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1.15 1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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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체는 누구나 알고 있지만 추사체가 뭐냐 하면 대답을 잘해낼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어쩌면 추사체는 우리들이 쓰고 있는 글씨들이라고 해도 될지 모른다. 그의 대표적인 글씨 '잔서완석루(殘書頑石樓)'를 보자. '다 떨어진 책과 무뚝뚝한 돌이 있는 서재'라는 뜻으로 제주도 유배후 강상(한강 용산변의 강마을)시절의 대표작이다. 글자의 윗선을 맞추고 내리긋는 획은 마치 치맛자락이 휘날리는 듯 변화를 주었다. 이렇게 자유분방한 글씨는 추사 김정희밖에 없었다. 빨래줄에 빨래 걸린 듯하지만 필획이 맞으니 자유분방하다고 표현한다. 추사의 글씨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는 자들은 괴기한 글씨라 할 것이요, 알긴 알아도 대충 아는 자들은 황홀하여 그 실마리를 종잡을 수 없을 것이다. 원래 글씨의 묘를 참으로 깨달은 서예가란 법도를 떠나지 않으면서 또한 법도에 구속받지 않는 법이다. 글자의 획이 혹은 살지고 혹은 가늘며, 혹은 메마르고 혹은 기름지면서 험악하고 괴이하여, 얼핏 보면 옆으로 삐쳐나가고 종횡으로 비비고 바른 것 같지만 거기에 아무런 잘못이 없다" (유최진의 '초산잡서'에서) '잔서완석루'와 함께 대표작으로 꼽히는 '선게비불(禪偈非佛, 사진)'과 '판전(板殿, 사진)' 같은 작품을 보면 추사체의 '괴이함'을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다. '선게비불'은 획의 굵기에 다양한 변화가 있어 울림이 강하고 추사체의 파격적인 아름다움이 잘 드러난다. '판전'은 추사가 세상을 떠나기 3일 전에 쓴 대자 현판으로 고졸한 가운데 무심의 경지를 보여주는 명작. 파격이라 하기보다는 어린애 글씨같은 천연덕스러움이 있다. 추사체는 변화무쌍함과 괴이함에 그치지 않고 잘되고 못되고를 따지지 않는다는 '불계공졸(不計工拙)'의 경지에까지 나아갔다. 추사 글씨체 변화에 대하여 추사체가 예술의 경지에 이를 수 있게 된 것은 천재성의 발로가 아니라 판서를 지낸 아버지 김노경과 그 선조들, 그리고 청나라 고증학이 합해져서 가능해진 것이다. 추사와 동시대에 활동한 박규수는 추사체의 형성과 변천과정에 대해 "...완옹(阮翁)의 글씨는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그 서법이 여러차례 바뀌었다. 어렸을 적에는 오직 동기창(董其昌)에 뜻을 두었고, 중세(스물네 살에 연경을 다녀온 후)에 옹방강을 좇아 노닐면서 열심히 그의 글씨를 본받았다. 그래서 이무렵 추사의 글씨는 너무 기름지고 획이 두껍고 골기가 적었다는 흠이 있었다. ... 만년에 제주도 귀양살이로 바다를 건너갔다 돌아온 다음부터는 남에게 구속받고 본뜨는 경향이 다시는 없게 되고 여러 대가의 장점을 모아서 스스로 일법을 이루게 되니 신(神)이 오는 듯 기(氣)가 오는 듯 바다의 조수가 밀려오는 듯하였다"고 증언하였다. 박규수의 증언에서도 드러나듯이 추사체의 골격이 형성되는 계기가 된 시기는 제주도 유배생활. 완당은 55세때인 1840년 10월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제주 대정현에 위리안치(탱자나무 가시 울타리 속에서만 생활하도록 하는 형벌)되는 유배의 형을 받게 된다. 유배가던 길에 있었던 일로 두가지 전설이 전해진다. 하나는 전주를 지날 때 그곳의 이름난 서가 창암 이삼만을 만난 얘기다. 창암은 전형적인 시골 서생으로 요즘으로 치면 지방작가였다. 원교의 글씨를 본뜬 창암의 글씨는 속칭 유수체라 하여 그 유연성을 자랑하고 있었지만 그 흐름이 도도하지 못하여 영락없이 시골 개울물 같은 면이 있었다. 그래서 꾸밈없고, 스스럼없는 천진스러움의 진국을 느낄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이삼만의 '운학유천'. 시골서생의 순수함이 있다. 대둔사 '대웅보전' 현판. 원교글씨. 그런 창암이 완당에게 글씨를 보여주며 평을 부탁한 것이다. 완당은 이때까지만 해도 배 갑판 밑에 모여사는 쥐의 수염만으로 만든 붓 등 최고의 붓과 종이로 글씨를 쓴 '스타일리스트'였기 때문에 창암의 개꼬리를 훑어내어 만든 붓으로 쓴 글씨를 보고 일순 당황했을 성 싶다. 그때 창암은 완당보다 열여섯이 더 많은 71세의 노인이었다. 현장엔 그의 제자들이 쭉 배석해 있었다. 창암의 글씨를 보면서 완당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윽고 완당이 입을 열었다. "노인장께선 지방에서 글씨로 밥은 먹겠습니다." 창암은 완당이 삽짝을 닫고 나가는 것을 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한다. "저사람이 글씨는 잘 아는지 모르지만 조선 붓의 헤지는 멋과 조선 종이의 스미는 맛은 잘 모르는 것 같더라." 전주를 떠난 완당은 해남 대둔사로 향했다. 절마당에서 대웅전을 바라보니 '대웅보전(大雄寶殿)' 네글자가 원교의 글씨였다. 완당은 초의선사를 만난 자리에서 "원교의 현판을 떼어 내리게! 글씨를 안다는 사람이 어떻게 저런 것을 걸고 있는가!" 하고 지필묵을 가져오게 해 힘지고 윤기나며 멋스러운 글씨로 대웅보전 네글자를 써주며 나무에 새겨 걸라고 했다. 완당은 붓을 잡은 참에 '무량수각'이라는 현판 횡액을 하나 더 써주었다. 대둔사 '무량수각' 현판. 제주도로 유배가면서 써준 것이다. 획이 기름지고 윤기가 난다. 예산 화암사 '무량수각' 현판. 획이 가늘면서 힘과 멋이 함께 들어있다. 제주도 유배시절 글씨의 새로운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 두가지 전설은 완당 자신만이 최고라는 생각을 갖고 원교의 글씨를 낮추어보는데서 나온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 동안 누렸던 특권층의 삶과는 거리가 먼 척박하고 고독한 유배생활 8년3개월을 보내면서 예스러운 멋과 회화적 조형미를 동시에 보여주는 '입고출신(入古出新)'의 세계를 갖추게 된다. 더 이상 어깨가 올라가는 일도 없어지며 골격은 힘있고 필획의 울림이 강하게 느껴지는 추사체의 면모가 자리잡게 된 것이다. 9년뒤 해배되어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완당은 대둔사에 다시 들러 떼어내리게 했던 원교의 대웅보전 현판을 다시 걸게 했으며, 전주에 들러 창암 이삼만을 찾았으나 그때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제주도 유배에서 풀려난 완당은 강상(江上)에서 매우 궁핍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 시절부터 완당 글씨의 특징을 보면 추사체의 파격미나 개성미, 이른 바 괴(怪)가 완연히 드러남을 실감할 수 있다. 글자의 구성에서 디자인적인 변형이 대담해지고 서체를 넘나들며 자유로운 조형미를 보여준다. 붓끝에는 힘이 실리고, 획에 금석기가 있으며 필세에 생동감이 있는 등 추사체의 참 멋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이때 씌어진 명작 현판 '단연죽로시옥(端硏竹爐詩屋)'은 유명한 단계벼루, 차 끓이는 대나무 화로, 그리고 시를 지을 수 있는 작은 집을 뜻하는 것으로 그것만으로 자족하겠다는 선비의 마음을 말한다. 이 현판 글씨는 글자의 구성미, 즉 디자인은 대단히 멋스럽고 획의 흐름에서 리듬조차 감지된다. 또하나 현판 글씨로 '소창다명 사아구좌(小窓多明 使我久坐)'라는 작품이 있다. 우리말로 옮기면 '작은 창으로 밝은 빛이 많이 들어오니, 나로 하여금 오랫동안 앉아 있게 하네'라는 뜻이다. 이 현판글씨는 구성미가 아주 뛰어나다. 그리고 글자에 유머와 파격을 주어 추사체의 '괴'가 곳곳에 드러나 있는데, 특히 밝은 명(明)자의 획을 삐뚜루 쓴 것이나, 앉을 좌(坐)를 흙 토(土)위에 네모 두 개를 그려 마치 땅에 앉은 궁둥이처럼 쓴 데서는 웃음이 절로 나온다. 그것도 한쪽 궁둥이를 슬쩍 들고 비스듬히 앉은 듯 네모의 양감이 다르다. 말년인 과천시절 완당이 남긴 '대팽두부(大烹豆腐)'는 결국 완당이 살아온 인생의 종착점이 어디였는가를 말해주는 명작 중의 명작이다. 최고 가는 좋은 반찬이란 두부나 오이와 생강과 나물 大烹豆腐瓜董菜 최고 가는 훌륭한 모임이란 부부와 아들딸과 손자 高會夫妻兒女孫 글 내용과 글씨 모두가 완당의 예술이 평범성에로 회귀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잘 쓰겠다는 의지를 갖지도 않은 상태에서 절로 드러난 불계공졸의 경지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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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15 12:44
2010.01.15 12:45
김정희(金正喜, 1786년 ~ 1856년)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서예가·금석학자·고증학자이다.
본관은 경주, 호는 완당(阮堂)·추사(秋史)·예당(禮堂)·시암(詩庵)·과파(果坡)·노과(老果) 등이다.
한국 금석학의 개조(開祖)로 여겨지며, 한국과 중국의 옛 비문을 보고 만든 추사체가 있다.
그는 또한 난초를 잘 그렸다.
영조의 딸 화순옹주가 출가한 월성위 집안에서 태어난 김정희의 집안에는 대대로 명필이 많았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 기계 유씨가 임신한 지 24개월 만에 출산했다는 전설이 있다.
7세 때 입춘대길이라 쓴 글을 문앞에 붙여 놓으니 지나가던 채제공이 보고는 김정희에게 장차 명필이
되겠다고 칭찬했다고 한다.
서얼 출신으로 시, 서, 화에 모두 능했던 박제가에게 어려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그러다가 큰아버지 김노영이 귀양 가고, 둘째 큰아버지 김노성, 할머니, 할아버지 등이 죽게 되었다.
그러자 가문을 이어야 한다는 집안의 뜻에 따라 김노영의 양자로 입적된 뒤 15세의 나이로 동갑인
한산 이씨와 혼인한다. 결혼하던 그해 정조가 승하하고(1800년), 그의 증대고모뻘인 김대비(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으며, 그 연고로 친부인 김노경은 종3품까지 벼슬이 오른다.
그런데 이번에는 생모가 34세로 세상을 떠나자, 비탄과 허무감에 고향 예산으로 내려가 불교에 심취하기도 한다.
스무살 되던 해(1805년) 대왕대비가 승하하고, 그 다음달에는 부인 한산 이씨가 죽었다. 이 무렵 스승
박제가가 유배에서 풀려났다가 집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었다. 양어머니도 얼마 뒤 죽었다.
양어머니의 삼년상을 치른 뒤 한 살 아래인 규수와 재혼한다. 이듬해인 1809년(순조 9) 생원시에 장원급제한다.
24세 때인 1810년(순조 10) 아버지 김노경이 청나라에 동지사 겸 사은사로 사신행을 떠날 때 아버지의 시중을
드는 자제군관으로 따라갔다. 6개월 동안 청나라에 머물면서 청나라 제일의 학자 옹방강(翁方綱), 완원(阮元) 등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고증학을 배우게 된다. 완원은 자기가 지은 《소재필기(蘇齋筆記)》를 처음으로 김정희에게 기증까지
하였으며, 김정희가 조선에 돌아온 뒤에도 그들과 서신을 주고받았다. 조선에 돌아온 뒤 한동안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그때 〈실사구시설〉 등을 발표하여 북학(北學)의 학문적 수준을 높이는 한편 성리학적 관념론을 비판했다.
김정희는 한국 금석학의 개조로 여겨진다. 김정희는 청나라에서 고증학을 배울 때 금석학도 함께 배웠다.
청나라에서 귀국한 뒤 친구인 김경연, 조인영 등과 함께 비문을 보러 팔도를 답사하기도 했다.
김정희가 남긴 금석학의 가장 큰 업적은 1816년 당시까지 “무학 대사의 비” 또는 “고려 태조의 비”라고 알려져
있던 북한산비를, 비문에 적힌 “…眞興太王及衆臣巡狩…”라는 구절을 통해 진흥왕 순수비라고 밝혀냈다.
순수비를 밝혀낸 과정과 그 사실적인 증명은 그가 저술한 《금석과안록》에 기록되어 있으며, 그의 학문 태도를 밝힌
글로서 유명한 〈실사구시설〉은 과학적이며 객관적인 방법으로 진리를 탐구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김정희는 그밖에도 《주역》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전각(篆刻)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차(茶)를 좋아하여 한국의
다성(茶聖)이라 불리는 초의 스님, 백파 스님과 친분을 맺었다.
1819년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로 합격하여 암행어사 등에까지 올랐다. 그 무렵 친구 조인영의 조카사위이자
19세의 효명세자를 가르치는 필선이 된다. 하지만 효명세자가 죽고 나자 권력을 잡은 안동 김씨 집안의 김우명이
그를 탄핵하여 파면되었으며, 그 아버지 김노경은 귀양을 가게 된다. 김우명은 비인현감으로 있다가 암행어사로 내려온
김정희에게 파직된 바 있었는데, 이는 김정희가 너무 강직한 탓이었다. 김노경은 순조가 죽던 1834년 유배에서 풀려난다.
1835년(헌종 1년) 친분이 있던 풍양 조씨가 정권을 잡자 성균관 대사성, 이조 참판 이조판서 등에 이르렀다.
그러다가 1840년(헌종 6년) 무렵 안동 김씨기 집권하자 윤상도(尹尙度)의 옥(獄)에 관련되어 제주도로 유배를 가게 된다.
1842년 음력 11월 부인이 세상을 떠났으며, 그 예순세 살인 1848년 음력 12월 6일에 유배에서 풀려난다.
제주도에서 유배하던 때에 삼국시대로부터 조선에까지 내려오는 한국의 서법을 연구하여 만든 서체가 추사체이다.
이 추사체는 한국의 필법뿐만 아니라 한국의 비문과 중국의 비문의 필체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그의 대쪽 같은 성품은 그 뒤로 안동 김씨의 표적이 되었다고 한다. 그의 친구 권돈인이 영의정으로 김정희를 돌봐
주었는데, 궁중의 제례와 관련하여 그가 실수를 하게 되었다(→헌종묘천 문제). 1850년(철종 1년) 또는 1851년에
실수한 권돈인은 물론이고 친구였던 김정희까지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를 가게 된다. 북청 유배는 1852년 예순여덟 살
겨울에야 풀려나게 되며, 그동안 지인과 제자로부터 고대의 석기를 모아오게 하여 한국의 고대 문화를 연구하였다고 한다.
2010.01.15 12:56
황선배님.
후배가 이곳 시간으로는 토요일 아침부터 쓰신 글보며 열심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2010.01.15 15:29
유선생!
阮堂에 대한글은 읽으면 읽을수록 재미있읍니다.
흥미 보여주셔서 감사하고요 추운날씨에 몸조심
하세요. 규정
2010.01.15 18:37
2010.01.16 00:56
방선생!
위키 백과를 찾아보면
"서예(書藝)란 중국에서 발생한 예술형식의 하나로서 한국 및 일본에 전래되어
한자뿐만 아니라 해당 나라의 글씨체를 예술적으로 종이 위에 표현하는 기술적
측면을 넘어서, 정신수양의 수단으로 (예컨대 문인화) 인정받고 있다."라고
적혀 있읍니다.
더나아가서 서예의 근본정신을 찾아보면
"서예의 심오한 뜻은 기법의 연습(習練)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기법과
병행해서 정신수련을 중요시한다."라고 한것을 보면 서예란 정신수양을 위해
큰도움이 되는 예술의 한형태인것을 틀림없읍니다.
한획 한획 툴림없이 써내려 가야함으로 정신집중이 절대로 필요한 군인들에게
필요한 교제가 아닐까 생각하며 은퇴한 노인들에게도 마음을 흔들림 없게
다스리는데 도움이 되리라 믿습니다.
이곳 미시간도 어제는 36도까지 올라가 한꺼풀 벗고 걸었었읍니다.
좋은 주말되세요. 규정
2010.01.16 06:11
Hwang sun-bae-nim, don't be surprised to hear this.
Today in New York, 50 degree F.
"Beautiful day, isn't it, Jerry? Why don't you go out to practice golf?"
"I just finished 18 holes at Dyker Beach G.C with Emil"
"Good for you"
"Why don't you go out now"
This is the conversation I had with Jerry, Pulmonary Specialist,
at our physician's parking lot before I headed home after round.
Spring is Not That Far? It's here in NY.
2010.01.16 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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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의 '추사체'에 대한 좋은 설명이 있어 여기에 옮겨옵니다.
이글의 원작자인 유홍준 교수는 문화재 청장으로 재직시 somewhat
controversial act로 본인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눈살을 짜푸리게
한점도 있었으나 추사체에대한 공부라생각하고 여기에 옮겨 왔음을
알립니다. 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