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5.29 07:59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053997
4.19, 5.16 과 미국
*원문 을 읽으시려면 오른쪽 "KCI 워문내려받기"를 클릭 하세요."
"이쯤 되면 우리는 “반공국시, 유엔헌장 준수와 우방과의 유대 강화, 부패일소, 국가 자주경제 재건, 대북 실력배양, 민정이양과 원대복귀”라 는 골간을 담고 있는 5·16쿠데타 공약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반공국 시에서 민정이양까지 모두 포괄하고 있는 CIA의 군사쿠데타 명분은 5·16 쿠데타군의 혁명공약 여섯 가지008와 너무도 유사하다. 두 내용이 거의 일 치하고 있음에 우리는 일반 시민의 상식으로서 상당한 전율을 느끼게 된 다. "
"2차 세계대전 이후 최초의 아시아 민주혁명 시도였던 4월혁명에 대한 미국의 향후 대응은 일본에서 파키스탄에 이르기까지 아시아 전체에서, 아직 희미한 지역 프로그램만을 갖고 있던 미국의 건설적 리더십을 결 정할 징표가 되리라 예측되었다. 민주혁명 사태에 직면한 한국은 아시아 온건주의와 급진주의, 민주주의와 혁명주의의 대결장을 현시하는 표징으 로 다가왔던 것이다. 이는 한국전쟁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침략에 대한 대 응을 아시아 전체에서의 자유세계와 공산세계의 대결이자 전 세계 대공 전략의 초기 선례로 여겼던 인식의 정확한 반복이었다. 세계 이념전쟁에 서도, 민주혁명에서도, 공산 진영과의 경계지점에 놓여 있는 한국 문제는 미국에게 국제문제이자 지역문제의 표본으로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문건들이 보여주는 대로, 쿠데타에 대한 지속적인 고려와 군부투입에 대한 미국 승인의 관점에서 본다면 군사쿠데타는 남아 있는 가장 유력한 대안이었다. 이것이 장면이 합헌정부의 구출을 위해 도와달라고 강력하 게 요구해도 미국이 응하지 않은 이유였다. 동시에 미국이 보기에 박정 희는 군부의 정치참여를 유도하려는 그들의 요청을 현장에서 앞장서 수 행한 셈이었다. 따라서 미국으로서는 군부쿠데타를 저지하고 장면 합헌 정부를 유지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것은 자기모순이 되기 때문이었다. 5·16에 앞서 CIA가 케네디에게 8번이나 쿠데타 위협을 보고하였음에도 아무 대책을 세우지 않은 미국이었다. 즉 미국이 군부쿠데타를 합작하지 는 않았다고 할지라도, 5·16쿠데타를 무리 없이 수용할 수 있었던 이유는 4·19 이전부터 일관된 군부의 정치참여 유도 구상이 존재했었기 때문이 었다."
"정치적 선택은 구조를 활용할 때보다 구조에 맞설 때 더욱 두드러진 다. 구조를 탔던 박정희의 승리는 민주혁명의 순간에조차 군사쿠데타를 적극 고려한 미국이 없었다면 불가능하였다. 미국은 4월혁명 시점부터 군사쿠데타를 적극 고려하고 있었다."
2023.05.29 08:51
2023.05.29 09:31
https://youtu.be/MG52zdQjj1w
세계를 고상하게 지배하고 싶었다. 역사도 짧은 미국이 No.1이된이유/미국사 요약
2023.06.01 09:19
텍사스 오스틴 자택에서 인터뷰를 했었다.
당시 사령관 고문으로 활약한 제임스 하우스만(78)은 지난 2월 미국 텍사스 오스틴시 자택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합헌정부를 지지한다는 매그루더와 그린의 성명은 제스처(Gesture)”라고 잘라말했다. 그는 “당시 주한미군은 어설픈 민주주의자였던 장면총리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차 있었다”면서 “미국은 오히려 쿠데타를 환영했으며 진압은 말도 안된다”고 말했다. 하우스만은 이어 “성명은 선거에 의해 선출된 정부가 쿠데타에 의해 무너지는 것을 미국이 방관했다는 애기를 듣지 않도록 형식적으로 내놓은 것이었을 뿐 진의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고 단언했다.
1995년 5월 11일 경향신문 11면- (나무위키, 제임스 하우스만)
https://namu.wiki/w/%EC%A0%9C%EC%9E%84%EC%8A%A4%20%ED%95%98%EC%9A%B0%EC%8A%A4%EB%A7%8C 너무위키 최신버존(2023.5.29)
나는 이 논문을 읽으면서 초중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 이런 역사를 어떻게
기록 할 까?하는 생각이 마음을 언짢게 한다. 1945년 부터 적어도 1987년 직선
제 개헌 까지 미국과 한국의 관계는 "주종관계 또는 가려진 보호령"의 범주
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승만, 장면, 박정희, 전두환의 미국에 대한 입지는
구한말 고종의 일본에 대한 입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다만 다른
점은 미국은 일본보다 많이 관대하고 기본정책이 미국은 "상존"이고 일본은
"착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