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2.27 20:53
‘Republic of Korea’ 사용한 최초의 공식 외교문서 찾았다
http://news.donga.com/Main/3/all/20190227/94308027/1
지난 1월 27일부 Dong A. com 문화난에 보도된 내용이었다.
언론인 모임 ‘한미클럽’에서 1919년 영국 총리에게 보낸 김규식 선생 서신 확인 기사가 나왔다.
서두에 대한민국의 영문 명칭인 ‘Republic of Korea’를 최초로 표기한 외교문서가 발견됐다.
나는 해방직후 이런 말들을 많이 들었다.
항일 민족 지도자 세 분, 이승만, 김구, 김규식 씨가 귀국하신다.
그러면 이 세분 중 이승만씨는 대통령이 되고, 김구씨는 부통령이 되고, 또 김규식씨는 총리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
하던 말들을 많이 들었다. 실제로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선친은 김구 선생과 전혀 안면이 없었다고 믿는다.
그런데 이승만박사와 김규식 선생과는 특별한 관계 내지 인연을 갖고 계셨다.
나의 추정으로 선친이 이승만 목사님을 처음 만나게 된 게 아마 1910년 으로 추정한다.
목사님이 프린스턴 대학에 박사논문을 제출했다가 통과하지 못하여서 재차 제출하려고 아버지와 숙부 두분이 살고 있던 건물에 작은 방으로 세 들어오셨던 때였다.
아버지는 17세시었고, 그때 Williston Seminary애 재학중이었으며 두분 숙질은 큰 방을, 이 목사님은 작은 방을 쓰셨다는데, 나는 2015년 6월에 바로 그곳을 들러서 4층짜리 빌딩을 다 보았다.
그곳 주소는 633 West 115th St, N. Y. City 이었다. 그게 현재 뉴욕한인교회의 주소다.
이 목사님은 사십이 가까웠고, 아버지에게 ‘너’라고 호칭하셨다.
두 분이 아주 친해져서 주고 받은 농담은 그곳 한인들에게 유명해졌다. 그리고 목사님은 아버지를 세례시켜 드렸다.
세월이 흘러 아버지는 귀국하시고 두번째 도미하여서 일을 보시고 다시 귀국중에 인편에 하와이에서 일본 간첩단체로부터 피신하여 계신 이승만박사께서 아버지를 만나자고 하셔서 만나셨는데, 내 생각으로는 1923년 여름에 도미하시고, 아마 1924년 봄쯤 귀국하시던 도중에 하와이에서 만나셨다고 추정한다.
이박사는 선친께 “현재 상해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는데 이를 경영할만한 인물이 없는데 자네가 가서 행정과 외교 두 분야에 책임을 지고 일하지 않겠는가?”하셔서, 선친은 대가족을 거느린 가정에 본인이 없으면 가정을 이끌 사람이 없어서 못 하겠습니다.” 하고 두 분이 적별하셨다.
해방후 이박사가 귀국하셔서 환영회가 이화장인지 돈암장인지 하는 곳에서 열렸는데 국내 많은 인사가 모였다.
거기서 두 사람이 완장을 차고 왔다갔다하며 바쁘게 돌아다녀서 선친이 옆에 계신 여운홍씨(여운형씨의 동생)에게 “왜 저자들이 여기 있지요?”하시니, 여운홍씨왈,” Mr. 정은 아직 모르시오? 윤치영은 이박사의 비서요. 유래장은 윤치영의 비서라오.”
이에 불끈한 선친은, “저 두 자들은 밖에서는 반일파라고 하며 안에서는 친일파로 많은 국내 항일인사를 일본 경찰에 밀고하여 잡혀가게 한 매국노인데, 저 두 놈을 쓰다니! 나는 이박사를 만나지 않겠소.”하고 분연히 Walk out하셨다.
이리하여 이승만 대통령을 찾지 않으셨다. 윤치영의 이름은 많이 들었지만, 유래장의 이름은 들은 적이 없다.
이제는 김규식박사와의 인연이다 .
같은 해 1945년 후반에, 아버지는 김규식박사 환영회에 참석하셨다.
이버지가 출국하실 때 두 분이 동행하였다. 한분은 아버지를 한극에서 일본까지 대동하여서 일본 청산외국어학원에서 1년간 외래 학생으로 공부를 하고, 다음해 (1903년으로 추정)에 김규식박사와 함께 일본에서 미국행을 하셨는데 마침 숙부되시는 지환 종조부도 후견인으로 함께 가서 함께 살았다.
우선 뉴욕시에 정착을 하고 그곳 학교에 입학지원을하고 입학시험을 보셨다가 낙방을 하셔서 3개월간 준비기간을 받아서 그 동네 도서관에 다니면서 영어공부를 계속하셔서 삼개월후에 합격의 영광을 가지셨다.
그런데 dl는 모두 김규식박사께서 arrange하신 게 아닌가하고 생각한다.
많은 손님들이 기다리는데 김박사께서 나오셔서 모두 인사를 드렸다. 아버지 차례에 인사를 하시니까 아버지 얼굴을 자세히 보시더니, “왜 얼굴이 그리 길어졌지?”하고 금새 알아보셨다.
그 후 아버지는 김박사를 자주 찾아가시고 두분이 함께 국가의 안위를 염려하셨고, 김박사께서 나라를 이끌게 되시면, 아버지는 그분을 도와 모든 일을 하시겠다고 결심을 하셨다.
나는 소학교 2, 3학년 시절이었다. 가끔 아버지 회사의 짚자를 타고 어머니와 함께 삼청장(三淸莊) 김규식박사의 거처까지 갔었다. 아버지는 들어가셔서 한참 추운 겨울 Heater도 없는 Jeep속에서 기사, 어머니, 나 이렇게 셋이서 기다린 적도 몇 번 있었다.
김박사께서 아버지를 부인에게 소개도 시켰다. 새 해에 가서 세배를 하시려니까, 김박사가 만류하셨지만, 아버지는 세배를 하셨다고 들었다. 이렇게 두 분을 개인적으로 가까웠다.
하지만 국운이 그런지 이런 위대한 지도자에게는 기회가 오지 않고 늙고 탐욕이 많은 이승만대통령은 부패한 정권에서 헤어나지 못하다가 결국 자기를 지도자로 뽑은 국민을 외면하고 하와이로 야반도주를 하게 되었다.
이게 나의 두서없고 짧막한 어렸던 시절 회고담이다.
여기 Williston Seminary에 나와 있는 선친의 옛 주소 기록이 A slip of paper에 있어서 아래에 싣겠는게 이 또한 김규식 박사께서 Arrange하여 드린 게 아닌가 또 1909년부터 1913년까지만 사신게 아니고. 혹시 처음 도착 때부터 그러니까 1903년 부터 이곳에서 사신 게 아닌지 생각한다.
Encoded Note - YR. 1914
Kwan Ho Chung - Feb 28, 2019
Kwan Ho Chung - February 11, 2021
2019.02.28 01:54
2019.02.28 02:44
나는 김규식 박사가 인격자였고, 청렴하셨던 애국자라고 아버지로부터 들었습니다.
이제와서 그분을 많이 알게 되는군요.
해방 직후, 육이오 이후에는 김규식 박사에 관하여 세간에서 거의 잊어버린 듯 하였지요.
2019.02.28 04:25
선배님의 조부님과 아버님이 독립운동 하시는 분들을 많이 도왔던것 같습니다.
김규식은 6.25 때 납북되어 이북에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2019.03.01 06:31
아버지께서는 귀국 후 가정 관리를 하시면서, 중국 상해를 위주로 수출사업을 하셨는데,
불행히 모두 실패하셨지요. 하긴 반일인사가 일제시절에 사업을 하시려니
잘 될 수 없었다고 믿습니다.
처음에는 독립투사에게 많은 원조를 하여 그들이 출국하는데 도와드렸다가
그 후 가세가 곤궁하게 되었는데, 아는 사람이 자꾸 부탁하면, 어머니 패물까지
전당포에 잡혀서 금전을 마련하여 드렸다고 어머니께서 말씀하셨어요.
내가 뉴욕한인교회 백주년사가 멀지 않아서 출간될 거라고 알게 되어서
아버지의 그 건물 관계와 아버지의 행적을 갖고 담당자를 만났지요.
그곳에서 도산 안창호 선생의 유지를 받들더군요.
담당자가 내게 아버지가 독립투사를 도우신 서류나 영수증이라도 있느냐고 문의하여서
그게 어찌 가능하냐고 반박을 하였습니다.
독립투사가 일경에게 쫓기는 상황에 돈을 받았다고 영수증을 받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을 것이라구요.
하여간 아버지께서는 정직하셨고, 애국자시었어요.
그런데 Dr. 온, 내가 가정비화 한가지를 쓰겠는데, 논란이 될 건 없겠지만,
하도 드문 일이라 많은 의구심을 일으키겠습니다. 여기에도 아무 증빙자료는 없구요,
내 자신이 생존한 유일한 증인입니다. 다음 달 쯤 여기에 올리지요. 기대하세요.
2022.04.14 16:08
이곳에 가보비화란 제목의 가문의 비화(祕話)를 올렸다.
세상에 알리기보다 나 자신의 기록을 어디에 실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것은 비밀이 아니어서 선친의 친구분들은 다 알고 계셨다.
하지만 이제는 그걸 알 사람은 나를 뻬놓으면 아모도 없다.
나만이 증인이다. 그래도 혹시 이것이 원제국, 고려국 그리고 이씨조선과 관련이 있기에 싣는다.
아마 영구히 없어졌다고 나는 믿는다.
그냥 지나가는 가문이야기일 뿐이다.
선배님의 부친께서 김규식, 이승만과 가까운 사이 셨다니 놀랍습니다.
김규식 선생은 여운형과 같이 독립국가를 만들어 볼려고 고군분투 하셨
습니다. 여운형은 1919년 임시정부의 모체인 신한청년당을 만들고 파리강화회의
에 김규식을 파견 했습니다. 해방후 미 군정은 중도 좌파인 여운형과 중도 우파인
김규식을 밀어서 좌우가 합한 정부를 만들어 볼려고 노력 했습니다. 그러나 여운형과
박헌영이 인민위원회의 지도자가 되자 미군정은 김규식에게 큰 기대를 걸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카리스마가 없었고 국민의 지지가 미약 했습니다. 그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김구와 같이 한반도에 좌우가 합작하여 하나의 정부 수립을 고집 하자.
미군정의 지지도 끝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