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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카메라로 바라본 세상 36.

객관성 시비

[중앙일보]  입력 2006.10.23

회사 간부들 "편파적인 기사를 썼다" - 회장에게 "내 이름 빼 주세요" 항의



북한 당국은 내 앞에서 ‘지상낙원’을 연출했다. 하지만 아이들의 꾸며진 표정에서 북한의 치부는 여지없이 드러났다.
북한 취재를 마치고 남은 건 28일 동안 듣고 본 것과 36통의 필름이었다. 필름의 양이 너무 적어 불안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기자들은 한 차례 취재에 500통 정도의 필름을 사용했다. 1000통이 넘는 경우도 있었다. 필름을 적게 쓴 것은 제한도 많았고, 마찰을 피하기 위해 자제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원산 송도원 해수욕장의 '남자''여자' 팻말은 재미있는 사진거리였지만 박오태는 군사시설이 있다며 해변에서는 카메라도 못 꺼내게 했다.

현상한 사진은 생각보다 상태가 좋았다. 문제는 기사였다. 혼자 다녀왔으니 당연히 내가 써야 했다. 미주리대학원에서 실습도 해봤고, 미국 생활도 13년이 넘었다. 자신있었다. 회사에서는 2주 만에 써내라고 했다. 긴 기사의 경우 보통 두 달을 주는데 비해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그만큼 회사는 빨리 결과를 보고 싶어했다.

모두 들떠 있는 연말에 나만 집에 틀어박혀 기사 작성에 몰두했다. 듣고 본 것은 하나도 빠트리지 않았다. A4 용지 36매에 달하는 초고가 완성됐다. 일주일 만에 초췌한 얼굴로 나타난 내가 두툼한 기사 뭉치를 건네자 편집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사이 이 많은 걸 썼단 말이오?"

하지만 기사를 돌려 본 간부들의 반응은 기대와는 달랐다. "선전 공작에 넘어가 편파적인 기사를 썼다"고 했다. 북한 측은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줬을 게고, 나는 그들의 일방적인 주장을 그대로 옮겼다는 것이다.

편집부에서도 같은 반응이 나왔다. 황당하고 억울했다.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그들의 선전만 가지고 기사를 썼겠느냐"고 따졌지만 회사의 분위기는 냉랭했다.

북한에서 취재하는 동안 선입견 없이 보고 들으려고 노력했다. 민감할 수밖에 없는 북한 기사의 생명은 객관성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열린 마음으로 보면 보여주지 않는 실상도 파악할 수 있고, 과장해서 보여주는 것은 알맹이만 보이는 법이다. 그런 자세로 취재하고 기사를 썼다. 그런데 회사가 가장 중요한 객관성을 문제 삼고 나온 것이다.

회사는 북한 실정을 전혀 모르는 편집부 고참기자에게 기사를 고치도록 했다. 내용은 특별히 달라지지 않았지만 단어 선택과 표현을 달리해 진지한 맛이 사라진 우스꽝스러운 글이 돼버렸다. 젊은 혈기를 주체하기 힘들었다. 회사를 그만 둘 수도 있다는 결심을 하고 회장에게 '메모'를 보냈다. "너무 실망스럽습니다. 이런 기사를 내보내려면 내 이름을 빼 주세요."

회사가 발칵 뒤집혔다. 보수적인 '내셔널 지오그래픽' 역사상 기자가 회장에게 항의성 메모를 보낸 것은 처음이었다. 문제가 커지자 회사는 나와 편집부 기자가 머리를 맞대고 기사를 수정하기를 원했다. 난 고치든 줄이든 직접 하겠다고 버텼다. 어떻게 결말이 날 것이냐가 회사 내 톱뉴스가 됐다.

부사장이 나서 중재한 끝에 기사는 다시 내 손으로 돌아왔다. 분량을 좀 줄여 제출하자 간부회의에서도 통과됐다. 그러나 이 일로 회사와 나는 껄끄러운 관계가 되었다. 한번 옳다고 믿으면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는 내 성격 탓이기도 했다.

김희중 (상명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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