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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김희중 Essay] '해결사'

2015.02.16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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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카메라로 바라본 세상 40.

'해결사'

[중앙일보]입력 2006.10.29 18:21 / 수정 2006.10.30 03:19

2년반 취재한 기획물 마감 사흘 전, "남태평양 가서 표지사진 찍어 오라"

남태평양에서 사흘 만에 표지 사진의 모델을 찾아냈다. 1970년대 중반은 필자의 전성기였다.
1974년 가을, 회사는 '남태평양의 인종 형성과 이주의 역사'에 대한 특집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2년 반에 걸쳐 여덟 명의 기자가 동원된 대규모 기획물이었다. 그런데 마감 직전에 문제가 발생했다. 마땅한 표지 사진이 없었던 것이다.

표지 사진은 단순하면서도 많은 정보를 담고 있어야 하며 독자를 감동시켜야 한다. 제호와 목차가 들어갈 공간도 있어야 한다. 그런데 네 명의 사진기자가 몇 년간 찍은 수만 장 가운데 그런 조건을 충족시키는 사진이 없다고 결론이 난 것이다.

사장은 나에게 다시 찍어올 것을 명령했다. 간부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표지만을 위해 기자가 출장간 적도, 취재 건과 무관한 기자가 대신 간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장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입장이 난처해 동료들 얼굴 보기조차 민망했다. 주어진 시간은 단 사흘. 어떻게 그 시간 안에 대규모 기획의 표지 사진을 촬영해 낸단 말인가? 하지만 못한다고 할 수도 없었다. 단 한 장의 사진을 얻기 위한 출장이었기 때문에 장비를 간단하게 꾸려 워싱턴에서 LA와 하와이를 거쳐 타히티로 날아갔다. 꼬박 하루가 걸리는 여정이었다. 비행기를 타자마자 열이 나고 식은땀이 온 몸을 적셨다. 태산 같은 부담으로 몸살을 앓은 것이다.
 
핼쑥해진 얼굴로 타히티에 내렸는데 공항에서부터 문제가 발생했다. 불어권이라 영어가 거의 통하지 않는데다 카메라 장비가 세관에 묶여버렸다. 고가 장비는 입국할 때 수입 절차를 밟고, 출국 할 때 다시 수출 절차를 밟아야 한다는 것이다. 빈손으로 호텔로 가 뜬눈으로 밤을 샜다.

다음날 아침 장비를 찾자마자 바로 옆의 모레아 섬으로 갔다. 조용하고 아름다웠지만 바쁜 마음에 경치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차를 빌려 섬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특집의 성격상 표지는 폴리네시아 원주민의 순수한 혈통을 간직한 인물 사진이 적당할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돌아다녀도 보이는 사람은 모두 혼혈이었다. 동료들이 표지감을 찾지 못한 것이 비로소 이해됐다. 나 역시 빈손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흘째 날 타히티 서북쪽 보라보라 섬으로 갔다. 이제 남은 시간은 단 하루. 섬은 지상낙원이었다. 고교 시절 서울에서 본 영화 '남태평양'이 생각났다.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섬을 돌아다녔다. 오후 네 시쯤, 야자수 우거진 바닷가 마을을 지나갈 때 섬광처럼 내 눈을 찌르는 장면을 봤다. 열두 살쯤의 원주민 소녀가 강아지와 놀고 있는 모습이었다.

차를 세우고 지켜봤다. 표정이 순수하고 눈이 빛났다. 머리에 열대의 꽃을 꽂은 그녀는 낯선 사람을 보고도 경계하지 않고 예쁘게 미소 지었다. 세계 곳곳을 다녔지만 그렇게 순수하고 밝은 아이는 보지 못했다. 속으로 외쳤다. '표지를 찾았다!' 소녀는 카메라 앞에서도 자연스러웠다. 광선을 보며 재빠르게 셔터를 눌렀다.

여객기 조종사를 통해 회사로 필름을 보냈다. 단 일곱 통이었다. 이틀 후 회사에서 전화가 왔다. "You did! Congratulations(당신이 해냈소! 축하합니다)." 극적인 성공이었다. 70년대 중반, 난 회사에서 종종 '해결사' 역할을 했다.

김희중 (상명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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