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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李方子妃: 이방자비

2023.10.31 03:52

정관호*63 Views:79

李方子妃: 이방자비
 

1. 개요

이방자: Yi Bangja (李方子, 1901년 11월 4일~1989년 4월 30일)
혼인전에는 梨本宮方子女王: 나시모토노미야마사코여왕이라고 하였다.

출생

일본의 황족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 왕(梨本宮 守正王)과 화족 나베시마 이츠코(鍋島伊都子)가 결혼한 지 1년여 후인 1901년, 첫 아이로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 여왕이 태어났다.
일본 최초의 세습친왕가였던 후시미노미야 가문의 20대 당주였던 후시미노미야 구니이에 친왕(伏見宮邦家親王)에게는 수많은 아들들이 있었는데, 그 중 7남 구니노미야 아사히코 친왕(久邇宮朝彦親王)의 4남이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 왕이었다.
즉 이방자 여사는 후시미노미야 가문의 분가의 분가 출신인 것이다.

3. 호칭

원래 이방자는 일본 방계 황족이었으며, 부계 혈통상 스코 덴노의 18대손 이다. 결혼 전의 이름은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梨本宮方子)였으며 지위는 여왕(女王)이었다.
영친왕과 결혼하면서 이왕족의 일원이 되었다. 일본 황족은 본래 성씨가 없다. 위에 있는 '나시모토노미야'는 미야고(궁호)다. 미야고는 해당 미야케 (宮家)의 당주에게만 붙이는 것이기 때문에, 정식 호칭은 그냥 '마사코 여왕(方子女王)'이었다 영친왕과 결혼 후 부인이 남편의 성을 따르게 하는 당시 일본의 민법에 따라 남편과 같은 '이(李)'씨 성이 되었다. '이방자'라는 이름은 본명인 마사코(方子)를 그대로 한국식으로 읽어서 완성된 이름이며, 일본에서는 원어 그대로 '리 마사코'라고 부른다. 남편의 성을 그대로 따랐으므로 전주 이씨라고 볼 수 있다.
'이방자 비'라 부르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 이 명칭은 일본 황실의 호칭 체계에 따른 것(이름+비)이라 현대 한국에선 원칙적으로는 적절한 호칭이 아니다. 다만 왕공족 시절의 이방자를 가리키는 경우에 한해서 쓰이는 경우가 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이 불리는 호칭은 '이방자 여사'이며, 엄밀히 따지면 이 호칭이 가장 적절하다. 현대 한국에서 사시를 인정하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이왕가 시절의 호칭을 부를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전에 본인 스스로 '이방자 여사'라는 명칭으로 대중매체와 접촉했으며, 1981년 한 여성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인터뷰어였던 배우 장미희가 "호칭을 어떻게 할까요? 비 전하(妃殿下)라고 해야 할까요?"라고 묻자, 이방자 본인이 "그냥 편한 대로 여사라는 호칭을 써 주세요."라고 대답한 적이 있다.

4. 어린 시절

마사코 여왕이 어릴 적에 일본은 러시아와 전쟁을 했다. 이땐 시대적 분위기 때문에 어린아이들도 전쟁놀이를 즐겨 하고 군가를 따라 부르며 놀았는데, 마사코 여왕 역시 어린 시절 전쟁놀이를 즐겨 했다고 한다. 어머니 나베시마 이츠코의 일기와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활달한 성격이어서, 전쟁놀이를 할 때면 퍽 용감한 군인 행세를 했다"고 알려졌다.
학교에 입학한 후로도 마사코 여왕의 적극적인 성격은 여전했고, 이러한 면모는 강한 승부욕으로 발전했다. 운동경기나 내기를 할 때면 지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자신이 이길 때까지 중단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외에도 마사코 여왕은 연극도 좋아했고, 하늘을 나는 비행기를 동경하여 여류 비행사를 꿈꾸기도 했다.

5. 신문을 보고 안 이왕세자와의 약혼 발표

16세(만 14세)였던 1916년 8월 3일 아침, 별장에서 마사코 여왕은 별 생각없이 신문을 집어 들었다가, 자신이 구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였던 이은과 혼인한다는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실린 걸 보게 된다. 이 기사는 일본 정부에서 멋대로 실은 것이었다고 한다. 약혼 발표가 있기 얼마 전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 왕은 궁중에 불려갔는데, 자기 딸이 황태자비로 간택된 줄 알고 기뻐하면서 갔다. 하지만 다이쇼 덴노와 데이메이 황후는 "마사코 여왕을 이왕세자 이은에게 시집보내라"는 명령을 내렸고, 당연히 모리마사 왕은 멘붕(mental崩)했다. 조선총독을 맡았던 데라우치 마사다케 원수는 "일본의 장래를 위해 말씀하는 겁니다. 일본과 한국의 두 왕실을 굳건히 결합시킬 필요가 있습니다."라고 강요하다시피 권고했다.

6. 영친왕의 약혼녀, 민갑완

양가 부모님들과 당사자들의 의견을 무시한 것뿐만 아니라, 당시 영친왕[英親王 李垠]에게는 이미 약혼녀가 있었다. 이는 영친왕이 일본인과 강제결혼을 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는지, 고종황제와 순헌황귀비 엄씨가 1907년 당시 11살의 어린 영친왕을 민씨 집안의 동갑 처자였던 민갑완과 서둘러 약혼시켰고 혼인도 서둘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마냥 어리다고만 하기는, 그런 게 전통적으로 조선에서는 세자와 세자빈을 10살 즈음에 혼인시키고 14살~15살 때 초야를 치르는 전통이 있었다.
그러나 일제는 '유학'이란 구실을 붙여 영친왕을 볼모로 일본에 끌고 갔고, 그렇게 세월이 흐르는 사이 일제는 이 약혼을 깨버렸다. 사실 둘을 파혼시키기 위해 일제는 민씨 집안에 핍박을 가한 것은 물론이고, 황실에 보낸 혼수품을 강탈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여파로 민갑완은 파혼한지 몇 개월 되지 않아 중국 상하이로 반강제적인 망명을 하게 되는데, 이때 민갑완의 아버지 민영돈은 화병으로 사망한다. 일제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설도 있다. 이은 (李垠) 황태자 명휘(明暉) 영친왕(英親王), 영왕(英王)이고, 모친은 귀비엄씨(貴妃嚴氏)이다.

7. 결혼 비화

이방자 여사의 회고록에 따르면 결혼의 배경은 이러하다. 그녀는 당시 일본 황태자였던 히로히토의 황태자비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어느새 영친왕의 신붓감 후보로도 언급되더니, 불임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일본 황실에 의해 영친왕과 약혼하게 된다. 다만 이건 소문이 그랬다는 거고 실제 사실과는 달랐다. 이방자는 별 탈없이 아이를 가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약혼 4년 뒤인 1920년에 결혼했다. 이 결혼을 성사시키기 위해, 일제는 황실 전범의 내용을 고쳐 "황족 여자에 한해 왕공족과 결혼이 가능하다."는 조항을 새로 만들기까지 했다. 어찌됐건 한국의 황족과 일본의 황족이 결혼한 것은 최초였기 때문에, 당시 주위에서도 둘의 결혼 생활을 꽤 걱정한 것으로 추측된다..

8. 결혼 준비

봄이 되자 마사코 여왕은 가쿠슈인 여학부 고등과에 진학했다. 세월은 어수선하고 바쁘게 흘러 다시 우기에 접어들었다. 바로 그녀를 그렇게 깜짝 놀라게 했던 그 여름이 또 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 1년 동안 그녀와 영친왕은 아직 대면도 하지 않은 채였다. 하지만 1960년대까지도 부모 내지는 집안 어른들이 정해준 대로 혼인해서 결혼 전까지 얼굴 한 번 보지 않는 일은 허다했으니, 이건 마사코 여왕과 이은만 해당되는 사안은 아니었다. 쇼와 덴노의 장녀 히가시쿠니 시게코도, 결혼식(1943년) 이후에야 남편 히가시쿠니 모리히로(東久邇盛厚)와 만났을 정도다.
학생 생활 최후의 휴가는 교토 사단장으로 있는 아버지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 왕에게 가서 산센인에서 지냈다. 산센인은 마사코 여왕의 조부가 주지스님으로 있던 유서 깊은 절이다. 그곳에서 산에 올라가거나 명소, 고적들을 찾으며 만 7살 아래인 여동생 노리코 여왕, 양친과 함께 보냈다. 마사코 여왕은 친정에서의 마지막 여름을, 하루하루가 귀중한 추억이 되고 가족들과 함께 있는 시간을 많이 가지고 싶었다.

9. 영친왕과의 만남

정식 결혼식은 이듬해 1월 25일로 결정되었다. 새해의 1월 9일, 그녀는 궁중으로부터 보관장 훈이등을 받는다. 결혼을 위한 복잡한 절차는 다 끝났다.
이은 왕세자는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소위에 임관되어 근위 보병 제2연대 소속으로 있었기 때문에 일요일만 외출이 가능했기에, 납채 의식을 거행하고 정식 약혼자가 된 뒤 왕세자는 매주 일요일에 만났다고 한다. 왕세자는 말이 없는 사람으로 말을 붙이기 어려웠고, 이들은 뜰 산책을 하거나 트럼프 놀이를 했다고 한다.

10. 외국의 반응

1920년 6월에 프랑스 파리에서 발행되는 불문잡지 <자유대한(La Coree Libre)>에 두 사람의 결혼을 반대하는 기사가 실렸었다. 자유대한(自由大韓)은 1919년 9월 파리 강화 회의에 조선의 독립을 청원하러 갔던 상해임시정부의 김규식 박사가 그대로 파리에 머물면서 항일투쟁을 하기 위해 발행하는 잡지였다.
기사는 정략결혼과 조선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가 왕세자를 강제로 부왕과 떨어뜨려 영친왕을 강제로 일본 정부의 감시하에 남겨두기 위해 일본 황실 근위대의 지휘관을 만든 것을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11. 결혼에 대한 걱정

이들의 결혼에 대한 조선 내에서의 항일 파동, 왕세자의 강경한 거절, 외국의 신문사설을 통한 비판을 물론 당시 그녀는 전혀 알지 못했다. 아무도 그녀에게 그런 사실을 말해주지 않았고 오히려 "조선 왕실에서도 일본 황족과의 결혼을 원했으니 너를 환영할 것이다"라며 그녀를 위로하려고만 들었다.
물론 강요로 인한 결혼이었고, 국제정세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조선 왕실이 환영한다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사코 여왕 또한 기뻐한다는 말이 거짓말이라는 것 정도는 눈치채고 있었다.

12. 3.1 운동과 협박 전화

1919년 1월 25일로 예정된 결혼식을 4일 앞둔 1919년 1월 21일, 시아버지가 될 예정이었던 고종황제가 갑자기 사망했다. 황태자 이은은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러 급히 조선으로 돌아갔고, 두 사람의 결혼식은 내년 봄으로 연기되었다. 결혼식으로 들뜨던 나시모토노미야 저택은 암울하고 무거운 분위기로 바뀌었다. 독살이 의심되는 고종황제의 죽음을 기폭제로, 조선은 얼마 안 가 3.1 운동으로 떠들썩해진다. 그 때문에 매일마다 마사코 여왕은 매일마다 악몽을 꾸면서 불안에 떨어야 했다.
신문을 보며 아버지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 왕은 "독립 만세 운동으로 조선이 무척 소란스럽군"이라며 크게 걱정했다. 늘 말없이 남편에게 순종만 하던 이츠코는 "그러게 내가 뭐라고 했어요, 그런 결혼은 아무래도 좋지 않다고 했잖아요!"라면서 유일하게 남편에게 역정을 냈다고 한다.

13. 결혼식과 임신

기다림과 악몽의 연속이던 2달 후, 이은은 1920년 3월 중순에 돌아왔다. 아버지 고종황제가 죽은 뒤 이은은 심리적으로 의지할 곳을 찾으려고 한 건지 마사코 여왕을 이전보다 자주 찾아왔다. 결혼이 본래 예정보다 1년 뒤로 연기되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결혼 전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며 교제할 수 있었다.
1920년 4월 28일 결혼식이 치러진 후 3일 동안은 파티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정신없이 바쁘고 떠들썩한 3일이 지난 뒤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져 왔다. 두 사람이 결혼식 날에 타고 온 의장 마차가 도리이사카 언덕을 오를 때 폭탄을 던진 사람이 있었다는 것. 경상도 출신의 한국인 유학생 서상일 이었는데, 폭탄의 성능이 좋지 않아 터지지 않았으므로 이방자는 결혼식 직후 3일 동안에는 이를 모르고 있었다. 이 사건은 극비에 부쳐져서 관계자와 일부만이 알고 있었고, 신문에도 보도되지 않았다. 주변에서는 이방자가 이 소식을 들으면 놀랄 것이라고 걱정한 것 같지만,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운명에 이방자는 앞으로 닥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일 각오를 하고 있었기에 침착했다고 한다.
이은은 결혼한 해에 일본육군대학에 입학했으며, 남편이 출근하고 나면 이방자는 집안을 정리하고 조선인 직원들을 불러서 조선의 풍습과 예의를 배웠다. 한복을 입는 방법도 그들로부터 배우고 입고 행동하는 것까지 일일이 연습하기도 했으며, 이방자가 파란색 동그라미 무늬가 있는 한복을 입은 적이 있는데, 이 때 이은은 "잘 어울린다"고 칭찬을 했다. 기뻐하는 이은을 보고, 이방자는 앞으로 자주 한복을 입으리라고 결심했다고 한다.

14. 첫 출산과 조선 방문

이진이 생후 7개월이 되던 1922년 4월 영친왕과 이방자는 최초로 함께 조선을 방문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아직도 영친왕의 맏형인 순종황제에게 결혼 보고를 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따라서 조선 방문을 너무 지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생후 7개월 된 이진을 데리고 조선까지 먼 여행을 하는 것이 불안했다. 그래서 아기를 데리고 갈 것이냐, 도쿄에 남겨두고 갈 것이냐로 고민을 했다.
이진은 모유에 유모의 젖까지 보충해야 하는 시기였고 기후나 풍토가 다른 땅이며 배를 타고 하는 여행인만큼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떻게 하나 불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방자는 마음대로 아들을 두고 갈 수 없었는데, 이진 왕자는 조선왕실을 이을 왕자였다. 그런데 그녀 마음대로 이진 왕자를 두고 갔다가는 조선왕실에 대해 무례하고 부도덕한 여자로 오해받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결국 영친왕과 이방자는 장남 이진 왕자를 데리고 가기로 결심했다.
일본에서 결혼식을 올린지 2년 만인 1922년 4월 28일, 두 사람은 조선에서 조선식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고, 이때 이방자 여사는 영친왕의 맏형 순종황제와 이복 여동생 덕혜옹주를 처음 만났다. 덕혜옹주는 1922년 히노데(日出) 소학교 1학년에 입학했는데, 이 학교는 일본인 학교였다.
소학교 입학 전에도 덕혜옹주는 일본인 교사와 보모에 의해, 일본어와 일본식 풍습 속에서 길러졌다. 덕혜옹주를 일본식으로 물들이기 위해 일제가 꾸민 일이었다. 영친왕과 이방자는 떠나기 전 날인 1922년 5월 7일까지 역대 선왕에게 결혼 보고를 하고 가든 파티에 참석하고 영친왕의 어머니 엄귀비가 세운 진명여학교와 숙명여학교에 방문하는 등 많은 일정을 보냈다. 이진 왕자는 아무 탈없이 귀여움을 받았다. 고종이 독살되었다는 소문에 일본인 수행원들은 무척 신경을 곤두세워 이방자의 음식을 일일이 점검하고는 했지만 아무 문제가 없었으며, 약 2주 동안 세 식구는 편안하게 조선에서 시간을 보냈다.

15. 이진의 죽음과 유산

그러나 경성을 떠나기 전날 밤, 건강하게 잘 놀던 이진 왕자는 갑자기 얼굴이 파랗게 되어 청록색의 젖을 토해내기 시작했는데 의사들은 "우유를 잘못 먹은 것 같다"고 말했다. 이진 왕자는 모유 외에 소량의 우유를 먹고 있었으나 이방자가 보기에는 토하는 것이 우유가 아니라 다른 음식물인 것 같았다. 그리고 우유가 잘못되었다 하더라도 아기가 이렇게 심하게 아픈게 말이 되나 하는 의구심 속에, 이방자는 아들을 돌보는데 소홀했음을 크게 후회했다.
"우리 아기가 죽지만 않게 해달라"는 수많은 기원과 몸부림과 눈물에도 불구하고 이진 왕자는 1922년 5월 11일 새벽 3시 15분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방자는 "겨우 생후 7개월된 아기가 죽어야 한다는 말인가? 내가 일본 여자라고 해서 그래서 우리 아들을 죽여야 한다면 왜 나를 죽이지 않았는가"하고 세상을 원망했다.
이에 사람들은 "그럴 리가 없다. 누가 왕통을 노려서 왕자를 죽일 수도 없고, 더구나 무슨 원수를 갚겠다고 그런 참혹한 짓을 저지를 사람은 없다."고 말했지만 이방자는 의혹을 떨칠 수가 없었다. 이방자는 작은 이진의 몸을 부둥켜 안고 소리내어 한없이 통곡했다. 체면이고 신분이고 따질 겨를없이 미친 상태가 되어 울고 또 울었는데, 당시 그녀의 나이는 고작 22세(만 20세)였다.

16. 간토 대지진과 대학살

1923년 9월 1일에 간토 대지진이 일어났다. 그 날 영친왕은 아카하네의 공병대에 출장을 나갔다가 정오 조금 전에 돌아왔다. 영친왕과 이방자가 점심 식사를 위해 식탁에 앉아 막 젓가락을 들자마자 대지가 부르르 떨리면서 집이 금방 부서질 듯 흔들거렸다. 두 사람은 순간적으로 일어나 밖으로 뛰어나갔는데 뗏목이라도 탄 듯이 땅이 흔들거려 발을 디딜 때마다 몸을 제대로 가눌 수가 없었으며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꼭 잡고 끌어당기며 정원의 큰 나무를 향해 달려갔다. 당시 일본 학교에서는 지진에 대한 특별 교육을 하고 있었는데 특별 교육이라도 별 방법은 없지만 지진 때는 큰 도움이 되는 내용이었으며 집에서 빠져나가 최대한 집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큰 나무 밑으로 피하라는 것 등이었다.
영친왕과 이방자는 정원의 큰 오동나무 밑으로 가려고 했으나 당시 지진이 너무 커서 땅이 솟아오르고 상하좌우로 함께 요동했다. 두 사람은 수없이 넘어졌으며 너무 급하게 뛰어나오느라 신발도 신지 못한 채 겨우 오동나무 밑으로 갈 수 있었다. 일본의 집은 지진에 대비해서 지붕 서까래를 깍지 끼듯이 만들어놓기 때문에 잘 부서지지 않았지만 당시 지진이 심해서 집에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사방에서 화재가 일어나 불길과 시커먼 연기가 도쿄 시내를 뒤덮고 있었다. 지진이 잠깐 잔잔한 틈을 타서 영친왕과 이방자는 조용히 집에 들어가 필수품을 꾸렸다.
불길은 시내를 질풍같이 휩쓸어 바로 두 사람의 집이 있는 언덕 아래까지 다가왔다. 한밤중이었지만 이방자의 친정 아오야마(靑山)의 나시모토노미야 저택으로 피신했으며 지진이 완전히 가라앉지 않았으므로 공포 속에 온 가족이 밤을 새웠다.
다음 날부터 화재 진압이 시작되었는데 도쿄의 태반이 잿더미로 화했고 10명 중 1명은 집을 잃었으며 수만 명이 불에 타 죽었다. 간토 대지진이 일어난 시간이 마침 점심 시간이라서 대부분의 가정과 식당에서 요리를 하느라 불을 사용하고 있었으며 당시 일본에는 목조 가옥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화재가 미친 듯이 번진 것이다. 식량 공급은 중단되었고 민심은 극도로 흉흉해져 도둑이 날뛰자 일본은 계엄령을 선포했다. 물론 영친왕과 이방자는 왕족이었고 무슨 일이 생기면 국제적 문제가 되기 때문에 보호를 잘 받아서 별 탈이 없었지만 이들에게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는데, 그건 한국인들이 곳곳에서 학살당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이러한 유언비어는 어지럽게 유포되어 삽시간에 들불처럼 타오르고 확대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집과 가족을 잃어 미친 일본인들은 조선인을 죽이려고 떼를 지어 몰려다녔다. 조선인 유학생과 노동자들이 수천 명이나 일본인에 의해 비참하게 학살당했다. 일본인들은 조선인을 불령단으로 몰아서 불령단 수색대라는 것을 만들고 자신들을 지킨다는 명분하에 자경단을 만들어 거리를 휩쓸며 조선인을 사냥하러 다녔는데 이들을 말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며 오히려 일본 정부는 조선인 학살을 묵인하고 부추겼다. 영친왕도 조선인이기 때문에 혹시 모를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 두 사람은 집을 버리고 궁내성 제 2대기실 앞에 쳐진 텐트 속에서 1주일 동안 피신해야 했다. 영친왕은 슬픔과 분노로 목소리를 떨고 있었으며 1주일 내내 영친왕은 눈물을 글썽이며 괴로워했다.
이방자는 그런 영친왕의 얼굴을 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는데, 이방자 역시 일본인이므로 이 모든 일이 그녀 자신의 잘못인 것만 같아서 죄책감을 느꼈다. 이방자는 자신과 남편이 국가나 피를 초월한 애정과 이해로 굳게 맺어져 있다고 생각했으나 이번 사건으로 그 생각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절실히 느끼지 않을 수 없었으며 이미 일본과 조선 사이에는 도저히 메울 수 없는 깊은 도랑이 가로놓여 있었다. 이진 왕자를 조선으로 데려가느냐 마느냐 고민한 것처럼 이방자는 이런 일을 결혼 생활 중 여러 번 겪어야 했으나 일본은 친정, 조선은 시가였다. 공개적으로 어느 누구의 편을 들 수도 비난할 수도 없는 처지였는데 이방자는 어디 하소연할 수도 없이 자신의 운명을 슬퍼하며 혼자서 숨막히게 고통을 참아내야 했다. 참혹한 사건을 보며 이방자는 영친왕에게 너무 부끄럽고 미안했는데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조선인들과 같이 무자비한 일본에 대해 적개심을 품는 것과 남편과의 사이가 이 일로 멀어지지 않기를 기원하는 것이었다.
나중에야 밝혀진 사실이지만 당시 일본 내각의 미즈노 렌타로(水野錬太郞) 내무대신과 계엄사령관 후쿠다 육군 대장 등은 이 때 "지진으로 집을 태우고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공산주의자나 무정부주의자들에게 선동되어 혁명을 일으키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에 눈이 뒤집힌 민중의 심리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조선인들을 일종의 공공의 적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이 시기에 조선인들뿐만 아니라 이런 사회주의자들도 함께 학살당하곤 했다. 혁명을 두려워한 잔인한 비상 수단으로 인해 조선인들이 억울하게 죽어간 것을 들은 이방자는 일본인들의 잔혹함을 피부로 느낀다. 죄없는 사람들을 희생시킨 일본 정치에 대해 그녀는 애매한 입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일 간에 있었던 이러한 일들을 직접 체험하면서 일본인들이 너무나 많은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을 알았고 그것은 영원히 갚지 못할 빚이라고 생각했다.
1주일이 지나자 일본 정부에서도 조선인 학살을 중지시켰는데 희생자가 너무 많이 나왔고 영국을 비롯한 외국의 반응이 의외로 강했으며, 가장 큰 이유는 이미 목적을 달성했기 때문이다. 지진으로 인해 집이 무너지고 뒤처리가 힘들어서 바쁜 날을 보냈으나 이방자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는데 모든 것이 싫고 무의미하고 절망되고 무기력했다. 불면증에 시달리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겨우 잠들어도 꿈 속을 헤매다가 갑자기 깨어나고는 했다. 지진이 일어난지 20여 일이 지나고 정원을 빨갛게 수놓았던 칸나도 모두 시들어갔다. 정원에서 진 꽃을 보면서 그녀는 자신의 인생 역시 서글프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왜 사는지, 무엇을 위해 자신이 있는지 허무할 뿐이었다.

17. 가엾은 덕혜옹주

덕혜옹주가 히노데소학교 5학년 때인 1925년 정월, 이왕직 차관 고쿠부 쇼타로(國分象太郞)는 순종황제에게 덕혜옹주의 일본행이 결정되었음을 통보해왔다.
순종황제는 "영친왕만 볼모로 데려다가 도쿄에 있게 했으면 됐지, 왜 어린 옹주까지 데려가야 하느냐"고 반대했지만, 실권 없는 순종황제의 말이 통할 리가 없었다. 당시 이미 일제는 조선의 궁궐인 창경궁을 개방하여 동물원을 만들었고, 광화문 자리에는 경복궁 근정전의 시야를 가로막으며 조선 총독부의 석조 건물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순종황제는 이제 일반 시민에게 동물원으로 개방된 고궁이나 돌보는 주인에 불과했다.
덕혜옹주는 3월 25일 서울을 출발하여, 30일 오전 8시 반 도쿄역에 도착했다. 집의 직원들과 함께 옹주를 마중했을 때, 이방자는 깜짝 놀랐다. 순진하게 생글생글 웃던 옹주는 피로에 지친 듯 흐려져 있고, 얼굴도 무척 수척해져 있었다. 이방자가 "긴 여행에 무척 피로하시죠?"라고 말을 걸어도, 옹주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미소조차 짓지 않았다. 덕혜옹주와 덕혜옹주의 생모 복녕당 귀인 양씨의 슬픔을, 자식을 사랑하고 잃어 본 어머니의 마음으로서 이방자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덕혜옹주는 일본 황족과 화족의 딸들이 다니는 학교인 여자가쿠슈인에 편입학했다.
이방자는 그녀 자신이 올케니까 덕혜옹주를 어머니와 같은 애정으로 위로하고 충격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줘야겠다고 생각하고, 며칠 동안 옹주와 나란히 누워서 얘기를 하고 옹주가 잠드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래도 올케라고 믿고 안심하고 잠드는 덕혜옹주의 순진한 얼굴을 보고, 어린 옹주가 가여워서 눈물이 나곤 했다.
영친왕은 비록 어머니는 다르지만 덕혜옹주는 일본에서 유일한 혈육이니 이방자에게 옹주를 잘 부탁한다고 말했다. 이방자도 흔쾌히 그러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덕혜옹주를 데리고 잘 보살피겠다는 희망도 무참히 거절당하고 말았다. 영친왕과 이방자 부부는 어린 덕혜옹주를 데리고 살며 직접 돌보길 원했지만, 일본은 그마저도 못하게 한 것이다. 덕혜옹주는 가쿠슈인 기숙사로 가게 되었다.
이후 영친왕은 꿍하니 말도 잘 하지 않고 조선 왕실이 일본 왕실에 사사건건 지시를 받는 것에 대해서도 신경질을 내곤 했다. 어느 날 영친왕은 분통이 터졌는지 여느 때와 달리 큰소리로 한탄했다.
영친왕의 그 말에 이방자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영친왕 역시 무슨 해결책을 듣고자 한 말은 아니었다. 그저 한탄을 하며 천장을 바라볼 뿐이었다.
1925년 12월 6일, 히로히토 황태자와 나가코 황태자비의 첫 아이인 데루노미야 시게코 내친왕(히가시쿠니 시게코)이 탄생했다. 라디오에서는 시게코 공주의 탄생을 알리는 요란한 종소리가 흘러 나왔다. 도쿄 시내는 어둠 속에서도 축하 행렬이 줄을 이었다. 시게코 공주의 출생을 기리는 축하의 노래가 지어졌고, 이 노래는 라디오의 전파를 타고 거리에 퍼져 나갔다. 시민들이 들고 다니는 축하 깃발이 거리를 메웠고, 일본은 연일 축하 분위기로 떠들썩했다.
그러나 이방자는 "누구는 아기를 낳아 행복하겠구나" 하고 부럽고 우울할 뿐이었다. 허전함을 달래려 불경을 베껴 쓰고, 영화를 보고, 연극을 보고, 그림이나 자수를 해봐도 아무 소용 없이, 그녀에게는 한 해가 헛되이 지나갔다.

18. 순종의 죽음과 유럽 여행

1925년 가을쯤 두 사람은 궁성으로부터 내년 봄 유럽 여행을 제안받았다. 이방자도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고 특히 영친왕은 새장 속의 새같이 답답한 일본 볼모 생활을 탈출해서 마음대로 보고 듣고 숨쉴 곳을 찾을 수 있어서 무척 기뻐했다. 1926년 3월 11일로 여행이 예정되었고 다이쇼 덴노의 칙허와 하사금을 받았으며 두 사람은 큰 기대에 부풀어 있었으나, 운명의 신은 그들에게서 자비를 빼앗듯이 갑자기 순종의 병이 악화되었다.
1926년 3월 1일 두 사람은 급하게 경성으로 가야만 했는데, 순종이 중환이기는 했지만 아주 위독한 수준은 아니어서 순종에게 유럽 여행의 인사를 드리고 도쿄에 돌아갔다. 예정대로 1926년 3월 11일에 여행을 가려 했지만 순종이 "결정적으로 아주 위독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상당한 중환 수준의 병"이 계속되다가 다시 병환이 악화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1926년 4월 13일 경성으로 서둘러 갔다. 한편 1926년 3월에 두 사람이 창덕궁에 갔을 때 이방자는 "간호원과 이름있는 양의와 양약을 둘 것"이라고 지시했으나, 하나도 지켜지지 않고 있었다. '오랜 관습의 개선이란 게 이렇게 어려운 시도였는가'라고 그녀는 아연하고 답답했다. 순종은 병중이었지만 두 사람을 기쁘게 맞이했으며 영친왕은 라디오, 이방자는 흰 비단 속에 새털을 넣은 쿠션을 순종에게 선물했는데, 순종은 라디오를 신기해하며 만지고 쿠션이 무척 편하다고 좋아했다. 이방자는 순종에게 뭔가를 더 해드리고 싶어도 조선 왕실의 관습과 규칙이 있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걱정 속에 하루하루가 흘러가던 날 1926년 4월 25일 새벽 1시, 창덕궁 대조전에서 자고 있던 순종은 호흡 곤란에 빠졌다. 영친왕과 이방자는 황급히 대조전으로 달려갔지만 이미 순종은 사망했는데, 순종은 재위 19년만에 한 맺힌 숨을 거둔 것이다. 영친왕은 "형님께서 너무 불쌍하다"고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이방자 역시 일본에 의해 어머니가 살해당한 것을 지켜보고 권력을 빼앗기며 나라가 망하고 독극물이 든 홍차를 마셔 앞니 여러 개가 빠지고 평생 병약한 몸으로 살아야 했고 그 홍차가 원인이었는지 평생 아이를 가질 수 없었고, 어린 이복동생을 왕세자로 책봉했지만 동생들을 강제로 일본에 인질로 보내야 했던 순종이 왕으로서가 아닌 순종의 개인 인생이 너무 가엾어서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순종보다 더 외로운 인생을 보내야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순정효황후 윤씨였다. 순정효황후는 순종의 죽음 후에 바로 서쪽 방에 들어가 머리를 풀어헤치고 크게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그 곡소리는 간장을 끊는듯 궁 내에 크게 울려펴졌고 이방자는 그런 순정효황후가 너무 가여워서 이방자 역시 그 방에 들어가 통곡을 했다. 옛 관습에 따라 순정효황후는 앞으로 수십 일 동안 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세수나 빗질도 하지 못한 채 미음만 먹고 죽은 남편만을 애도해야 했다.
13세의 어린 나이에 20살이나 연상인 남편과 결혼해서 약 20년 동안 구중 궁궐에 갇혀서 1년에 1~2번만 비원을 산책한 게 유일한 외출이었고 순종은 자식을 가질 수 없는 몸이었으니 약 20년 동안 얼마나 적적한 세월이었는지 이방자는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는 33세의 나이에 홀로 수십 년 세월 동안 평생 구중 궁궐에 갇혀 사는 슬프고 외로운 인생만이 남아 있었다. 만약 영친왕이 조선의 황제가 된다면 이방자 역시 그런 삶을 살아야 된다고 생각하니 숨이 턱 막히는 듯했고 같은 여인으로서 순정효황후가 너무 불쌍해서 눈물만 흘렸다. 영친왕과 이방자는 순종의 죽음 이후 약 20일간 머물며 순정효황후를 위로한 뒤 도쿄로 돌아왔는데 그동안 미뤄졌던 유럽 여행을 하기 위해서였다. 대부분 황족들이 그러하듯 스스로 돈을 지불해본 적이 없던 이방자는 약 1년간의 유럽 여행을 위해 거스름돈을 받는 연습을 했다.

19. 다이쇼 덴노의 죽음과 쇼와 덴노의 즉위

1927년의 신년 새해는 다이쇼 덴노의 국장으로 인해 축제없이 조용히 보냈다. 2월 7일 아오야마에서 장의식장이 거행되었다. 장례식 전날은 무척 추워서 밤을 새며 장의식장을 올리는 사람들은 몸의 감각이 없을 정도였으나, 털옷을 입을 수가 없어서 고통스럽게 밤을 보냈다. 다이쇼 덴노는 어려서부터 병약했으나 15년의 재위 기간을 무사히 보낼 수 있었던 것은 선왕인 메이지 덴노의 후광과 그 측근들의 도움 덕분이었는데, 선대가 이룩한 것을 물거품으로 만들지 성공적으로 이끌지는 새 천황인 쇼와 덴노에게 달려있었다. 이방자는 쇼와 덴노가 자신과 동갑이며, 그의 아내 나가코 황후가 자신의 사촌 여동생이기에, 덴노 내외의 앞날을 걱정했다.

20. 차남 이구의 탄생

이진 왕자가 죽은 지 정확히 10년이 되던 해, 1931년 12월 29일, 차남 이구가 태어났다. 차남이긴 하지만 사실상 외아들로서 이왕 이은의 이왕세자가 되었다.

21. 광복 이후

1945년 한반도는 광복이 되고 이방자는 영친왕을 따라 호적상 재일 한국인이 된다.[18] 1947년엔 일본에서 신적강하가 이어지면서 평민이 되어 친정 나시모토 일가의 도움을 토대로 어렵게 살아갔다. GHQ가 신적 강하와 함께 기존 황족 / 화족 / 왕공족이 누리던 면세 특권을 폐지하여, 보유 재산의 70%를 넘는 엄청난 재산세를 내야 했다. 한국에 있는 재산은 동결되어 이후 국가로 귀속된다.
1948년 미군정이 끝나고 남한에 한국 정부가 수립되자 영친왕은 귀국과 국적 취득을 타진했는데, 이승만 정부는 그들이 일본 황족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일본으로 귀화한 것이라 주장하여 한국 국적을 인정하지 않았다. 또한 이승만 정부는 이들의 일본 아카사카 저택을 "한국 재산이니 주일 대표부 공관으로 내놓으라"며 압박하기도 했다. 그래서 부부는 일종의 무국적 상태로 살아갔는데, 와중에 경제적 어려움으로 아카사카에 있던 대저택은 일본 참의원 의장 공관으로 대여했고, 별장도 매각하였다. 1950년 일본을 방문한 이승만을 만나 국적 취득과 귀국을 논의했을 때도 여전히 냉담한 반응이었으며, 같은 해 차남 이구가 미국 MIT로 유학을 떠나기 위해 여권 발급을 요청했지만, 이승만은 그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 일본 정부가 발행한 임시 여권으로 미국을 오갔다고. 이후로도 아들 이구의 졸업식과 결혼식 등으로 미국행을 위해 지속적으로 여권 발급을 요구했으나, 끝내 이승만 정권은 한국 국적을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남편 영친왕과 함께 1960년에 일본으로 귀화(이방자 입장에서는 일본 국적 회복)하여 국적을 얻었다.
그런 와중에 경제적 어려움은 더해갔는데, 아카사카의 대저택은 결국 세이부 그룹의 창업자인 츠츠미 야스지로(堤康次郎)에게 팔려 1955년 그 자리에 그랜드 프린스 호텔이 들어서게 된다. 1954년에 대한민국에서 〈구황실재산처리법〉이 제정되어 대한제국 황실의 재산을 모두 국유화하는 대신 황족의 직계와 배우자에게 매월 생활비가 지급되도록 하였지만, 영친왕 이은은 거기서도 제외되었다. 이에 쇼와 덴노(히로히토)가 특별히 어용금 10만 엔을 매달 주었다고 한다.
그러다 1960년대 들어 이승만 정부가 4.19 혁명으로 물러나고 장면 내각을 거쳐 박정희가 5.16 군사정변을 일으켰다. 그제서야 영친왕과 덕혜옹주의 상황을 살피게 된 박정희 정부는 두 사람의 치료비를 지원해주기로 결정한다.그리고 1963년에 이르러 드디어 이방자 여사는 국적회복을 통해 한국 국적을 얻고 남편 영친왕과 함께 한국에서 살게 된다. 한국에서는 창덕궁 낙선재에 기거하면서 육영수 여사의 지원을 등에 업고 수원시 자혜학교 안산시 명혜학교 같은 각종 장애인 학교를 세우는 등 많은 사회봉사활동을 펼쳤다.당시 뉴스
노후에는 자개공작(칠보) 등을 배우고 스스로 만든 장신구 등을 팔며, 노동의 즐거움과 스스로 삶을 영위할 돈을 번다는 것에 대하여 큰 기쁨을 느꼈다고 한다.
1965년 3월, 쇼와 덴노를 예방한 이동원 당시 외무부장관은 그와 40여분이나 대화를 나누었는데, 대화를 마친 쇼와 덴노가 이 장관을 배웅하면서 '리 마사코'에게 안부 전해달라는 부탁을 했다고 한다.

22. 사망

시누이 덕혜옹주가 세상을 떠난 지 9일 후, 1989년 4월 30일, 향년 87세를 일기로 창덕궁 낙선재에서 정맥류로 타계했다. 시기가 묘한데, 주변인들은 행여나 시누이의 죽음을 알고 병세가 악화되지는 않을까 염려해 이방자 여사에게 덕혜옹주의 사망 소식을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
사후 이 여사는 남편 영친왕이 안장된 영원(英園)에 합장되었고, 현덕정목온정자행비(顯德貞穆溫靖慈行妃)라는 사시(私諡)를 받아 남편과 함께 종묘 영녕전에 배향되었다. 어디까지나 우연이라고는 하지만, 묘하게도 이때까지 영녕전의 제실 공간은 딱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가 배향될 공간만 비어 있었다라고 한다. 사후 의민황태자비장의위원회에서 '의민황태자비장의록'을 발간했는데, 나중에 회은황세손 이구의 장례식 때 참고되었다. 영원의 비각(碑閣)에는 '대한(大韓)의민황태자영원(懿愍皇太子英園)/의민황태자비부좌(懿愍皇太子妃附左)'라는 묘표가 새겨졌다.
장례식 때는 쇼와 덴노의 막내 동생인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과 미카사노미야 유리코 비 부부가 비공식 방문을 했다. 고준 황후의 사촌언니이자 방계 황족이었던 마사코에 대한 예우로 보인다.
사망하기 전 투병 생활을 할 때는 이런 일화가 있었다. 한국 주재 일본인 기업가들의 부인들이 병문안을 왔는데, 그녀들이 이방자 여사에게 "어떤 요리를 해드리면 좋을까요?" 라고 물었다. 이방자 여사는 "어렸을 때 먹었던 이런이런 요리들이 참 맛있었지요." 라고 답했다. 그런데 그 요리들은 일본에서 난다 긴다 하는 부유층 사모님이었던 그 부인들에게조차 생소한 요리여서, 그 부인들이 "역시 황족 출신은 다르다!" 며 감탄했다고 한다. 이방자 여사의 생전 모습을 알고 싶다면 당시 뉴스데스크 보도를 참고하자. 참고로 본 뉴스의 앵커는 보면 바로 알아챌 수 있는 당시 MBC 기자였던 손석희 JTBC 사장이었다.

 
장례 현장 영상

이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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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사진
11 Yi bangja Images: PICRYL - Public Domain Media Search Engine Public  Domain Se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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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친왕·이방자 여사 결혼 100주년… “한·일 우호 유지 전승해야” [특파원+] | 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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