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리국(索離國), 또한 북이색리국(北夷索離國)으로 알려졌고, 고대동북소국(古代東北小國)으로 예맥인의 북부지방 색리족이 건설하였다.
고대 부여조선신화중(古代夫余祖先神話中) 한명의 전기인물이 있어, 그는 옛 부여지역에서 왕으로 칭했던 해모수(解慕漱)였다. 현재 존재하는 해모수의 가장 오래된 전기는 고려문인 김부식이 편찬한 《 삼국사기 고구려편: 三國史記·高句驪紀》에 아래에 한 줄 글에 있다:
일찌기 부여왕 해부루(解夫婁)는 아들이 없어 후사를 얻기 위하여 산천에 제사를 올렸더니, 아란불상(阿蘭弗相)이 말하기를, “해가 하늘에서 내려오며 내게 말하기를, “장차 내 자손이 여기에 나라를 세울터이니, 너는 동해가로 피하고, 그땅은 이엽원(邇葉原)이라 부르고, 토양이 기름지고 오곡이 잘 자라서, 도읍을 정하라. 아란불(阿蘭弗)은 왕에게 권하여 그곳으로 도읍을 옮기고, 동부여(東扶余)라 칭하였다. 옛 도읍에 사람들이 있어 어디서 왔는지 몰라서 자칭 천제의 아들 해모수가 이리로 도읍을 정하였다고 하였다.
조선정사[朝鮮正史]에서 여러왕조에서 부여왕해모수[夫余王解慕漱]를 실었고, 그후 고구려시조로서는 주몽 또는 (朱蒙; 又稱東明)의 고사와 전설을 다루었다. 여기에서 여러 전기속에 해모수를 천제(天帝)라고도 칭하였다.
그후 하구중(瑕丘仲)이 나타나서, 백성을 지도하였다. 혹시 부여왕의 역사(驛使)가 아닐까 생각한다.
동부여는 서천한 부여의 동편부여로서 전기의 왕성중심의 부여이다. 동부여의 이름은 414년에 건립되었다고 《 호태왕비; 好太王碑》에 있으며, 후에 12와 13세기 즉 송, 원(宋、元)시기에 평찬한 《三國史記》和《三國遺事》에 나왔다. 단지 동부여의 이름은 중국역사에 기재되지 않았다.
동부여의 문제에 관하여, 중국과 외국사학계는 아직 논쟁과 진일보의 토론의 문제이다. 필자는 동부여 이름이 부여의 서천(西遷)과 관련이 있다고 믿는다. 진영화2년(晉永和二年; 正月 初AD 346) 정월 초에 부여는 녹산(鹿山)에 있었고, 백제의 침략을 받아서 부락이 흩어졌고, 서쪽으로 연(燕)으로 접근하였으나, 설비가 없었다.
문헌기록에 의하면, 당시 부여, 고구려, 백제의 방위와 국내외정황을 보건대, 이때 백제가 침략했음는 착오였다. 그래서 고구려의 침략을 잘못 기재되었다고 본다. 342년 전후에 고구려는 연의 침략을 받았던 때였다. 전연모용(前燕慕容)이 대거로 고구려를 진공하였고, 환도는 훼손되고 궁실은 타버렸다. 400년에 후연이 요동을 진공하여서 신성과 남소이성(新城,南蘇二城)을 뻬앗었고, 700여리를 열었고, 5000여가족을 데리고 왔다.
AD346 전후의 고구려는 이미 무력해졌고, 부여를 공격할 여유가 없었다. 동시에 AD346 이전에 고구려가 부여를 공격한 기록이 없었다. 보고되기를 부여가 서쪽으로 이동하여 연에 가까이 한 원인은 실제로 전연(前燕)의 침범으로 일어났다. 부여가 서쪽으로 옮긴 땅은 부여후기의 왕성(夫余後期的王城)이었고, 또한 후에 올 발해의 부여부(扶余府)와 요대황룡부(遼代黃龍府)의 땅, 현재 농안(農安)이었다.
부여가 현재 농안으로 천도한 후부터 AD494까지 오로지 그때 물길(勿吉)의 쫓김을 받아 멸망하였다. AD405, 고구려는 전연 후연과 요동과 현토(遼東,玄菟) 즉 양군(兩郡)을 쟁탈하여 승리를 얻은 후 요동과 현토 수십성(數十城)아 되었고, 모두 관사를 설치하여 서로 통치하게 되었다. 고구려의 요동점령 이후 부여의 서천후를 틈타서, 부락은 흐터지고, 설비할 기회가 없어진지 호태왕(好太王) 20년(AD410)이 되었다.
《好太王碑云: 호태왕비운하되》”고구려시조추모는 북부여로부터 나왔다”고 하였고, 동부여롭부터 나왔다고 하지 않았으니, 추모가 왕이 되었을 때 부여 즉 북부여는 하나가 둘로 나뉘지 않았고, 동부여의 이름도 없었고, 그래서 호태왕비에 추모는 북부여로부터 나왔다고 하였다.
한편 동부여는 일찍이 추모왕(鄒牟王)에 예속된 백성이었기에 중간에 반항하고 조공을 하지않은 변명을 하였다. 동부여를 대거 공격하고 점령하였으니, 소위 반항하며 조공하지 않음이었고, 각종 다른 해석이 있었다. 필자는 AD345년을 가리켜 참조한다. 부여는 서천후(西遷後) 모용연(慕容燕)에 의탁하였다. 고구려와 더불어 중단되었다가 왕래하였다. 60여년간 오래동안 (AD346-410) 호태왕비《好太王碑》속에 동부여를 공격점령한 설명 즉 원북부여의 동부(原北夫余的東部)가 또한 부여의 동쪽부여로 서천하였으니, 법적 근거를 한번 보면, 신당서 유귀전《新唐書·流鬼傳》애서 말하기를 : “달말루는 스스로 말하기를 북부여의 후예라고 했다.
고구려가 그 나라(부여)를 멸하고, 사람들을 보내어 나하(那河)를 건너 살게 하였는데 누구는 말하기를, 그건 누하(漏河)로서 동북으로 흘러 흑수(黑水)로 들어갔다. 그 나라를 멸한 고려로부터, 이것은 고구려를 지적함으로 고구려 호태왕20년(好太王二十年; AD410)에 동부여를 공점(攻占)한 문제를 확증함이다. 일부의 동부여인은 나하(혹은 누하이며 현재 제일송화강:第一松花江)를 건너 거주하였고, 달말루(達末婁) 즉 두막루국(豆莫婁國)을 건립하였다. 위서 두막루국전 (魏書·豆莫婁國傳)에 이르되, 두막루국은 구북부여(舊北扶余)이다.
신당서 유귀전《新唐書·流鬼傳》에 이르되, “달말루(達末婁)는 스스로 북부여의 후예”라고 하였다. 이는 동부여가 북부여임을 가히 알수 있으니, 동부여는 다른 이름이며, 북부여라고 스스로 칭한다. 소위 구북부여는 북부여로서 부여가 이미 멸망하였기에 그래서 구북부여 혹은 구부여라고 이른다. 돌이켜 호태왕이 동부여를 공점한 이후, 이 지역에 진수관원(鎮守官員)을 파견하였으니, 바로 북부여의 수사(守事)이다. 호태왕은 모두루(牟頭婁)를 북부여수사로 임명하였다. 이는 동부여가 북부여의 근원이란 근거의 하나이다.
호태왕비속에서 쓰기를, 군이 여성(余城)에 이르니, 전국이 공황에 빠졌다. 여성은 북부여왕성(北扶余王城)이었고, 부여초에 녹산에 살았던 부여전기왕성(夫余前期王城)이었다. 이러한 관찰의 근거는 410년 고구려 호태왕이 동부여성을 공점한 후 고구려는 또한 북부변방 방어지역으로 상속한 부여성이었다. 668년에 이르러 당은 이적겁(李績劫)등을 ,파견하여 부여성을 빼앗었다. 고구려의 부여성채아래 호삼성주(胡三省注)에 부여국의 고허(故墟: 옛 폐허)이니, 부여전기왕성이 현재길림시용담산(吉林市龍潭山)에 있다고 추정하여, 용담산거참(龍潭山車站: 역마을)이 동단신일대(東團山一帶)의 근거로서 그속에 서단산문화유적(西團山文化的遺跡)이다. 유적분포는 가장 밀집하여 가장 풍부한지구다. 동시에 이 속에 돌이켜 한대부여와 동진이후의 고구려시대유적과 유물(東晉以後高句麗時代的遺跡,遺物)이 있다. 현재 길림시용담산, 용담산거참, 동단산일대는 장성이북이고 한대문물의 최풍부지구(最豊富地區)이다. 서단산문화, 한대문화분포적밀집과 풍부한 정황을 와서 보면, 이속에 당시 고대경제적 중심이다. 현재 길림시용담산, 동단산남부적 모아산일대는 이미 한대부터 많은부여인목곽묘(木椁墓)를 이미 발굴하였다.
부여인의 사후 시체의 국가남산위에, 곽(椁)이 있고 관(棺)이 없는 기록이 있다. 부여의 전기왕성을 추정하기는 현재 길림시ㅡ 용담산, 용담산거참, 동단산일대에 근거가 되고, 인하여 나의 저서에서 네편을 저술하였다.
부여는 346년에 서쪽으로 이주하여 연에 가까워진 후, 둘로 나뉘어서 1. 부여전기왕성이 중심이 된 부여 즉 동부여; 2. 서로 이주하여 현재 농안(農安)으로 부여후기왕성이 중심이 된 부여였다. 410년 고구려 호태왕이 동부여를 공점(攻占: 공격하고 점령함)하였다. 494년 물길(勿吉)이 서쪽으로 옮긴 현재 농안일대의 부여를 공점하였다. 호태왕비《好太王碑》아르되; 고구려시조 추모(鄒牟)가 북부여로부터 나왔다고 하며 동부여로부터 나왔다는 말이 없었고, 추모왕때 부여 즉 북부여는 둘로 나뉘었으며, 동부여란 말은 없었고, 호태왕비로써 이르되: 추모는 북부여로부터 나왔다.
호태왕비에서 또 이르되; 호태왕20년(410년)에 동부여를 공점하였으니, 부여나 북부여를 공점했다는 말은 없었고, 호태왕당시 공점한 건 부여의 전부가 아니고 일부분이었으니 동부여였겠으며, 아울러 서쪽으로 옮긴 부여를 포괗하지 않았음을 알 수있다. 호태왕비에서 이르되; 추모왕은 북부여로부터 나왔고, 410년 동부여를 공점하였다. 이 시비는 확실하고 신빙성이 있고 역사적사실과 부합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권1에서 모두 이르되; 고구려시족동명(즉추모, 주몽)이 동부여에서 나왔다. 단지 삼국유사권1에서 북부여조를 이른다: “동명제는 북부여를 계승하여 흥하였고, 서울을 졸본천에 세우고, 졸본부여를 만들었다. 즉 고구려의 시조다. 이 모두 동부여를 북부여로 간주하는 문제이니, 둘중 한개의 부여다. 단 동부여로부터 출현한 연대를 설명함에 돌이켜 호태왕비에시 이르기를 추모가 북부여로부터 나왔다는 기록이 역사사실과 부햡되어 더욱 신빙성이 있다.
이덕무의 정장관전서 54권 앙엽기[李德懋《青莊館全書》卷五四《盎葉記》]에서 직접 단언하였으니, 해부루가 가섭언덕으로 옮겼으며, 국상 아란불의 꿈에 맡기었고, 가섭과 아란은 모두 불명이며, 당시 불서는 아직 중국에 들어오지 않았고, 아직 혼란이 된 자들은 단군이 환웅이라 함은 깊이 연구할 수없다. 단군고기《桓檀古記》에 기재하기를, 해모수는 고조선왕실의 출신이고, 23세에 단군조선의 장군이 되었다. 단군조선말기에 해모수는 북부여국을 청건하였다.
주몽은 옥저왕 고모수의 아들로 고진은 해모수의 둘째 아들 로서 고모수의 조부이다. 그는 다물군(多勿軍)을 조직하여 한조에 저항하였다. 단군고기《桓檀古記》에서 알려진 바 BC238에 단군조선군주고열가(檀君朝鮮君主古列加)는 왕위를 버리고 입산수도하여 신선이 되었다. 종실대해모수(宗室大解慕漱)는 옛서울 백악산에 의거하여 천왕랑(天王郞)아라 부르고 북부여를 건립하였다. 삼국사기에 설명하기를, 해모수자신을 천제의 아들이라 하고 그는 유화의 아들 주몽(朱蒙)에개 고구려창건자를 만들었다. 삼국유사에서 해설하기를, 해모수는 천제의 아들이고 북부여의 왕이며 해부루와 주몽의 아버지이다.
【韓國】【朝鮮】朝鮮半島的政權認為扶余人是今天韓國人/朝鮮人的先民之一。
한국과 조선: 조선반도의 정권은 부여인이 오늘날 한국인/조선인의 선조(先祖)의 하나라고 인식한다.
【美国】一位人類學家賈德·戴蒙說,扶余就是布裡亞特人與大和族祖先,公元前四、五世紀從貝加爾湖移居東北。但是未有任何考古學的證據證明其觀點。 미국: 인류학가 Diamond과 Judd는 말하기를, 부여는 포리아특인과 대화족[布裡亞特人與大和族:Buryats and Yamato]의 선조로서 BC 4, 5세기에 Lake Baikal로부터 동북으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이 의견을 지지할 고고학적근거가 없다.
【中國】扶余一名最早出現在逸周書,名鳧庾(Fuyu),是九夷之一。
중국: 부여는 일주서(逸周書)에 가장 일찍이 출현한 이름이 부유(鳧庾)로서 동쪽의 아홉 오랑캐의 하나다.
송눈평원(松嫩平原)위에 일종의 나무가 있어 나무위에 일종의 소금이 있어 식용이 가능하여서, 고대에 어떤 월인(越人)이 송눈평원에 이르렀고, 다른 사람들은 이런 소금을 식용으로 먹는데 사용한 사람들을 부여라고 불렀다. 이것이 부여란 이름의 다른 설명이다.
조선반도의 정권은 오늘 한국인/조선인의 선대의 사람이라고 인정한다. 부여인은 현재 중국동북에 취거하였고, 그곳에 곡물이 풍성하여 식량이 충분하였다. 학자들이 있어 부여의 원류(源流)가 일본인이나 동호를 이루었다는 설은 근거가 없다. 유고조, 요동옥(劉高潮、姚東玉)의 《일본인이 흉노족의 기원-부여왕족이 동호에 속하다《:日種”說與匈奴之族源──兼論夫余王族屬東胡》함은 부여인이 외출시 흰옷을 입고 국외로 나갈 때 비단과 수옷을 입었음은 은왕조로부터 왔다는 설이 역사기록과 부합지 않는다. 오로지 은 과상(殷商)때 습속은 아니고, 일본과 신라에서 그렇게 하였다. 이덕산(李德山)이 말했듯이 장기간 국내외 연구자들이 부여의 기원등에 관한 문제를 광범위하게 검토하여서, 큰 성과를 얻었으나, 여러가지 이유로 목전에 얻은 결론을 학계의 공동인식으로 받아드리지 못하였다.
조선 후기의 북학파 실학자인 이덕무(李德懋)는 《청장관전서: 青莊館全書》Vol 54 卷五四《앙엽기: 盎葉記》에서
직접 단언하기를: 해부루가 가섭원으로 이동하였고, 국상 아란불 꿈에 위탁하였다고 하였다. 가섭 , 아란은 모두 불명이지만, 이때 불서가 중국에 들어오지 않았고, 혼돈된 사람들은 또한 단군을 환웅에 위탁함과 같았고, 또한 아직 깊은 연구가 부족하다.
환단고기《桓檀古記》에 기재하기를 해모수는 조선왕실출신이고, 23세에 단군조선에 장군이 되었고, 단군조선말기에 해모수는 북부여국을 창건하였다.
주몽은 옥저왕 고선수(沃沮王高慕漱)의 아들이고, 해모수의 둘째 아들고진(高辰)은 고모수의 조부다. 그는 사실상 다물군(多勿軍)을 조직하여 한조에 저항하였다. 환단고기《桓檀古記》에 알기를, BC238년에 단군조선군주고열가(檀君朝鮮君主古列加)가 왕위를 버리고 입산수도하여 신선이 되었다. 종실대해모수(宗室大解慕漱)는 고도백악산(故都白岳山)에 웅거하여 천왕랑(天王郞)이라 칭하고 북부여를 건립하였다.
《삼국사기: 三國史記》에서 해모수를 천제지자(“天帝”之子)라 칭하고, 그는 유화(柳花)의 아들 주몽과 더불어 고구려의 창건자이다. 《삼국유사: 三國遺事》에서 이르기를, 해모수는 천제의 아들이고 북부여의 왕이고, 해부루와 주몽의 아버지다.
爭議事件(쟁의사건: Controversial events)
1990년대 후기 한국학자가 부여가 조선민족기원의 하나라라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견강부회[牽強附會; Far-fetched; 이치(理致)에 맞지 않는 말을 억지로 끌어 붙여 자기(自己)에게 유리(有利)하게 함]가 너무 심하여 믿을 가치가 없다. 현재 반도의 조선, 한국은 모두 당조시대의 신라로부터 유래하였고, 신라는 반도남단의 해변지대에서 본래 살았고, 삼한부락(三韓部落)이라 칭하여 신라가 조선민족의 직계선조이다. 이것이 중국학계의 주장이다.
이덕무[李德懋《青莊館全書》卷五四《盎葉記》; 청장관전서 54권 앙엽기]에서 단언하기를, 해부루가 가섭원지에 옮겨서, 국상 아란불꿈을 일컬었다. 가섭, 아란은 모두 불명이었는데, 당시 불서가 중국에 유입되지 않았고, 여기에 혼돈되었고, 또한 단군을 환웅이라 일컬음과 같아서 탐구가 부족하다. 환단고기《桓檀古記》에 기재하기를, 해모수는 조선왕실 출신이며, 23세에 단군조선의 장군이 되었다. 단군조선말기에 해모수는 북부여를 창건하였다.
주몽은 옥저왕고모수(沃沮王高慕漱)의 아들이고, 해모수의 둘째아들 고진(高辰)은 고모수의 조부다. 그는 실제로 다물군(多勿軍)을 조직하여 한조에 저항하였다. 환단고기에서 BC238에 딘군조선의 국주고열가는 왕위를 버리고 입산하여 수도등선(修道登仙)하였다. 종실대해모수는 고도백악산(故都白岳山)에 웅거하여 천왕랑(天王郞)이라 칭하고 북부여를 건립하였다. 삼국사기에서 해모수는 천제의 아들이라 칭하고, 그와 유화(柳花)의 아들 주몽은 고구려의 창건자다. 삼국유사 에서 이르되, 해모수는 천제의 아들이고, 북부여의 국왕이며, 해부루와 주몽의 부친이다.
한국/조선과 조선반도의 정권은 부여인을 금일 한국인/조선인 의 선조의 하나라고 한다. 실제로 성씨(姓氏)로 보면 한국인, 조선인은 신라로부터 기원하였지, 중국의 부여로부터가 아니다. 이것 또한 중국의 주장이다.
L 미국: Judd Damon이 말하기를, 부여는 포리아특인(布裡亞特人: the Buryats)과 대화족(大和族: Yamato people)의 선조로서 BC 4,5세기에 패가이호(貝加爾湖: Lake Baikal) 동북으로 이주하고 살았다. 그러나 이 관점을 지지할 고고학적증거는 없다.
중국: 부여이름은 처음으로 일주서(逸周書)에 구이(九夷; 아홉오랑캐)의 하나인 부유(鳧庾)로 출현하였다. 송눈평원에 한가지 나무가 있어 나무위에 있는 소금을 식용하여, 고대 일부월인(越人)이 퍙원에 이르러 이 소금을 먹는 사람들을 부여라고 불렀다. 이것이 부여의 명칭의 다른 해석이다. 조선반도의 정권은 현재 한국인/조선인의 선조의 하나라고 하지만, 이 관점은 착오적이다. 현재 조선인/한국인의 선조는 삼한(三韓)이다. 이 또한 중국의 주장이다.
부여인은 현지 중국동북에 모여 살았고, 거기에 곡물이 풍성했고 식량이 넉넉하였다. 이덕산등의 학자들은 부여는 한국민과 전혀 관계가 없다고 한다. 어떤 학자가 부여의 원류(源流)는 일본족이나 동호(東胡)란 말이 전혀 근거가 앖다.
유고조나 요동옥(劉高潮、姚東玉)의 《“日種”說與匈奴之族源──兼論夫余王族屬東胡; “일본족이나 흉노족 근원이 부여 왕족이 동호에 속함》에서, 그들이 국내에서 흰옷을 입었고, 출국시 비단과 수놓은 옷을 업었음은 오로지 은상(殷商)에 국한한 일은 아니고 일본이나 신라시대에 그런 습속이 있었다, “는 역사 기재와 부합하지 않는다. 이덕산설처럼 장기간 국내외연구자들이 부여기원등 문제데 대하여 광범위한 검토를 진행하였고, 많은 성과를 얻었지만, 여러가지 이유로써 (특히 중국측의 반대로) 학술적공식(共識)을 이룰만한 결론을 취득하지는 못하였다.
香港大學語言學者金鐘,經由語言學考證,認為百越族的分支北上,建立了夏朝與扶餘。
4世紀頃東夷諸國 夫余位置。
The East Barbarian(東夷)
Kwan Ho Chung - July 1, 2024
2024.07.01 06:06
2024.07.01 19:17
Hi, Doc;
Thanks for your effort to put the old history of 부여, complicated by the Chinese 동북공정.
I know it has to be a very confusing history and really hard work for you to summarize.
In reviewing the article, I found a portion to be a duplicate from different original articles.
I would appreciate your correction to one simple article.
I have put that portion isolated below. We may re-edit these parts. Thanks, by W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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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조선; 조선반도의 정권은 부여인을 금일 한국인/조선인 의 선조의 하나라고 한다.
.......... 중국: 부여이름은 처음으로 일주서(逸周書)에 구이(九夷; 아홉오랑캐)의 하나인 부유(鳧庾)로 출현.....
....부여인은 현지 중국동북에 모여 살았고, 거기에 곡물이 풍성했고 식량이 넉넉하였다. ......
...못하였다.
香港大學語言學者金鐘,經由語言學考證,認為百越族的分支北上,建立了夏朝與扶餘。
2世紀頃東夷諸國 夫余位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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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2 04:57
Thank you for reminding me of multiple errors, which were corrected to my best knowledge.
Kwan Ho Chung
고구려 지도를 펴보면 항상 그 윗쪽(북부지역)에 부여의 지도가 나온다.
그래서 부여에 관하여 재료를 정리해 보았다.
첫째 부여로부터 고구려와 백제의 왕족이 나왔다.
이리하여 고구려와 백제는 부여로부터 유래되었음이 확실하다.
1990년이후 대한민국 사학자들의 부여연구가 활발하여졌고,
부여도 고구려처럼 우리선조의 국가중의 하나란 학설이 나왔다.
그런데 중국은 무조건 절대 반대다. 그들말로는 부여는 구이(九夷)중의 하나인
중국의 소수족이라고 계속 주장한다.
우리에게도 약점은 있다.
첫째 부여의 땅을 중국에게 잃어버렸다.
둘째 우리의 글로된 부여의 역사기록이 없다.
하긴 고대사의 기록이 현대처럼 될 수는 없다.
게다가 중국은 우리의 조상을 한반도 남단의 신라에게 국한하려고 주장한다.
그건 용인할 수없는 소리다.
역사적으로 우리조상은 단군조선 즉 고조선, 고구려, 백제, 신라르부터 내려왔다,
그러니 우리도 우리의 조상나라를 다시 찾아야겠다.
이것이 현재와 미래의 우리나라 학계의 큰 임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