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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카메라로 바라본 세상

39. 박정희 대통령

[중앙일보]입력 2006.10.26 21:23

육 여사 서거 석달 뒤 청와대 방문, "많은 국민이 원하면 물러날 겁니까"

1974년 가을의 박정희 대통령. 석달 전에 아내를 잃은 그는 외로워보였다.
대통령은 국화로 덮인 운구차를 밀듯이 두 손으로 짚고 천천히 따라갔다. 아내를 실은 차가 청와대 정문을 나섰다. 대통령은 발길을 멈췄다. 남편은 지어미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풍속이었다. 그는 청와대 정문을 붙들고 아내와 작별했다. 운구차가 경복궁 돌담을 돌아 이윽고 시야에서 사라졌다.

1974년 8월 19일, 박정희 대통령은 이렇게 육영수 여사를 떠나보냈다.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문세광이 쏜 총탄을 맞고 육 여사가 숨진 지 닷새째 되는 날이었다. 그로부터 석 달이 지난 11월, 나는 청와대를 방문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한국특집 취재가 마무리 될 무렵이었다. 청와대의 거부로 취재기자는 동행하지 못했다.

현관에 나와 있던 김정렴 비서실장이 접견실로 안내했다. 청와대는 아직도 상가(喪家)였다. 침통하고 적막했다. 대낮인데도 창문엔 두꺼운 커튼이 드리워져 실내는 침침했다.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대통령은 어둠 속에서 슬픔을 삭이고 있는 걸까.

잠시 기다리자 대통령이 들어왔다. 작고, 까맣고, 강인한 인상이었다. 김성진 공보수석이 배석한 가운데 면담이 시작됐다.

"14년 만에야 한국 땅을 다시 밟았다고요? 부모님이 서울에 계신데 좀 더 자주 찾아뵙도록 하세요. 오랜만에 본 조국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소감을 듣고 싶습니다."

"어려움 속에서 많이 발전했습니다.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망설이다 마음먹었던 말을 했다. "…하지만 사회가 혼란스럽습니다. 국민이 유신에 저항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김 수석의 안색이 변했다. 대통령은 별 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유신에 반대하는 사람은 소수지요. 다수 국민은 찬성합니다. 계속 발전하려면 유신은 불가피합니다."

시국에 대해 제대로 보고받지 못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용기를 내 물었다. "많은 국민이 대통령이 물러나기를 원하면 그렇게 할 의향이 있습니까?" 공보수석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대통령은 잠시 생각하더니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국민이 원한다면 그럴 수밖에 없겠지요."

대통령이 가장 궁금해 했던 것은 역시 북한 실정이었다. 나를 부른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게다. 남한 경제가 북한을 막 따라잡고 있을 때였다.

"잘 먹고 잘 살고 있던가요?" "통제는 생각보다 훨씬 심합니다. 하지만 사회는 안정되어 있고 '세계 최고의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곧 통일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대통령은 접견실 구석을 가리켰다. 최근 발견된 남침용 땅굴 모형이었다.

"북한은 호시탐탐 남침의 기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이러니 유신을 하지 않을 수 없지요."

외로워 보였다. 아내를 잃은 절대 권력자는 편안하게 대화할 상대조차 없는 듯했다. 남북한을 여행하며 듣고 본 것을 있는 대로 이야기했고 대통령은 경청했다. 15분으로 예정됐던 면담이 한 시간을 넘겼다. 대통령은 현관까지 나와 배웅해 주었다. 광복절 기념식에서 총성으로 중단됐던 기념사의 바로 다음 문장을 정확하게 짚어내 읽어 내려갔을 때 미국 사람들은 경악했다.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본 박 대통령은 섬세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김희중 (상명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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