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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카메라로 바라본 세상 19.


돌아오지 마라


[중앙일보]
입력 2006.09.27

돈 떨어져 식빵 한 개로 며칠씩 버텨 - 아버지께 "한국 돌아가 공부…" 편지


라이프- 1952년 4월 7일자 표지에 당시 섹스 심벌인 마릴린 먼로가 등장했다
요즘은 동영상이 넘치는 세상이다. 사람들은 전철을 타고 가면서도 휴대전화로 스포츠 중계를 시청한다. 정지영상인 사진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줄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사진도 전성기가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70년대까지가 그때다. 매그넘(Magnum)이라는 자유 보도사진 그룹이 활발하게 활동했고, 미국 타임사는 사진잡지 '라이프'를 매주 수백만부씩 발행하며 세계 저널리즘을 이끌었다.

자살 기도 사건 얼마 뒤 나는 그 유명한 '라이프'사를 무작정 찾아갔다. 한국에서 갖고 온 200달러가 다 떨어져 빈털터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사진에 어느 정도 실력이 있다고 자신했기 때문에 '라이프'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사진 편집인 레스터를 만났다. 40대 중반 여성이었다. 그땐 몰랐지만 그녀를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세계의 쟁쟁한 사진가들이 그녀와 면담하기를 원했지만 쉽게 만날 수 없었다. 그녀의 책상 위에서 두 권의 앨범을 싼 보자기를 풀었다. 앨범에는 고교생 때 연 개인전에 출품한 사진들이 정리돼 있었다.

그녀는 사진보다 보자기에 먼저 관심을 보였다. "한국에서는 물건을 운반할 때 이런 걸 쓰나요?" 보기에 따라 신기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한국에서는 '보자기'라고 부릅니다. 래핑 클로스(wrapping cloth)지요. 크게 만들면 이삿짐도 옮길 수 있고, 작게 만들면 책가방이 됩니다." 그녀는 착착 접혀 내 주머니로 사라지는 보자기에 감탄했다.

그녀가 사진을 다 보기를 기다렸다가 "일자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사진 찍는 일이나 암실 작업을 할 수 있다고 했다. 내가 그렇게 이야기한 것은 무식한 탓에 용감했기 때문이었다. 세계 유수의 잡지인 '라이프'가 나에게 그런 일을 맡길 리 없었고, 레스터는 그런 일을 상의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나를 잘 보았는지 이리저리 일자리를 알아봐줬다. 당장 일을 얻지는 못했지만 그 뒤 그녀를 가끔 찾아갔고, 연말에는 카드도 오갔다.

힘겨운 날이 계속됐다. 커다란 식빵을 사서 학교 사물함에 넣어두고 며칠씩 먹으며 버텼다. 빵엔 곧 곰팡이가 생겼다. 그 뒤로는 약간 비싸게 먹혔지만 작은 포장으로 샀다. 몸이 꼬챙이처럼 마르고 일주일씩 대변이 나오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 무렵 아버지에게 편지를 썼다. 유학 자체에 극심한 회의가 생겼기 때문이다. "한국에 다시 돌아가서 공부를 하는 것이 어떨까요? 공부는 자세가 중요하지 어디서 하느냐가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석 달 뒤 답장이 왔다. "그곳은 누가 강제로 보낸 것이 아니다. 네가 선택한 길이니 네가 책임져야 한다. 죽어도 거기서 죽고, 돌아오지 마라."

편지를 쓰기 전까지만 해도 돌아갈 곳이 있었다. 이제 그것도 없어졌다. 죽든 살든 미국에서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다시 레스터를 만났다. 그녀는 진로를 바꿔 저널리즘을 공부하라고 조언했다. 사진 실력과 적극적인 자세로 볼 때 기자가 되는 게 좋겠다는 것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녀는 텍사스주립대를 추천해 주었다.

김희중 (상명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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