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8.06 19:34
광복은 빛을 찾았다는 뜻이 아니고 빛나는 회복이라는 뜻으로 광복절은 일본에게서 나라를 찾은 날을
기념하는 국경일이다. 과연 그날은 축하 할 만한 날일 까?
나는 1946년에 남한에서 태어 났다. 대한민국은 1948년8월15일에 건국 했다. 1946년은 미 군정기이다. 그렇다면 미국이 38선 이남을 통치하던 시절이 아닌가? 우리민족이 만든 정부가 존재하지 않았다. 분명히 우리민족은 1945년8월15일에 나라를 일본으로 부터 되 찾지 못 했다. 그날은 일본이 한반도 통치를 포기 하고 본국으로 돌아가기로 한 날일 뿐이다.
나는 얼마 전만 해도 광복절이 나라를 되 찾은 날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역사를 자세히 들여 다 보니 1945년8월15일은 일본 대신 소련과 미국이 나라의 주인이 된 날이었다.
역사를 학문적으로 연구 하지 않는 이상 일반국민들은 "역사적인 인상"을 역사적인 사실이라고 믿고 산다. 한국 사람들의 많은 역사 인식는 "민족의 자존심" 을 앞세우는 경향이 짙다. 이는 현재 사는 사람들이 반성할 기회를 놓지게 하여 미래에 악 영향을 미치는 행동을 할 위험을 증배 한다.
1910년8월29일 조선은 일본의 영토가 되었다. 한반도에 한민족이 운영하던 나라가 없어진 날이다. 반만년전 에 시작한 힌민족의 나라가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나는 이날이 한국사람들에게 얼마나 절망적인 날이었는 지를 표현할 단어를 지금까지 찾지 못 하고 있다. 일본이 하는 전쟁을 울며겨자 먹기로 조선사람들도 한편이 되어 싸웠다. 한반도가 일본의 식민지 였기 때문 이다. 일본은 미국과 전쟁을 했다. 조선사람들은 일본은 적이고 미국은 우리편이라고 생각 했다. 그러나 미국에게는 일본이나 조선이나 다 같이 미국의 적 이었다. 미국의 눈에 한반도는 적의 식민지에 불과 했다.
2차대전 말기에 소련이 동북아 전선에 참전 했다. 소련은 만주와 한반도의 일본군과 싸웠다. 당시에 모두 일본의 영토 였다. 1945년8월15일 일본이 미국에게 항복 했다. 소련과 미국은 각각 38선 이북과 이남을 나누어 가졌다. 승전국이 패전국의 식민지를 나우어 점령 한 것이다. 본국으로 돌아간 일본군 대신에 이북은 소련군이 이남은 미군이 점령 했다.
https://m.khan.co.kr/feature_story/article/201809302137005
[박태균의 버치 보고서](26)버치의 통치과정 평가
“우리는 긴급하게 왔다. 일본으로 가는 것과 상해에 해군을 보내는 것이 무엇보다 급한 일이었...
m.khan.co.kr
Leonard Bertsch 중위는 점령군 사령관이었던 하지 중장의 가장 중요한 보좌관이었다. 얼마전에 그가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적은 기록이 발견 되었다. 이를 버치 보고서라고 한다. 그는 "한국 사람들은 한국이 패전국의 영토라는 것을 인정 하지 않는 다"고 토로 하고 있다.
"(중략) 신탁통치는 ‘과거 적국의 영토’에서 실시된다는 것인데, 한국인들은 스스로 ‘과거 적국의 영토’였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중략) 한국인들은 ‘최대 5년간의 신탁을 위한 준비과정’이라는 (3상회의 결정에서의) 용어를 이해하지 않으려 했다.”
1945년 한반도는 미국에게 그리 중요한 지역이 아니었다. 중국에서는 국민당과 공산당이 싸우고 있었고 미국은 국민당의 장개석을 도왔다. 잿더미가 된 일본을 재건하기 위해서 전력을 기우리고 있었다. 미국은 유럽 재건에도 크게 관여 하고 있었다. 일본의 작은 식민지였던 한국은 천덕 구러기 였다. 하지가 하루가 멀다하고 원조 요청을 했지만 미국 정부는 여력이 없었다. 미국은 남한에 통치 인력, 돈, 식량등 미군정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충분히 조달 해 주지 않았다. 거기다가 만주, 북한, 일본에서 수 많은 사람들이 남한으로 몰려 왔다.
1945년8월15일은 남한이 패전국인 일본의 통치에서 승전국인 미국의 통치로 바뀐 날이지 주권을 다시 찾은 날은 분명히 아니다. 일본을 우리 힘으로 굴복 시킨 것이 아니고 남의 나라 미국이 그렇게 했기 때문 이었다.
외세의 힘을 빌려서 우리민족이 원하는 나라를 운영 할 수 없다는 교훈을 우리에게 주는 역사적 사실 이다.
1910년8월29일과 1945년8월15일이 다른 점은 전자는 영구적인 점령이였고 후자는 얼마지나서 독립을 약속해 주는 일시적인 점령이었다. 그러나 소련과 미국의 분할 점령은 분단국가를 의미 했다. 빛나는 주권의 회복(광복)이라고 하기에는 좀 어폐가 있지 않을 까?
1948년8월15일은 대한민국을 선포 한 날이다. 1910년8월29일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처음으로 우리나라가 탄생한 날이다. 분명 8월15일은 일본이 미국에게 패전한 날이며 대한민국이 건국한 날이다. 그때 생긴 대한민국은 세계 10위안에 드는 선진국이 되었다. 이제는 없는 자손심을 억지로 찾을 필요는 없다. 좀더 자신감을 가지고 떳떳 해야 역사가 주는 진정한 교훈을 받아들여서 국가의 백년대계를 세울 수 있을 것이다.
2022.08.07 06:47
2022.08.07 07:14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5/08/12/2005081270308.html#:
조선일보: 1945년8월15일 매일신보를 통해본 해방전후
그보다는 오히려 신문 한가운데 자리한 총독 아베(阿部信行)의 발표문이 더 뚜렷하게 그날의 역사를 말하고 있다. “경거(輕擧)를 엄계(嚴戒)하야 냉정침착 하라”는 유고(諭告)였다. 다른 기사들도 지금 눈으로 보면 거의 암호문이라고 할만한 정도다. “미, 영, 중, 소(米英支蘇) 네 나라의 공동선언을 수락했다”는 기사는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날 낮에 있었던 항복 방송과 관련해서는 “천황폐하께옵서는 만세(萬世)를 위하사 태평(太平)을 열랴고 하옵시는 성려(聖慮)로 14일 정부로 하여금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였다”고 보도했다.
▶▶적어도 이날 매일신보 만으로는 일제가 패망하고 조선은 광복을 찾았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웠다. 군중이 거리로 뛰어나와 부둥켜안고 감격의 만세를 부르는 장면이 연출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태평양 전쟁에 몰두하면서 극단적으로 군국화된 당시 사회의 반영이었다.
https://namu.wiki/w/%ED%8F%AC%EC%B8%A0%EB%8B%B4%20%EC%84%A0%EC%96%B8
포츠담 선언
13. We call upon the government of Japan to proclaim now the unconditional surrender of all Japanese armed forces, and to provide proper and adequate assurances of their good faith in such action. The alternative for Japan is prompt and utter destruction.
13. 우리는 일본 정부에게 이제 일본군의 무조건적인 항복을 선언하고 이러한 조치에 대한 일본 정부의 적절하고 충분한 성의있는 보장을 제공할 것을 촉구한다. 이에 대한 일본의 다른 대안은 즉각적이고 완전한 파멸이다.
2022.08.07 07:49
조선 사람들이 일본천황의 "포츠담 선언을 수락 한다"는 말을
알아들었을 리가 없었다. 일본의 패전을 조선사람들이 안 것은
8월17일 경이라고 조선일보 기사는 말하고 있다. 조선 사람들
은 일본이 전쟁에서 지면 주권을 다시 찾을 것임을 추호도 의심
하지 않았다. 일본 패전은 광복과 같은 단어 였다. 그러나 열강은
신탁을 계획하고 있었다. 조선이 패전국의 식민지 였기 때문이
었다.
이 무렵 소련군은 이미 38선 근처로 남하하고 있었다. 8월8일
나가사끼 원폭 투하 직후 소련군은 만주와 한반도를 거의
동시에 처들어 왔다. 소련군은 만주와 이북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
군과 전투를 했다. 일본은 명실 상부 한 적이었다. 소련군은 이북
의 일본세력을 완전히 배척하고 건국준비위원회 같은 민족 세력의
조직을 이용하여 이북을 장악 헀다.
서울의 조선총독부는 소련이 총독부를 접수 하는 줄 알고 벌벌 떨고
있었다. 조급해진 아베 총독은 부랴부랴 여운형에게 총독부를 넘겨
주기로 결정 한다. 8월15일 여운형은 휘문고등학교에서 그 유명한
수락 연설을 하고 1944년 부터 자신이 조직한 건국준비위원회를 바탕
으로 나라를 일본 총독부로 부터 접수 하기 시작 했다. 그러나
8월20일 경 미국은 38선을 긋고 소련의 남하를 정지 시킴과 동시에
극동 사령관 맥아터를 통해서 38선 이남을 미국이 접수 할 것임을
통지 한다.
아베 총독은 모든 이관 작업을 중지 하고 그 동안 약화된 경찰력을
주둔 군으로 보층하여 다시 권력을 잡고 무사히 귀국 할 준비를 한다.
일본을 장악한 미국은 천황을 앞세워 일본 선무 작업에나선다. 전쟁
으로 피페한 일본을 미국이 도와 준다는 인상을 심어 주기 위한 정
책 이었다. 미국은 천황이 지은 죄를 용서 해 주고 천황은 일본 사람들
에게 미국이 일본을 도와 주는 좋은 나라라고 하는 방법 이었다.
일본의 식민지였던 남한에서도 미국의 정책은 마찬가지 였다. 미국과
조선 총독부는 적대 관계가 이니었다. 군정과 총독부는 오히려 서로
협조하는 관계 였다. 그러나 조선 사람들에게는 총독부는 철천지
원수 였다. 마땅히 처형되었써야 할 인간들이었다. 이 틈에 소위
친일파라고 하는 사람들도 숨을 쉴 수 있었다.
미국의 이와 같은 일본 친화 정책은 오늘 날 일본 보수 자민당이
일제 전범이 주측이 되어 형성이 되고 남한의 보수가 친일
세력 중심으로 이루어 진다. 박정희의 구테타가 만주 군관학교
출신으로 성공 하면서 한국 보수의 친일 색은 더욱 짙어 진다.
2022.08.07 10:03
나는 일본의 항복, 우리나라의 해방 그리고 미국과 쏘련의 삼팔선으로 분할한 것에 관한 기록을 읽은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나의 아홉살 때 내가 직접 보고 또 들은 바에 의하여 이야기할 뿐이다.
그러나 나는 일본의 항복을 조선인이 8월 17일까지 몰랐다고 생각지 않는다. 바로 그날 8월 15일 정오에 일본천황 유인의 항복사실을 그가 방송하였고, 우리 아는 분 묵로 이용우씨 부인이 그날 낮에 유인의 방송을 듣고 그가 너무 불쌍해서 울었다고 하여 많은 사람들의 비난을 받았던 기억도 새롭다. 틀림없이 8월15일에 방송을 통하여 일본의 항복이 우리나라에서 알려졌다고 나는 믿는다. 여기 다음을 인용한다. "일본의 항복(일본어: 日本の降伏)은 일본 제국이 1945년 8월 14일에 연합국에 통보하고, 8월 15일 낮 12시에 쇼와 천황이 무조건적인 항복을 선언한 것을 말한다." Google Search에서 인용하였고. 또 위키백과에서 "일본의 항복(일본어: 日本の降伏)은 일본 제국이 1945년 8월 14일에 연합국에 통보하고, 8월 15일 낮 12시에 쇼와 천황이 무조건적인 항복을 선언한 것을 말한다. "
2022.08.07 14:11
일본천황은 8월15일 라디오 방송으로 "포츠담 선언을 받아 들
인다"라고 만 했지 직접적으로 항복 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포츠담 선언이 무슨 뜻인지 아는 사람들은 항복 했다는
사실을 8월15일에 알 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국민은
확실 한 감을 잡지 못 했을 것으로 짐작 됩니다. 더구나 누구나
라디오 방송을 들을 수 도 없는 시절 이었으까요.
2022.08.07 14:50
흥미있는 얘기들...
8.15 of 1945에는 일제부터 독립이 되어 자유와 희망의 빛이 드디어 보였다는 의미에서
광복절이라해도 부끄러움이 없다고 본다. 본인은 그때 5살 산골짝의 촌녀석 소년이었기에
그날이 무엇이였는지 몰랐다. 하지만 그당시의 어른들은 얼마나 기뻤을가 상상도 못한다.
본인이 더 큰후 1950년의 6.25때 국군이 남쪽에서 올라와 우리를 다시해방했울때의 기쁨은
내일생에서 다시 못본 환희였다. 아마 8.15 해방과 맞먹는 "만세, 대한민국 만세"였을거다.
정말 우리가 하나의 당당한 국가, 국민으로서로서 세계의 지위에 오른 것은 언제일가?
대한민극의 국가선언이 1947년이라 하지만, 우리는 어림없이 나라도 못되고 국민도 못되었다.
먼 그후에 1965년에 미국을향해 한국을 떠날때에도 대한민국은 민주국가, 민주국민의
근처에도 못갔다. 말만 민주국가라고 했지만 그장시 우리는 박정희 독제정권 밑에 있었다.
미국에 도착해보니 많은 미국인둘이 "Korea가 어디에 있는 어떤 나라이냐" 물었다!!
우리는 국가이기는커녕 민주국가는 더 아니였다.
세월이 지나 1990년대초에 남미 Argentina의 남단에 갔을때 대문짝보다 더 컸던
현대 자동차 광고를 처음보고 "대한민국이 여기까지 왔어??" 1990년대 끝장에 소련에 갔을때
거대한 아파트의 수백개 유리창에 달린 "LG" air conditioners를보고 "어떻게 여기까지??"
그때는 이미 Samsung TV가 미국을 휩쓸때였다. 드디어 "대한민국"의 존재를 세계무대에서
느꼈다. 서서히 이제는 Korea와 Korean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이 없게되었다.
이제 Korean-made Military weapon이 Europe의 선진국을 휩쓸기 시작한 "오늘"이 아마도
한국이 "진정한 민주독립국가"로 탄생한 날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The birth of Korea was not 1947. It is 2022 when we came to be truly an independent nation.
When "Nancy Pelosi" visited South Korea only a few days ago, the Korean president did not
even bother to meet her. The American press did not mention it.
We came a long way into the 21st century to become what we wanted to be.
Even with the dark clouds in our north and west, we shall still work harder.
We still have a long and hard way to go.
2022.08.08 01:12
누가 뭐라고 말해도 나는 우리나라 해방일의 환희와 그 행진은 1945년 8월 15일임을 주장한다. 내가 직접 경함한 사실을 누가 뭐래도 양보하거니 변경하지 않는다. 그게 나의 기억이요 사실이니까.
그때 우리나라사람들이 가난했고, 지식을 가진 분들이 적었다고 해도, Radio쯤 가진 집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들에 고학벌을 가진 사람들이 많지 않아도, 우리나라 해방이란 한마디만 나오면 모두 펄쩍 뛸 정도였다. 여러분은 삼일운동이 범국민운동이었음을 모르는가? 그건 1919년 3월 1일에 일어난 전민족의 궐기였다.
만일 1945년 8월 15일이 한사람만이 Radio에서 이소식을 들었다면 그는 펄쩍 뛰고 아는 이, 보는 이에게 정신없이 말하였겠고, 그것을 들은 이가 가만있었겠는가? 그렇지 않다. 그들도 알건 다 알았고, 모두 일본말을 다 배웠다. 나는 내 경험, 내 기억을 굳게 지킨다. 그러고 8월 15일에 우리국민이 몰랐다가 8월 17일에야 겨우 일본의 항복, 그리고 우리의 해방을 알게 되었다는 재료가 있다면 나는 기꺼이 읽어 줄 수있지만, 나의 경험과 기억은 변경하지 않는다.
내 기억에 일본말 못했던 어른은 나의 부모님뿐인 듯하였고, 대다수 중년이나 젊은 층은 일본말을 유창하게 잘하였다.
일화 한가지만 이야기하겠다. 나의 넷째 누님은 경기고녀출신이었다. 그당시 담임선생님이 가정방문을 하여 학생 부모와 교육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그 가정사정도 알았던 시절이었는데, 담임선생님을 만났던 우리아버지는 일본말을 잘 못하셔서 다른집 부모와 달리 소통을 하는데 땀을 뺐다. 그후 유창한 일본말을 자랑했던 경기고녀 선생님이 교실에서 우리 노마누나에게 너의 아버지는 왜 그리 일본어를 못하느냐? 혹시 학교도 다니지 못한 사람아니냐? 하니까, 누나가 덤벼들면서 "그런소리 마세요. 우리아버지는 미국의 펜실베이니아 상과대학에서 교육을 받은 분이에요." 했더니, 그 우물안 개구리인 경기고녀선생이 "그런 학교가 어디있어, " 하였다고 들었다.
한국인이 워낙 재빠르지 않는가? 일본세상에는 일본말을 배웠고, 미군이 들어오니 영어를 또한 금방 배웠지 않은가? 일본말을 못해서 일본왕의 방송까지 이해하지 못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1945년 8월 15일을 광복절이라고 하는 표현에 어폐가 있는가?
과대찬양인가? 그런 점이 있다. 우리는 더욱 적절하게 해방일이라고 하는 게 더 옳는 표현인 듯하다. 하지만 우리 회원들은 바로 그날 1945년 8월 15일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어떻게 환호하였는지 알지 못할 것이다.
강릉 중앙소학교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여름 방학 날 나는 밖에서 동네 친구들과 놀다가 집에 들어왔다. 그때 숙명고녀 3학년 다녔던 순이누나가 방학이 되어서 집에 와 있었는데, 날보고 무슨 긴한 말을 하였다.
"춘호야, 일본이 항복했단다." 그때 나는 누구로부터 들었는지 일본이 항복하면 미군이 들어와서 우리를 모두 죽일거라는 유언비어를 기억하였고, 누나보고, "그럼 우리 모두 죽어?"하고 물었더니, 누나는 웃으며, "우리는 독립한단다."
나는 독립이 무언지 알리가 없었다. 그래서 혼자서 얼떨떨해 있었다. 그 직후 많은 사람이 소리지르는 큰 함성이 연달아 들렸다. 우리집 아래쪽에 있는 동네에서 사람들이 한떼로 몰려서 달려 오며, 오른쯕으로 강릉시내로 향한 길로 흰옷입괴 머리를 수건으로 감은 청년들이 손에 큰 장대에 국기(태극기였겠다)를 높이 들고 "만세, 만세, 우리나라 만세, 대한민국(?)만세"를 목이 터져라하고 부르며 국기들을 흔들며 뛰어 강릉시내쪽으로 달려갔고, 바로 그 뒤에는 적지 않은 숫자의 아낙네(요즘말로 아즘마)들이 똑같이 열광하여 따라갔며, 거기에 어린이들도 뒤따랐다.
나는 이 나이가 되도록 그러한 열광에 도취했던 청년, 아낙네, 어린이 떼들을 본 적이 다시는 없었다. 그렇다. 그날이 어찌 광복절이 될수있겠는가? 우리의 만고의 원수 일본을 우리손으료 때려 잡지 못하고, 미국의 힘으로 해방이 되었다. 그러고 3년후에 독립하였다. 그러니 해방일에서 독립일이 되었다. 무어라고 표현하여도 나 또한 그날의 기억은 어제같이 생생하다.
Long Live, Korea.
Long Live, our Count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