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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정이 뭐길래

2011.10.08 00:28

오세윤*65 Views:3859




         


        망초


        정이 뭘까.


        5호선 전철을 타느라 광화문역 계단을 내려가던 참에 생각지도 않게 J여사를 마주쳤다. 비슷한 또래의 동행과 둘이 나와 엇갈려 반대편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곁의 동료와 깔깔거리며 이야기하느라 내가 멈춰 서서 바라보는 것도 모르는 채 지나치는 그녀를 나는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무슨 화제이기에 저리 재미있을까.


        옷차림이 박지점장과 사귀던 사오년 전과는 딴판으로 달라져 있었다. 모란꽃무늬의 밝은 분홍 플레어스커트에 진보라 재킷, 머리에는 짙은 고동색의 채플린모자를 썼다. 반나마 센 머리는 모자 속에 감춰져 자분치만 몇 가닥 귀밑으로 흩날렸다.


        국적불명의 패션으로 수다를 떨며 지나치는 J여사를 나는 끝내 멈춰 세우지 못했다. 멀어져가는 그녀를 보면서 나는 당연한 연상으로 집우
        執友 박지점장을 떠올렸다. J여사의 화사한 차림새와 구슬을 굴리듯 경쾌한 웃음소리에 대비되어 친구의 마지막 가던 모습이 더 한층 쓸쓸하게 가슴을 훑어 내렸다. 그녀는 박지점장을 사랑하기는 했던 걸까. 아니면 무료와 고적감을 달래기 위한 한때의 미봉책으로 사귄 것뿐인가. 사랑이라는 건 정녕 뭘까.


        그녀가 과연 누구를 진정 사랑한 적이 있었을까. 빼어난 미모에 서·화
        書畵 두루 탁월한 재인이라 남의 글이나 그림을, 남을 인정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을 터. 그런 이들에게는 거의 대부분 예외 없이 나르시시즘이라 일컬어지는 자기애만이 있다고 말하기는 한다.


        어찌 미인 재사뿐이랴. 사람의 본성이 그렇고 사랑의 속성이 그러하다고, 사랑 앞에서는 범부필부도 다 한가지라고, 사람은 다만 자기 자신만을 사랑한다고 고금의 철학자들은 정의하고 있지 않은가. 모정을 제외하고 인간사회에서 진정한 사랑, 나가 아닌 상대를 보다 앞세우는 참사랑, 변함없는 사랑이란 과연 존재하는지가 의심스럽다. 선사이래, 아벨라르와 엘로이즈간의 사랑 같은 헌신적이고 변함없는 사랑이 과연 몇이나 있었는지 궁금하다.


        그녀도 순간순간이나마 누군가를 끊임없이 사랑하기는 했을 것이다. 필요에 의해서든 아니면 외로움이나 결핍감을 메우기 위해서든 -. 사랑을 받기위해 하는 사랑, 그 이기적인 사랑은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랑을 사랑이라고 과연 말할 수 있을까.


        남편이던 선배 김 변호사가 타계한 뒤나 박지점장의 경우를 돌이켜봐도 그녀는 사랑은 했을망정 정을 주고받고 정을 키운 사람이라고는 여겨지지 않았다. 그렇게 조신하게 행동하며 남편을 공경하던 그녀가 상부
        喪婦된지 겨우 두 달에 화가모임에 얼굴을 내밀었을 때 사람들은 상실의 공백을 메우려는 어쩔 수없는 몸부림이라고 그녀를 측은해했다. 적극적으로 창작에 몰입하는 그녀를 동료들은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이던 남편으로 인해 억눌려 있던 예문藝文에의 욕구가 일시에 분출되는 것이라고 이해하며 적극적으로 도왔다.


        박지점장과 비금도· 암태도 등 서남 해의 여러 섬을, 남녘땅 곳곳을 여행하며 사랑을 키우다가 불쑥 자유롭고 싶다며 하루아침에 절교를 통보한 뒤에도 그녀는 여전히 그림을 그리고 시를 썼다. 그녀가 진정 사랑하는 건 글이요 그림이요 자기 자신뿐이었다. 다시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쓰기 시작한지 불과 1년여 만에 여사는 첫 번째 시화전을 열었다.


        사랑은 뭐고 정은 뭔가.


        항용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런 버러지보다도 못한 놈을 뭣 땜에 못 잊느냐.”는 지청구에 “정 각각 흉 각각”이란 말로 자기 마음을 변호한다. 흉허물이 있다고 정이 가지 않는 것도 아니요 정을 준다고 결점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라는, 정과 사람은 별개문제라는 뜻이다. 하기에 미운 정 고운 정 더러운 정 치사한 정 하다가도 끝내는 “정이 뭐길래” 또는 “그놈의 정 때문에”로, 슬그머니 연민 가득한 마음이 되어 잊지 말아야할 것을 잊고 용서하고 체념하며 품어 안으며 산다. 사랑이 끊어져 미움이 되면 남남이 되는 것과는 달리 정은 한번 생기면 세월 더불어 미움조차도 희석하기 때문이다.


        정이란 말을 할 때 거기엔 나보다 상대가 먼저 등장하고 연민이 생겨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비록 그것이 밉고 고약한 상대라 해도 -.


        사랑을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항용 ‘맹서’니 ‘영원히’니 하는 말을 곁 딸려 기필코 ‘사랑’과 ‘사람’을 얽어매려고 한다. 사랑의 속성을 알기에 변할까 두렵고 떠날까 불안해서다. 사랑에는 언제든 변할 수 있는 불안요소가 있고, 영구적이지 못하고, 타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이기적 속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결함이 보이거나 손익계산서가 부정적일 것이 예상되면 관계가 끝나리라는 걸 ‘사랑’을 하는 사이에선 서로 잘 안다. 하지만 정은 그렇지 못하다. 손해를 감수하고 아픔을 감내한다. 동양인의 정서요 우리네 사랑이다. 물론 서양에서도 이 정과 같은 감정을 필리아(philia)라고 정의하고는 있지만 우리네처럼 보편적이지도 않고 흔하게 접하지도 못한다.


        사랑이 한때 화사하게 피었다 지는 꽃이라면 정은 뿌리요 줄기요 잎이며 그 모두다. 불멸의 사랑이 존재하기 힘든 것과는 달리 정은 불멸하다.


        J여사를 지나쳐보내고 계단을 내려오는 중에 내 눈이 착시현상을 일으킨다. 개망초꽃이 웅기중기 피어있는 버덩 길을 쳐진 왼쪽 어깨아래 팔을 늘어뜨리고 고개를 숙인 채 걸어가고 있는 박지점장의 뒷모습이 언뜻 나타났다 사라진다.


        박지점장을 떠나보내던 자리에서 나는 친구가 그녀의 가슴에 추억으로라도 남았으면 바랐지만 그 모두 부질없는 기대였던 것 같다. 부디 가있는 그곳 세상에서는 물망초 닮은 정인을 만나 마음상하는 일 없이 편안하게 살았으면 바라며 허정허정 계단을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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