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2.17 21:59
https://blog.naver.com/correctasia/221571327489
김구와 장제스
장제스는 김구와 임정에게 많은 자금을 지원하여 광복군을 만들게
해주었지만 광복군의 운영과 통제는 국민당군이 장악했다.
장제스는 중국에 있는 임시정부가 신생 한국의 정부가 되어 자신의
국민당 정부를 지지하는 친중 신생한국이 되게 하기 위해서 임정을
지원했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다.
https://www.newdaily.co.kr/site/data/html/2023/03/04/2023030400008.html
장제스, 김원봉, 김구; 광복군
갈수록 중국의 ‘광복군 지배’는 놀라울 정도였다.
첫째, 김원봉을 설득하여 조선의용대를 광복군에 편입시키고, 김원봉은 광복군 ‘부사령’이란 직책을 만들어 부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조선의용대를 중공군에 넘겨주고 20여명 측근만 남은 김원봉은 조선의용대의 종말에 밤새 술 마시며 울었다고 한다.
둘째, 중국 군사위원회는 중국 군인들을 광복군 간부로 투입하였다.
참모장 이범석(李範奭)을 해임, 중국 고급참모 윤정보(尹呈輔)로 교체한 것을 비롯하여, 사령부 간부 45명중 중국장교가 33명이나 차지하고 사상교육담당 정훈처는 전원이 중국인으로 채워졌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자료집-9], 손세일, 앞의 책).
한마디로 광복군의 작전권, 운영권, 인사권을 국민당정부 장제스가 독점한 셈이었다.
두손 묶여 냉가슴 앓는 김구는 임정의 ‘주권행사’를 호소하는 편지도 보냈지만 허사였다고 한다. 독자적인 일은 불가능하였으며, 병력을 만들 청년들도 구하지 못해 부대 편성마저 못 하는 형편이었다(본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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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대한민국은 대한민국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았다는 문구를
헌법전문에 명시하고 있다. 소위 임시정부 법통론이다.
윤봉길의사 의거 이후 김구와 임정은 철저하게 장제스와 중국 국민당 정부
의 원조로 유지되었다. 중일전쟁 동안에는 한중 연합으로 일본과의 전쟁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게 하려는 것이 원조의 긍극적인 목적이었다. 장제스
로서는 일본을 제압한 후에 독립된 한국이 중국의 영향권 안에 있기를 원했
을 것이다. 장제스의 김구에 대한 지원은 이러한 그의 장기적인 포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 패전 후 한반도는 소련과 미국이 점령했다. 중국의 영향력는
극히 미약했다. 일본의 항복을 얻어 중일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중국은 곧
바로 국공내전에 휩싸여 국민당은 여력이 없었다.
그리고 한반도의 신생국은 북은 소련이 남은 미국이 건설했다. 김구를 도와
일본 패전 후 한반도에서 영향력을 발휘해 보려던 장제스의 꿈은 이루어
지지 못했다. 중국에서 장제스와 국민당 정부에 순응했던 김구는 남한의
새 주인 하지와 미군정에 대항했다. 둘 다 김구가 어쩔 수 없는 상대였는데
말이다. 그리고 김구는 미국 육군 정보기관 CIC 요원 안두희의 총알에 맞아
유명을 달리했다. 이와 같이 김구의 임정은 미군정에 의해서 철저히 무시
되었다. 그런데 임정법통론이라니....말이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