 내가 아니였는데. 참 알수없는 일이다. 너무 늙었나? 말이 않된다. 이 병신아, 나수섭 선배님은 나보다 15년 위가 아닌가 !! |
2016.09.23 06:45
WM 동생 님,
9.28 부근의 추억문 은 나의 심금을 울렸고 또 몇번이고 배꼽 빼며 웃지않을수 없었읍니다.
WM님 유년시의 무용담은 보통이 아니야요. 참 극적입니다. Is it your first confession?
나는 싸음을 할래도 코피 터지는것 보고 무서워서 뒤 꽁무니 빼곤했어요. 그러면서 또 한편 쌈
잘하는친구 보면 존경 (ㅎㅎㅎ)했어요. 하여튼 나는 어려서부터 겁쟁이었어요.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때 나도 봤든 그 한국은행앞 분수 안에서 놀든 아동 들안에 끼어있으셨든것 같애요.
옛날에 읽었든 "rengai sammai 연애삼매" 라는 소설의 작가 Gustave Flaubert가 하였든 말: 굳센 의지의
소유자가 아니면 희극이나 비극 어느쪽에서도 주인공이 될수 없다 고 한 말을 되새기게 하였읍니다.
You deserve to be called a hero in your own right!
그러나 정은 정이라 그들이 한번 보고 싶다...슲은, 잊혀져야하는 고향이로다 하셨는데...구름도 울고 넘는
울고넘는 저 산 아래 ...고향이 있었건만 지금은 어느 누가 살고 있는지...고향무정 노래를 읊어봅니다.
John Soosup
2016.09.23 14:27
나 선배님의 친절하신 글에 감사합니다. 뭐 Hero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지요.
우리가 잘아는 Hero들은 알고보면 별것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성의 영웅이 중요하겠지요.
명동을 떠난 이후 아주 좋은 학구적인 환경과 좋은 가정 출신의 친구들과 같이 자라는 동안,
그때의 도전성을 공부와 과외활동으로 많이 Sublimation시켰지만,
역시 고교때는 학교의 쌈꾼들 (산악반 애들)과 친하게 지내며 그들의 보호를 받었지요.
옛날 버릇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아직도 무모한 도전에 두려움이 별로 없읍니다.
우리 website도 개인 website에서 시작해서, class website, 그 다음 서울의대 website 으로
진행 시킨것도 그중의 하나라는것을 아시겠지요.
Yes, 인생은 결국 "Lone Pine Road"가 아니였나요? Forever a lone ranger...
그 Phrase를 머리에 담고, 지나간 인생을 돌아 보면,
그런대로 본인의 인생이 이제 매력적으로 느껴집니다.
그건 그렇고, 본인도 선배님 처럼 책을 하나 써야 될텐데.....
본인에게 또 하나의 고민을 안겨준것은... You know, it is your fault. ㅎ, ㅎ, ㅎ.
2016.09.23 22:05
All I would like to say is that
I thank the Good Lord for the good fortune to get to know
the two remarkable human beings, 나수섭 선배님 그리고 our WM, 존경하는 동기들중의 하나,
who are such shining examples and models for those who are willing to listen to their stories and learn.
wish both of you all the bests and His continuing blessings for the rest of your journeys.
한중
2016.09.24 04:46
나 선배님:
한 달 후면 뵈게 되어 기다려 지는데, 선배님의 글을 읽습니다. 저는 9,28을 잘 기억합니다. 저의 고향 경남 거창의 회복일 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또, 그날, 저의 아버님과 작은 외삼촌께서 인민군에게 당할 뻔한 날입니다. 아마 그날이 추석날이 아닌가 기억합니다.후퇴하던 인민군이(전부 덕유산으로 가던 길이라 합니다) 소총 열개를 묵어 민간인에게 짊어 지고 가게 하는 것을 아버님과 외삼촌이 뺏어 집에 보관하고 있는데 다음날 새벽 동네사람이 후퇴하는 인민군에게 고자질하여 인민군 몇사람이 우리가 피란하고 있던 우리 집으로 들여 닥쳤습니다. 아버님은 와들와들 떨기만 할 뿐 (그렇게 재치가 많다고 저는 생각했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모르시고 외삼촌은 숨어섰는데 저의 어머니께서 앞으로 나서셔 이총들은 당신들이 못 가져 가오 하시면서 아버님과 인민군사이에 서버렸습니다. 이 총들은 다른 인민군이 우리에게 임시로 맞긴 것이요, 아무도 못 건드린다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어떻게 당신들이 이 총들을 가졌냐고 떠들던 인민군들이 드디어 어느 인민군 부대에서 소총을 접수했다고 증서를 쓰고 가져 갔습니다.
그 후부터는 외삼촌과 아버님은 어머니께서 자기들을 살렸다고 추석날이면 어머님께 고맙다고 하셨습니다. 요즈음 한국의 젊은이들은 그저 자기들이 잘나서 한국이 잘들 산다고 끄덕거립니다만 황할배의 말 같이 한국의 장래가 크게 걱정됩니다.
선배님, 곧 볼티모어에서 뵙겠습니다. 신백효
2016.09.25 04:58
WM 동생 님,
맞아요. ...forever we are one of those lone rangers all the way.
And you are an extraordianary man of determination. Why not!
I have no doubt you will not leave anything undone in your path.
Whenever I look up at you, you enable me to be rejuvenated.
I thank you.
John Soosup
2016.09.25 05:25
친애하는 이 한중 님,
I thank you for your thoughtful comments.
I thank God for me to be well acquainted with you. You are the consistent source of encouragement
and enlightenment in my life's journey.
John Soosup
2016.09.25 06:12
신 백효 님,
Baltimore 동창들 생각이 늘 납니다.
쓰신 글 보며 그때의 scene 을 눈 앞에 그려 보았습니다. 읽는 사람 마다 가슴에 메아리 치는
극적인 장면이었겠어요. 아버님 과 외삼촌님도 물롤 훌륭하셨고 대범하고 대단하신 어머니
셨습니다. 내 가슴도 두군 거림을느꼈습니다.
그날이 추석이었습니까? 가을 이 오는지 가는지 생각할 겨룰이 없었지요.
얼마 있다 Baltimore에서 뵙겠습니다.
나 수섭
2016.09.25 10:26
나수섭 선배님,
선배님의 한말씀 한말씀을 접하는 여러 후배들, 모두 큰 격려와 용기를 얻고 있다는 사실을
당연지사이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오직 고맙습니다.
선배님의 자서전을 정독하고나서 저는 앞으로 자라나는 젊은세대를 비롯하여 우리들의 수많은 후손들이
그 책을 접할 기회가 있기를 우리 한국을 수천년 돌바주시는 그분, 천주님에게, 기도했습니다.
고등학교때 의과대학갈 준비하던 당시, 마담 뀨리 자서전 읽고 가장 큰 힘과 격려를 받을수 있었던
저의 젊은 시절을 상기 시켜주기도 했습니다.
저는 항상 믿고 말하기를 학교다니는 젊은 애들에게 제일 중요한일의 하나가 진실로 찬 자서전들을 읽는 일이라는 것이지요.
저 자신의 젊은 시절을 돌아보면 마담 뀨리 자서전, Albert Schweitzer 자서전, Albert Einstein 자서전등이
항상 큰 힘과 격려, direction을 제공해주었다고 생각하지요.
선배님의 큰 업적들중의 하나인 자서전 출판을 이기회에 다시한번 축하드리며
선배님 내외분의 만수무강을 기원합니다.
이한중 드림
2016.09.26 06:51
이 한중 님,
냉정하게 생각할때 내 놓을만한 가치가 없는 것을 자서전 이라하여 내 놓게 된것이 부끄럽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성 껏 읽어주셨음에 대하여 충심으로 부터의 감사를 드립니다.
미국에 와서 살게 됬다는 사실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1992년 경 부터 My life story를
써야되겠다는 충격 -> 집념 -> 강박관념을 안고 여러해를 흘러 버렸든것 같아요. 내가 부족한 탓
이지만 묘하게도 85세를 넘긴 나이 까지 전문직의 일을 계속했다는 사실이 하나의 핑계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나는 가끔 생각해봅니다. 만일 내가 한국에서 계속 살았드라면 신앙에 귀의하였을까 그리고 자서전
이라는것 생각했을까 하고요. 나라의 팔자가 사나와서 8.15 라는것이 38선 - 조국 분할 - 동족 상잔의
6.25 전쟁 - 북쪽의 유례없는 공산 공포 작당 - 남 북의 대적 대치 - 그리고 어찌된 꼴인지 이제는 북핵의
협박 을 맞게 되어 우리 모국이 떨고 있음을 보게 되기 까지의 사태를 보면서 "소리 없는 절규" 라고할가요,
이북 평양 내 고향을 등지고 나와 이제 미국 땅에서 늙어가는 사나이의 몸 부림 이라고 보아 주십시오.
한중 님, 부디 건강하시고 가족 여러분 과 함께 행복 하시기 바랍니다.
나 수섭
2016.09.26 07:09
황 규정 님,
우리가 살면서 느끼게 되는 문화, sport events, 정치부문 등 여러 방면을 선구적 안식으로 솔선하여 다루어
주시어 우리 Website 를 빛 내 주심에 대하여 감사와 찬사를 드립니다.
계속 좋은 글을 내 주셔서 동포들의 답답한 마음을 위로 하고 격려해 주십시오.
나 수섭
2016.09.26 13:30
나수섭 선배님!
과분한 격려의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선배님의 왕성하신 활동은 우리 후배들에 좋은 귀감이 됩니다. 규정
2016.09.27 22:01
9.28 서울 수복일
오늘이 이곳 날짜로 9.28기념일이다.
육이오동란으로 3개월간 북괴의 만행에 두려워했던 암흑 속에서 드디어 연합군의 승리로 서울이 해방된 날이다. 나 선배님에게는 세 번째 해방일이라고 하셨지만, 나에게는 두 번째 해방일이다. 첫 번 1945년 8.15는 내가 어려서 그때 그 의미를 잘 몰랐다. 그러나 이 두 번째에는 절실히 해방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북괴의 잔인무도한 양민 학살을 경험한 사람치고 어찌 잊을 건가? 잠시 그 날을 회고해본다. 연합군의 입성 직전에 벌써 소문이 나돌고, 게다가 멀리서 대포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더니 점점 가까이 오고 있었다.
돈암동 삼선교 전차정거장 가까이 살고 있던 우리가족은 전에 살았던 경동중학교 근방으로 피란을 갔고,이삼 일만에 연합군이 서울을 해방시켰다. 북괴군은 이곳에서만은 대단한 저항을 못하고 허둥지둥 북으로 도망가는 모습이 보였다. 이 해방은 일제의 독수로부터의 해방보다 더욱 실감이 나는 해방이다. 이 두 집단, 일제와 북괴 중에 누가 더 잔혹하고 나쁜지는 모르겠으나, 이 둘이 천하에 가장 나쁜 집단임에는 틀림없다. 여기서 Happy ending이어야겠지만, 불행히도 민족의 수난은 계속되었다. 서울을 중공군에게 빼앗기고, 우리 모두 3년 가까이 피란 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9.28 서울 수복 덕택에 다시는 북괴의 만행을 우리가 직접 겪지는 않았다.그런 의미에서 9.28 수복일은 우리에게 대 해방일이다. 그런데 일반인만 이 날을 모르거나 무관심한 게 아니고, 대한민국 대표 신문이 조. 중. 동 이 세 개 Online News에서 “9.28 수복일”이란 제목이나 글을 찾을 수 없다. 대단히 실망스런 현실이다. 게다가 우리의 고국에서는 보수파 여당과 종북좌파 야당 무리 간에 항상 치열한 싸움이 벌어진다. 그건 그렇다 해도 국민이 야당을 더 지지하는 모양이다. 왜냐하면 좌파들은 저희가 정권을 잡기 위해서는 하늘 아래 있는 모든 혜택을 다 약속하고, 사드 설치 반대하고 그 대신 북한과 대화만 해야된디고 하는 못된 수작을 한다. 한국국민이 단합하여 국가를 지킬 생각은 하지 않고, 야당을 더욱 지지하고 있으니 조국의 앞날이 심히 우려된다. 게다가 혈맹인 미국에 대한 적개감을 일으키고, 반미가 점점 강성해지니 앞날이 대단히 어두워 보인다. 나는 친형제가 없어도 일가친척이 누구나 마찬가지로 많다. 조국이 잘 되어야 우리도 마음 편하게 이 나라에서 살 텐데, 심히 우려스러운 생각이다.
이곳에 사는 우리끼리라도 항상 단합하여야겠다.
2016.09.28 03:44
친애하는 정 관호님,
오래간 만에 반갑습니다.
가만 있고 싶은데, 위에 쓰신 시의에 합당한 글을 보고 가만히 있을수가 없어서 한 마디 쓰고자 합니다.
1988년 Olympic 이 거의 끝날 무렵에 두 아들과 딸을 다리고 우리 가족이 한국 에 갔었는데
마침 그때 USA Team 과 USSR Team 의 Soccer 경기를 보게 되었어요.
놀랍게도 동포라는 한국인들이 미국 대신에 USSR를 응원하는것이었습니다.
도대체 이해할수 없었는데 to make it worse 그때가 쏘련 nom 전투기가 우리 KAL 여객기를
Sakhalin 부근 해상에서 격추한 만행이 있었든지 불과 2,3개월 후의 일이었습니다.
정상한 정신 상태에 있는 사람이라면 이해할수 없는 광경이었지요.
미국에 사는 어떤 동창 학자가 썼든대로 한국사람은 묘하게 극단적으로 여러면에서 군중심리에
뇌동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인들 사이에 일어나고있는 사태의 밑바닥에는
유감스럽게도 그동안 친공파 교원 노조가 조성해놓은 공작의 결과가 자리 잡고 있는것입니다.
국민이 말하는 입의 구실을 해야되는 조, 동,중 은 아무 말 못하는 벙어리가 됬다지요.
힘에는 힘으로 대처해야되는 법인데. 아시는 분은 알고 있겠지만 북괴는 7.27을
전승기념일이라하여 미쳐 날뛰는데. 적반하장격인데 말입니다.
이쪽에서는 그사실을 알기나 하는지? 눈뜨고있는,
나라를 위하고 정치한다는 자 들이여 어서 빨리 잠에서 깨어나라.
나의 살든 고향은 꽃피는 동산 그 속에서 살든 때가 그립습니다....
평화로운 한 토막으로 돌아간 내 나라를 언제 다시 보게 될까요. 기다려 집니다.
건강하시고 행복 하세요.
나 수섭
2016.09.28 09:00
나 선배님:
그동안 옥체 안녕하셨습니까?
선배님의 9.28 글을 읽게 되어 만감이 교체되었습니다.
저는 2년전 8월부터 이곳에 등록하고 글을 올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올릴 줄 몰라서 운영자님의 도움으로 시작하였고, 많은 시간을 요하였습니다.
8.15 광복절 때 적지 않은 글이 올라왔지만, 9.28 수복을 기념하는 글은 선배님께서
처음으로 올리셨다고 믿습니다.
우리 민족에게 잊을 수 없는 광복절, 수복일 등을 항상 기억하고 서로 그 뜻을 색이는
일이 참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하오며, 앞으로도 중요한 기회에 저희 동기에게 알려 주실
글을 써 주시면 참으로 큰 도움에 되겠습니다.
그럼 일기가 변화하는데 옥체 만안하기를 기원합니다.
정관호 올림
2016.09.28 12:33
먼 타향에 사는 우리에게는 "조국, 동포, 모교" 등등의 단어는 언제나 그리움과 애절함의
감정에 젖어, 무조건 좋을것이라는 정신적 향수와 盲信의 대상이 되고있지요.
따라서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조국, 우리동포, 우리 모교"가
우리를 "마치 우리가 그들을 그리워하는것처럼" 생각해준다고 느낄때가 많은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지요.
그들은 오히려 우리를 "배반자, 타향인, 외국인, 뜯어먹고 이용할 사람들"로 취급하지요.
재외의 우리들도 "냉철"한 감정으로 조국의 미친놈들은 미친놈들로 취급해야 된다고 봅니다.
조국의 악당들도 역시 "차갑게" 악당으로 취급해야되겠지요.
우리가 아련하게 아는 조국은 그 옛날 아주 가난할때의 조국이지요.
지금은 돈, 부귀영화, 주제에 맞지않는 허영에 들떠서 사는 한심한 세상이 된것 같습니다.
우리가 그리워하는 그런 고향은 전혀 아니지요.
Not everything at home are something lovable and beautiful.
이제는, We are we and they are them 입니다.
이민 생활 반세기가 훨씬지난 오늘에 "조국, 동포, 모교"는
하나의 먼 "꿈속의 신기루"에 지나지 않는것이 아닐가요?
We should wake up and forget the dream that will never be realized.
본인의 고향은 마음속에는 간절하지만, 실제로 그 땅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 맘속의 애절한 고향은 현지에서는 자취도 거의 없이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다시 찾을수도 없어요. 그렇게 깨달은지 참 오래되었지요.
2016.09.28 14:07
WM 님,
At the close of this year's 9.28 Recovery Day anniversary, you summerized succinctly regarding our heartfelt exchanges
concerning good old homeland of Korea.
Enough is enough. We all have done more than fare shares for the service of Korea.
We are we and they are them!
We look forward to the prosperous future in the life of our Website families.
John Soosup
2016.09.29 06:08
나선배님, 정선배님, 운영자님:
위에 실린 댓글들은 읽고 안타까워 몇 말씀 올립니다. 위의 글들은 한마디도 틀린 것들이 아님을 먼저 말씀드립니다. 그러나 저의 미천한 경험은( 1994-1999년의 삼성서울병원 근무) 저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많은 과격한 , 뭘 잘모르는(less informed or mal-informed) 인간들이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반면 묵묵히, 근실하게, 꾸준히, 올바르게 한국사회에 이바지하는 사람들이 엄청 많습니다. 문화적 차이로 저희 미국인들과는 확실히 다른,한국의그 유명한 "정"때문에, 저자신도 머리에 피가 오르게 화를 낸적이 한 두번이 아님을 말씀드립니다. 그래도 한두달만에 그들의 생각이 바뀌어 가고 있슴을 저는 확실이 느꼈슴 을 말씀드립니다. 저는 고향친구들과 더이상 교류가 없습니다. 그 분들은 저를 이상하게 생각하기 때문이요. 운영자님의 말씀과 별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분들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서서히 눈을 뜰 줄 아는 것이 한국인의 장점이며, 언젠가는 종북하는 척 하는 인간들도 달라 질 희망이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다만 이 복 받은 나라에서 살게된 복 받은 우리 한국태생 미국인들이 끊임없이 한국인들의 오류를 고쳐 주려 노력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틀렸다고 포기하면 한국은 지상에서 없어 질 것같습니다. 사실 저는 그것이 두렵습니다만. 우리 다 같이 조용히한국을 도울 길이 없을까요.신백효
2016.09.29 07:28
백효형,
한국에서 여러해를 살아보고 누구보다도 밝게, 정확하게 사물을 판단하는 형의 말씀들은
많은 희망과, 형의 말과 같이 이곳에 사는 우리 교포들이 각자 조국을 위해 할일들을 찾아야 한다는
마땅한 의무에, 많은 격려를 줍니다.
예전에도 이 스페이스에 비슷한 토론이 있을때 나는 많은 적들에 예워쌓인 이스라엘 국민들이
항상 치열하게 정치싸움들을 하면서도 민주정치를 이끌어 가는것과 같이
우리 한국인들도 계속 인내심을 발휘하여
서로서로 final judgement를 삼가 서로 이해와 tolerance를 하는 전통을 세워 나가야 한다고
어떻게 보면 naive한 의견을 말한적이 있습니다.
3만여명의 탈북자들이 살고 그들이 매일같이 TV에 나와 북한사정을 알려주는 이지음에 종북자들 꾀임의
국민대다수가 넘어가리라곤 생각할수 없다고 봅니다.
I have confidence in Korean people's intelligence.
If I am wrong and indeed if our young generation should forget the past and be stupid enough
to fall into the trick or temptation by the North,
God forbid they indeed may deserve to suffer from the consequences.
But I do not think so, do not believe they are stupid, and
as a matter of fact, they may be smarter, wiser than the older generations.
I was communicating by email with one of my nephews in Seoul yesterday,
who had the higher education here some years back,
who is active in civic movement involving the young and old
in educating and directly confronting the politicians in order to
legislate the laws the citizens really need.
I was just amazed how advanced and how international their knowledge base was.
All of this movement is thru online and websites. They were, I believe, more advanced than here in USA.
I was so impressed and so proud.
These young people seem to be carrying out
what Henry David Thoreau, Gandhi or Martin Luther King dreamed about.
Let's have confidence in our young people, our sons and daughters, grandsons and granddaughters,
as we do in our Korean LPGA players.
"I am a firm believer in the people. If given the truth, they can be depended upon to meet any national crisis.
The great point is to bring them the real facts." Abraham Lincoln
2016.10.01 03:02
제가 Dr. 이 글에 나온 Henry David Thoreau의 Walden Pond 사진을 다시 올려 보려고 합니다.
참 좋은 곳이며, 감명 깊었습니다.
2016.10.01 03:59
정선배님,
고맙습니다.
사진들이 눈앞에서 보듯 실감이 갑니다.
One of my mentors, Dr. R. D. in 1960's, who was a fine internist and a great fan of Thoreau,
introduced me to Henry David Thoreau.
He himself built a cottage in the middle of woods in the Northern Michigan and
was a great scholar on the life of Thoreau,
building a great model life of his own by mixing medicine with naturalist's pure living and
other life philosophies of Thoreau.
Among others, he was a professional bird watcher as well.
We became good friends, and my wife and I were invited to his cottage.
We helped each other professionally as well.
I didn't know a thing about Thoreau until my mentor introduced me to him.
2016.10.01 20:00
You had such good relationship with Dr. R. D.
It was around mid-June of 2014, when my wife, my sister-in-law and I had a New England tour by car.
Our first leg was Concord, Massachusetts where we arrived at the Walden Pond which was crowded by
lots of people, enjoying summer time and the beach.
Next morning I revisited the cabin, but it was closed. After some shots, we went to a nearby gift store
and I bought a book, "WALDEN' written by Henry David Thoreau.
While reading, I had some feelings like having heard his talks by my side. I cherish this book so much.
I also like to call him "소로 선생님" in our Korean way since I feel very close to him during my reading of Walden.
If you haven't read it, I recommend this "WALDEN, or LIFE IN THE WOODS" published by EVERYMAN'S LIBRARY.
2016.10.04 20:38
요 몇일간 출타중이었기 때문에 이제 부가적으로 이 한 말씀을 띠웁니다.
신백효 님, 이한중님의 현명한 글 과 정관호 님이 보내신 귀중한 Henry David Thoreau의 Walden Pond 사진을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늙은이에게 고무적이고 희망을 안겨 주셨어요.
그러나 노파심에서 한 말씀하고저 하는데, 문제는
What Lincoln said; the great point is someone will bring them the real fact.
Therefore, the utmost concern here as I see is "How soon and Who will be carrying it out".
Are we all just waiting in vague hope that someone will do it some day?
모든 분들의 건투를 기원합니다.
나 수섭
선배님의 말씀에 동감합니다.
지진,북한의 핵위협,그리고 한국의 정치판도등 작금의 고국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생각하면 그저 답답할뿐입니다. 감사합니다.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