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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ndfather’s decision on Father’s American Education
 

Following is my reply to a comment made by WM on “My father’s footsteps in America V” on Oct 15, 2018.
Dear WM: I haven’t forgotten your questions as to the background of my father’s American education in those days. I do not have information based upon certificates or documents since my family almost went into bankruptcy around the time of my birth and did not leave any articles or relics.
However I will try to gather information primarily from my mother’s anecdotes, and to use Korean language since the contents will be written exclusively in Korean connections.

 
선친의 미국유학 배경
 

운영자가 제기한 의문에 관한 대답을 쓰는 건 선친의 미국기록을 쓰는 것보다 더 힘들다. 왜냐하면 이 일은 선친의 미국유학 연도보다 더 일찍 일어났기 때문이다.

간단히 시작하자면 우리 가문은 진양정씨 모암(茅庵)공 선조부터 본인까지 내려온 13대 종가였다.
조부께서 만석의 재산을 받으셨으니, 영남지역의 대부호였고, 또 조부는 연소할 때 과거급제를 하여 경북 예안의 현감 즉 고을 원님이 되셨는데, 그 당시 친일세력이 조정을 장악하게 되어서 뜻한 바가 있어 고을벼슬을 사직하시고, 전가족을 인솔하고 한양으로 이사를 하셨고, 큰 집 여러채를 소유하셨겠지만, 나는 잘 모르고, 오로지 내가 1937년에 태어난 “적선정(積善町) 132번지의 2호”가 우리 가문이 소유했던 마지막 큰 집이었다.
이 세상만사가 모두 그렇듯이 흥망성쇠가 유수하여 1898년에 증조부께서 돌아가신 후 40년도 채 못되어 조부와 부친께서 전 재산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내가 태어난지 얼마 안되어 그 집을 팔고 가족은 셋방으로 이사를 갔다고 하니 얼마나 참담한 지경이었는가?
나의 어렸을 때 기억에 의하면 수원에서 살았고, 어머니는 39세에 나를 나셨던 노산이기에 유모가 있었던 기억도 있고, 그 후 장충단공원 옆에서 살았던 신당정 집도 기억하고, 서울 떠나기 전 마지막 집인 흑석정 집도 기억하는데 아마 거의 모두 셋집이었겠다.
왜 이렇게 가난했던 이야기를 쓰는가? 선친에 관한 기록을 전혀 본적도 없고, 게다가 전부터 내려오던 세간살이를 본적도 없다. 얼마나 없었단 말인가?

두가지 예만 들겠다.
1943년 내가 유치원 다닐 때 우리는 강릉으로 이사갔다. 행로는 경성역에서 경원선기차를 타고 원산을 들러서 중앙선으로 바꾸어 타고 양양에 내려서 버스로 바꾸어 타고 한많은 강릉 버스정거장에 내렸다. 그리고 대정정 다섯집 동네에 들어가서 방 하나에서 살았다.
그때 무슨 짐을 갖고 왔겠는가? 아마 보따리 두세개를 들고 왔을 것이다. 강릉에서 산지 햇수로 3년만에 해방을 맞이하여 아버지가 혼자서 먼저 상경하셨고, 어머니, 누나, 나 이렇게 나머지 세 식구는 한달쯤 후에 대관령행 버스를 타고 원주에서 기차로 바꾸어 타고 정량리역에 와서 내렸다. 내 기억에 어머니와 누나가 각각 보따리 한개씩 들고 온 기억뿐이다. 이게 우리 재산이며 세간살이의 전부였다.

다음 장면은 아버지 돌아가신 후 2년 가까이 되어서, 우리 모자는 종암동 어느 집 문간방에서 살다가 요행으로 회기동 후생주택을 얻어서 그리로 이사를 가는데, 리어카(Rear car) 한대를 빌려서 어머니는 앞에서 걸으시고, 나는 리어카를 뒤에서 밀었는데, 바로 옆집에 한 반 친구 서 군이 나와서 보기가 안 되었던지 나와 함께 리어카 뒤를 밀면서 청량리를 넘어 회기동집까지 갔다. 거기에는 겨우 옷가지, 밥그릇, 솟, 풍로등 부엌 살림 몇가지였다.
그때가 아마 1955년 가을쯤 된듯 싶다. 이게 우리의 전재산이다. 그 때는 일사후퇴 이후 서울집을 3년이상을 비웠기에 도적들이 들낙날낙 하였겠지만, 원래 세간살이가 없었던 가정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자랐으니, 집에 무슨 서류, 유물같은 게 있었겠는가?
그러니 내게 어른께서 이루셨던 기록이나 물려받은 서류는 전무하다.

조부께서 개혁파였느냐고 ? 그건 모르겠지만, 가능하다.
그럼 서재필씨 같은 인물과 교류가 있었던가? 그것 역시 모르지만 많은 신지식인과 교류하셨고 많은 젊은이들과 만나서 그들의 포부를 듣고 또 그들중에 조부께서 비용을 대어 유학을 시킨 예가 적지 않았다고 어머니로 부터 들었다.

조부께서는 보성전문 법학과 1회 졸업도 하셨는데, 물론 졸업증서같은 건 있을 리도 없기에, 내가 고려대 동창회에 연락을 하여 졸업증명서를 보내달라고 하였더니, Fax로 소실된 기록을 복제하였고, 발신일 2003년 7월 24일이며, 내용은 5회 졸업생으로 되어있어서, 내가 어떤 근거로 그런 오류가 되었느냐고 문의해도 모른다는 소리만 들었다.
당시 주소는 종로구 사직동으로 기록하였고, 졸업 연월일은 1912년 2월 3일이라고 하였으나, 그 신빙성을 믿을 수 있는지 없는지 나도 모르겠다 ..

조부님은 서울에 오셔서 신지식인과 많은 교류를 하셨고, 돈도 많이 쓰셨고, 젊은 이들을 유학도 많이 보내셨으니. 아마 일본 동경이었다고 믿으며 수많은 사람들이지만, 그중 한명은 여운형이고 또 한사람은 해방후 연대 초대총장이라고 들었다.

또 김규식 박사와 친하였는데 김박사께서 할머니와 의남매를 하셨다니, 믿기 힘든 이야기다.
할머니는 유명한 집안에 태어나셨는데, 이름높은 서흥김씨로 한훤당 김굉필의 직손이라고 하며 그런 할머니가 우리 가문에 오신건 이만저만 큰 영광이 아니었다고 들었다. 혹시 김규식박사도 같은 가문에서 출생하셨는지 모르겠다.

한 때 조부님은 기독교를 신봉하셔서 종가의 제사를 완전 폐지하시니까, 진주의 일가친척 수십명이 올라와서 우리집을 완전 점령하고 요즘말로 단식투쟁을 벌려 한두달후에 조부님이 항복하고 기독교에서 탈퇴하고 다시 종손의 임무를 다시 하셨다고 어머니로부터 들었다.
그러니 당시 선지식과 많은 교류를 하셔서 선친 유학지를 영국, 불란서, 독일같은 유럽 열강을 제쳐놓고, 신강국이요 세계 최강이 될 미국을 택하신 건 올바른 선택임이 틀림없다.

언젠가 아버지께서 어떤 분에게 영어 공부가 얼마나 힘들었는가하는 예를 들어서 설명하셨던 걸 곁에서 들었다. 영어공부를 이곳에서 저곳에서 1년 2년씩 준비하고 도미하셨을 때 첫번째 학교 입학시험에 낙방하셨다는 이야기인데 그 자세한 내용은 기억하지 못한다.

이게 내가 알고 있는 전 지식이니, 궁금증을 충분히 풀지는 못하였을 것으로 사료된다. 그래도 내가 요청해서 받은 조부님의 보성전문 졸업 증명서를 그 후신인 고려대학교 동문회에서 받아서 싣는다. 이게 내가 갖고 있는 조부님 학업의 유일한 증거다.

 
조부님 학적부 발송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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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적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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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부님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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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암공(茅庵公) 송덕비(頌德碑)에 참배:
나로부터 13대조(代祖) 즉 나의 13대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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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덕비(頌德碑) 진주시 일반성면에 위치한 선산. 2010년 6월 귀국 때 성묘하였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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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wan Ho Chung – January 31,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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