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3.31 19:17
1. 미국에 온 때와 계기. 돈을 얼마나 가져왔나?
미국에 1965년 6월 30에 도착했습니다. 도미의 계기는 당장 코 앞에 닥친 우리 식구의 재정문제였지요.
그때 미국 인턴 월급 $300이면 한국에 남아있는 식구의 재정 문제 해결이 가능했지요.
의대 졸업 후, 당시 서울대병원의 인턴 월급 1,000원 (담배 한 갑 가격)을 받으며
살았던 처지에 가지고 올 돈은 전혀 없었지만, 아버님 돈으로 미화 50불 (그 이상은 정부에서 바꾸어 주지 않았음)을
바꾸어 가져왔습니다.
갑자기 그해에 생겨난 "킴스 플랜"의 덕택에 본인은 대한민국 국방부 병무과에 뇌물 한 푼 쓰지 않고 왔지요.
우리 전의 선배님들은 그때 돈 약 1000만원 정도를 뇌물로 썼다고합니다. 흥미있었던 것은 만일 우리가 미국에서
돌아오지 않는경우에 우리 각자의 보증인이 1000만원 배상금을 물어야 한다는 보증서를 썼지요.
그해에 마침 같이 의과대학을 졸업했던 한국의 고관대작, 부자들의 자녀들을 위한 킴스플랜이었기에
그 플랜의 법적 사회적 정당성을 위해서 가난했던 우리들도 그들에게 붙혀 통채로 묶어 보낸 작전으로
알고있었읍니다. 결과적으로 그들 부모의 권력과 치부를 나머지 우리에게 아무도 모르게 몰래 나누어 준 셈인데,
우리는 모른척 감사했지요.
본인이 학교를 마치고 처음 사회에 나와 배운 정치적, 경제적, 법적 사회생활 입문이었읍니다.
그것으로 본인의 한국에서의 사회생활은, 다행인지 불행인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영원히 끝났읍니다.
2. 결혼 배우자를 어떻게 만났나? 가장 행복했던 때?
미국에서 7년의 Medical Traning을 맞추고, 켄터키에서 개업을 시작하자,
드디어 결혼할 생각이 났을 때, 당시 펜실바니아에 사시던 누님을 통한 중매로
그동내 의사의 따님을 만났지요. 그녀는 펜실바니아, 본인은 켄터키에
살면서 바쁜 개업 중에 연애도 데이트도 제대로 못 해보고 약 일 년 후에 결혼했지요.
중매결혼이 그렇게 쉽고 편한데, 왜 미국에서 난 한국 애들은 그렇게 싫어하는지
알 수 없더라구요. 결혼 후에는 특별히 행복했던 시기가 따로 있었던 것보다 본인은 언제나
행복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결혼생활이 평범한 밥과 국이라면 맛있는 반찬이 되는,
짜릿했던 애정의 조그만 기억들도 물론 가끔 있었는데 조그만 신문 지면에 한가지만 불겠읍니다.
문득 머릿속에 떠오르는 한 에피소드... 한 10여 년 전에 서울의대 선후배 구릅 20여 명이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를 걸어서 왕복하려는 용기를 내어 막 첫발을 디뎠는데, 갑자기 비와 바람이 오기 시작했지요.
이제 못 하면 언제 또 기회가 올까 해서, 딴 사람들은 모두 포기하고 돌아섰을때,
"나는 혼자 건너갔다 오겠다"고 했더니, 후배, 선배님들이 "너 미쳤냐?"는 듯이 고개를 흔들때,
보통 때는 겁 많은 아내가 기대조차 못했는데 "그럼 나도 같이 갈께"하며 뛰어나오더군요.
나머지 사람들이 근처 선물가게로 향하자, 우산도 없었던 우리가 둘이 서로 팔을 꼭 끼고 가벼운
비바람 속에 무사히 금문도 다리 전장을 걸어서 횡단 왕복했지요.
다리 왕복이 무사히 끝난 후 아내가 유난히 무척 고마웠고 사랑스러워, 금문도 다리 끝 난간에서 아내에게
오랜만에 키스를 해주었지요. 작고도 큰 기억입니다.
3. 왜 의사가 되었나? 특별한 계기? 위사가 된 후회? 제일 중요한 의사의 조건?
국민학교 때에 그림 그리기를 늘 즐겼는데 중학교 들어가기 직전쯤 어느 하루 형님과 아버님께서
"저 애가 그림만 자꾸 그리는데, 화가가 되면 어떡하지요?"하며 걱정하시더라구요.
그때 어린 나이에 무슨 뜻이였는지 알아 차리고, 중학교부터는 그림은 잊기로 하고
좋은 대학교에 가기로 마음 먹고 공부에 전력했지요. 고등학교 3학년이 되자 본인은 공대에 더 흥미가
있었지만, 의사가 되는 것이 그 당시 가족의 경제위기를 해결하는 데 우선 당장 유리할 것 같어서 의대로
대학지원 원서를 바꾸었습니다. 또 하나의 잊을 수 없는 어릴때의 기억이 본인을 의과대학으로 보내게 됩니다.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남아있는 6.25 피난시절... 부산 피난 때 어느 추운 바람 부는 겨울밤에,
어린 여동생이 체열 성 경련 (Febrile convulsion)으로 의식을 잃고 그 작은 어린 몸으로
온몸으로 전신경련을 하는 것을 보면서, 어머님이 힘없이 절망에 우시는 동안,
"왜 우리 가족에 의사가 없나?" 하며 빈손밖에 없었던 어머님과 함께 안타까워했던 생각이 늘
저를 따라 다녔지요. 그때 죽음의 벼랑 끝에 매달려서 아펐던 그 녀의 거친 신음이 마치
"오빠, 오빠, 빨리 의사가 되어 날 살려주세요"라고 외치는 듯 들렸습니다. 이것이 의과대학으로 가기로
마음을 바꾼 또 하나의 동기가 됩니다. 즉 "내가 우리 가족의 첫 번 의사가 되겠다." 였지요.
다행히 그 아기는 무사히 스스로 살아났고, 훗날 자신이 간호사가 되어 미국에서 잘살고 있으며,
본인의 뒤를 쫗아서 지금 우리 큰 가족 안에 의사만 5명이 있지요.
저는 언제나 선천적으로 과학이나 공학을 위해 태어난 사람이 아닐까 느꼈습니다.
의사가 됨으로 해서 한 가지 섭섭했던 것은, 공대 출신으로 한국인 엔지니어가 되어 대한민국이
"한강의 기적"을 이룸에 직접 공헌을 못 했다는 아쉬운 마음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중동의 사막, 경부 고속도로 등에서 창조적 아이디어에 한국인만 할 수 있는 기발한 공법을 도안하며,
거대한 토목 공사들을 했다면, 돈은 많이 못 벌었겠지만, 따분했던 수술장에서의 작업보다 더 찬란한 환희와 보람을
느끼지 않았을가 합니다. 이미 한참 지나가 버린 세월의 뒤안길에 서 있는 본인은, 소년 시절에 어린 여동생의
병고의 모습과 가족의 경제적 위기를 위해 의사의 길로 뛰어들었던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던 것은 아니었지요. 부모님을 한국에 두고 미국에서 헤매이는 동안,
그들의 노년을 본인이 몸소 돌볼 수 없었던 비극입니다. 본인이 눈 감을 때까지 맘속 깊이 덩어리져서 풀리지
않은 채 남아 있을 이루지 못한 약속의 아쉬움입니다.
하지만, 인생에 보람이 있었다면, 후회도 있었기 마련이니 이제와서 어쩔 수 없겠지요.
의사의 근본적 조건은 자비로운 인간성과 끊임없이 배우고 연마할 수 있는 노력의 소유라고 생각합니다.
엔지니어는 공사의 성공을 생각하지만, 의사는 연약하기 짝이 없는 사람의 생명과 건강을 돌보는
예기하기 어려운 참 특이한 직업이라 생각하지요.
4. 그동안 했던 연구과목 또는 임상 전공과목
본인의 일생중 연구과목은 외과 의사되는 배움과, 의사가 된후의 개업이었지요. 원했던대로 되었읍니다.
학교 다니면서 원래 외과를 선호했었고, 미국에서는 어려웠었지만 결국 일반외과의 피라미달 경쟁체재를 마치고
흉부외과를 수료한 후에 1972년부터 두 전공 분야를 혼자 개인 개업으로 몰두하며 살았습니다.
여기 까지가 본인의 연구과목이었고...
1990년대 초반에 구룹 경영 개업과 의료보험관할 의료시절이 (HMO) 창궐하기 시작했을 때,
본인은 의사의 가운을 벗었습니다. 의사의 존재는 남의 명령아래에 속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했지요.
1994면 6월 30일, 도미한지 29년후에, 푸른 하늘과 아름다운 산천을 향해 병원을 떠난 후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았던 것이 본인의 임상전공과목의 시작이었지요.
하여간 인생의 반이 의사였다는 것은 참 보람 있는 일이였다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본인의 뇌리에는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습니다. 다음에 나옵니다.
5.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 힘들었던 것, 6.25때 어디에,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젊어서 열심히 남을 위해서 부지런히 일하며, 동시에 나를위해 미래의 은퇴를 준비해서,
중년쯤이 되면 일찍 은퇴해서 나머지 인생을 자유 평화롭게 자신을 위해서 사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즉 의사로서의 직업은 성공적인 은퇴의 준비작업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젊었을 때 미리 은퇴를 바라보며 준비하는 선견지명이지요.
본인은 젊어서의 행복보다는 노년 은퇴 후의 건강과 행복에 더 우선권을 주었습니다.
의사 개업을 하면서 본 가난한 노인네들의 비참함, 본인 주변의 노년에, 사업에 실패한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저렇게 되면 안 된다"라고 생각했었지요.
건강과 행복한 여생은 그저 많은 세월이 지나가고 돈많이 벌었다고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겠지요.
본인이 이렇게 말하면 혹자는 "당신은 은퇴를 위해서 인생을 살았단 말인가?" 하며 비웃겠지만,
지금 80이 넘은 본인은 많은 선배, 후배들을 눈앞에 직접 보면서 산 실제 경험으로부터,
"물론이지요, 인생은 은퇴를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라고 솔직히 얘기할 수있습니다.
젊어서 실패하면 재기할 시간이 있지만, 늙어서 실패한 자신을 발견한다면 속수무책이 됩니다.
노년을 위한 조기 준비의 중요성은 필수 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지요.
여기 본인의 의견은 많은 분들께 속 거슬리는 건방진 소리 겠지만, 시계탑의 설문에 할수 없이 대답하니,
오해 마시고 받어 주십시오. 이런 망언같은 발언은 시계탑외의 딴 사람에게 한 일이 없읍니다.
흔히 "인류를 위한 의학도로서의 위대한 공헌"을 외치는 의사들이 있지만, 그건 젊었을 때 이미
끝마쳤어야 했을 얘기입니다. 늙은 후에 "자기 자신"을 건강하고 행복하게 돌보지 못한다면
위대한 공헌이 무슨 소용 일가요? "야, 너는 무척 이기적인 녀석이다"라고 하시면 "네, 그렇습니다"
6.25 전쟁이 초등학교 4년에 시작해서 중학교 1학년 환도할 때에 끝나는 동안, 본인은 아버님의
직장을 따라 남한 전국을 헤매었지요. 1.4후퇴 피난길에 몇 차례 굶었을 때가 있었지만, 부모님 보호 아래
큰 고생은 없었으나, 피난길에 국민학교를 6개를 바꾸며 다녔지요. 아마 이런 고난에서의 생존이
그 후의 제 인생에 큰 훈련과 도움이 되었다고 봅니다. 덕택에 저는 모르는 사람 만나는 것이 두렵지 않습니다.
이제 뒤돌아 보면 운명의 여신이 저에게 베풀어 준 자비로운 고육과 축복이었다고 생각하지요.
같은 맥락에서 본인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때"는 없었다고 봅니다.
축복을 받았을 때를 어디 감히 힘든 때라고 할 수 있겠나요?
5-4. 가장 보람된 경험은 언제였나요?
가장 잊지 못할 보람이 무어냐고 물어보시니, 이제 본인 나이 82에 "California 라구나 욷즈"의 은퇴 마을
종착역에서 인생의 기로에 선 지금, 부끄러움 없이 그동안 숨기며 살았던 많은 일들을 처음으로 또는
아마 마지막으로 털어놓겠읍니다. 저에게 물어주어 그동안 꼭꼭 숨겼던 자랑(?)의 기회를 만들어 준
시계탑에 감사하며 이제 드디어 터트려 씁니다.
본인이 특히 보람을 느끼는 "보람 이정표" 중에 몇 개 골라 씁니다.
1945: 다섯살때, 강원도 인제군 원통면 서화리의 첩첩산골에서 이북공산당으로부터 탈출하기로 한 아버님의
결단은 본인이 한 것은 아니었지만, 본인에게 무한한 보람을 주게 된 역사의 시작입니다.
칠흑의 야밤에 소련군 보초소를 멀리 보면서, 38선을 숨도 크게 못쉬고 산비탈을 건느면서, 부모님께서
아들에게 준 선물은 좁은 산골에서부터 넓은 미지의 세계를 열어 준 큰 선물이었지요.
인생에 문이 있다면 그것처럼 본인 앞에 큰 문이 열린 것은 다시는 없었을 것입니다.
1959: 19살때, 한 강원도 산골 촌놈이 서울의 어느 고등학교 졸업과 서울대 문리대(의예과 포함) 입학시험을
본인 자신도 또 아무도 믿기 어려운 꿈같었던 결과로 마무리 했던 것은, 현실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본인에게 왜 그런 명예가 주어 졌는지 본인은 지금도 불가사의입니다. 단지그 후부터,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 보이지 않는 명예가 본인의 어깨 위에 영원히 지워진 무거운 멍에가 되어, 본인의 의무인 것 처럼 지니고
살고 있습니다.
1962: 서울의대 바시티 (Varsity) 산악부 창립. 학년별로 분리되었던 활동을 의대학생회 안에 단일화시키고
1962: 총 서울대 바시티 스키부 창립. 뿔뿔이 흩어져있던 단과대학별 스키활동을 통일 시켜 서울대 팀을
만들어 한국 체협과 학생스키연맹의 대학 팀으로 출전하기 시작. 영원한 서울대 스키부의 전통을 시작했지요.
우리 서울대 스키부는 2022년 11월에 창립 60주년 기념회를 가졌고, 수 백명의 후배선수들을 양성하게 되었지요.
1971: Diplomate of American Board of Surgery
1972: Diplomate of American Board of Thoracic Surgery
1974: Fellow, American College of Surgeons
1979: 39세 때, Mt. McKnley (Denali) - 한국인으로 최초 Denali 남북 종주, 정상등정은 한국인으로 5번째,
정상등정후 살아서 돌아온 사람으로는 두 번째.
1988-1992: 세계 6 대륙 정상등반 (에베레스트 제외)
1994: 53세에, 외과의사 개업에서 영원한 은퇴
1999-2009: PSIA Certified Ski Instructor, Vail Resort system. 직업이라기 보다 취미로 했음
1979-Today: 제2로 병행된 다른 인생. 1970 년대 말부터 Intel-8088 CPU가 나오기 시작했고
곧 IBM-PC가 나오자, 홈 컴퓨팅에 흥미를 두고 집에서 독학을 시작한 것이 점차 깊어지면서, 나의 본성에
맞음을 발견, 계속 노력하기 시작하면서, 그때는 없었던 오피스 프로그람을 만들어 자신의 개업에 쓰고,
2000년 부근에서 고등학교 웹사이트에 손을 대기 시작, 2005년에 고등학교 클래스 웹사이트를 재편,
2010년경에 재미 서울의대 65 동기들을 모아, 우리 의대 1965 클래스 전용의 웹사이트를 만들었지요.
이것이 잘 돌아가자, 다음 단계로 재미서울의대 website을 만들어 우리 class밖의 member들을 끌어드려
몇천 개의 webpage를 실은 큰 website이 이룹니다. 2016년경에 재미서울의대 동창회의 Professional Website이
실패하자, 동창회의 부탁으로 1965 Class Website을 서울의대 Alumni Website로 update 합니다.
동창회와의 Honey Moon이 시작되어 잘 되는듯했으나, 얼마 후에 동창회에서 돈 걷는 목적으로 Website을 쓰기를
원하자, 나의 순수한 독립적 무료 Website 경영 원측에 어긋나게 되어, 결국은 동창회와의 관계에서 분리되는
불행 (혹은 다행)을 격지요. 이때 먼저 Website을 버리고, 새로운 SNU Medical Alumni Website으로 재탄생
시켜, 현재까지 독립된 website으로 잘 운영하고 있습니다.
"WWW.SNUMA.NET/XE"는 서울의대 동문들을 위한 것이고 의대동창회와는 직접 관련이 없었기에
홍보가 되어있지 않아 여기에 잠깐 소개합니다.
물론 서울의대 동문이나 가족이면 누구나 멤버가 될 수 있고, 멤버가 아니래도 자유게시판(Free Board)에
들어와 볼 수 있읍니다. www.snuma.net/xe의 website link를 치시면 website이 나오며, Freeboard에 가시면
Member 들의 기고-Webpage들이 나오지요.
Membership에 등록하시면 (곧 운영자가 approve 한 후) 글을 쓰고, 바꾸고, 지울 수 있읍니다.
지금이라도 가입이나 쓰시는데 문제가 있으시면 제 E-Mail로 연락 바랍니다.
이것이 본인의 제2의 보람되는 "직업같지 않은 직업"의 인생이며, 아마 본인의 타고난 소질을 잘 만족시켜 주는
기쁨입니다. 이것이 고등학교 모교와 서울의대동문들께 드리는 본인의 작은 기여입니다.
이 website은 의대동문 또는 아무나 등록된 사람에게는 영원히 Free이며, 아마 이 제2의 직업에서는
본인의 정신력과 육체가 허락하는 한 은퇴가 없을 것입니다.
6-1. 의대 때 생각나는 이야기 2개만.
의대 때는 고난의 행군 시절이었기에 감개무량한 추억이 가득 차 있지만, 기쁨보다는 불행했던 얘기 둘만 씁니다.
제일 본인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은 새로운 미국의학에 무능, 무식했지만 권력과 권위투쟁에 투철했던
그 당시 의대 교수들이었읍니다.
이들의 강의는 우리에게 영어 교과서를 그대로 줄줄이 읽어주는 것이 대부분이었읍니다.
대부분 학생들이 이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드린듯 했지만 본인에게는 참기 어려운 일 이었지요.
이들은 학생의 교육보다 학교내에서의 권위유지와 패권다툼이 더 중요 했던 것 같더군요.
일제강점기 잔재의 그늘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던 교수진들을 탓할 수는 없겠지요.
왜 본인이 힘들게 애쓰고 돈 벌어서 바쳤는지 이해할 수 없지만, 졸업장을 받기 위해 꾹 참고 침묵을
지켜야 했던 비극이었다 할 수 있겠지요. 운명의 여신이 저에게 베풀어 준 귀중한 저주와 선물로 생각합니다.
끝으로, K라는 교수님이 우리 1965 클래스는 의대 역사상 "제일 못된 반"이었다 했기에, 여러분께 늦게나마
알려드리려 기재합니다. 우리가 그분의 Temper Tandrum에 동의하지 않음도 동시에 Sigetop에 알려드리지요.
이 사람이 나중에 문교부 장관까지 되었으니 세상 알수 없읍니다.
내친김에 우리 1965 클래스 동문들께도 "우리는 그렇지 않었다"는 것을 다시 알립니다.
본인이 서울의대 생활에 별로 보람을 못 느끼고 그 권위에 가득 찬 교수님들께 찬양을 못 드림에 그 분들께
미안하지만, 용서를 빌지는 않습니다. 때가 그런 때였는데 우리가 거기에 끼어 들어갔으니 말이지요.
이런 네가티브 감정에 더욱 불을 부친 것은 본인이 미국에서 본 교수들과 그들의 가르침이 본인의
서울대학때의 그 것들과 너무 차이가 난다는 것이지요. 한국의 교수들이 우리를 위해 한 것이 무언가?
그 외에 산악반, 스키부 활동과 함께 학비를 벌기 위한 아르바이트에 수많은 에피소드가
있지만 다 쓸 공간이나 시간이 없군요.
6-2. 4.19 때는 어떻게?
우리 클래스는 우리 일 년 후배들과 함께 역사의 일부가 된 4.19 학생 혁명 클래스입니다.
의예과 2학년때에 청량리 교정에서부터 광화문, 국방부를 거쳐 학생데모에 참가했고,
4.19 이후에도 한동안 학생데모에 가담했다가 5.16으로 끝냈지요. 그런 와중에 연세의대로 갔던
본인의 죽마지우 고교동문을 데모진압 경찰의 총탄에 잃었읍니다. 청량리 의예과 교실에서 문리대
수업을 받기 싫을 때 반정부 데모를 핑계로 오용해서 가끔 도망쳤지만, 문리대 의예과 수업 몇 개를
빼먹은 것에 전혀 후회 없습니다.
우리가 한국역사의 중요한 가름길의 주인공이었다는 자부심의 기억이 있지만, 5.16 군부의
학생탄압으로 시지부지 4.19의 광택이 잊혀버린 기억이 남아있지요.
6-3. 재미 서울의대 동창회
본인에게는, 재미 동창회도 재한 의과대학과 별 차이 없었습니다. 거기에서 나왔으니 별 수 없지요.
미국에 처음 와서 제일 밑바닥의 클래스로 처음 몇 년 열심히 참가했지요. 그 당시 동창회장들은
거의 한물 가신 고령의 선배들이었는데 매년 참가했지만 점점 흥미를 잃어가다가 어느 해 1970년경
New York에서 열렸던 동창회에서 많은 "지방"사람들이 (뉴욕사람들이 우리를 부른 이름) 몇가지 불쾌한 일을 본 후
"뉴욕에는 다시 안 간다"는 구호가 생긴 후, 동창회에서 많은 사람들과 본인도 발을 끊어 버렸지요.
더구나 China Board의 장학금 헌금운동에 가난했던 우리의 주머니를 털어 바친 땀 흘린 기금이 오리무중으로 사라진 후에 동창회에 대한 신임이 땅에 떨어졌던 것도, 지방 사람들의 동창회에 대한 냉담증 해소에 도움이 안 되었겠지요.
최근에는 모교에 바치는 소위 연구비를 걷어 오는 사람에게 서울의대 학장으로부터 (무슨 위원회라고 하지만)
현금보상이 그럴듯한 이름으로 수여되는 것 같더군요. 아직도 구한말 엽전 시대가 태평양 양쪽에서 재현
되는 것 인가요?
요새는 다행이도 젊은 후배님들이 동창회를 잘 운영하는 것 같이 보이는데 오랫동안 안 갔던 타성이 쉽게 풀리지
않습니다. 그들의 노고에 고맙다는 얘기가 아닌, 재미없는 우울 한 얘기가 되어 죄송합니다.
모쪼록 동창회가 건강하게 계속 잘되어 나가 기를 빕니다.
7. 다시 태어나도 의사? 다른 직업은?
의사의 직업은 언제나 무난하고 좋은 선택의 하나일 것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단지 본인은 일단 태어난 후 철이 들어 가족과 주위의 사회상태를 둘러보고 결정하라고 추천합니다.
의사라는 좀 특수한 직업을 무조건 함부로 택할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현명하지 않은 사람을 아주 불행하게
만들 수도 있는 직업일 수도 있지요. 지나친 자부심, 엘리트 의식, 이혼, 자살, 마약중독 등등이
즐겨 어울리는 직업이 아닙니까? 세상에는 의사보다 좋은 직업이 많이 있겠지요.
8. 자녀들 경험에서 후배들에게 할 이야기, 긍정적 또는 부정적
미국 이민자로서 우리 아이들에게 한국말을 가르치지 않었음을 후회하지요.
한국이 그렇게 발전할 줄을 미처 몰랐었습니다. 한국인의 노력을 존경하며 본인의 애들도 그 정신을
배웠으면 합니다만 우리 애들을 미국인으로 키웠으니 그럴 가망이 희미 함에 후회합니다.
우리는 아들 딸 둘 뿐인데 3-4명은 갖는 게 더 좋을 것 같군요.
가능하면 일찍 은퇴하십시오. 그리고 은퇴하시면 "완전히" 의료계에서 떠나십시요.
추억과 보람이 될만한 것을 골라서 하십시오. 제2의 인생도 좋지만 환자를 취급하는
직업은 한번 했으면 충분할 것 같은데 두 번째에도 다시 해야 될가요?
그러시면 의사로서의 추억외에 당연히 많은 좋은 추억과 보람을 지니는 인생이 되겠지요.
9. 현재 건강비법, 운동, 취미, 흡연, 종교
행복하게 오래 사는 비결은 충분한 운동, 술 담배 끊기, 많은 친구들을 옆에두고, 잘 먹으며,
바쁘게 사는 것입니다. 본인은 다행히도 이 모든 것들을 찾어냈고 없으면 만들어서
실천하며 살고있읍니다.
1. 켄터기에는 산과 눈이 없어서 은퇴후 덴버로 이사해서 여름철에는 원래 즐기던 등산과 겨울에는 스키를
만끽하고 살다가, 2005년부터는 겨울 철에는 Laguna Woods, CA의 은퇴 촌에서 일주일에 몇번씩 골프치며 삽니다.
2. 담배는 고교졸업후에 (1959) 정식으로 피기 시작해서 골초로 살다가, 일반외과
Chief Resident가 되던 1970에 끊었지요. 하루에 한갑 약 10년 Pack-Year의 외도를 저질렀지요.
술은 원래 좋아하지 않어서 멀리하는데 문제가 없읍니다.
3. 특히 여기 은퇴촌에서는 고교동문 30 가구, 서울의대 동문 30가구, 서울대 동문 100가구들이
모여 가깝게 지내고 또 다른 한국인들 천여 가구들까지 해서 무척 바쁜 사회생활을 합니다.
4. 그런 와중에 툭하면 같이 먹을 일이 생기고, 다른 오락(가라오끼, 댄스)들을 같이 즐기지요.
종교는 기독교, 천주교, 불교를 시작만하고 체질에 맞지안어 그만 두었읍니다. 지금 현재 없읍니다.
10. 코로나 사태, 편집위원이나 동창회에 남기고 싶은 말,
코로나 판데믹과 동시에 아내의 백혈병까지 겹쳐 골수이식을 보면서, 본인의 79세부터 82세까지
3년 동안 시간 가는지 모르고 헤맸지요. 노년에 배우자가 아프면 본인도 아픈거나 다름없다는 것을 처음
배웠지요. 이제는 다 해결된 듯합니다만, 언제 어떻게 닥칠지 모르는, 노년의 물결, 바람, 파도는 계속 오리라
생각합니다. 어쩔 수없이 조용히 기다릴 뿐이지요.
시계탑의 편집자들과 동창회임원들의 수고에 감사 할 뿐입니다.
끝으로, 이런 모든 얘기들은 본인의 개인적 경험, 틀린 편견, 미숙하고, 건방진 감정에서 나온 의견이라는
아마 위선적인 겸손을 남기며 끝냅니다. .
드디어 하루가 지나 서산에 해가 져 갈때, "누가 무어라" 하던, 본인의 주인은 본인 뿐이며, 여러분들의 주인도
여러분 자신들 뿐이겠지요. 젊었을 때 복잡하게 보이던 인생이 이제는 무척 간단하게 보이니 본인에게도 노년이
드디어 도착한 모양입니다.
모두 행복하고 건강하신 남은 내일들을 맞이하기 바랍니다. 두서없는 푸념을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김성수*1965 (Steven Kim) 3/31/2023, snumaweb@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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