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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카메라로 바라본 세상 30

'수령님'의 나라

[중앙일보]입력 2006.10.15

인적 없는 평양 외곽 초대소서 묵어 - 취재 나가려 하자 "낮잠 시간이라…"
 
불가리아 대통령의 방북 환영행사에 동원된 평양 시민 1만여 명이 꽃술을 흔들고 있다. 멀리 천리마동상과 모란봉극장이 보인다.
 
 
모스크바에서 평양으로 향하는 소련 국영항공사 아에로플로트의 여객기는 소형 프로펠러기였다. 내부는 좁고 불편했으며, 승객의 행색이나 짐칸 분위기가 시골버스 같았다. 하지만 그런 것은 전혀 문제가 안 됐다. 오랫동안 마음 졸이며 추진하던 북한 취재가 드디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비행기는 어두운 시베리아를 밤새 날았다. 다음날 낮 비행기가 고도를 낮추자 북한 산하가 보이기 시작했다. 북녘 땅이지만 13년 만에 다시 보는 조국이었다. 어린 시절 카메라를 메고 뛰어다니던 바로 그 들판과 동산이 눈 아래 펼쳐졌다. 콧날이 시큰했다.

평양 순안공항은 작고 한산했다. 청사에 걸려 있는 대형 김일성 초상화 아래엔 '김일성 수령님 만수무강하십시요'라는 붉은 글귀가 쓰여 있었다. '수령'이라는 호칭을 처음 알았다. 붉은 스카프를 두른 남녀 어린이들이 꽃다발을 주며 북한식으로 경례했다. 담당 안내원은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의 박오태 부장이었다. 마음씨 좋은 시골아저씨 인상의 그는 "평양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하고 인사했다.

그가 날 데려간 곳은 시내 호텔이 아니라 평양 외곽의 초대소였다. 경치는 좋았지만 인적조차 없는 곳이었다. 박 부장은 "여행으로 피곤하실 테니 쉬시라"고 했다. 북한 당국은 아직 나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방침을 못 정한 것 같았다. 이틀간 바깥 구경을 할 수 없었다. '수령님'의 초상화가 붙어 있는 방에서 기대와 불안이 교차하는 가운데 지루한 시간을 보냈다.

사흘째 되는 날, 드디어 취재가 허락됐다. 박 부장과 검은색 벤츠를 타고 길을 나섰다. 평양은 내가 상상하던 모습과 완전히 달랐다.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철저히 파괴돼 휴전 당시 성한 건물이라고는 달랑 두 채만 남아있던 도시가 인구 100만의 현대적인 도시로 탈바꿈해 있었다. 버드나무가 늘어선 넓은 길, 고층 아파트와 웅장한 기념탑들, 하늘을 찌를 듯한 텔레비전 송신탑과 아름다운 대동강….

하지만 그것은 겉모습일 뿐이었다. 95개의 대형 전시실을 갖춘 조선혁명박물관에는 군인과 학생.근로자들이 무리 지어 관람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하나같이 무표정했다. 카메라를 멘 나를 외계인 보듯하며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다. 도시 전체는 연극무대요, 주민은 자신에게 주어진 배역을 연기하는 배우 같았다.

숙소로 돌아와 점심식사를 하고 다시 취재를 나가자고 하니 박 부장이 말렸다. 오침(午寢) 시간이라 나가봐야 아무것도 볼 수 없다는 거였다. 오침이 뭐냐고 물으니 점심을 먹고 낮잠을 두세 시간 자는 것이라고 했다. 남유럽도 아니고 중남미도 아닌데 무슨 오침이란 말인가. 조바심이 난 김에 비웃듯 투덜거렸다. "세계에서 제일 살기 좋은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한다면서요. 몇 시간씩 낮잠을 자며 어떻게 그런 꿈을 이룰 수 있습니까?" 박 부장은 내 말을 듣고는 잠시 밖에 나갔다 오더니 "갑시다. 공장의 오침시간이 끝났습니다"고 했다. 아마도 그는 잠자는 공장 사람들을 다 깨웠을 것이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나의 이런 건설적 비판은 그들에게 신선한 것이었고, 덕분에 취재 기간은 대폭 늘어나게 되었다.

김희중 (상명대 석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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