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

English
                 

History 대통령의 말씀에 거의 100% 반대한 분

2011.03.22 16:37

이기우*71문리대 Views:6539

KIST 탄생 배경
최형섭(崔亨燮) 소장

『계집애들 머리카락 팔아 번 돈이 뭐가 그리 자랑스럽습니까?』
1965 년 4월 정부 산하 연구소장들을 불러 모은 리셉션에서 朴正熙 (박정희) 대통령은 기분이 몹시 상했다. 당시 스웨터 수출이 연간 2 천만 달러에 달한다며 연구소장들에게 은근히 정부의 실적을 자랑 하던 朴대통령에게 崔亨燮(최형섭) 원자력연구소장이 갑자기 찬 물 을 끼얹는 말을 던졌기 때문이다.
당시 수출 주력 품목을 보자. 섬유, 합판, 가발, 신발, 피혁 같은 경 공업 제품이 대부분이었다. 특히 가발은 수출액으로 볼 때 3위에 오 를 정도로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아직도 머리카락은 여성에게 貞節(정절)을 상징한다. 유교적인 성향이 강했던 朴대통령에게 「계집애들 머리카락 팔아 번 돈」이라는 표현은 속을 뒤집어 놓기에 충분했다. 물론 崔소장은 가발은 물론 섬유나 신발 같은 제품이 모두 여공들의 피땀으로 만든 것이라는 생각에서 한 말이었다. 자존심이 몹시 상한 朴대통령은 언짢은 표정을 억누르며 화가 남아 있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팔 수 있어?』
『기술이 있어야 합니다』崔소장은 당시 일본은 전자제품만도 수출이 10억 달러가 넘는다고 지적하며, 기술이 들어간 제품을 만들어야 부가가치가 높다고 강조 하면서, 기술을 개발할 연구소를 설립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다음 달 미국을 방문한 朴대통령은 그 뒤 한국을 적어도 수십 년은 먹여 살린 것으로 평가되는 엄청난 선물을 하나 안고 들어왔다. 당시 존슨 대통령이 한국의 베트남 派兵(파병)에 대한 보답으로 한 가 지 선물을 약속하자, 朴대통령은 「공업기술 및 응용과학연구소」를 세워 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1966년 한국과학기술연구 소(현재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가 설립됐다.

KIST 가 한국을 적어도 수십 년은 먹여 살릴 수 있는 기술을 제공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예를 들어 보자. 선경마그 네틱스(현재 SKM)는 지금 磁氣(자기) 테이프나 磁氣 디스크 같은 기록매체 분야에서 세계적인 지명도를 자랑한다. 이 기술은 KIST가 1970년대에 개발하여 선경마그네틱스에 이전한 것이다. 지금 한국의 대표적인 수출 효자 상품으로 꼽히는 반도체나 통신기기도 처음에 KIST에서 출발하여 나중에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에서 그 씨앗 을 제공했다. 하나의 씨앗 기술이 그 열매를 맺기까지 적어도 20∼ 30년이 걸리는 것이다.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한국에서 기술과 기능은 구분하기 어려운 단어였다. 한국이 세계기능올림픽대회에서 몇 차례 연속 우승했다는 사실이 해마다 언론에 크게 보도되던 당시 기술이란 기능과 별 다 를 것 없는 것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공무원들의 대우와 신분을 안정시켜 국가주도의 근대화를 맡긴 박정희는 월남파병에 대한 선물로 존슨 대통령이 설립을 도와준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의 발족에 강력한 후견인 역할을 했다. 이 연구소는 한미양국이 1000만 달러씩 2000만 달러를 출연하여 만든 것이었다. KIST가 경제발전을 뒷받침할 과학기술의 사령탑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1966년 2월3일 초대 소장으로 임명된 최형섭 박사가 처음부터 "어떻게 하면 산업체와 연계를 갖도록 할 것인가"하고 고민한 덕분이다.

최 소장은 후진국의 연구소들이 거의 실패하는 이유는 연구소에서 먼저 연구를 한 다음에 사용자를 찾아나선 때문이라고 보았다. 기업체로서는 아무도 쓰지 않는 기술을 이용했다가 자기만 손해보지 않을까 겁을 내니 그런 기술을 사용할 리 없었다. 연구단계에서부터 기업이 돈을 댄다면 다소 위험부담이 있더라도 개발된 기술을 사용하려고 할 것이다. 그래서 산업체와 연구소가 처음부터 계약연구를 해야겠다고 판단했다.

두번째 고민은 '유능한 사람을 모으기 위해 어떻게 할 것인가'였다. 대학교의 교수들을 빼오면 교육에 지장을 줄 것이다. 최소장은 해외에 있는 한국인 과학자들을 유치하기로 했다. 문제는 조건이었다. 최소장은 박대통령의 엄호 아래 해외 과학자들이 안정된 환경에서 연구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를 정착시켰다. 집을 마련해주고 당시 국내에는 없던 의료보험을 미국 회사와 계약하여 들게 해주었다. 자녀들 교육대책도 세워주고 봉급은 중류 정도를 보장해주기로 했다. 주로 미국에서 모셔온 과학자들이 많았는데 미국에서 받고 있던 봉급의 약 4분의 1을 주기로 했다. 연구자는 돈이 너무 많으면 공부를 안한다는 것이 최소장의 지론이기도 했다.

그 래도 KIST 연구원들이 받는 봉급은 국립대학 교수의 세 배나 되었다. 서울공대 교수들이 반발했다. 최소장은 "우리 봉급을 깎아내리려고 하지 말고 당신네들 봉급을 우리 수준으로 올려달라고 문교부에 건의하는 게 상식이 아니오"라고 했다. 박대통령도 KIST 연구원들 봉급에 대한 진정과 불평을 듣고 있었다. 그는 최형섭을 불렀다. 봉급표를 갖고 들어오라고 했다. 박대통령은 표를 훑어보더니 "과연 나보다도 돈을 더 많이 받는 사람들이 수두룩하군"라고 했다.

"만일 각하께서 부당하다고 생각하시면 제 봉급만 깎으십시오. 다른 사람은 안됩니다."

박정희는 한참 봉급표를 들여다 보다가 "여기 있는 대로 하시오"라고 말한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소신이 강한 최형섭은 KIST 육성법안을 만들 때도 '연구소는 회계감사도 받지 않고 사업계획 승인도 받을 필요가 없다'는 취지의 조문을 넣었다. 연구하는 데 공무원들이 관료적으로 이것저것 간섭해선 일이 안된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정부쪽에서 반대가 심했다. 정부 돈이 들어가는데 어떻게 감사를 안받느냐는 논리는 오히려 타당성이 있는 것 같았다.

이 경우에도 박 대통령은 과학자편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막상 국회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당초 법안이 수정되어 연구계획의 승인과 회계감사를 받도록 되었다. 최소장은 박대통령에게 직소하여 1967년 3월 임시국회에 법률개정안을 냈다. 국회의원들도 많은 문제제기를 했다. 나중에 최소장은 "나를 믿고 법안을 통과시켜 주시오"라고 호소했고 국회의원들도 "우리가 과학기술을 모르니 일단 소장을 믿고 맡겨보자"고 했다. 연구소는 공인회계사를 고용하여 회계감사를 시킨 뒤 보고서를 정부에 보내는 것으로 낙착되었다. 최소장은 "일반 행정에서 쓰는 잣대로 연구업무를 재려 하면 반드시 문제가 생긴다. 감사원이 연구소를 감사하게 되면 연구원들은 잡무에 시달려 본업을 소홀히 하게 된다"고 했다.

"그렇다고 돈을 흥청망청 쓰자는 것이 아니다.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질서를 찾자는 것이다."

박 대통령은 서울 홍릉(원래 명성황후의 무덤이었으나 고종이 죽은 후 남양주군 금곡으로 이장되었다)에 있던 임업시험장을 연구소 부지로 검토하도록 최형섭에게 지시했다. 최소장이 농림부와 협의를 해보니 말이 먹혀들지 않았다. 대전, 천안 등지까지 조사하여 30여 군데의 장소를 물색했다. 최종적으로 서울 근교 동구릉을 지목하여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박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서울시장과 농림부 장관을 불러 홍릉으로 갔다. 현장에서 박대통령은 "임업시험장도 중요하지만 한국과학기술연구소는 더 중요하다. 38만 평을 전부 연구소에 주라"고 지시했다. 최형섭 소장은 농림부장관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서 그 가운데 15만 평을 넘겨받아 1966년 10월에 기공식을 올렸다.

박 대통령은 최 소장을 임명할 때 두 가지 부탁 겸 약속을 했다. 인사청탁을 받지 말 것, 예산을 얻는다고 경제기획원을 들락거리지 말 것. 1966년 가을 연구소는 1967년도 예산으로 10억 원을 신청했다. 김학렬 경제기획원 차관이 양해를 구해왔다. 2억원만 깎자는 것이었다. 국회로 예산안을 넘기기 전에 대통령이 주재하는 회의가 열렸다. 마무리 단계가 들어갔을 때 느닷없이 박대통령이 말했다.

"김학렬 차관, KIST 예산이 얼마라고 했지?" "8억원입니다." "원래 신청한 액수는 얼마인데?" "10억원이지만 소장과 의논해서 8억원으로 했습니다." "다시 10억원으로 해!"

박 대통령은 KIST 설립 후 3년 동안 한달에 한 두 번씩은 꼭 연구소를 방문해 연구원들을 격려했다. 최형섭은 "국가원수의 그런 방문에는 돈도 드는 것이 아니지만 연구소의 위상이 올라가 지원하는 정부부서의 태도가 완전히 달라지게 만들었다"고 했다.

지난 2004년 6월 29일 숙환으로 별세한 최형섭 박사는 최장수 과기처장관으로서 한국 과학기술사에서, 또한 한국 과학기술의 기반을 놓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로 알려지고 있다. 그와 관련해 많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그의 묘비에 기록된 글은 지금까지도 수많은 과학기술자들의 기억에 남아 살아 있는 교훈으로 전해지고 있다.

묘비에는 ‘연구자의 덕목’이란 제목으로 “학문에는 거짓이 없어야 한다”, “부귀영화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시간에 초연한 생활연구인이 되어야 한다”, “직위에 연연하지 말고 직책에 충실해야 한다”, “아는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을 반성해야 한다”는 다섯 가지 항목의 지침이 새겨져 있다.

Photobucket

이 글이 특히 큰 위력을 발휘한 것은 몇년전에 줄기세포 조작 파문으로 나라가 큰 혼란에 빠져 있을 때였다. 모 언론을 통해 최 박사의 비문 내용이 소개되면서 국민들로부터 큰 관심을 끌었고, 국민들로 하여금 복잡하게 얽혀 있는 연구윤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실마리를 제공해준 계기가 되었다.

이런 일화도 있다. KIST에 대한 박 대통령의 관심은 엄청났다고 할 수 있다. KIST 설립 후 3년여 동안 한 달에 한 번꼴로 연구소를 방문해 연구현장이나, 연구동 신축 현장을 둘러보며 연구 관계자들을 격려하곤 했다.

그러나 연구에 전념해야 할 연구원들에게 있어서는 대통령의 방문이 무척 힘들었다. 연구원들의 불만의 소리가 소장실에 전해지면서 최 박사는 마침내 결심을 하고 대통령에게 “잦은 방문이 일에 지장을 주고 있다”고 어려운 충고를 하게 된다. 그러나 박 대통령의 방문은 계속 이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건설현장을 찾아 막걸리만을 풀어놓고 연구실은 얼씬도 하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최형섭 박사와 박 대통령과의 일화들은 이후에도 계속 이어진다. 특히 1971년 6월 최형섭 박사가 제 2대 과기처장관에 선임되면서 두 사람의 돈독한 관계도 계속 이어져 연구 분야에서뿐만 아니라 행정 분야에서도 미래 과학기술의 초석을 놓는 계기로 작용하는데 재미있는 사실은 일생을 연구원 철학을 갖고 살아온 최형섭 장관이 행정을 수행해야 하는 장관직을 결코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회고록에서 최 장관은 자신이 “본디 행정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쓰고 있다. “과기처 장관 발령을 받았을 때 그다지 반갑지가 않았다”는 것. 때문에 장관 발령을 받은 직후 최 박사는 대통령을 만나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하며 말을 꺼냈다고 한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알았으니 앉으라”고 하면서 최 박사의 얘기를 듣기도 전에 “우리들은 어렵지만 당신네들은 얼마 동안 행정을 하다가 연구실로 되돌아갈 수 있는 것 아니오. 그러니 2~3년 동안 일하다가 다시 KIST로 돌아가시오”라고 했다고 한다.

최 박사는 이후에도 박 대통령에게 연구실로 돌아가고 싶다는 의사를 수시로 표명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럴 때마나 박 대통령은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최 장관을 계속 유임시켰는데, 어떻게 보면 최 박사가 장관으로 선임된 1971년 6월 4일부터 1978년 12월 21일까지 7년여 간에 걸쳐 이러한 관계가 계속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연구뿐만 아니라 행정 분야에 있어서까지 박 대통령의 신뢰가 어느 정도였는지 말해주는 부분이다.

과학기술 정책에 대한 신임 최 장관의 지론은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 이를 실천할 수 있도록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매년 과학기술처장관이 바뀌고, 새로운 계획을 늘어놓으면 효율적인 연구개발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연구인으로서의 오랜 경험에서 비롯된 견해였다.

때문에 최 장관은 1971년 취임하자마자 과학기술 관계 법령을 만드는 일부터 시작한다. “여러 기관을 만드는 일, 연구학원도시를 건설하는 일 등도 중요하지만 이러한 것을 제대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법적인 뒷받침이 필요하다"고 보고 과학기술 관련법의 제정과 개정에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그 리고 1967년 제정된 과학기술진흥법의 내용을 보강해 대폭 개정한 데 이어 특전략산업 및 공업기술 분야별 전문연구소 설립 근거가 되는 특정연구기관육성법을 새로 제정한다. 국내 최초의 기술인력개발법인 국가기술자격법을 제정해 우수한 기술자 및 기능자를 양성할 수 있는 교육시설과 자격제도를 운영할 수 있도록 기반을 마련한다.

1972년 제정된 기술개발촉진법은 민간 기업으로 하여금 기술개발에 눈을 돌리게 만든 중요한 법이었다. 민간기업 기술개발을 위해 기술개발준비금 적립제도를 새로 만들고, 적립금을 기술에 투자할 경우 금융 및 세제 혜택을 주도록 하는 등의 신기술 촉진법으로 이 법을 통해 국내 산업기술 개발이 정부 주도에서 기업 주도로 변모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법률 제정을 전후해 논란도 끊이질 않았다. 특히 국내 업체들 간에 심각한 마찰이 일어나기도 했는데 대기업인 삼성과 선경 간의 충돌이 대표적인 사례다. 1970년 당시 삼성과 선경은 비디오테이프를 생산하기 위해 외국에서 중간재인 폴리에스테르 필름을 만드는 기술을 들여오려고 신경전을 하고 있었다.

그 러던 중 선경이 KIST의 도움을 얻어 1년 후인 1971년 기술개발에 성공하였다. 기술개발의 핵심인 중간재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나 이 기술을 적용, 필름으로 완제품 생산하기 위해서는 생산장치가 필요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그 시설을 외국에 발주할 수밖에 없었다. 선경에서는 생산장치를 일본 도시바에 의뢰하였다.

그런데 사고가 여기서 발생했다. 도시바의 자매회사였던 도레이에서 이 사실을 알고 그동안 기술공여를 거부해오던 삼성에 연락해 자사의 기술을 로열티 없이 그냥 주겠다는 제안을 해왔다. 값비싼 기술을 그냥 주겠다고 하니 삼성에서 대환영이었다. 삼성은 즉시 정부 측에 기술도입 허가를 신청하는데, 기술개발촉진법에 의하면 국내에서 특정 기술을 개발했을 때는 다른 기술을 도입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었다.

결국 과학기술처는 삼성의 기술도입을 불허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삼성 측에서 크게 반발하고, 한동안 미묘한 분위기가 조성된다. 그러나 최 장관은 회고록에서 “결국 삼성의 기술 도입은 무효로 돌아갔고 우리가 개발한 기술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적고 있다. 한국에서 한국인에 의해 개발된 기술에 손을 들어준 첫 번째 사례로 R&D에 전념하고 있는 연구원들의 사기를 크게 높여준 사건이었다.

____
대통령의 지시를 95%나 반대 했다?
최형섭(崔亨燮) 장관

우 리 나라 장관 중에 대통령의 말씀에 거의 100% 반대한 분이 있었다. 그렇게 하고도 무사한 분이 있었다. 그냥 무사한 게 아니라 그 대통령 아래서 1971년 6월부터 1978년 12월까지 무려 7년6개월 장관직을 지켰다. 지엄하신 각하의 말씀에 반대했을 뿐 아니라 기어코 자기 뜻을 관철시키기까지 했다. 많은 한국의 지식층은 입에 거품을 물고 이런 대통령을 독재자로 폄하한다. 그에 대한 증오심을 ´생명의 양식´으로 삼는 사람도 부지기수이다.

그 대통령은 박정희 전대통령이고 그 장관은 최형섭 전과기처 장관이다.

1965년 박정희 대통령은 월남파병의 대가로 존슨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무상원조 5천만 달러를 받았다. 1964년 11월 30일에 건국 이후 처음으로 수출 1억 달러를 달성했으니까, 당시에 그것은 엄청난 돈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박 대통령은 그 돈을 전액 과학기술진흥에 쓰기로 결정하고 이 일을 최형섭 박사에게 일임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는 그렇게 해서 탄생하게 되었다. 초대 소장으로 임명만 받았지, 건물도 사람도 없었다. 여 직원 한 명과 예산을 줄 경제기획원 직원 한 명 이렇게 셋이서 청계천 어물전 옆에서 파리를 쫓으며 사무실을 열었다. 그렇게 경비를 아꼈다. 대신에 해외에서 과학자를 유치하는 데는 아낌없이 돈을 뿌렸다.

유명한 일화 둘.

서울대 교수들이 들고 일어났다.
--아니, 지들이 뭔데 우리 월급의 3배나 받아, 잉?
--여보시오, 그렇게 흥분할 게 아니라 당신네도 그렇게 받도록 노력해 보시오.

대통령이 허허 웃으며,

--소문대로 나보다 월급 많이 받는 사람이 수두룩하구먼.
--각하, 제 월급은 깎아도 그들의 월급은 한 푼도 깎으면 안 됩니다.
--음, 계속 그렇게 받도록 하시오. 장관 월급도 깎지 말고.

최형섭 박사는 1966년부터 1971년까지 KIST 초대 소장으로 재직하면서, 한국 실정에 맞는 응용 기술 위주의 연구소를 성공적으로 정착시켜 ´KIST´를 이공계 대학생들이 책상머리에 크게 써 붙이고 죽으라고 공부하게 만들었다.

기 술의 일본이 두려워 할 정도였다. 이 당시에 이미 성과급 제도를 도입하여 중소기업 중심으로 기술을 한도 끝도 없이 개발해 주고 로열티를 받아 일부는 개인이 갖고 나머지는 부서의 공동 기금으로 편입하여 국가 예산 외에 따로 자금을 확보, 모든 부서가 경쟁적으로 나날이 발전할 수 있게 했다.

이 당시 KIST 직원의 월급은 극비 사항이었다. 누가 얼마 받는지 연구원끼리도 서로 몰랐다. 하여튼 개인과 팀의 성과에 따라 대통령의 월급을 능가하는 사람이 속출했던 것이다.

최 형섭 박사는 1971년부터 1978년까지 과기처 장관을 역임하게 된다. 이 때 그는 획기적인 조치를 취했다. 과학기술의 아마추어인 행정관료보다 전문가인 과학기술자의 직급을 올려 버린 것이다. 국회에서도 과학기술에 관한 예산은 무사 통과하게 만들었다. 감사도 안 받았다.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은 전문가에게 믿고 맡겼던 것이다. 이런 그가 집이 없는 것을 보고 대통령이 특별히 사 준 집을 퇴직하면서 국가에 헌납했다.

1966년부터 1978년까지 무려 12년 동안 최형섭 장관은 수시로 박정희 대통령의 격려를 받으며 경제의 기초가 되는 과학기술을, 나사 하나 못 만들던 대한민국의 과학기술을 눈부시게 발전시켰다. 선진국과 후진국 모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1960년대 후반부터 시작하여 주로 1970년대에 ´공돌이 배움터´라고 스스로 비하하던 공대를 획기적으로 지원, 새로운 공대도 많이 설립하고 기존 공대는 그 정원을 대폭 늘리고 시설을 최신식으로 바꾸어 주었다.

경제가 나날이 발전함에 따라 기능공도 태부족했다. 과기처가 앞장서서 머리 좋고 손재주 좋은 한국인의 특성을 최대한 살려 기능공도 대대적으로 육성하고 국제 기능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면 김포공항에서 광화문까지 카 퍼레이드를 펼쳐 주었다. 서울공고와 서울공대의 학생들은 그 자부심이 하늘을 찔렀다. 아무리 정치가 불안해도 이들은 무풍지대에 사는 듯했다. 이 당시 공대생은 데모도 할 줄 몰랐다. 찬란한 미래가 바로 눈앞에 있었던 탓이리라.

이 때의 공고생과 이공계 대학생들이 지금까지 대한민국을 먹여 살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학기술 정책은 IT 지원 외에는 전두환 전대통령부터 엉망이 되었다. 이제는 우수 학생들이 적성을 살린다, 소신 지원한다, 어쩌며 우르르 기껏 제 한 식구 잘 먹고 잘 사는 의대로 몰려가고 있다. 희망이 없는 불쌍한 세대이다. 아무리 이름 없는 지방대의 의대도 이젠 서울대 공대에 뒤지지 않는다. 25년간 과학기술 정책이 표류한 업보이다.

1966년부터 1978년까지 최형섭 장관은 과학기술에 대해 늘 아는 척하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그 때마다 무안을 주었다. 아첨이란 걸 몰랐다. 95% 반대했다. 포병장교 출신은 다 그렇듯이 박정희 대통령의 과학기술에 대한 상식과 지식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그 당시 대한민국에서는 일류급이었다. 그러나 그의 박사 논문이 아직도 미국의 대학교재로 쓰이는 세계적인 과학자인 최형섭 장관이 보기에는 하나같이 ´맹한´ 소리였다. 그가 반대할 때마다 대통령은 묵묵히 들었다. 그리고는 최형섭 장관의 말대로 하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가 안 되면 며칠을 두고 숙고하다가, 결국 최형섭 장관의 말이 맞다며 그대로 하라고 재가했다.

최형섭 장관의 회한 섞인 말이다.

-- 나도 너무 했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대통령을 떠나 한 인간의 입장에서 5%는 그분의 말을 따를 걸. 그분이 그렇게 돌아가실 줄이야...
_____________

출처: 최형섭소장의 회고록들에서 발췌
웹작성: 2011년 3월 23일 워싱턴 디시에서 - 이기우



No. Subject Date Author Last Update Views
Notice How to write your comments onto a webpage [2] 2016.07.06 운영자 2016.11.20 18193
Notice How to Upload Pictures in webpages 2016.07.06 운영자 2018.10.19 32345
Notice How to use Rich Text Editor [3] 2016.06.28 운영자 2018.10.19 5922
Notice How to Write a Webpage 2016.06.28 운영자 2020.12.23 43839
73 The "First CO2 Free" Korean Expedition to Antarctica 2011.06.16 Rover 2011.06.16 9167
72 Memorial Day Rolling Thunder 2011 [3] 2011.05.29 이기우*71문리대 2011.05.29 6810
71 [이원복 만화] 먼나라 이웃나라 중국 - 중국의 문화혁명 [2] 2011.05.20 운영자 2011.05.20 6062
70 차인태 "이명박 보면 박정희가 그리워진다" [3] 2011.05.19 이기우*71문리대 2011.05.19 7038
69 독도 그려진 대동여지도 필사본 국내 첫 발견 [3] 2011.05.12 황규정*65 2011.05.12 6902
68 고교생 내년부터 한국사 필수로 배운다 [6] 2011.04.22 황규정*65 2011.04.22 6114
67 4.19... 그날을 어찌 잊으랴 !! [2] 2011.04.19 Rover 2011.04.19 8353
66 Memories of the Forgotten War 2011.04.16 김영철*61 2011.04.16 9250
65 독도의 역사적 고증 [7] 2011.04.09 황규정*65 2011.04.09 5690
64 월남전 회고 [re] 다시 찾은 국립현충원 [3] 2011.04.08 민경탁*65 2011.04.08 6169
63 최근 한국 역사적 News-Footage Collections [2] 2011.04.06 Rover 2011.04.06 9383
» 대통령의 말씀에 거의 100% 반대한 분 [7] 2011.03.22 이기우*71문리대 2011.03.22 6539
61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눈물 [4] 2011.03.15 이기우*71문리대 2011.03.15 7817
60 경부 고속도로와 박정희 대통령 [11] 2011.03.04 황규정*65 2011.03.04 6161
59 한국 성씨 탄생의 비밀 [8] 2011.02.25 Rover 2011.02.25 5419
58 塔의 기원 [7] 2011.01.18 민경탁*65 2011.01.18 6563
57 [Book Review] '1,300년 디아스포라, 고구려 유민' [1] 2011.01.10 운영자 2011.01.10 7890
56 중국의 먀오 족(苗族)의 조상은 고구려 인 [1] 2011.01.10 홍완표#guest 2011.01.10 9002
55 李舜臣 장군의 친필 [5] 2011.01.09 황규정*65 2011.01.09 8027
54 [동영상] 숭례문, 2012년에 다시만나요 [6] 2011.01.09 황규정*65 2011.01.09 7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