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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친의 옛 발자취를 찾아서 2회


Exhibit 1: Williston Seminary 본관 정문19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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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Williston Seminary, Easthampton, Massachusetts. 이 사진은 나의 선친께서 10년간의 미국 유학시기에 찍었던 학급사진이며 장소는 Boarding School, Williston Seminary의 건물정면이었다. 선친은 뒷줄 우측 끝으로부터 세 번째 학생이다. 이 사진이 선친의 학창시절에 남긴 유일한 사진이며 또한 미국 유학의 증거물이다. 이 학교는 4년제 Boarding school이다.

 
Exhibit 2 : 본인과 아들 Henry Chung의 사진 - 1985년 여름방학, Easthampton Town Library의 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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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과 Exhibit 1에 나오는 건물 외곽은 완전히 동일하다. 옛 학교 건물은 없어지고 거기에 새 학교 건물로 대치되었다. 그리고 학교 이름은 이제 Williston Academy였다. 이 건물은 잘 보존되어 우리 부자가 길고 긴 72년 세월 후에 방문하였을 때에는 Town Library였다.

 
Exhibit 3: Williston Seminary 본관 정문촬영 백주년 가족기념일 - 촬영일 2013년 8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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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가 선친의 학급사진 촬영이후 100년이 되었다. 좌측부터 손자, 본인, 둘째아들과 맏아들이다. 이제 학교 이름은 Williston Northamton School이고, 도서관은 Emily Williston Memorial Library다.

Exhibit 4: 아버지의 제2차 도미, 연도 1923년 좌측 - 같은 장소인데 친구분과 함께 찍으셨다. 우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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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친의 사진이 거의 없다. 원래 사진 찍기를 좋아하지 않으셨지만, 그보다도 전쟁당시 1951년 1월 4일 서울 철수 때 남쪽으로 걸어서 떠났고, 1953년 여름에 휴전된 후에도 귀가하지 못하다가 1954년 3월 초 아버님 장례 끝내고 귀가하니 집을 비운 후, 도적들의 만행으로 집은 쑥밭이 되었고, 여기 저기 널렸던 것을 모았지만 쓸만한 건 다 없어졌기 때문이다.
선친께서 1925년(교정 1923년) 두 번 째 미국에 오셔서 뉴욕시에서 찍으신 사진 4장이 있어서, 가져 왔다. 위 사진 두 장은 돌담 앞에서, 좌측 사진은 혼자서, 우측 사진은 친구분과 함께 찍으신 사진인데, 그 분이 이희경선생님으로 추정된다.
여기서 돌담은 끝난다. 그 우측으로 descending staircase가 있는 듯하며, Protective wooden fence로 막혔다. 사진 자체가 희미한데, 뒤에 있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없어서 이전에 혹시 Hudson River가 아닌가 최근까지 추측을 했었다.
이번 2015년 1월 6일에 New York Historical Society에 가서 넉장 사진을 모두 감정받고, 모두 Central Park안에 있는 유명한 Belvedere Castle에서 촬영하였음을 확인하였고, 나는 곧 걸어가서 그 Castle에 가서 찍은 사진 4장을 아래에 실렸다.
거듭 말하자면, 나는 2015년 1월 6일 화요일에 New York Historical Society에 두 번째 사진 문의 방문하여 그 돌담과 성곽이 모두 인근에 위치하고 Central Park안에 있는 Belvedere Castle 건물과 그 경내임을 알게 되어서 당장 Society에서 Castle까지 10여분 보행거리를 눈을 무릅쓰고 걸어서 Gift shop-Visitor’s Center까지 도착하였다.
그 곳 gift store에서 내가 들고 온 사진을 보였더니, 그 곳 여직원이 대단히 감명을 받았다. 이 직원이 이 Castle에서 촬영한 사진이었음을 다시 확인하여주었고, 내가 그에게 이 두 사진촬영장소를 아느냐고 물었더니, 안다고 한 후 그 직원이 다른 여직원을 데리고 와서 우리 셋이 눈이 심하게 내리는 밖으로 나갔다.
처음 직원은 나에게 서 있을 위치를 정해주었고, 둘 째 직원은 내 Camera로 내 사진을 찍어서 다음 Exhibit 5에 싣는다. 주소: Belvedere Castle, Central Park, 79th St, New York, NY 10021

 
Exhibit 5: Kwan Ho 좌측 사진 - Kwan Ho 우측 사진 Jan 06,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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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바로 그 돌담 끝에서 약간 거리를 두고 섰는데, 돌담이 5층임을 보여주었고, 내 뒤에는 Staircase이며 그 아래에는 Iron fence로 막았다. 현재 눈이 많이 내렸다. 그런데 그 배경은 Hudson River가 아니고, Turtle Pond였다. Jan 6, 2015. 이번에는 내가 돌담앞에서 찍은사진인데, 돌담을 더 잘 보여주며, 돌담위에는 석주를 만들어 세웠다. 90년의 세월은 갔지만, 이곳은 바로 위의 Exhibit 5의 장소임이 틀림없다. 이러한 대 발견의 날이 바로 2015년 1월 6일이다.
"아버지, 춘호가 아버지께서 사진 찍으셨던 바로 그곳에 90년 만에 와서 사진을 찍습니다." 2015년 1월 15일
나의 이름에 관한 설명: 출생시 조부님께서 관호(觀鎬)로 이름을 지어서 호적에 올리셨는데, 모친께서 내가 6세경에 갑자기 이름을 춘호(瑃鎬)로 고치셨다. 그때부터 고등학교 삼학년까지 춘호로 통하였다가 대학 입시 지원할 때 호적등본에 아직도 관호로 되어있어서 불야불야 다시 관호로 고쳤다. 부친은 항상 "춘호야" 하고 나를 부르셨다.

 
Exhibit 6: 1923 두번째 도미시에 친구 두분과 교대로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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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은 나머지 두장 사진 중 첫 장으로 선친께서 이희경 선생님과 찍으신 사진인데, 이번 2015년 1월 6일에는 불순한 일기관계로 이곳을 찾지 못하였으나, 다음 방문 시에는 이 장소를 반드시 찾겠다.
이 두 사진 배경에 중요한 Landmarks가 몇 개 있다. 첫째 좌측에 Castle, 둘째 Stonewall, 셋째 앉으신 벤치 우측에 석주 등이며 마지막으로 두 분 앉으신 앞에 인도가 보인다. 또 주목해야 할 것은 Castle 본관과 Tower가 우측-좌측의 배열이다. Belvedere Castle 1925(교정 1923)

 
Exhibit 7: 선친과 다른 친구분 사진이며 전 사진과 똑같다. Belvedere Castle,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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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hibit 8: Front View of Belvedere Castle

Belvedere Castle - Central Park Tours
 

내가 Front Yard에서 서쪽으로 이동하여 서북쪽에서 동남쪽을 향하여 촬영하였다. Jan 6, 2015

 
Exhibit 9: Rear View of Castle


Exhibit 10: 뉴욕 한인 교회. 촬영일 Sep 8, 2014. 촬영인 정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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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소는 633 West 115th Street, New York, N. Y. 이다. Williston Seminary 재학시기에 이곳에서 방을 세들어서 주소로 삼으셨고, 아버지의 셋째 삼촌과 함께 쓰셨다. 내가 이곳을 지금까지 3 번이나 찾았다. 첫번은 1971년 경에 Bronx-Lebanon Hospital, Bronx, N. Y.에서 근무할 때이며, 장소만 알아 두었다.
그 후 2014년 9월에 찾아서 문의하려고 하였으나 문이 잠겨서 돌아갔고, 금년 2015년 1월 6일에 비로소 목사님과 만나서 여러가지 정보를 얻었다.

 
Exhibit 11: 뉴욕 한인 교회 건물 사진 오래된 4층 건물이다 . 촬영일 Sep 8,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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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감회: 교회안에 “강변에 앉아 울었노라: 뉴욕한인교회70년사”란 글이 있다. 이를 보니, 나는 아버지와 작은 할아버지께서 한일합방 당시 두 분이 우셨던 일이 떠오르면서 나 역시 비애를 금할 수 없었다. 아마 많은 우리의 선인들께서 나라를 잃은 후 Hudson River를 굽어보는 언덕에 앉아 강물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많이 울었을 것이다. 하루 아침에 나라없는 국민이 되었기 때문이다. 백여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이 후손은 그때의 강개함을 억제할 수 없다.

 
Exhibit 12: 1913~1914년간 선친의 University of Pennsylvania 재학시절인 주소: 3911 Pine Street, Philadelphia, 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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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hibit 13: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본관 앞에서 사진, 2015년 2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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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nry는 우측에, Connor는 좌측에 있으며, 부자가 이곳에 대학 순회 차 방문 중 College Hall 경내 Benjamin Franklin 동상 앞에 섰다. Henry는 이곳의 졸업생이고, Connor는 유서깊은 이 대학교에 관심이 크다. 이 벤자민 프랭클린의 동상은 1899년에 유명한 Strawbridge and Clothier Firm의 창립자, Justus C. Strawbridge 로부터 필라델피아 시가 기증받아 설립하였으며, 현재 College Hall 경내에 위치하였다. 1913년부터 1914년까지 선친의 Wharton School 시기에 바로 이 동상을 보셨을 것이다. 한 마디 해명할 일이 있다. 사실은 이 사진 찍은 날은 내가 이 글을 올린 후 10일 후 일이었다. 그런데 추후라도 여기 올리는 게 배열이 좋겠어서 여기 올린다.
내가 국민학교시절에 선친의 대학교 사진을 보았다. 넓은 운동장에 제복을 입은 학생들이 열을 지어 서 있었고, 대포가 몇 개 있었는데, 대학생들이 군사훈련을 받는 것이었다고 들었다. 그러나 피란 후 귀가하였을 때에는 이미 모두 없어졌다. 나는 그곳이 당연히 펜실베이니아대학교 교정이라고 믿는다. 이리하여 나는 아버님 대학교 사진을 보관하지 못하였으며, 이 손실이 너무 애석하다. 그래서 이번 아들과 손자가 대학교 순회 때 Pennsylvania 대학교 정면에서 사진을 찍어, 잃어버린 사진 대신으로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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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hibit 14 선친(좌측)과 종조부(우측)의 독사진 두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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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hibit 13 좌측은 아버지 재학시절 사진임에는 틀림없지만 연도 미상이다. 그 우측에는 아버지의 숙부되시는 정지환(鄭芝煥), Jewhan Chung의 학교사진이며 역시 연도 미상이다. 내게는 종조부(從祖父)가 되시니, 쉽게 작은 할아버지라고 칭한다. 영어로는 Granduncle이다. 미국에서 대학교육까지 마치시고 귀국 후 지병으로 일찍 돌아가셨고, 후손이 없다. 1879년 8월 16일에 출생하셨고, 1916년 7월 24일에 졸하셨다. 삼촌과 조카 두 분이 함께 10여년을 이역 만리 타국에서 사셨으니, 두 분 사진을 사진을 나란히 올린다.
 
아버지 옛 숙소와 1923년 사진 넉장
 

제2회는 2015년 1월 16일에 올렸으니 제1회이후 5개월이 지난 후였다. 왜 제1회로 끝내지 못했는가?
처음부터 설명했듯이 내가 가졌던 재료가 너무 빈약하고 사실상 나 자신도 아버지가 어떻게 공부하시고 10여년 학창시절을 미국에서 보내셨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PENN대학교 Archives와 Williston School의 동창실을 통하여 재료를 얻기 시작하였는데,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추적을 해 본건 아버지가 종조부와 함께 사셨던 숙소를 알아보고 싶었고, 둘째는 학창시절의 사진 한장외에는 오로지 남은 1925년 사진 넉장으로 이는 제2차 미국방문 시에 찍으셨던 사진이었고, 나는 그 장소를 알고 싶어서 두 번씩이나 New York Historical Society에 가서 한인교회와 이 넉장 사진에 관한 정보를 찾아서 그 결과를 여기에 실었다.
100여년이나 된 외지인의 족적을 그만큼이나 찾을 수 있음에 고마움을 갖는다. 하지만 나의 추구열은 그걸로 식지 않았다. 그래서 다음 회에 계속된다.
이곳에는 한인교회목사님으로부터 그리고 뉴욕역사회 담당자로부터 나의 의문에 관한 해답을 얻는 과정을 추가하여서 좀 지루하지만 추적하기에 힘들었던 일을 추가하였다.

 
A. 부친의 옛날 미국주소 찾기
(1) 633 West 115th Street, New York City
 

상기의 옛날식 주소는 Williston Seminary 기록에 기재된 주소다.
부친께서 가끔 미국에서 사실 때 얘기를 하셨다. 뉴욕에서 부친과 자신의 삼촌이 큰 방을 세들었었고, 이승만박사(李承晩博士)께서는 작은 방을 세들어서 한 건물에서 6개월을 보내셨으며, 이박사는 그때 중년쯤 되셨고 부친은 한 20세가 되기 전이었다.
친해지셔서 농담도 하실 정도였다. 그 때 이박사는 프린스턴대학교에 제출할 박사논문준비를 하셨으니 이 때가 1910년으로 추정된다. 이박사는 또한 목사님이어서 부친을 세례 하여 드렸다.
나는 물론 그 거주지와 시기를 알지 못하였지만, 부친 고등학교 기록에서 상기의 주소를 찾을 수 있었다.
그 때는 1968년부터 1970년 사이에 Philadelphia에서 Residency 교육중이었고, 그 후에 1970년 7월부터 1971년 12월까지 Bronx-Lebanon Hospital에서 Residency and Fellowship 교육을 받고 있을 때, 어느 일요일에 혼자서 차를 몰고 이 주소를 찾아갔더니, 놀랍게도 이 주소에 한국교회가 있었다.
그러고 부친이 그 곳에 계셨던 때가 1909년부터 1913년 사이에 있었던 일이라고 믿지만 혹시 1909년 이전에도 이 건물에 계셨을 수 있었다.

하긴 2013년에 Williston School에 갔을 때 Mr. Pilgrim이 학교기록에 의하면 1930년대에 학교에서 어떤 문의편지를 이 주소로 보냈는데 회신을 못 받았다고 하였다. 내 생각으로는 부친, 작은 할아버님, 이승만박사 그리고 혹시 독립유공자 이희경선생님 등, 이분들이 이 장소에 같은 시기에 계시지 않았을 까하고 생각도 했다.
작년 9월 9일에 New York Historical Society 담당관에게 이 주소가 그 당시에 무엇이었고 또 한국인 혹은 한국사회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문의하였더니, 그가 조회한 후 New York Times 기사를 발췌하여 내게 주었다.
Aug 19, 1929일에 Rev. P K Yoon이 한국을 지배했던 일본을 비난했던 설교였고, 또 Aug 26. 1929일에 같은 윤목사님의 설교로서 서양과 동양의 최선의 문명이 공동으로 세계 평화를 이루기를 열망하는 글을 발견하였다.
그보다 좀 이르게, Aug 29, 1926일에는 Westside Residential Lease를 보도하였는데, 633 West 115th Street에 위치한 Four story 25 foot dwelling를 Houghton Company가 Lease한다는 소식이었다. 하긴 내가 그보다 하루 전날인 9월 8일 아침에 갔으나 문이 잠겨서 아무도 못 만났다. 그래서 이 교회사진 몇 장만 찍었다. 바로 이곳이 백여년전에 방금 청년이 되신 선친과 중년의 이승만박사가 6개월을 함께 지내셨던 곳이라고 나는 굳게 믿는다.
또 1910년 8월 29일에 한일합방이 되었을 때 부친과 그 삼촌 두 분이 얼싸안고 하루 종일 빈 방에서 우셨다고 하니 틀림없이 이 집이었을것이다. 나라잃은 백성이 된 슬픔으로 우셨다는 뜻이다.
그 후, 선친께서 제2차 미국방문하시고 귀국시 누구를 통하여 하와이에서 일본 첩자나 친일세력들로부터 피신중이셨던 이승만 박사를 마지막으로 만나셨다.
다음은 Korean Methodist Church의 역사를 Wikipedia에서 찾은 내용이다.
Korean Methodist Church and Institute는 1921년에 뉴욕시에 설립되었고, 그 현재 주소는 633 West 115th Street, New York, NY 이다.1910년 한일합방과 1919년 3 .1 운동이후 뉴욕시 지역의 한국인이 모여서 1921년에 3.1운동을 기념하고 추모한 후 교회를 설립하기로 결의하였다.
처음 예배는 매디슨 애비뉴의 Methodist Church에서 거행하였고, 1921년 4월 28일에 교회설립일로 정하였고 1923년 4월 22일에 459 West 21st Street 에 위치한 빌딩으로 이사하였고, 1927년 현재 주소로 다시 이사하였다.
이 건물은 4층이고 25X100 feet이며, Columbia University와 인접하여있다. 이리하여 선친이 거주지 주소로 사용하였던 곳을 찾았다. 게다가 그 후 이곳에서 우리나라 광복의 뜻을 갖인 선인들께서 독립을 위해 여러가지 의거를 계획하셨던 곳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이번에는 이메일로 교회담당인과 미리 연락을 한 후, 이용보목사님과 예약을 한 후 1월 6일 오후에 그 주소에서 만나서 많은 의문을 풀었다.
우선 나는 목사님께 부친께서 틀림없이 1909~1913년까지 이곳을 주소로 사용하셨고, 또 이곳에서 여러가지 일어났던 일을 이야기하였다.
또 1910년 한일합방을 알게 되었을 때 아버지와 후견인인 작은 할아버지 두 분은 서로 붙잡고 하루종일 방에서 우셨다고하였고, 또 1910년경에 이승만박사께서 이곳에 오셔서 박사학위논문을 6개월간 준비하셨는데 그 때 작은 방은 이박사께서, 큰방은 아버지와 작은 할아버지께서 쓰셨다는 내용, 아버지는 20세이전이었고, 이박사께서도 40세 미만이셨는데, 두분이 아주 가까워져서 농담도 하실 정도였다는 내용, 이박사는 목사님이였기에 아버지를 세례해 드렸다는 내용, 그 후 1925년 부친이 미국을 방문하셨다가 귀국길에, 하와이에서 일제세력으로부터 피신하고 계시던 이박사를 아버지를 잠시 만나서 무슨 상의를 하신게 두분의 마지막 만남이었다는 내용을 모두 목사님께 설명하였다.

또 한가지는 독립유공자이신 이희경선생님의 이야기인데, 그분은 선친과 의형제를 맺은 사이이며, 의사이며 독립투사였으며, 독립운동차 중국과 한국에서 일하시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었다가 결국 병사하시고 또 우리나라 독립후에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었다.
한가지 지적할 일은 서울대학교 음대교수이며 Soprano인 이관옥교수는 이 선생님의 외동딸이란 사실이다. 그런데 이 선생님과 선친 두 분은 이곳에서 함께 6개월간 기거를 하셨는데, 이 선생님이 요리를 하시고 아버지는 청소와 설거지를 하셨다는 내용까지도 설명하였다.
그러고 나서 목사님의 설명이 다음과 같았다. 이 장소에서 한인교회가 설립된 때는 1927년이었고, 그 전에 한인들이 오게 된 연유는 이곳이 기숙사였기 때문이다. 나를 데리고 4층을 모두 보여주셨는데, 기숙사처럼 각층마다 공동 Bathroom with shower room이 있었고, 기타 방은 3개였고, 아버지 말씀처럼 큰방과 작은 방이 있었고 또 Fireplace도 있었다.
목사님이 내게 신도목록인 두꺼운 책자를 보여서 찾으니, 놀랍게도 “정재원”:서울출신, N.Y.U.에서 상과전공, 세례교인. 귀국."
그래서 내가 N.Y.U.를 정정해 달라고 하여 “펜실베니아 상과대학”으로 정정하고, 세례교인에는 “이승만박사가 세례함”이라고 추가하고 또 그 위에 “Jan 6, 2015 방문 오후 1:59분. 정관호 (막내아들)” 이렇게 기록하였다.

 
(2) Belvedere Castle 에서 사진 넉장
 

그런데 순서가 조금 뒤바뀌었지만 (1) 번 한인교회 이용보목사님을 만나기 직전 같은 날 오전 9시경에 나는 우선 두번째로 New York Historical Society를 방문하고 1925년 제2차 미국방문시에 찍으신 사진넉장에 관하여 재차 문의하였다. 그 연유를 다음에 설명한다.
두 장은 낮은 돌담 근방에서, 나머지 두 장은 어떤 성곽같은 건물이 정면에 보였고, 선친과 그의 두 친구분들은 교대로 선친과 벤치에 앉아서 사진을 찍으셨다. 처음 두 장 사진과 다음 두 장 사진이 같은 곳에서 같은 날자에 찍으셨는지 알 수 없을 뿐더러 도대체 그곳이 어딘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내가 어렴풋이 기억나는 건 어머니께서 “아버지 두번째 미국에 가셔서 그곳에서 찍으신 사진이다. “라고만 하셨으니 도대체 그곳이 어딘가? 나는 알고 싶었다.
하긴 예전에 옆집 부인이 이 사진을 보고서는 당장 그건 Cathedral Church of New York City라고 내게 친절히 알려주었다. 수십년 후에 그 생각을 하고 지도에서 찾아보니 대도시 한복판에 있는 Cathedral Church에서 이러한 숲과 넓고 높직한 언덕이 있을 수없었다.
생각끝에 나는 맨해튼에 본부를 둔 AAA Auto Club에 가서 문의해 보려고 했다. 또한 이번에는 아버지의 학창시절의 주소였던 현재 뉴욕한인교회에 가서 담당자에게 직접 문의하고 싶었다.
하긴 지난 번 2014년 9월 8일 월요일 아침에 그곳 즉 633 West 115th Street, New York, N. Y.에 찾아갔더니 아침9시 직후인데도 문이 굳게 잠겼고, 초인종을 눌러도 대답이 없어서 할 수 없이 밖에서 사진 몇 장만 찍고 돌아섰다.
그런데 그 AAA Auto Club본부에 가서 사진 문의를 하려고 하니, 담당자가 가장 좋은 곳은 New York Historical Society이며 오늘 월요일은 문이 닫혔으니, 내일 가보라고 하여서 다음 날 화요일 2014년 9월 9일 아침에 가서 Counsellor을 만나 이층에 들어가서 두 가지 질문을 하였다. 첫째 한인교회에 관하여 이 건물이 1909년부터 1913년까지 누가 소유하였고 혹시 한국인과 관련이 있었는가?
그는 New York Times에서 오래된 기사를 찾아서 몇 가지 사실을 알려주었다. 이 내용을 이번 제2회에 실었다.
그 다음 돌담 사진 두 장을 그에게 보이면서 이곳을 알 수 없겠는가?하고 물었더니, 그가 이리보고 저리본 후 혹시 아버지와 친구 분 이희경 선생께서 두 분이 그 교회장소에서 만나 115th St를 따라 서쪽으로 내려가면 Riverside Drive를 만나고 이걸 건너 가면 큰 보행로가 나오며 거기서 서편 경계에 오래된 돌담이 있으니 그곳에서 찾아보라고 하였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곧장 115th Street에 가서 그가 말한대로 보행로까지 가서 돌 담앞에 서서 행인에게 부탁하여 사진 내가 돌담 앞에 선 사진을 몇 장찍은 후 추후에 귀가하였다. 그래서 선친의 돌담 사진과 나의 발견품 돌담 사진을 비교연구해 본결과 불행히도 그 두 돌담은 같은 돌담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일단 좌절을 겪은 후 다음에 또 다시 Society에 갈 기회를 엿보고 있다가, 둘째 아들 James가 연말 연초에 우리를 다시 초대하여 Southampton home에서 신년을 보낸 후 아이들 학교에 보내려고 우리 여섯가족이 한 차로 다시 West 96th Street에 있는 아파트에 온 후 1월 6일에 나는 다시 두 번째 Society를 화요일 2015년 1월 6일에 방문하였다.
이번에는 좀 더 신중하게 사진 넉장을 모두 보였더니, 그 Counsellor는 처음 돌담 사진에는 역시 난감한 표정을 보이다가 성곽사진을 보자마자 대뜸 이건 Belvedere Castle이라고 큰 소리로 알렸다! 도대체 Belvedere Castle이 어디있는가? Society에서 Central Park West를 따라 77th Street에서 79th Street까지 간 후 우회전하여 79th Street Transverse를 따라 Central Park 으로 들어가면 총거리 0.4 마일 보행 시간 9분이면 도착한다.
이리하여 나는 심하게 내리는 눈속을 걸으며 그 성곽의 본건물입구까지 간 후 Visitor Center에 들어가 Central Park 기념 책자를 사고 여종업원에게 갖고 온 사진 넉 장을 모두 보였더니, 그는 이 사진이 이 Castle경내에서 찍었다고 확인해 주었고 자기의 동료를 불러 둘이서 나를 데리고 성곽 바로 앞에 있는 돌담으로 데리고 가서 귀중한 나의 사진 두 장을 찍었다.
눈은 계속 심해서 나는 여기서 끝내고 다음 벤치사진은 추후에 찾기로 하고 떠났다. 이것으로 그 날 일과가 끝난 건 아니었다. 나는 그 날 오후에 한인교회 이용보 목사님과 1시에 방문 예약을 하였기에, 일찍 점심을 한 후 그곳에 세번째 교회 방문하여, 목사님을 만나게 되었고 또 건물과 교회에 관한 많은 정보를 얻게 되었다. 하여간 2015년 1월 6일은 내가 획기적 발견을 한 날이었다.

 
(3) 종조부에 관하여
 

이곳에 종조부 정지환님에 관한 언급이 가끔 나와서 내가 간단히 소개하려고 한다.
그러니 도미시 연세가 이십 사오세경이었고, 사망 시 겨우 삼십대 중반 정도였겠다. 게다가 후손도 없다. 이분께서 1906년부터 1910년까지 Williston Seminary에서 수업하셨고, 1910년부터 1914년까지 Colorado School of Mines 즉 콜로라도 광산대학을 졸업하셨다고 들었다 계속 생존하고 활동하셔야 할 분이 이렇게 일찍 돌아가시다니 너무 애석하다.
선친께서 도미하실 때 만 십세 혹은 십일세로 추정한다. 그래서 함께 계실 후견인 한분을 택하였는데 그 분이 바로 정지환님이시다. 조부님의 세번째 동생이시며, 요절하셨다.
정지환(鄭芝煥) Jewhan Chung. 출생: 1879년 8월 16일, 졸년: 1916년 7월 24일

 
B. 결론
 

아버님께서는 1903년경 십세 경에 동경에서 미국행 정기선을 타고 유학길을 떠나셨다.
처음 6년은 틀림없이 요즘말로 Elementary School에 다니셨을 텐데 그 정보는 도저히 찾을 수 없다.
내가 Williston School 동창회와 학적부에 여러 번 문의해보아도 전학교(former school)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대답뿐이다. 그러나 마지막 5년은 1909년~1913년까지 Williston Seminary에서 수학하였고, 1913년~1914년까지는 Wharton School, University of Pennsylvania에서 Freshman course를 마치셨다.

 
C. 아버님의 유산 (Legacy)
 

내가 처음 Williston Academy를 방문했을 때 Henry는 11세, James는 8세로 Elementary School에 다닐 때였다. 그 날 그 곳 동창회장에게 내가 듣기만 했던 Boarding School인가 하고 문의하였더니 그렇다고 대답하면서, 차 속에 있던 아이들을 보며 몇 살이냐고 묻고 만일 이 아이들이 자라서 고등학교 갈 때에 Boarding School(College Preparatory School과 동의어)을 고려하고 또 Williston Academy에 Apply할 경우에는 아버님의 재학사실과 동창회장 자신과 이날 만났던 일을 상세하게 기록하여 학교에 제출하라고 대단히 친절하게 설명하였다.
그 때부터 나는 우리 두 아들을 Boarding School에 보낼 계획을 세웠고 또 그 다음에는 Ivy League College에 보낼 계획도 세웠고 결국 그 때 계획했던 대로 실현하였다. 아버님이 그 옛날 오로지 미국 교육을 받으시려고 이 먼 나라에서 십여년간 노력과 고생을 하셨고 그러면서도 대학교 교육을 끝마치지 못 하신 사실을 생각하여, 나는 더욱 분발하셔서 두 아들에게 좋은 교육을 받게 할 결심을 하게 된 결과이다.

다음은 아버님의 일화 한편이다.
내가 소학교 아래학년시절 일이다. 나는 별로 우수한 생도가 못되었다. 그래도 노력하여 가끔 100점짜리 시험답안지를 들고 집에 와서 아버님께 보일 때 아버님은 내게, “춘호야, 백점보다 팔십점이 더 좋은 것이다. “ 하셨던 말씀을 여러 번 들었다. 나는 다른 과목보다 수학(예전에는 산술이라고 불렀다.)을 잘 하였다. 그런데 왜 하필 80점이 100점보다 더 낳았다고 하셨는지 그 뜻을 몰랐지만 아버님께 그 이유도 물어본 적이 없었다.

그 후 지인들에게 잡담할때 이 이야기를 하면 모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내가 이 지역에서 개업하고 병원에 Attending Physician으로 일할 때 그 때가 좋았던 세상이었다. 내 환자를 회진 한 후 환자 Charts를 들고 Nursing Station에 가서 Progress notes and Orders를 쓴 후 옆에 있는 담당 Nurse에게 Charts를 주면 간호원들은 내게 의례 ”Want some hot coffee?" "Yes. Please." 하고 주는 Coffee를 마시며 잡담을 한다.
어느 날 한가할 때 우연히 아버님의 이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아직도 왜 Grade A보다 Grade B를 더 선호하셨는지 모른다고 말했더니, Mary라고 하는 중년 Nurse가 대뜸,
“Don't you know, Dr. Chung? Your father wanted you to be an all-American boy with well-rounded personality. He didn't want you just to be a so-called bookworm."
아무도 대답을 못했던 나의 반 생의 의문을 Mary가 풀어주었다. 아버님은 내가 좋은 사람이 되기를 원하셨고 세속적으로 성공한 사람이 되는 걸 대단하게 생각지 않으셨던 분이었다.
이게 나의 아버님의 유산이다.
또 한가지 기억나는게 있다. 아버지께서 소년시절에 세례를 받으셨고, 이번에 처음으로 아버지가 뉴욕한인교회 신도명단에 세례교인으로 되어있음을 알게 되었다. 가끔 말씀중에 God 인용을 하셨다.
나는 나면서부터 어머니께서 나를 데리고 절에 가셔서 항상 불자이었다.
아버지께서 부산 피란시절에 내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이 세상에 모든 종교는 다 좋은 것이다. 네가 어떤 종교를 택하든지 진실하게 믿으면 된다.”
그 말씀을 나는 나의 며느리들에게 하여주었다. 이 또한 아버지의 유산이다.

G. 부친의 말년

미국유학은 1914년에 송금문제를 해결하시려고 일시 귀국하셨다가 뜻밖에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도미와 귀교가 불가능하게 되어서 결국 학업을 끝마치지 못하셨다. 하지만 독자 중에는 그 후에 어떻게 지나셨는가하는 의문이 생기겠기에 그 후의 행적을 요약하려고 한다.

이리하여 조부께서는 부친께 가사를 전담하시도록 명하셨고 또 모친과의 결혼도 곧 하셨다.
또 많은 친구도 사귀게 되셨고 중요한 일은 YMCA의 초대영어교사가 되셨으며 그때 제자 중 많이 알려진 분이 영문시인 수주 변영로선생, 성균관대학교수 성재 이관구선생, 기상대장 이원철박사였다.
그 외에도 많은 문인, 지사, 사상가와 교류를 하셨고 그들 모두 반일인사 혹은 항일투사였었다.
그 후 개인재산을 써서 국외 수출과 기타 사업을 하셨으나, 모두 실패하셨다. 일제시대에 반일인사가 사업을 하려니 될 수 없었다. 결국 중년시기에 가세는 기울어졌고, 부친은 일본경찰로부터 요시찰인(要視察人)명단에 올라서 항상 고등계형사가 배치되었다.
얼마나 고생하셨느냐하면, 돈이 다 떨어진 후 친우 두 세분과 함께 단골 찻집에서 만나서 냉수만 마셨다고 들었다. 해방 후 부친이 정계에 들어가실 것으로 기대하였으나, 부친은 그들 즉 정계에 들어간 분들과 뜻이 맞지 않는다고 하시며. 생계를 위하여 개인회사에서 근무하셨고, 가족은 항상 궁핍한 생활을 면치 못하였다.
설상가상으로 육이오동란이 일어나서 다음 해 1951년에 부산에서 피란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 때 연세는 이미 육십이 가까뒀으나, 쉬고 계실 수 없어서 계속 일을 하시다가 1953년에는 잘 알던 미국인의 소개로 마지막 직장이 되었던 완월동에 위치한 ‘부산아동자선병원’에서 행정 병원장으로 일하시다가, 지병의 악화로 "좀 더 치료도 받고 일을 계속하시라"는 미고문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사직하셨다.

그 후 대구에서 살던 셋째 누님에게 가셔서 대구서부시립병원에 입원하셨고 다음 해 1954년 2월에 돌아가시고, 유해는 고향인 진주 일반성 면에 위치한 선산에 모셨다.
아버지는 만석부호의 종손으로 태어나셨고, 자기 재산J로 10여년 미국 유학하셨고, 패가하신 이후부터 줄곧 곤궁하게 사셨다.

내가 연전에 집 이야기를 영어로 써서 아이들에게 남기려할 때 나의 글을 도와주었던 영어선생 Merry Ewing이 내게 묻기를, "Was he an intellectual?" 나는 아니라고 했고, "He was a person of principle." 이라고 하였으니, 자신의 원칙대로 사셨던 분이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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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wan Ho Chung - January 16,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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