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

English
                 

8. 자유를 찾아 남으로

DSCF0041.JPG



 

DSCF0042.JPG

김익창 선생님의 외조부,  주하룡 목사



 

DSCF0044.JPG



 

DSCF0045.JPG

시간이 지나면서 공산당이 세력을 장악하게 되자 기독교인들과 민족민주진영 지도자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조만식 선생뿐 아니라 민주정권을 세우려는 모든 지도층의 사람들이 김일성의 숙청대상이 되었다. 하루는 우리 가정을 잘 아는 공산당 관계자가 소식을 전해 주었다.“당신이 조만식 선생을 지지하고 있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오. 머지 않아 당신에게 죄를 뒤집어 씌워 체포하려 할 것이오. 빨리 피하시오.”그래서 아버지는 급히 집을 떠나 먼저 배편으로 남으로 향하셨다. 아버지는 진남포에서 배를 검사하는 보안원에게 잡혀 고생을 하다가 구사일생으로 빠져나와 남한으로 가셨다. 그때 서울에는 서대문 평동에 외삼촌이 살고 계셨는데 아버지는 거기에 가 계시면서 토목계통의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때는 큰 토목공사가 없었고, 수입이 일정치 않아 어려움이 많았었다고 후에 말씀하셨다.

아버지가 떠나시고 두어 달 후 1946년 초봄에 나머지 가족도새벽에 몰래 집을 떠나 남으로 향했다. 동리에서 의심을 받지 않으려고 나, 어머니, 여동생, 두 남동생이 각각 한 명씩 집을 나와 신의주 역으로 향했다. 만주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귀향민같이 보이기위해 얼굴에 재를 묻히고, 허술한 옷을 입고, 가방을 하나씩만 메고 나왔다. 식구들이 모두 역에 도착하였다.그런데 어머니가 남으로 갈 때 쓰려고 한 주일 내내 우리들 양말을 기워서 자루에 넣어 놓았는데 그 양말자루를 깜박 잊어버리고집에 놓고 온 것을 알게 되었다.
다시 집에 다녀 올 수도 없고 하여그대로 기차를 탔다. 기차표는 역에 아는 사람을 통해 미리 구해 놓았었다. 기차가 정주를 지나가는데 내가 다니던 오산학교가 보였다.학교에서 공부하던 모습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다시는 그 학교를보지 못할 것을 생각하니 서글펐다. 사리원까지는 별로 문제 없이갔다. 사리원은 남쪽으로 가는 기차 종점이었다. 사리원에 도착해서도 어머니는 두고 온 양말 주머니를 못내 아쉬워하셨다."삼팔선이다 "사리원부터는 걸어서 38선을 넘어야 했다. 우리는 안내원 한사람을 구해 그 사람 집에 약 한 주일 묵으면서 기회를 기다렸다. 안내원은 보안원과도 내통을 하여 비교적 안전하게 38선을 넘을 수있는 길과 적당한 때를 알고 있었다.

어느 날 안내원이 오늘 아침 떠난다고 하였다. 짐을 소달구지짚더미 위에 쌓아 놓고 만주에서 오는 피난민으로 가장하여 신작로를 따라 38선까지 갔다. 국경에는 북쪽 경비대의 경비는 심했으나남쪽에는 없었다. 초소도 북쪽에만 있고 남쪽에는 없었다. 남으로가려는 사람들은 많았으나 북으로 가는 사람들은 없었기 때문이다.북한초소에 도착했는데 경비병 한 사람이 나와 짐짝들을 보고 저안을 뒤지면 보물이 나올 거라고 말하고 뒤지려고 하였다. 어머니가우리는 만주에서 돌아오는 귀향민이라고 북한의 경비병에게 말하였다. 어머니가 우리들에게 만주에서 오는 귀향민이라 하라고 미리 철저히 교육을 시켰었다. 그러는데 안에서 또 한 명의 경비병이 나오더니 어머니의 말을 듣고 그냥 보내라고 하였다.

안내원이 이 길을따라 남쪽으로 계속 가면 된다고 말하였다.이때에 남으로 가는 사람들 중에는 중국 내륙이나 만주에서남쪽의 고향으로 가는 귀향민이 있었고 북에서 공산주의가 싫어 탈북하여 남으로 가는 월남민이 있었다. 공산당국은 외국에서 남으로가는 귀향동포에게는 그렇게 심하게 다루지 않았다. 그러나 북한주민의 이탈은 철저히 통제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사람들이 밤에 몰래 38선을 넘다가 체포되기도 하고 총에 맞아 죽기도 하였다. 우리식구는 집을 떠날 때부터 만주로부터 귀향하는 귀향 동포로 가장을하고 낮 시간에 소달구지에 이삿짐을 싣고, 행길을 따라 북한보안군초소를 통해 남쪽으로 갔다. 위험을 무릅쓰고 모험을 한 것이다.우리들은 짐을 소달구지에서 내려 짊어지고 남으로 향했다. 한십리쯤 왔는데 남쪽 안내원들이 남으로 오는 월남민들과 중국에서 오는 귀향민들을 돕고 있었다. 안내원들이 우리 식구들과 짐을 트럭에 실어 개성 피난민수용소로 안내해 주었다.

드디어 피난민 수용소에 도착하였다. 수용소에 들어가기 전에 미국 군인들이 우리들몸에 DDT 살포제를 뿌렸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우리 가족은 정치의 억압과 종교의 핍박에서 벗어나 자유의땅에 도착한 것을 감사하여 모두 땅에 엎드려 감사기도를 드렸다. 수용소에는 이북에서 온 피난민들이 많이 있었다. 이들에게 큰 마루방 같은 데에 잘 수 있는 곳도 마련해 주고 식사도 제공해 주었다. 남한에 와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미국 군인들이었다. 소련군과는 아주 대조적으로 키가 크고, 깨끗하고, 항상 얼굴이 밝았다.지나가는 우리들에게 손을 흔들며 친절하고 상냥하게 인사해 주었다.  마음 좋은 군인들이 아이들에게 껌, 사탕, 초콜릿들을 주었다.  우리 가족은 피난민 수용소에 며칠 있다가 기차를 타고 서울까지 왔다. 서울에 도착하여 아버지가 먼저 와 계셨던 외삼촌 댁을찾아갔다. 서울에 도착하여 보니 넓은 거리와 높고 큰 건물들이 북쪽에서 보던 것과 너무나 달랐다. 그때 내 나이가 15살이었다.

9. 동족상잔의 비극

한국전쟁 일어나다한국전쟁 이전의 서울 생활서울에 도착하여 나는 서울중학교 5학년으로 편입하였다, 영어와 수학시험을 치고 들어갔다. 서울중학교는 본래 일본 학생들이다니던 경성중학교였는데 광복 후에 서울중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김원규 교장이 책임을 맡았는데 북에서 온 대학교수 출신 등 훌륭한 교사들이 많았고 북에서 온 학생들도 많았다. 김원규 교장은학생들을 엄하게 공부시켰다. 그때 서울에는 좌익학생들 주도로 시위가 심했으나, 김원규 교장은 학생들을 무섭게 다루어 시위를 못하도록 하였다. 결석을 하면 정학을 시키고 학생들을 학교에 늦게까지 있게 하면서 공부를 시켰다. 그 결과로 제1회 졸업생 중에 90퍼센트 이상이 대학진학에 성공하여 일류학교라는 평판을 얻었다.여동생은 어머니의 모교인 숙명여중에 입학했다. 그때 숙명여중에는 문남식 선생이 교장이었는데 우리 어머니와 숙명 동기동이었다. 그래서 동생은 시험도 치지 않고 무사 통과됐다. 두 남동생a은 덕수국민학교에 입학했다. 그때는 우리가 어려서 몰랐는데, 어머니는 우리를 제일 좋은 학교에만 골라서 입학을 시키셨다.나는 서울중학교 시절 특별활동으로 합창단에 참여했다. 서울중학교 합창단은 그때 중학교 합창단 콩쿠르에서 세 번 연속으로우승을 하였다. 그래서 국빈이 올 때는 행사장에 가서 합창을 하기도 했는데, 당시 유엔 사무총장 메논(Vengalil Menon)이 방한했을 때 환영 파티에 가서 “푸른 다뉴브”를 불러 그로부터 칭찬을 받은 것이 생각난다. 그때 나는 서대문감리교회의 고등부 성가 대원이었다. 성가대 지휘자였던 장수철 씨와 인연을 맺게 되었고, 그의 소개로 박재훈 선생, 이동훈 선생, 그 외에 다른 종교 음악가들과도만나 가깝게 지냈다.

나는 1948년에 서울중학교를 1회로 졸업하고 서울문리대 의예과에 입학했다.

의예과에 입학한 다음 의대 합창단에 들어가 활동을 했는데 남성테너 등 노래를 잘하는 단원이 많았다. 명동의 시공관에서 이태리 오페라 “카바렐리아 루스티카나”(CavalleriaRusticana)도 공연했다.그 당시 황성수 씨가 기독교학생단체를 만들어 지도했는데, 그곳에는 머리가 좋고 장래의 포부가 큰 학생들이 많았다. 한때 내가이 단체의 회장을 했다. 나 다음에 김경원(金瓊元) 씨가 회장을 했는데 그는 후에 대통령 비서실장과 UN대사를 지냈다. 내 둘째 동생 익성은 1948년에 서울중학교에 입학했고, 1950년에 내 여동생익란은 이화여대 미술과에 입학했다. 6.25전쟁이 일어나기 바로 전
인 이때가 우리 가족에게는 아주 평화스럽고 행복한 때였다. 내 막냇동생 익풍은 부산피난 중인 1952년에 서울중학교에 입학하였다.한국전쟁 발발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미국, 영국, 중국 등 연합국 대표들이 카이로(Cairo)에 모여 종전 후 한국을 독립국가로 세울 것을선언하고, 포츠담(Postdam)에서 다시 만나 이를 재확인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1945년 2월 얄타(Yalta) 회담에서 미국, 소련,영국의 지도자들이 모여 한국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의 제국 군대를무장해제시키기 위해 북쪽은 소련이, 남쪽은 미국이 맡아 38선을경계로 나누자는 비밀 결의를 하였다. * 8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36년의 일본제국주의의식민지 정치가 끝나고 한국이 드디어 해방되었다. 한국 사람들은 진심으로 해방과 함께 독립적인 한 국가를 이룰 수 있다는 미래를 향한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초강대국이었던 소련과 미국에 의해 38선이라는 선 하나로 한국은 분단국가가 되었다.

결국 미군이 남한에 주둔하게 되었고, 북한에는 소련군이 주둔하게되었다. 38선 양쪽에서 일본군은 무장해제 되었고, 일본 식민당국은 일본으로 돌아가게 되었으나, 38선은 그대로 남아 있는 상태에

*8 Ki-baik Lee(Translated by Edward W. Wagner with Edward J. Shultz),A New History of Korea, Seoul: Ilchokak Publishers, 1984.53


서 남쪽에는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대한민국이 수립되었고, 북쪽에는 공산주의 정권이 수립되었다.남북 양정권은 통일을 원했으나, 서로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고 각기 자기식 정치체제로의 통일을 원했다. 북한의 김일성은 중국과 소련의 원조를 받아 남한을 무력으로 침입하여 통일하자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남한에서도 북진통일을 외치는 소리가 있었으나 미국은 애치슨(Dean Gooderham Acheson) 국무장관의 의회 증언을 통해 한국은 아시아의 미국 안보라인 밖에 있다고 선언함으로써 한국을 포기할 수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이에 따라 김일성, 중국, 소련은 인민군이 남침을 하여도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오판을 하였다. 중공은 팔로군을 비롯하여 중공군과 함께 싸운조선족 군인들을 인민군 2개 사단으로 만들어 38선에 배치하였다.소련은 비행기, 탱크, 대포 등 장비로 인민군을 무장시켰다. 중공과소련의 지원을 받은 김일성은 전쟁준비를 완료하고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전 인민군대에게 남한으로의 총공격을 명하였다. 이것이한국전쟁의 시작이었다.주말이라 장병들이 많이 휴가를 갔고, 대규모 남침에 대한 준비가 전혀 되지 않은 상태에서 남한의 국군은 기관총, 박격포, 소총으로 대항하였으나 탱크와 전투기에 대해 상대가 되지 않았다. 북한의 야크 전폭기가 편대를 만들어 남한을 공격할 때 남한공군은연습용 경비행기 몇 대만 보유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북한인민군은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남쪽으로 계속 진격하여 2개월 만에부산 부근의 일부지역을 제외한 남한 전체를 점령하였다.

인민군이 파죽지세로 내려 미는 상황에서 극히 일부만 부산으로 피난을 했으나 대부분의 남한 주민은 인민군 점령지역에서 3개월 동안 비참한생활을 했다. 점령지역의 남한 청년들은 일부 숨어 지낸 사람들 이외에는 대부분 인민군대로 끌려갔고, 지도층 인사들은 체포당해 북한으로 끌려갔거나 반동이라는 이름으로 처형당했다. 

10.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한국전쟁이 난 일요일 아침 나는 친구들과 함께 선교사의 집에서 모이는 성경공부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갑자기 비행기 두 대가 낮게 떠서 지나가는데 기관총 소리가 들렸다. 이상하다고 생각을 했는데 집에 가니까 전쟁이 났다고 했다.그때 아버지는 강원도에 출장 중이셨다. 집에는 나와 할머니,어머니, 여동생, 그리고 두 남동생이 있었다. 공중에서는 비행기가왔다 갔다 하고, 비행기에서 기관총을 쏘는 소리가 났다.우리는 무서워 부엌바닥에 가마니를 깔고 이불을 갖다 놓고 엎드렸다. 어머니는 전쟁이 멈추게 해 달라고 기도를 드렸다.“익창아, 네가 내 곁에 있어서 마음이 든든하다.”어머니가 내 손을 꼭 잡고 말씀하셨다. 그때 우리는 남대문 근처의 봉래동에 살고 있었다. 전쟁이 난 후 사흘 동안 우리들은 부엌바닥에 깔아 놓은 가마니 위에 이불을 깔고 함께 잤다. 부엌바닥이마당보다 조금 낮아 안전하게 생각되어 방공호 삼아 그곳에서 지냈

사흘이 지났는데 조금 조용해졌다. 어머니가 나갔다 오시더니말씀하셨다.“벌써 빨갱이들이 들어왔다. 도시 중심에 있는 우리 집은 위험하다. 아현동에 있는 동생 친구의 집으로 가자.”아현동에 있는 친구집으로 가는 도중에 서대문 형무소에 있던죄수들이 떼를 지어 나와 길을 건너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때 우리곁을 지나가는 순경을 불러 어머니가 말씀하셨다.“이봐요, 순경 선생님. 저기 죄수들이 나와 도망가고 있어요.”그 순경은 아직 인민군이 들어온 것도 몰랐는지 죄수들이 가는 쪽으로 뛰어갔다. 우리가 갔던 아현동 집에는 시골에서 온 그 집의 식모가 있었는데 인민군이 들어온 다음에 그의 남편이 왔다. 그는 빨치산 간부같이 보였다. 눈이 반짝반짝하게 돌아가는 것이 보통이 아니었다. 그 사람은 전화통화를 할 때마다 암호로만 말했는데 그럴 때마다 섬뜩했다. 그 집에서 식모에게 그동안 대우를 잘해주어 그 사람은 우리들을 해치지 않고 잘 대해 주었다. 7월 중순까지 약 보름 동안 그 집과 봉래동 집을 왔다 갔다 하며 지냈다.그때 나는 갑자기 고열이 나서 몹시 앓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밤에 의사를 하나 구해 데려왔는데 그가 와서 어머니 피를 나에게 수혈했다. 며칠 동안 계속 아프고 숨이 막히는 것 같아 동생들이 돌아가며 내 가슴을 쓰다듬어 주었다. 꼭 죽는 줄 알았다. 이웃에 유명한 한약방이 있었는데 누이동생이 그곳에 가서 약을 지어왔다. 한약을 먹고 나서 병이 나았다. 그때 한약의 효력을 경험하고
그 후 한약을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었다.납치당하신 어머니인민군 점령하에 있던 1950년 여름 어머니는 혼자 우리 온 가족을 돌보느라 많은 고생을 하셨다.

8월이 저무는 어느 날 젊은이둘이 지프차를 타고 우리 집에 와서 어머니를 찾았다. 그때 어머니는 집에 안 계셨다. 그 사람이 내 동생에게 말했다.“내가 아버지 소식을 알고 있단다. 내일 다시 와서 어머니에게직접 알려 줄 테니까 어머니에게 꼭 집에서 기다려 달라고 전해 주렴.”저녁에 돌아오신 어머니에게 그 말을 전했다. 어머니는 그들의남침 사흘 만에 서울시청을 지나 남대문으로 진격하는 인민군 말을 믿고 다음날 혹시 정말 좋은 소식이 있지 않을까 하여 집에서기다리셨다.

다음날 아침 10시에 그 사람들이 다시 왔다.“어서 오셔요.”어머니가 반갑게 그들을 맞이하셨다.“네, 반갑습니다. 따로 조용히 이야기해 드리겠습니다. 밖으로잠깐 나갑시다.”숨어 있던 나는 걱정이 되어 동생들에게 부탁했다.“얼른 어머니를 따라가 봐라.”동생들이 약 100미터 거리의 골목길을 따라 행길로 나가니까어머니는 벌써 보이지 않았다. 동생들이 그곳에 있던 동네 아이들에게 물었다.“너희들 우리 어머니 보지 못했니?”“조금 전에 그 사람들이 너희 어머니를 차에 태우고 떠났다.”그것이 우리가 어머니를 본 마지막이다.

그날은 1950년 8월22일이었다. 그 후 백방으로 어머니의 소식을 알아보려고 애를 썼으나 지금까지도 어머니가 그들에게 살해당하셨는지, 북으로 끌려가셨는지, 알 수가 없다. 포로교환 때 내가 국제적십자 요원으로 판문점에서 근무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 적십자사의 통로를 통하여 어머니 소식을 알아보았으나 소용이 없었다.어머니가 왜 납치를 당하셨을까? 이즈음 서울을 점령했던 공산당국은 그동안 파악해 놓았던 남한의 지도자, 교수, 자본가, 지식인 등 인사들을 강제 연행하여 구속하기 시작했다. 그 후 그들이급하게 서울을 포기하게 되자 공산당국은 그동안 구속해 놓았던 인


사들을 일부 처형하기도 하고, 많은 사람들을 북으로 강제 연행하였다. 이들을 끌고 가다가 급하게 도망해야 할 처지가 되자 연행하던 인사들을 많이 즉결처분하고 갔다. 사람들이 의정부 부근에 이들을 처형한 장소가 있고 많은 시체들이 방치되어 있다고 하였다.

*9  대한민국 정부에서 1952년에 파악해 놓은 8만 3천 명가량의 납북인사 명단이 2002년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국회통일외교통상위원회 간담회 질의응답내용,” 2002년 3월 8일, 김성호 의원의정 노트, Google Search, 2.17.2010.

봉래동에 있던 우리 집은 일식가옥이라 일본인들이 신사예식을 하던 조그만 단이 있었다. 우리가 그곳으로 이사 온 후 이 단을마루방으로 개조하여 쓰고 있었는데 그 단 밑에는 사람 한 명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숨어 지냈다. 내가 숨어 있던 공간 위에 나무판자를 덮고 그 위에 장롱을 얹어 놓았다.낮에는 장롱을 옮기고 뚜껑을 반쯤 열어 놓고 있다가 인기척이 나면동생들이 얼른 와서 뚜껑을 닫고 다시 장롱을 위에 얹어 놓았다. 그구멍에서 나와야 할 때는 내 동생을 불러야만 했다. 이로 인해 집에와서 나를 찾던 보안대원들에게 들키지 않았다.하루는 교양 있게 보이는 동네 아주머니 한 사람이 우리 집에와서 어머니와 한참 이야기를 하고 갔다. 그 후 그는 가끔 우리 집에 와서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차차 그 사람과 가깝게 느낀 어머니는 집안이야기 등 여러 가지 말씀을 하셨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후에 그 사람이 함흥에서 훈련을 받고 파견된 남대문지역 여성동맹 위원장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혼자 아이들을 먹여 살리고 보호해야 하는 어머니는 그 사람을 계속 친절하게 대할 수밖에 없었다.

한번은 거리에서 유엔(UN)에 보낼 “미군 물러가라”는 연판장을 돌려 백만 시민의 서명을 받는 운동을 여맹 주도로 벌린 일이 있다. 그때 어머니가 여맹위원장에게 이런 서명을 아무리 많이 받아도미군이 물러가겠느냐며 이 운동을 비하하는 말을 하였다. 내 동생이 걱정하며 그 사람에게 그런 말을 해도 되느냐며 어머니에게 말을한 적이 있다.또 그때 여맹원들이 가끔 우리 집에 갑자기 들이닥쳤다. 늘 3명씩 조를 짜서 함께 왔다. 와서는 방, 마루, 부엌, 변소 등 모든 곳의 면적을 자로 재었다. 장롱, 다락같은 곳도 문을 활짝 열어젖히며치수를 쟀다. 치수를 잰다고 하면서 집안에 젊은 사람을 숨겨 놓았는지 조사하는 것 같았다. 마루방 밑 작은 공간에 숨어 있던 나는조마조마하였다.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 집에 자주 드나들던 여맹위원장이 어머니의 소재를 당국에 알렸던 것 같다. 소재를 파악하고 있던 당국은 UN군 인천상륙 전 이광수 씨를 비롯한 서울의 남측 인사들을 피랍할 때, 대한부인회 등 여러 단체의 간부로 활약하셨던 어머니를 함께 강제 연행하여 납치해 간 것으로 생각된다. 그때 우리들은 당시 청년이었던 나만 위험했고, 공산당국이 어머니와 어린 동생들에게는 해를 끼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었다.나의 어머니가 그들의 납북대상이 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그때 내 처지와 나의 어머니를 생각하면, 60년이 지난 지금도 가슴이 메어지고 눈시울이 붉어진다. 생사확인이 불가한 지금 막연히 인민군에 끌려가 사살당하셨다고 생각이 될 뿐이다.

8월 말이 되면서 B29 편대와 함재기들의 폭격이 심해졌다. 인천 쪽에서 대포소리가 계속 났다. 정말 무서운 때였다.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한다는 소문도 돌았다.서울을 떠나 부여로인민군 점령하의 3개월 서울에서의 생활은 참으로 어려웠다.어머니 혼자 여섯 식구의 생활을 꾸려 나가야 했다. 처음 3주일은여동생 친구의 아현동 집에 많은 신세를 졌다. 봉래동 집으로 다시온 7월 중순 이후는 더욱 어렵게 살았다. 어머니가 집에 있던 값나가는 옷이나 물건을 갖고 나가서 곡식과 바꾸어 오기도 하면서 겨우 연명을 했다. 길거리에서는 확성기로 인민군에 자원하여 우리 조국의 품에 안기면 먹을 것을 주겠다고 떠들어 댔다. 그래서 숨어 있던 사람들 중에는 굶다 못해 밖에 나왔다가 잡혀 인민의용군에 끌려 간 사람이 많았다.어머니가 납치된 후 우리는 살 길이 막연했다. 앞날이 캄캄했다. 마루방 아래 숨어 있던 나는 밖으로 나와 서울대학병원에서 일하고 있던 친구를 찾아갔다. 거기서 어떤 사람을 시골에 보내면서위임장을 만들어 주는 것을 보았다. 내용은 이 사람이 병원계통에 일하는 사람인데 전선으로 가니 편의를 제공하라는 일종의 위임장이었다. 나는 여기서 하나의 아이디어(계략)가 떠올랐다. 위임장을 위조하면 친척이 있는 부여로 갈 수 있을 것 같았다.나는 어려서부터 도장을 잘 팠는데 도장만 위조하면 위임장을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바로 집으로 가서 도장을 파 위임장을 만들었다. 내용은 서울대학병원에서 본 것과 비슷하게 했다. 나(당시20살)는 두 남동생(익성 15살, 익풍 11살)을 데리고 떠났다.

우리는 7일 밤낮을 걸어 부여에 도착했다. 가는 도중에 너무덥고 배가 고팠다. 하루는 위험을 무릅쓰고 어떤 지방 공산당(인민위원회) 본부로 찾아갔다. 가짜 위임장을 보여 주며 내 자신을 소개하고 쉴 곳과 음식을 청했다. 그들은 우리들에게 방과 음식을 제공해 주었다. 또 한 번을 그런 식으로 넘겼다. 그러나 이러한 모험이결국 들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더 이상 그러지 못하고 길거리에서 그대로 잤다.부여에 도착했는데 운동화 밑창이 다 닳아 구멍이 나 있었다.부여에 있던 친척도 딸이 여덟이나 되는 피난민 신세라 아주 어려웠다. 우리는 부근의 빈 초가집 하나를 찾아 가마니를 깔고 지냈다.얼마 동안 우리는 친척집에서 얻어먹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집에서얻어먹기도 하면서 지냈다. 옆집에 “절간할머니”라고 부르는 분이계셨는데 우리에게 무척 잘 해 주시고, 자주 데려다 식사도 제공해주셨다.

11  9.28 서울 수복과 첩보활동


그러다가 서울이 수복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친척 아저씨가서울에 가서 소식을 알아보고 오겠다며 자전거로 다녀오셨다. 그분이 돌아와서 어머니는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고, 아버지가 돌아와계신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나는 동생 둘을 남겨 두고 먼저 서울로 향하는 트럭을 얻어 타고 집으로 갔다. 동생 둘은 그곳에 있던친척식구와 함께 며칠 후 대전역까지 걸어가서 화물차 지붕 위에 몸을 싣고 서울로 돌아왔다.친척 중에 육군대위가 있었는데 좋은 자리가 있다고 하여 까다로운 영어 시험을 이틀이나 쳐서 합격하였다. 백 명 이상의 지원자 중 20명을 뽑았다. 처음에는 정보계통의 임무라는 것을 알았지만 확실히 무슨 일을 하는 것인지 잘 몰랐다. 후에 알고 보니 아주어렵고 위험한 첩보활동과 관련된 임무인데 미군과 긴밀히 협조하며 수행하는 일이었다. 계급도 없는 민간인 첩보요원이었다.

남산에서 훈련과 브리핑을 받은 후 대기하라고 했다. 이삼 일후에 출두하라는 통지를 받고 갔더니 소령 한 사람과 중위 한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 이외에 네 사람의 민간인 첩보요원이 이 장교 두 사람과 한 조가 되어 떠났다. 우리들은 김포 군용비행장으로향했다. 미군 수송기를 타고 함흥비행장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집을 하나 얻어 열흘간 함께 있었다. 소령 인솔자는 오토바이를 타고어디엔가 바쁘게 다녔다. 상부의 명령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내가 함흥에 도착한 것은 통역첩보요원으로 들어간 지 꼭 일주일 만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함흥에 도착하자 곧 유엔군은 중공군에 밀려 후퇴를 시작했다. 여섯 명으로 구성된 우리 첩보 팀은 함흥에서 명령을 기다리다가 철수하는 미군을 따라 흥남으로 갔고 그곳에서 해체되었다. 각자 알아서 집으로 가라고 하였다.이때는 장진호 부근에서 미 해병 1사단 병력 1만 3천 5백 명인천에 상륙하는 미해병들 과 미 육군 7사단 4천 5백 명 병력이 4배나 되는 중공군과 인민군병력에 포위당하여 결사항전으로 포위망을 뚫고 남하하고 있던 때였다. 엄동설한의 개마고원 혹한에서 중과부적의 중공군 병력과 싸우며 포위망을 뚫는 가운데 수많은 미군이 전사했고 부상을 당했다. 후퇴할 길은 양쪽의 가파른 산기슭 아래에 얼음으로 꽝꽝 얼어붙은 좁은 길뿐이었다. 중공군은 길 양쪽 산기슭에 이미 포진하고있다가 후퇴하는 미군에게 공격을 가하였다. 후퇴하던 대부분의 군사들이 죽거나 심하게 부상을 입었다. 그 중 4천 명 정도의 부상병들은 임시 공항을 통해 피신시켰으나 나머지 군인들은 44마일 죽음의 길을 밤낮으로 걸어 후퇴해야 했다. 그중에는 한 번도 겨울의추위나 눈을 경험해 보지 못한 군인들도 많았다. 얼어 죽은 병사도있고 대부분이 동상에 걸렸다. 부상당한 사람들은 눈 위에 썰매를개마고원대에서 후퇴하는 미군들사선을 넘어서끌듯이 질질 끌고 가야 했다.

60년이 지난 지금도 장진호 전투에서 싸웠던 미국 해병대원들은 80대의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그때의 그 비참함을 잊지 못해 매달 만나 서로를 위로하고, 그때의 아픔을 나누며 살아가고 있다. 그때의 아픈 역사 속에서 살아남은 미국 해병대 군인들이 모여 만든모임이 “Men of Chosin”(장진호의 남아들)이다. 이들은 스스로를 “Chosin Few”(장진호의 소수)라고도 부른다. 그때 그들이 필사적으로 빠져나온 계곡의 44마일 눈길을 이들은
“Death Road”(죽음의 길)이라 부른다. 이것은 내가 새크라멘토에 있을 때(2004년) 이들의 모임에 가서 직접 들은 이야기다.

 

No. Subject Date Author Last Update Views
Notice How to write your comments onto a webpage [2] 2016.07.06 운영자 2016.11.20 18193
Notice How to Upload Pictures in webpages 2016.07.06 운영자 2018.10.19 32345
Notice How to use Rich Text Editor [3] 2016.06.28 운영자 2018.10.19 5922
Notice How to Write a Webpage 2016.06.28 운영자 2020.12.23 43838
23 [책연재 #5] "사선을 넘어서" #5 김익창 저 [3] 2012.01.27 민경탁*65 2012.01.27 4887
» [Book 연재] 사선을 넘어서 by 김익창, #3 [8] 2012.01.12 민경탁*65 2012.01.12 4204
21 [Book 연재] "사선을 넘어서" by 김익창*56 #2 [4] 2011.12.21 운영자 2011.12.21 4876
20 [Book Review] Destiny of A Running Horse [1] 2011.05.21 운영자 2011.05.21 67945
19 [Book Review] "Cutting For Stone" / Abraham Verghese [6] 2011.01.09 이한중*65 2011.01.09 3165
18 [Book] A Bird and Its Albatross: A Tale of Renewal [1] 2010.12.24 운영자 2010.12.24 16226
17 [re] 박경리 - 토지 1 (정리단계, 작업 중입니다) 2010.10.20 운영자 2010.10.20 7141
16 [re] 박경리 - 토지 4 (정리단계, 작업 중입니다) 2010.10.20 운영자 2010.10.20 6281
15 [re] 박경리 - 토지 3 (정리단계, 작업 중입니다) 2010.10.20 운영자 2010.10.20 7399
14 박경리 - 토지 2 (정리단계, 작업 중입니다) [1] 2010.10.20 운영자 2010.10.20 5399
13 KOREA: The Untold story of the War. 1982 [9] 2010.08.08 한원민*65 2010.08.08 7662
12 The War in KOREA, 1981 [7] 2010.07.31 한원민*65 2010.07.31 8550
11 Hello Dr. Seo [11] 2010.07.10 문광재*68 2010.07.10 7078
10 "백경" (Moby Dick)을 읽고 (내 동기 김영준*72 의 글) [7] 2010.01.22 유석희*72 2010.01.22 7675
9 『나무열전』(내 친구교수의 글) [6] 2010.01.08 유석희*72 2010.01.08 7821
8 The Two Books I Recommend [4] 2010.01.05 이한중*65 2010.01.05 7847
7 "부처를 쏴라" (내 친구교수의 글) [12] 2009.12.08 유석희*72 2009.12.08 7552
6 "How doctors Think," A must read [5] 2009.11.29 이한중*65 2009.11.29 3744
5 "데브다스" (내 친구교수의 글) [2] 2009.09.07 유석희*72 2009.09.07 8554
4 브람스 현악 6중주 1번 2악장 과 '연인들' file 2008.07.10 이건일*68 2008.07.10 108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