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6.29 21:44
소군묘 상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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昭君墓 常建 소군묘 상건 漢宮豈不死,異域傷獨沒。 힌궁기불사오? 이역상독몰을. 萬里馱黃金,蛾眉為枯骨。 만리타황금하고, 아미위고골을. 迴車夜出塞,立馬皆不發。 회거야출새하고, 입마개불발을. 共恨丹青人,墳上哭明月。 공한단청인하니, 분상곡명월을. |
소군 묘를 지나며 당조 상건 한나라 궁녀인들 어찌 죽지 않으리오? 다른 땅 아픈 마음으로 홀로 쓰러졌음이라. 만리에 황금을 실어 보냈고, 고운 아미는 마른 뼈로 변했도다. 회군하여 밤에 변방을 떠나려허니, 말은 섰고 모두 출발치 않네. 소군을 추녀로 그렸던 화공을 한하노니, 묘위에 명월을 바라보며 슬피 울었네. |
王昭君 II youtube: Tenor 王昭君 III youtube : Contemporary 昭君出漢宮(소군출한궁): 왕소군이 한나라 궁전을 떠날 때 昭君墓 image
解析(해석) |
2020.06.29 23:11
2020.06.30 23:49
Great story, KwanHo!
As said, 왕소군 is one of the most famous beauties in Chinese history together with 초선 to have become the source of
many poems we heard all along. Wish to hear more poems!!!!
BB Lee
2020.07.01 01:05
아무리 삭막한 이국땅에서 생을 마쳤지만 그래도 두번이나 시집을 가고,
아들 하나에 딸 둘을 낳고 살었고, 죽어서 커다란 능에 묻혔으니
이것 또한 나머지 중국 삼대 미인에 비교해서 잘 살은거 아니겠오?
자고로 옛날 절세 미인들의 운명은 딱하게 끝나기 마련이니 우리 너무 슬퍼하지 맙시다.
문득 생각이 나는데, 백제 의자왕의 손녀인 한 공주 (백제의 마지막 공주, known later as "부여태비")가
백제 멸망후 당나라에 끌려가 중국 당 나라의 황후가 되어 살았던 "애절한" 얘기가 기억에 납니다.
Please take a look. It is an amazing and fascinating story, not written in the Korean history book.
It is amazing that Chinese people preserved and studied her tomb.
백제 멸망 AD 660이후 요동반도 지역에서 백제인들이 150년간 "백제"로 모여 살었다 한다.
이것 말고도 우리가 전혀 몰랐던 역사적 사실들이 중국 역사에 남아있다 (as a written history).
1. 고구려 멸망후 고구려 후손이 산동반도에서 고구려 나라를 만들어 한참 존재했던 사실.
2. 고려 여인이 원나라의 황후가 되어서 원나라를 한참 다스렸던 사실.
I don't have the links on this Youtube story right now. But they are in the Youtube. I saw them.
2020.07.02 00:23
Dear BB: I plan to post two works titled Wang Zhaojun. 왕소군 next time.
The first one is "왕소군" by 이백(李白), and the second one 소군원(昭君怨 )
which means "왕소군의 원망" by 동방규(東方虬).
Both of them are the so-called 人口膾炙( 인구회자), which means "널리 칭찬을 받으며
사람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다는 의미.
Following are some parts of these great poems:
소군이 옥안장을 떨치며 말에 오르니 붉은 뺨에 눈물이 흘러.
오늘날 한나라 궁인이 내일아침 오랑캐땅에 첩이되도다. (이백)
한나라의 국운은 초기에 전성하였으니, 조정에는 무신이 넉넉했도다
어찌 모름지기 박명한 여인으로 하여금, 멀리 화친하는 괴로움을 겪게 했던고?
제1회(동방규)
얼굴을 가리고 눈물을 흘리며 단봉성을 떠나니, 슬픔을 삼키며 백룡대로 향하네.
선우는 깜짝 놀라고 기뻐했으나, 다시는 옛날 그 예쁜 얼굴이 아니었도다.
제2회 (동방규)
오랑캐 땅에 꽃과 풀이 없으니, 봄이 와도 봄 같지 않도다
.스스로 옷과 띠가 느슨해지니,이는 허리 몸매를 위하였음이 아니로다.
제3회 (동방규)
I won't disappolint you with these great poems.
Thanks,
Kwan Ho
당조의 시인 상건이 아마 변방근무를 할 때 내몽고 현재 울란바토르 지역에 있는 왕소군묘를 지나다가 감회가 일어나서 이 시 한편을 썼다고 믿는다.
서한 초기에 태어나서 궁중에 들어왔지만, 궁중 화공 모연수에게 뇌물을 주지 않아서 좀더 높은 직위, 즉 빈궁이나 귀비로 오를 기회도 없었고, 몇 년간 궁녀로 허송세월을 하다가 급기야 흉노왕이 황제에게 사위가 되겠다고 하여 작위도 없는 왕소군을 미련없이 시집보냈다.
문제는 궁을 떠날 때 황제에게 인사를 들이러 들어왔는데,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소군미모에 궁안이 환하게 비추는 듯하였다.
여기에는 흉노의 사신이 와서 대기를 하고 있어서, 한 원제는 통탄을 하며 이 절세가인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고, 그 분노로 모연수는 기시(棄市)하였다고 하니, 이는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서 죄인의 목을 베고 그 시체를 길거리에 버리던 형벌. 또는 그 형벌에 처함하는 형벌이다.
이리하여 모연수의 추한 이름이 지금까지 전해진다. 하지만 그건 소군에게 아무 위안도 되지못하였다.
일생을 한궁의 황제를 그리워하며 살았다. 그러나 소군은 중국 후세 시인의 마음을 많이 감동시켜서 누구보다 더 많은 추모시를 받았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