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7.11 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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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만춘(楊萬春, ?~?)은 고구려 말의 군인으로 안시성 전투 당시의 안시성주였다. 1차 고당전쟁 당시 안시성에서 당태종이세민(唐太宗李世民)의 공세를 막아낸 것으로 유명하며, 후대에 구국의 영웅으로 숭앙받았다. 이를 제외한 삶은 모든 것이 미상으로 그 이름조차 현전하지 않아 그저 안시성주(安市城主)라 불리기도 하나, 조선시대의 민간전승(民間傳承)에 의해 양만춘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왔다.
양만춘이란 이름은 16세기 중국 소설에 최초로 등장한 가공의 이름으로 실제 이름은 알 수 없다. 양현감(楊縣監)의 아들로, 양현감이 죽자, 고구려에 귀항(歸降)했다는 설도 있다.
생애
안시성의 성주였으며 재주와 용기가 비상하였다고 한다. 642년(보장왕 1년)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연개소문에게 복종하지 않아 그 공격을 받았는데 성을 잘 지켜냈다. 644년 당태종(唐太宗)이 고구려를 정복하고자 군사를 일으켰다. 645년 안시성까지 진군해온 당군에 맞서 오래도록 버텨냈다.
이에 강하왕이도종(江夏王李道宗) 이 성의 동남방에 토산을 쌓기 시작했고, 안시성주 역시 성벽을 더욱 높이며 대응하였다. 교전은 하루에 예닐곱회에 달했으며 충차나 포석의 타격을 받아 파괴된 곳은 목책을 세워 수리하였다.
당군(唐軍)은 60일 동안 밤낮으로 쉬지 않고 토산을 올린 끝에 불과 수장( 數丈) 거리에서 성을 내려다보게 되었다. 과의(果毅) 부복애(傅伏愛)가 토산수비를 맡았다. 얼마 후 토산이 무너져 성과 이어졌는데 부복애가 마침 자리에 없었다.
안시성주가 재빨리 수백명을 출전시켜 토산을 빼앗고 해자(垓子)까지 둘렀다. 당태종의 3일에 걸친 탈환 시도도 모두 저지하였다. 겨울이 오면서 보급이 곤란해진 당 태종은 결국 총퇴각을 명하고 마지막으로 안시성 주위를 돌며 시위하였다. 안시성주가 병력을 물리고 홀로 성에 올라 작별의 예를 갖추었다. 당 태종은 안시성주가 성을 고수한 것을 가상히 여겨 비단100필을 내리며 격려하였다. 이후의 행적은 정확한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실전된 이름
안시성 전투를 제외한 삶은 모든 것이 미상으로 그 이름조차 현존하지 않는다. 현전하는 기록 중에서 양만춘(梁萬春)이란 이름이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16세기 명나라의 소설 《당서지전통속연의》(唐書志傳通俗演義, 약칭은 당서연의 혹은 당서지전)이다.
태종동정기(太宗東征記)는 이 책의 후반부를 이른다. 이익은 또다른 전거로 하맹춘(何孟春)의 《여동서록》(餘冬序錄)을 들었으나 여동서록에는 그런 내용이 없다. 이익이 착오를 범한 듯 하다. 어쨌든 윤근수, 송준길, 박지원등 조선의 많은 문인들이 당서연의를 채용하면서 양만춘이란 가공의 이름이 널리 퍼졌다. 한편에서는 성씨가 梁(양)이 아니라 楊(양)이라 주장하였고 楊萬春(양만춘) 역시 널리 통용되었다.
평가
김부식은 사론으로 ‘당 태종은 고명한 불세출의 임금으로 난을 평정함은 탕왕과 무왕에 비할 만하고 통치는 성왕과 강왕에 가까웠다. 용병술은 그 기묘함이 끝이 없고 향하는 곳마다 대적할 자가 없었다. 그럼에도 동방 정복만은 안시에서 패하였으니 그 성주는 가히 비범한 호걸이라 하겠다. 다만 사서엔 그 성명조차 전하지를 않으니 양웅이 제나라와 노나라 대신들의 이름은 사서에 남지 않았다고 한 바와 다르지 않다. 심히 애석하도다.”라고 하였다.
전설
당 태종이 안시성주가 쏜 화살에 맞아 한쪽 눈을 잃었다는 이야기가 14세기 고려의 시에 등장하지만, 어느 사서에도 그런 기록은 없다. 다만 이것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중국측에서 자신들의 수치로 여겨 감출 가능성은 매우 높고, 조선시대의 학자들도 이 점을 지적했다.
이름을 따온 것
양만춘이 등장한 작품
드라마
《삼국기》 KBS, 1992년 ~ 1993년, 배우 : 임혁
《연개소문》 SBS, 2006년 ~ 2007년, 배우 : 임일규, 신동훈
《대조영》 KBS, 2006년 ~ 2007년, 배우 : 임동진
朝鮮文人筆下的安市城之戰[조선문신필하적안시성지전: The Battle of Ansi City as Written by Korean Literary Writers]
高麗王朝文臣李穡(號牧隱)曾作詩詠太宗東征事,其中一句是「謂是囊中一物耳,那知玄花落白羽」,也就是說太宗的眼睛被安市城主的箭射中了。朝鮮王朝的文臣徐居正對此表示「當時雖有此事,史官必爲中國諱,毋怪乎其不書也。但金富軾《三國史》亦不載,未知牧老何從得此?」
고려왕조문신 이색(목은)은 일찍이 태종동정사 시를 쓰고 읊었으니, 그 중 한구가 바로 [주머니속에 물건이 하나 있으니, 어찌 현화로부터 흰 깃이 떨어졌음을 알건가?] 하였다. 이에 설하기를, 태종의 안정(眼睛)이 안시성주가 쏘았던 화살에 명중되었다고 한다. 조선왕조문신 서거정(徐居正)은 바로 이것에 대하여 표시하기를, [당시에 바로 이런 일이 있었으면, 사관이 반드시 금기를 만들었겠으니, 책에 쓰지 않았음이 괴이치 않다. ] 오로지 김부식의 삼국사 또한 기재하지 않았으니, 어떤 경로로 목은이 이것을 얻었는지 알 수없다. ]
逸事(일시): 기록(記錄)에 빠지거나 알려지지 아니하여 세상(世上)에 드러나지 아니한 사실(事實).
李穑曾作古体诗《貞觀吟》,其中有句曰“谓是囊中一物耳,那知玄花落白羽”,意指唐太宗伐高句丽,在安市城被弓箭射中眼睛。但是此事历史上唯有李穑此诗提及
이색은 일찍이 고체시 정관음을 썼고, 그 중에 구(句)가 있어 가로되, “주머니속에 물건이 있다는 말이 있는데, 어찌 눈에 화살을 맞았음을 알건가?” 이 뜻은 당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하다가, 안시성에서 화살에 눈동자를 맞쳤다는 의미이며, 오로지 이 일은 역사상에서 이색이 이시에 말했을 뿐이다.
It is said that there is only one thing in the bag, but the white feathers fall from the mysterious flowers.
독자 여러분, 나는 이 위대한 전투실황을 가급적 생생히 소개하려고 합니다. 한글과 한문을 올립니다.
당졍관16년[唐貞觀十六年(642년)], 연개소문(淵蓋蘇文)은 영류왕(榮留王)을 죽이고, 스스로 대막리지(大莫離支)가 된 후. 양만춘은 연개소문이 군왕을 죽임에 불만하여서, 연개소문의 섭정을 거절하였다. 연개소문은 이에 군사를 보내어 안시성을 공격하였으나, 성공치 못하고, 이리하여 계속 그 직무를 책임지고 맡으라고 하지 않을 수없었다. 당정관18년(644년), 태종은 이세적, 이도종, 장손무기로 하여금 십만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친정하였다. 당정관19년 (645년) 당태종은 고구려의 방어선을 격파하여서, 평양공격을 준비하여 대성공이 임박한 듯하였다. 뜻밖에 안시[安市(今遼寧鞍山)]현재 요령안산)에서 막혀서, 거듭 전진할 도리가 없었다.
안시성 공격전에, 태종은 안시성지가 공격하기 힘듦을 알게 되었고, 인시성주양만춘은 기지와 용맹을 갖고, 강대한 수비부대를 가졌다. 아애 태종은 건안성[建安城(今遼寧營口)(현재 요령영구)]을 선공할 계획이었다. 이리하여 안시성을 공격하지 않고 격파하려고 하였고, 이리하여 안시성은 당이 요동으로부터 받는 공급선을 절단하여, 당(군)으로하여금 피동(被動)상태에 빠지게 하였다. 이에 태종은 돌이켜 먼저 안시성을 포위공격하도록 결정하였다. 당태종과 이세적의 부대가 안시성에 도달하였을 때 안시성 수비자는 당태종의 기치(旗幟)를 보고, 성의 담장위에 올라 큰소리로 꾸지졌다.
태종은 대로하였다. 이세적은 태종이 점령후 성안의 모든 백성을 죽일 것을 청하였다. 이는 안시성수비자로 하여금 더욱 분발하여 당군에게 저항 하였다. 이에 이시적은 한동안 안시성을 떨어뜨리지 못했다. 어느날 안시성안으로부터 닭과 돼지를 잡는 소리를 들었다. 이에 그는 이세적에게 고구려인은 수비자들에게 연회하여 잘먹여 돌격을 준비한다고 하였다. 예상했던대로, 사실상 그날 밤 안시성은 당군에게 돌격을 하였다. 일찍이 방비한 태종은 친히 군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공격을 격퇴시켰다.
安市城的土山
따라온 이도종은 안시성동남편에서 안시성을 공격할 토산을 구축하였다. 이것을 위하여 안시성은 부단히 동남편성장(城牆)을 높였다. 쌍방이 이렇게 대치(對峙)한지 60일후 이도종은 이미 토산이 충분히 높아서 안시성이면(裡面)을 내려다 볼수있었다. 이도종과 그의 수하 부복애(傅伏愛)는 토산정수리까지 올라갔다. 홀연히 토산이 무너졌고, 아울러 안시성담위로 넘어졌다. 안시성담도 이로 인하여 쓸어졌다. 이때 부복애는 자신의 주둔지를 떠났다. 고구려는 이 혼란을 이용하여 공격하여 토산을 점령하였고, 아울러 이것을 안시성의 방어무기로 사용하였다. 태종은 대로하여 부복애를 공개처형하였고, 아울러 토산을 미친듯이 공격하라(瘋狂攻擊)는 명령을 내렸다. 3일동안 싸웠어도 토산을 빼앗지 못했다. 이도종은 다리를 벗고 태종께 죄를 청하였고, 결국 태종은 용서하였다.
겨울이 닥아오기에, 당군의 공급은 모두 없어지기 시작하였다. 당정관19년 (645년10월13일)에 군사를 돌이킬 영을 내렸고, 떠나기 전에 안시성아래에서 병사의 위엄을 보일 때, 안시성중에서 모두 두려워하여서, 성문을 닫고 감히 출전치 못하였으며, 양만춘은 성루에 올라서 태종을 향하여 예절을 갖추어 이별을 고하였고, 태종은 양만춘에게 비단백필을 상으로 주어서, 양만춘의 충성을 표창하였다.
정관18년(644년), 당태종은 고구려정벌에 실패하여서, 한탄하기를, “위징이 있었으면, 내가 이번 정벌을 하지 못하게 하였을것을.” 이에 영을 내려 파괴된 위징의 묘비를 새로 세우고, 위징의 유족에게 위문을 하였다.
위징(580년-643년1월17일), 자 형성으로 상주내황현인이며, 당태종 창건의 대업에 보좌하였기에 후세에 일대명상(一代名相)으로 칭한다.
唐貞觀十六年(642年),淵蓋蘇文殺死榮留王自封為“大莫離支”後,楊萬春不滿淵蓋蘇文弒君,拒絕接受淵蘇蓋文攝政。淵蘇蓋文曾發兵攻打安市城,但沒有成功,因此只好讓楊萬春繼續擔任其職務。唐貞觀十八年(644年),太宗帶領李世勣、李道宗、長孫無忌諸將率軍十萬親征高句麗。唐貞觀十, 九年(645年),太宗衝破高句麗的防線准備攻打平壤,似乎大功在即。不料在安市(今遼寧鞍山)受阻,再也無法前行。
在攻安市城前,太宗就得知安市城地勢難攻,安市城主楊萬春機智勇敢,有一支強大的守城部隊。於是太宗打算先攻打較為容易的建安城(今遼寧營口)。這樣安市城也就不攻而破。李世勣對此表示反對。他認為如果太宗先攻建安城,安市城就會切斷唐從遼東的供給線使唐陷入被動。於是太宗決定還是先圍攻安市城。當太宗和李世勣的部隊到達安市城時,安市城的守城者見到太宗的旗幟就在城牆上大聲漫罵。
太宗大怒。李世勣請求太宗拿下安市城後坑殺全城百姓。這使得安市城的守衛者更加奮力抵抗唐軍。就這樣李世勣一時間拿不下安市城。一天,太宗從安市城中傳出殺雞宰豬的聲音。於是告訴李世勣說高句麗人可能在宴請守城部隊準備突襲。李世勣於是作好了高句麗會在晚上突襲的準備。事不出所料,安市城當晚真的對唐軍進行了突襲。不過早有防備的太宗,親自率兵擊退了高句麗的進攻。
隨同的李道宗開始在安市城的東南構築一個用於進攻安市城的土山。為此,安市城也不斷加高東南邊的城牆。雙方這樣對峙了60天後,李道宗的土山已經高到可以看到安市城的裡面。李道宗和他的手下傅伏愛登上了土山頂。忽然,土山出現了倒塌,並倒在了安市城的城牆上。安市城的城牆也因此倒塌。傅伏愛這時卻擅離職守。高句麗趁亂發動進攻占領了土山,並使其成為安市城防守的武器。太宗一怒之下,公開處死了傅伏愛並下令對土山進行瘋狂攻擊。不過打了三天也沒拿下來。李道宗於是赤腳向太宗請罪。不過太宗寬恕了他。
隨著冬天的臨近,唐軍的供給也開始匱乏。唐貞觀十九年九月十八日(645年10月13日),太宗下令班師,臨行前在安市城下炫耀兵威,安市城中皆緊閉城門不敢出戰,楊萬春登上城樓向太宗行拜禮辭別,太宗賞賜楊萬春縑帛百匹,以表揚楊萬春的忠誠.
貞觀十八年(644年),唐太宗親征高麗受挫,發出了「魏徵若在,不使我有是行也」的感慨,於是又下令將毀壞的魏徵墓碑重新樹立起來並慰問魏徵的遺屬。
魏徵(580年—643年1月17日),字玄成,相州內黃縣人,輔佐唐太宗創建「貞觀之治」的大業,被後人稱為「一代名相」。
安市城位置(안시성위치)
안시성은 중국동북부中國東北部) 고대(古代)의 일개군사 성보( 城堡: 성과 요새)로서 진조(晉朝)에 짓기 시작하였다. 대략 위치는 현재 요령성안산시해성시(遼寧省鞍山市海城市)이다.
한조(漢朝)에 안시현(安市縣)을 설립하여 요동군(遼東郡)에 속하였다. 십육국[十六國(317一420年)] 시절에 선후로 전연, 전진, 그리고 후연요동군(前燕、前秦、後燕遼東郡)에 예속(隸屬)되었다. 남북조[南北朝(420一589年)]와 북조(北朝)때 고구려가 점령하였다.
당조정관연간(唐朝貞觀年間) 고구려가 신라를 공격하여서, 신라의 선덕여왕(善德女王)이 당조에게 급함을 고하였다. 당조는 고구려에게 정전(停戰)을 명령하였으나, 연개소문은 거절하였다. 645년 당태종은 군을 거느리고
친정(親征)하여서 요동성[遼東城(今遼寧遼陽)]을 빼앗고, 백애성[白崖城(今遼寧海城)]과 개모성[ 蓋牟城(今遼寧蓋州)] 연달아 격파하였다. 단지 당군은 안시성에 이르러 안시성주[安市城主(後世小說中塑造成高句麗名將楊萬春)]가 견고하게 저항하였다. 후에 겨울이 임박하여, 태종은 반사(班師)를 하령하였다. 665년 당장이적(唐將李勣)등이 안시성을 공격함락시킨 후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安市城是中國東北部古代的一個軍事城堡, 始建於晉朝。大概位置在今遼寧省鞍山市海城市。
漢朝設立安市縣,屬於遼東郡。十六國(317一420年)是先後隸屬於前燕、前秦、後燕遼東郡。 南北朝(420一589年)北朝之際,為高句麗所佔領。
唐朝貞觀年間,高句麗進攻新羅,新羅善德女王向唐朝告急。唐朝命高句麗停戰,淵蓋蘇文拒絕。645年,唐太宗率軍親征,拔遼東城(今遼寧遼陽),接著連破白崖城(今遼寧海城),蓋牟城(今遼寧蓋州)。但是,唐軍在安市城遭到了安市城主(後世小說中塑造成高句麗名將楊萬春)的堅決抵抗。後由於冬天來臨,太宗下令班師。665年,唐將李勣等攻陷安市城後,滅亡高句麗。
해성경내(海城境內)에 오래전부터 일찍이 큰 바다가 있었고, 후에 지질의 구조가 변하여, 바닥이 상승하여 점차 육지를 이루어 설치하였을 때 해성(海城)이란 명칭을 받았다.
전국시기에 연국 요동군에 속하였다.
한조시기(漢朝時期)에 경내에 신창(新昌), 요대(遼隊), 안시(安市)등, 심현(三縣)을 두었다.
삼국시기(三國時期)에 위가 북방을 점령하고, 평주(平州)에 속하고 후에 유주(幽州)로 개명하였다.
서진시기(西晉時期)에 경내에 신창, 요대 그리고 안시 3현을폐하였다.
후연광시4년 [後燕光始四年(404年)] 고구려가 할거[割據; 땅을 나누어 차지하고 막아 지킴]를 시작하여, 260여년을 가졌다.
당총장원년[唐總章元年(668年)] 통일판도로 안시성을 두고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에 속하였다. 요조시기(遼朝時期)에 경내에 해주, 동주, 요주[海州、銅州、耀州]를 설치하고, 함께 임명, 선향, 절목과 암연 4현[臨溟、仙鄉、析木、岩淵4縣]을 함께 설치하고, 아울러 해주(海州)애 남해주(南海州)를 두고, 겸하여 임명현으로 주(州)를 다스리게 하고, 요동도(遼東道)를 예속시켰다. 해성(海城)의 이름은 해주(海州)에 기인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금조시기(金朝時期)에 해주(海州)를 징주(澄州)로 고쳤고, 임명(臨溟)과 절목(析木) 2현을 관리하여, 동경로(東京路)관할을 받았다.
1985년 1월,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이 비준하여, 해성현(海城縣)을 없애고, 해성시(海城市)를 성립하고, 안산시(鞍山市)에 예속되었다.
海城境內很早以前,曾是一片汪洋大海,後因地質結構變遷,底殼上升,漸成陸地,設治之時,取名為海城。
戰國時期,屬燕國遼東郡。
漢朝時期,境內置新昌(今甘泉鎮向陽寨)、遼隊(今西四鎮三岔河東岸)、安市(今八裡鎮營城子)三縣。
三國時期,魏占領北方,屬平州,後改幽州。
西晉時期,境內新昌、遼隊(隧)、安市三縣皆廢。
後燕光始四年(404年),開始被高句麗割據長達二百六十多年。
唐總章元年(668年),統一版圖,置安市州,屬安東都護府。
遼朝時期,於境內置海州、銅州、耀州,同設臨溟、仙鄉、析木、岩淵4縣,並在海州置南海州,兼置臨溟縣為州治,隸屬遼東道。海城之名源於海州至此始。
金朝時期,改海州為澄州,轄臨溟、析木二縣,受東京路管轄。
1985年1月,經中華人民共和國國務院批准,撤銷海城縣,成立海城市(縣級市),隸屬於鞍山市。
이 전투는 우리나라 오천년 역사에 나오는 전투중 가장 위대한 승리였다.
아쉽게도 그 내용을 치밀하게 상세히 올리지 않았다.
이곳 기록에 의하면, 당태종이 안시성을 공격한 해는 645년이었고,
고구려의 평양천도가 427년, 고구려의 멸망연도가 688년이었다.
아마 당군의 참패를 그들이 기록하기를 원치 않았다고 나는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