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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비 피살  사건

을미사변 1895년10월8일

by온기철 James OhnJun 17.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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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주간지 『르 주르날 일뤼스트레』 표지기사

                               <조선 왕비 암살(L'ASSASSINAT DE LA REINE DE CORÉE)>

 

야마구치현은 혼슈의 서쪽 끝에 있고 구마모토현은 규슈의 중앙부에 있다. 민비는 이지방 출신의 일본인에 의해서 피살 되었다. 일본 섬중에서 가장 큰 섬인 혼슈의 서쪽 끝과 가장 남쪽에 있는 규슈는 일본 우파들의 고향이다. 무서울 정도로 전통을 지키는 일본 사람들의 면모를 보이는 지방이기도 하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를 따르는 사무라이들도 이곳 출신들이다. 임진왜란, 명치유신, 일본제국, 조선 강점, 태평양전쟁, 현재의 정권 모두 이사람들의 작품이다. 

 

민비는 일본 낭인들에 의해서 살해 되었다고 한다. 일정한 주거지 없이 떠돌아 다니는 사람을 낭인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그들은 무식한 불한당이 아니었다. 동경제대등 일류대학 츨신의 엘리트 들이었다. 말하자면 에도시대의 사무라이 정신을 이어 받은 사람들이다. 사무라이는 조선의 선비에 해당하는 지배계급이었다. 일본에도 사농공상이라는 신분제도가 있었으나 조선은 사가 선비였고 일본은 무사 였다. 사무라이는 조선의 양반에 해당 한다. 이들은 번주(영주)로 부터 봉록을 받아 먹고 살아 왔다. 그러나 에도막부 말기 부터 명치유신을 거치면서 영주에 속하지 않는 사무라이가 많아 졌다. 그들은 일정한 주거지 없이 떠도라다니면서 청부살인 같은 일을 하며 살았다. 근대화 되면서 신분제도 자체가 없어졌고 근대식군대가 이들을 다 흡수 할 수는 없었다. 엘리트 젊은이들 중에 사무라이의 전통을 이어받아서 국가에 충성하려고 굳은 일을 도맡아 하는 사람들이 생겨 났다. 이들이 민비 피살에 동원된 낭인들이다. 

 

무능한 고종과 간교한 민비는 부정 부패의 근원 이었다. 부패는 피폐한 백성들의 삶과 망해가는 나라의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민비 제거의 대의명분이 되고도 남았다. 대원군파와 개화파는 자신들의 정치적인 이득을 위해서 민비제거를 추진 했겠지만 이에 동조한 조선사람들이 많았던 이유는 고종과 민비가 망국의 원인이라는 데는 이의가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민비 피살사건을 다루는 글들은 민비의 비행에 대해서 강조하지 않고 있다. 아마 결론을 "일본사람들에게 당한 억울한 죽음"으로 몰고 가기 위해서 일 것이다. 

 

삼국간섭이후 민비는 러시아와 접근하여 고종과 자신의 입지를 억압하는 일본세력을 배척 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친일파인 개화파를 집권시켜 조선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을 강화 하려고 했다. 민비는 이러한 일본의 목적을 방해하는 존재였다. 조선 조정안에서 민비의 천적인 대원군과 민비에게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는 개화파가 민비를 제거하자고 하는 마당에 일본이 마다 할리가 없었다. 

 

대원군과 민비의 권력 투쟁의 마지막 장은 대원군, 개화파 그리고 일본이 한편이 되고 민비가 홀로 서는 형국으로 전개 되었다. 물론 피살작전의 지휘권은 일본측이 가지고 있었지만 대원군과 개화파가 피살작전의 타당성을 제공 했을 뿐만아니라 작전에 직접 참여 했다. 

 

민비는 우유부단한 고종을 보호 하여 자신의 영달을 유지 하려고 가진 애를 썼고 대원군은 민비를 제거하여  고종을 상왕으로 만들어 무력화 시키고 손자 이준용을 왕으로 옹립하여 권력의 중심에 복귀 하려고 온갖 간계를 총 동원 했다. 동학군과 청나라의 힘을 빌리려고 했으나 실패 했다. 그러나 다행이 일본과 개화파는 그와 같이 민비를 제거 하려 했다. 

 

대원군이 군국기무처를 운용하고 있을 때 군국기무처에 자기파인 박준양, 이태용, 이원경을 기용 했다. 한편 손자 이준용은 유길준을 포섭해서 자기 편 사람으로 만들 었다. 유길준은 민비를 제거 해야 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친일 급진 개화파(일본파) 사람들과 대원군파는 점점 멀어 졌다. 대원군파의 위협을 방어 하기 위해서 일본파는 민비와 고종에게 일시적으로 가까졌고 민비 또한 그들과 협력하는 것이 유리 했다. 민비가 박영효에게 관복과 저택을 하사 하던 시기 였다. 물론 일본파 박영효는 유길준이 대원군과 가까워진 것을 한동안 모르고 있었다. 

 

 겉으로는 박영효와 가까워 지는 척 하면서 민비는 개화당을 모두 제거하려 했다. 1894년 가을 이계획이 대원군의 정보망에 걸렸다. 그는 일본공사 오카모토을 만나서 이일에 대해서 협의 했다. 이때 민비 제거를 위해서 일본측에 도움을 요청 했다(유길준 진술).  적어도 민비 피살 일년전에 대원군은 일본측에 민비를 살해할 용의가 있음을 알려 주었다는 증거 이다. 


이준용과 대원군은 일본 영사관에 자주 드나 들면서 패륜인 민비를 살해 하자고 요청 했으나 일본은 당장 움직여 주지 않았다. 이준용은 러시아, 영국, 청국 영사관을 드나들며 이들도 자기 편으로 끌어 들이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별로 관심이 없었다. 

 

삼국간섭 이후 일본이 수세에 몰리자 정국은 완전히 정리 되었다. 이무렵 이준용은 개화파인 김학우 암살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어 강화로 유배 되었고 대원군은 공덕리 별장에 가택 연금 되었다. 일단은 급진 개화파(일본당)가 대원군파를 축출 했다. 그러나 민비의 친러 정책으로 그들도 정동파에게 밀려 날 운명이었다. 박영효가 민비를 제거 하려던 시기 이다. 개화파도 일본도 대원군도 민비를 제거 해야 했다. 공덕리 별장에 일본영사관 사람들이 자주 드나 들었던 이유이다. 아마 유길준등 민비제거에 가담했던 조선사람들도 공덕리와 일본공사관을 드나들었을 것이다.

 

1895년7월8일, 박영효가 민비살해에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 했다. 조선의 실권이 민비와 친러파에 넘어가고 일본과 급진개화파가 조선 조정에서 완전히 축출되었음을 의미 했다. 일본으로서는 분통이 터지는 일이었다. 애써 대국 청나라와의 전쟁에서 이겨 놓으니 러시아가 조선을 가로 채는 형국이 되어 갔다. 

 

박영효 망명에 크게 자극을 받은 일본정부와 군부는 민비를 제거하기로 결정하고 이에 대한 필요한 절차를 신속하게 진행하기 시작 했다. 정부와 협의차 일본에 있던 조선주제 일본공사 이노우에는 1895년7월10일(박영효 사건 이틀 후), 자신의 후임으로 군 출신인 미우라 고로를 자신의 후임으로 추천 했다. 이토 히로부미와 이노우에는 민비를 회유 해서 일본편으로 만들려는 정책을 포기하고 극우파 군인 출신인 미우라를 앞세워 무력으로 민미를 다스리기로 결정 했다. 추천후 이노우에는 일단 조선에 귀국 했다.  

 

귀국한 이노우에는 고종을 예방하고 왕실의 안전을 확보 할 것을 약속하고  고종에게 9천원에 상당하는 선물을 했다.  당시 내각에서 논의 중이던 차관을 조선에 제공할 것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박영효 사건 전에는 조선에게 차관을 제공하는 댓가로 조선이 친일정책을 유지하게 하는 회유책을 고려 중이었으나 박영효 망명 후에는 강경책으로 바뀌었다. 이노우에 고무라는 자신의 딸을 고종과 민비의 양녀로 삼게 하였다. 그녀는 민비가 죽은 후 신원을 확인하는 일을 맡았다고 한다(매천야록).  모두가 고종과 민비를 안심시켜서 방비를 소홀이 하게 하기위한 계책이었다. 

 

pfIt4iVkG9vXIVugiIkhqIH-q5w.jpg   미우라 고로

1895년9월1일 미우라 고로가 조선주재 일본공사로 부임 했다. 육군 중장 출신인 그는 일본 우익 군인 세력의 거두 였다. 부임한 후로 일체 집밖으로 나가지 않고 염불만 하면서 소일 했다. 염불공사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 였다. 조선조정을 안심시키위한 위장 전술이었다. 

 

1895년10월3일 일본공사관 지하 밀실에서 미우라 고로 공사 보좌관 시바로 주제로 민비시해에 관한 비밀 회의가 열렸다. 그는 펜실바니아 대학과 하바드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엘리트 였다. 그는 조선에서 활동하고 있던 낭인 단체인 천우협 그리고  현양사 소속 낭인들과 긴밀하게 협의 하면서 민비살해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일등서기관 스키무라 후카시, 궁내부 고문관 오카모토 류노스케, 영사관보 호리쿠치 구마이치, 공사관 무관 구스노세 유키히코가 참석했다. 이중 오카모토는 대원군과 친분이 두터 웠다. 

 

회의 결정 사항은 다음과 같다. 1. 시해의 범행은 일본낭인이 맡고 외관상 흥선대원군과 조선인 훈련대의 반란으로 꾸민다. 2. 일본인 가담자는 낭인 자객, 일본 수비대 군인, 일본공사관 순사들이다. 낭인자객들의 동원은 한성신보 사장 아다치 겐조거 맡는 다. 3. 일본수비대 순사, 조선인 훈련대를 움직이는 일은 일본공사관 소관이다. 4. 거사일은 10월10일 새벽으로 한다. 작전 명은 "여우사냥" 이었다. 

 

1895년10월4일, 친일파  농상부 대신 김가진이 친러파 이범진으로 경질되고 유길준이 내무협판자리에서 의주부 관찰사로 쫓겨 났다. 이로써 조정에는 한사람의 친일파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1895년10월6일, 일본 궁내부 고문관  오카모토 류우노스케가 공덕리 별장을 방문 했다. 대원군과 마주 앉은 그는 4개항으로 된 각서를 드리 밀었다. 민비를 제거 한 후 대원군이 국왕을 보필 해 궁중을 감독 하되 정사는 내각에 맡겨 일체 간섭하지 않는 다는 것이 핵심 내용이었다. 대원군은 장남 이재면과 장손자 이준용이 배석한 자리에서 각서에 서명 했다. 민비는 우리가 처리해 줄 테니 당신은 우리가 하는 일에 상관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사실상 일본측과 대원군은 이렇게 민비살해에 동의 했다. 

 

1895년10월7일 새벽2시(10월8일 02로 짐작), 조선정부는 훈련대 해산 명령을 내렸다. 훈련대는 친일파 군대였다. 일본세력을 몰아 내는 수순의 일부 였다. 훈련대장은 우범선이었다. 오전9시에 군부대신 안경수가 미우라 고로 일본공사에게 알리고 우범선도 곧이어 보고 했다. 미우라는 그날 저녁에 거사히기로 결정 하고 오카모토 류노스케를 불러 들였다. 

 

미우라는 거사 계획서를 영사관보 호리쿠치 구마이치에게 주고 용산으로 가서 거사 준비를 진행하라고 지시 했다. 한성신보 직원, 낭인들, 순사들이 용산에 속속 모여 들었다. 한편 대원군 별장 공덕리에는 아시야마 지휘하에 군부협판 이주희가 규합한 조선인 수명, 공사관 직원, 고문관, 순사등 약 60명이 모였다. 

 

10월8일 자정 쯤, 낭인들이 공덕리 별장에 도착하여 담장을 넘었다. 별장 경비병들을 모두 포박하고 그들의 옷을 벗겨 일본인 순사들이 조선인 군사로 변장 하였다. 잠에서 깬 대원군이 집 밖을 좀처럼 나서지 않으려 하여 실강이를 벌리면서 시간이 지연되었다. 대원군은 "민씨 척족이 권력을 잡고 갑오경장의 개혁을 무위로 돌려 나라를 위태롭게 하고 있으니 이들을 척결해 버리겠다"는 내용의 고유문을 자신이 직접 써서 한성 시내에 게시하라고 지시하고 경복궁을 향해 출발 했다.  대원군 일행이 공덕리를 나선 것은 새벽3시 경이었다. 

 

그들이 서대문에 이르렀을 때 우범선의 훈련대 제2대대와 합류 했다. 일본 수비대 제1대대가 서대문으로 오기로 했는 데 엉뚱한 곳으로 가서 그들이 올때 까지 기다리느라고 또 시간이 지체 되었다. 

 

대원군 일행이 경복궁으로 오는 동안 궁은 일본군 수비대와 조선군 훈련대에 의해서 포위 되었다. 이사실을 보고 받은 고종은 이범진에게 미국 공사관과 러시아 공사관에 급히가서 도움을 요청하라고 명 했다. 그가 미국공사관에 도착 햇을 무렵 대궐 쪽에서 총성이 울 렸다. 오전4시30분 경 광화문을 지키던 군사와 일본군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 졌다. 5시 경에 대원군이 도착하자 일본순사들이 담을 넘어 광화문 빗장이 열렸다. 

 

궁내로 들어온 일본군 폭도들과 궁 경비병사사이 총역전이 벌어 졌으나 경비병들은 무기와 군복을 벗어 던지고 도망치기에 급급 했다. 미국 지휘관 윌리엄 다이가 지휘하는 500명의 경비대도 폭도들에게 쉽게 무너 졌다. 폭도들은 광화문 뿐만아니라 춘생문, 추성문으로 칩입 해 들어 왔다. 

 

폭도들이 혈안이 되어 민비를 찾는 동안 대원군은 근정전 뒤 강녕전 옆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훈련대 군인들은 건청전 앞 마당에서 쉬며 민비 시해에는 가담하지 않았다. 

 

법무 협판 권재형의 보고서에 따르면 서 있는 고종 앞에서 "폭도들은 칼을 휘두르며 고종의 어깨와 팔을 끌고 다니기도 하고, 권총을 쏘고 궁녀들을 난타하며 이리저리 끌고 다녔다. ..고종의 어깨에 손을 얹어 주저 앉혔으며, 태자도 다른 방에서 붙잡혀 머리채를 휘둘리고 관이 벗겨지고 칼등으로 목줄기를 얻어 맞는 수모를 당했다"고 한다. 

 

폭도들은 건청궁 동쪽 곤녕합 옥호루에서 황후를 발견 했다. 민비는 이들의 칼에 맞아 절명 했다. 10월8일 오전 5시50분과 6시 사이 였다. 민비는 44세의 젊은 나이로 일본 낭인의 칼에 맞아 파란 많은 생을 마감 했다. 

 

그날 아침 8시 고종은 일의 내막을 묻기 위해서 일본공사 미우라를 호출 했다. 미국과 러시아 공사도 소식을 듣고 궁으로 들어 왔다. 미우라는 서기관 스기무라와 통역관을 대동 했다. 흥선대원군도 고종 옆에 앉았다. 이 자리에서  미우라는 고종을 협박하여 친일 김홍집 내각을 구성하게 했다.  친 민비 정동파(미, 친러파)인사들이 모두 경질 되었다. 대신 친일 급진개화파 인사들이 대거 등용 되었다. 서광범은 법부대신, 유길준은 내무대신에 임명되었다. 

 

김학우 암살사건으로 강화에 유폐되었던 손자 이준용이 일본의 도움으로 석방되었다. 고종의 형 이재면은 궁내부 대신이 되었다. 대원군이 민비 살해에 협조한 일본측의 보답이었다.

 

1985년10월10일, 고종은 민비를 왕비에서 폐한다는 조칙을 발표 하였다. 왕비가 죽었다고 하지 않고 "엣날 임오 때와 마찬가지로 짐을 떠나 피난 했다. 친당을 좌우에 포진하여 왕의 총명을 막고 인민을 착취하여 매관매직을 일삼는 등의 죄를 지었다"고 폐비의 이유를 밝혔다. 유길준이 생각하는 민비의 상이었다. 이 조칙에 서명한 대신들은 김홍집, 김윤식, 조희연, 서광범, 정병하등이 었다. 탁지부 대신 심상훈은 서명을 거부하고 낙향 했다. 

 

1895년12월1일,  김홍집 내각은 왕비시해 사실과 국상을 발표 했다. 그리고 이주희, 박선, 윤석우 3명을 주동자로 체포하여 처형 했다. 조선인 가담자인 조희연, 권형진, 우범선, 이두황은 일본으로 망명 했다. 

 

유길준은 개혁의 선봉에 섰다. 단발령을 내렸다. 상투를 짜르는 일은 천륜을 어기는 행위였다. 백성들은 이것을 일본이 강제로 시키는 일로 받아 들였다. 어느 덧 조선의 정국은 친일파 유길준과 위정척사파 최익현의 대결로 번저 갔다. 대세는 항일 반개혁이었다. 대원군도 일본도 개화파도 민비 살해로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사건 당시 대원군의 나이 76세였다.  1895년 말 대원군의 행동을 제약하는 법이 통과 되었다. 사실상 가택연금이었다. 1896년 아관파천이 일어나자 공덕리 별장에 머물다가 1898년 1월 부인 민씨가 사망하자 2월에 운현궁 별장 아소당 정침에서 생애를 마쳤다. 

 

고종은 아내를 살해한 아버지를 임종하지도 않았고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1896년2월2일, 일본군사와 친일 개화파로 둘러 싸여 공포에 떨던 고종은 궁을 탈출하여 러시아 공사관으로 오자마자 반민비세력으로 지목되었던 총리대신 김홍집, 내무대신 유길준, 농상공부대신 정병하, 군부대신 조희연,  법부대신 장박을 처형하라고 명 했다. 김홍집, 어윤중, 정병하는 거리에서 무참히 피살 되었다. 이들은 민중의 원수 였다. 유길준, 장박, 조희연등은 일본으로 망명 했다. 

 

*위키백과와 여러 인터넽에 나아 있는 정보를 망라하여 합리적인 이야기를 서술 했음을 알려 드립니다. 

참고 서적은 "강준만의 한국 근대사 산책 1,2,3,4 권입니다. 

 온기철 James Ohn은퇴  의사

온기철의 브런치입니다. 역사를 주제로 한 수필을 쓰고 있습니다. 본직은 의사이고 취미는 골프와 역사 공부입니다. 지루한 역사를 재미있게 이해시키기위한 글을 쓰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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