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사군(漢四郡)
한사군[(漢四郡) (公元前108年~公元313年)]은 한조한무제(漢朝漢武帝)가 공원전109년 내지 공원전108년[BC109-BC108]간 위만조선을 초멸(剿滅)한 후 조선반도북부와 중부(朝鮮半島北部和中部)에 낙랑군, 현토군, 진번군, 임둔군 4개군[樂浪郡,玄菟郡,真番郡,臨屯郡四個郡]을 설립(設立)함은 총칭하였고, 한사군은 조선반도북부에 지대한 영향력을 가졌다.
공원전82년(BC82) 한조(漢朝)는 임둔, 진번이군[臨屯、真番二郡]을 낙랑, 현토이군[樂浪,玄菟二郡]에 넣었다.
낙랑군의 위치는 현재 조선평양(朝鮮平壤)이고, 현토군위치는 현재 조선함흥(朝鮮鹹興)이었고, 공원2년(AD2)에 길림의 동부(吉林的東部)로 서천(西遷)하였고, 동한이후(東漢以後)에는 맥(貊)의 반항으로 요동고구려[遼東高句麗(今遼寧新賓)] 즉 현재요령신빈으로 옮겨갔다. 그래서 부여와 고구려 백성을 통치하였다.
위진시기(魏晉時期)에 낙랑군과 현토군 모두 보류하였다. 동한말(東漢末)에 요동공손씨(遼東的公孫氏)가 낙양군남부를 나누어 대방군(帶方郡)을 설립하고, 아울러 위진(魏晉)이 승계하였다.
中文名(중문명)
漢四郡(한사군)
所屬地區(소속지구): 東北亞(동북아)
地理位置(지리위치): 今朝鮮國北部及中國吉林南部地區(금조선국북부급중국길림남부지구)
下轄地區[하할지구: Areas under jurisdiction]; 樂浪郡(낙랑군)、玄菟郡(현토군)、真番郡(진번군)、臨屯郡(임둔군)
氣候條件(기후조건):溫帶氣候(온대기후)
民族構成(민족구성): 漢(한)、穢(예)、扶余(부여)、鮮卑(선비)、烏桓(오환)、辰(진)
設立時期(설립시기):漢朝西漢(한조서한)
簡介(간개: Introduction)
한사군은 한무제가 중국동북과 조선반도에 설립한 4개의 군을 총칭하였고, 낙랑군, 현토군, 진번군과 임둔군으로 나눈다.
그중 현토군은 BC107에, 기타 3군은 BC108에 설치하였다. 4군이 병존한 정황(並存的情況)은 오로지 20여년간이었고, BC82에 진번, 임둔 2군은 현토의 남부지구[真番、臨屯二郡與玄菟郡的南部地區]와 더불어 낙랑군으로 획입(劃入)되었고, 현토군의 치소[治所; administrative office]는 아직 부조현(夫租縣)에 있었다.
AD2, 낙랑군의 동부와 남부를 나누어 동부도위와 남부도위(東部都尉和南部都尉)를 설치하고, 현토군은 부조현(夫租縣)으로부터 서편으로 이동하여 길림의 동부(吉林的東部) 고구려현(高句驪縣)으로 이동하였다. 이후의 동한, 위진[東漢、魏晉] 모두 보류(保留)하고 있었다.
동한말 요동의 공손씨[遼東的公孫氏]는 낭랑군의 남부도위[樂浪郡南部都尉: (原真番郡轄地)원래 진번군의 관할지지]로 분석하여 냈고, 대방군을 설립하여, 위와 서진[魏、西晉]이 계승하였다.
위진시기에 고구려는 낙랑군을 공격하였고, 낙랑, 대방 2군에 웅거하던 장통(張統)아 혼자서 장기간 고구려와 대치할 수 없었고, 백제도 작전하여 천여가를 이끌고, 요서(遼西)에 이르러 모용외(慕容廆)에게 가까이 하였다. 모용외는 후에 낙양군을 설치하였다. [(《資治通鑒》卷八八,建興元年조條)]
낙랑군은 요서에 교치[僑置: placed overseas]되어서, 조선 반도를 관할(管轄)하던 낙랑군을 결국 멸망하였다. 원래 진번군은 대방군의 지배를 받아서 중원왕조의 고립된 영토였고, 결국 완전 고립이 되어, 4세기때 낙랑의 고지(故地)와 함께 고구려와 백제의 패권을 다투는 장소였다.
設置(설치)
BC109, 한무제가 파병하여 수륙양로(水、陸兩路)로 공격 하여 반거[盤踞: entrenched]했던던 조선반도북부의 위씨조선을 멸망시켰다.
BC108 한무제는 그 옛 지역을 통일한 후, 지방행정구역(地方行政區域)을 나누었고, 낙양군[約在今朝鮮平安南道,治所朝鮮縣城是故衛氏朝鮮都城王險城,位於今平壤大同江南岸], 현토군[約在今朝鮮鹹鏡道], 진번군[約在朝鮮黃海道、京畿道各一部], 임둔군[約在今朝鮮江原道]을 설치하여서, 역사에서 한사군이라고 칭했다.
사군은 그 관할지역에 약간의 현(轄)아 있고, 그 현장관은 한조중앙(漢朝中央)으로부터 파견된 한인이 맡았다. 분명히 한사군의 설치는 한무제가 조선반도북부지구직할관리를 하였음을 설명하며, 한제국의 직할관리통치범위를 납입[納入; 세금(稅金), 공과금(公課金) 따위를 냄.]하였다.
BC82 한조는 임둔, 진번 2군을 낙랑과 현토로 함께 넣으려고하였다. 낙랑군통치소는 현재 조선평양이었고, 현토군치소[治所則初在夫租(今朝鮮鹹興)]는 부조 (현재조선함흥)이었고, AD2에 서천(西遷)하여, 길림동부(吉林的東部)에 이르렀고, 동한이후 맥(貊)이 빈힝히여, 요동 고구려현( 今遼寧新賓)으로 옮겼다.
동한, 위, 진시기[東漢、魏、晉時期]에 낙랑군과 현토군의 구역과 군의 다스림(郡治)는 부단히 변화하였다. 동한말년(東漢末年)에 요동태수공선강(遼東太守公孫康)운 낙랑둔지구를 관할(管轄)하여서, 낙랑의 남부를 분할하고, 대방군(帶方郡)을 설립하였다.
이외에, 한나라와 위나라 때 조선반도남부에는 한민족의 삼지[三支: 경상도 삼기현(三歧縣)의 신라 때 이름.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 삼기현으로 고쳤다.] 즉 마한, 진한, 변한[馬韓、辰韓、弁韓]이 거주하고 있었다.
역사에 기록하기를: 미힌은 54국 총십여만호를 가졌고, 진한과 변한은 각각 20국, 모두 78국을 가져서, 헙차묜 200,000호, 거의 백만인을 가졌다.
歷史淵源(역사연원: Historical origins)
힌빈도 역사적견지에서, 기자조선에서 위만조선으로 이르러, 상주시대(商周時代)부터 서한무제시기(西漢武帝時期)까자의 기간에 상당하며, 그들의 건립자와 통치계급대부분은 중국 중원지구로부터 왔다.
이리하여 기자조선에서 위만조선까지, 모두 중국변강제후국이 중국정권[中國邊疆諸侯國與中原政權]과 더불어 일종의 예속관계(一種隸屬關系)를 형성하였다.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정식으로 조선번도 한강 이북지구에 군을 설치하고 중앙직할관리통치(中央直轄管理統治)를 진행하여, 역사상 저명한 한사군(“漢四郡”)이었다.
한(漢)에서 서진(西晉에 이르는 전시기에, 조선반도북부 지구는 한결같이 중국중원정권의 군현으로 직할관리통치를 받았고, 기자조선과 위만조선 문화의 기초위에 부유한 영향력의 낙랑문화를 창조하였다.
여사면선생의 백화본국사[呂思勉先生的《白話本國史》]에서 반도한강이름이 유래를 이끌었다… 한강은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멸한 후 그 지무역을 사군으로 나누고, 남계(南界)는 한조의 남쪽 경계이기에 한강이라고 칭하였다…
樂浪博物館(낙랑박물관)
樂浪文化(낙랑문화)
漢代文化(한대문화)
한조(漢朝)가 조선북부지구에서 군현통치(“郡縣”統治)를 진행하였고, 한편으로 한과 조선반도의 경제문화교류(經濟文化交流)를 형성하였다. 중원의 상층인사의 일부는 이민으로 그지역에 이르렀다.
당시 한인관리가 사군에 이르러 직을 가졌을 뿐아니라, 많은 부상대고(富商大賈)와 농민이 와서, 상업을 경영하고, 황무지를 개간(墾荒)하여, 조선사군은 이미 한분파[一派:한 분파(分派).]의 한문화경상[漢文化景像(scene)을 이루었다.
이것이 고고발굴[考古發掘: archaeological excavations] 로부터 증명되었다. 근년(近年)에 와서, 군지역의 고고발굴(考古發掘)중 출토(出土)된 대량한조의 관인(大量漢朝的官印)과 여러가지 직물이 같지 않았고, 그 형상은 각각 다른 기명[器皿; 그릇붙이)였으며, 고고학가는 이런 문화의 현상을 낙랑문화(樂浪文化)라고 지어서 불렀고, 실은 바로 한문화(漢文化)였다.
낙랑문화의 고고학적발견중 가장 대표적 재료는 조선평양시 낙랑구토성남면[朝鮮平壤市樂浪區土城南面]에 있으며, 총수(總數)는 2000이상 자리의 낙랑묘장군(樂浪墓葬群)이다. 이 묘의 대다수는 정사각형의 단(壇)으로된 분구묘(墳丘墓)로서, 중국의 주와 한시기의 묘장[中國周、漢時期墓葬]의 보편형상 이다.
그 묘의 구조는 나무관묘와 벽돌방묘로 두가지이며, 그 궃체적건축방법, 양식 내지 미세한 벽돌의 꽃무늬는 오로지 중국중원의 한대의 묘와 차이가 없다. 묘속의 물품은 비상히 풍부하여, 모두 한문화의 특징이다. 낙양묘군(樂浪墓葬群)은 조선북부가 한문화를 받았다는 강렬한 구체적 증거이다.
이 한문화의 영향이 한사군 소재지인 조선북방지구에 국한된 게 아니고, 반도남부지구에도 동양(同樣)의 영향을 가졌음을 주의할 점이다. 일찍이 BC109년 한무제가 위씨조선에 출병하기 전야(前夕), 남부마한목지부락(南部馬韓目支部落)은 일찍이 사자를 한지(漢地)에 보내어 한무제에게 조정에 알현(謁見)하려했지만, 그러나 이는 조선왕우거(朝鮮王右渠)의 조요[阻擾; obstruction]로 실현이 안되었다.
일찍이 BC109년 햔무제가 위씨조선에 출병하기 전석[前夕:eve; 직전], “한사군”설치후 남부마한왕과 부락추장은 한조낙랑군과 더불어 왕래를 개시하고 계속하였다. 남부의 한부락은 심지어 북조선예인(北朝鮮穢人)이 남천후(南遷後) 남방삼한인(南方三韓人)과 더불어 잡거(雜居: 여러 사람이 섞여 삶)하여, 이민사회를 형성하였다. 출토문물(出土文物)로부터 알 수있듯이 당시 한사군문화는 이미 삼한왕국의 최남단의 제주도등지까지 영항을 이르렀다.
樂浪帶方郡遺跡(낙랑대방군유적)
고고학적작업을 통과하여 이미 조선반도북부지구가 성지(城址: 성터)를 포함한 발견이었고, 무덤의 매장 속에는 한사군 시기의 유적과 대량의 유물이 있었고, 유물과 명문[銘文: 금석(金石)ㆍ기물(器物) 따위에 새겨 놓은 글]이 있고, 이 시기에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는데데 제공하는 구체적재료를 공급한다.
樂浪郡城址(낙랑군성지)
낙랑군터는 평양남교대동강남안토성리대지[樂浪郡治址位於平壤南郊大同江南岸土城裡的台地]위에 있고, 평면은 불규측하고, 동서로 약 700m, 남북으로 약600m이다. 1935와 1937년에 성터동부(城址東部)에서 주초석(柱礎石높은주춧돌 ), 용로(甬路;양쪽에 담을 쌓은 길), 정화하수도(井和下水道; 우물과 하수구)등 견축유적(建築遺跡)을 발견하였다.
성터안(城址內)에서 출토(出土)된 유물은 상당히 풍부하여, 여러해에 걸쳐 채집한 소득은 전와, 봉니, 도기등[磚瓦、封泥、陶器等: bricks and tiles, sealing mud, , pottery]와 동철기등[銅鐵器等; copper and ironware, etc]이다.
기와에 항상보는 구름무늬(雲紋)이외에, 돌이켜 낙랑예관(樂浪禮官), 낙랑부귀(樂浪富貴)등 명문(銘文)새겨놓은 글을 발견했다. 특별히 봉니[封泥: 간책(簡冊) 등(等)으로 된 문서(文書) 같은 것을 끈으로 묶고 봉할 때에 사용(使用)하던 아교질의 진흙 덩어리]에 낙랑태수장(樂浪太守章)과 낙랑데윤장(樂浪大尹章)이외에, 조선등 23현(縣)의 령, 장, 승, 위(令、長、丞、尉)의 관인(官印)을 모두 발견하였다. 그때에 이것이 당시의 낙랑군터[樂浪郡治址]였음을 증명한다.
선현텨(蟬縣治址)는 평안남도용강군성현리(平安南道龍岡郡城峴裡)에 위치하여서, 성은 약간 장방형(長方形)이며, 동서 1500m, 남북 1300m이다. 성의 동북에서 동한원화2년[東漢元和二年(公元85)]의 선신사비(蟬神祠碑)를 남겼고, 비명 내용은 매미(蟬)가 산천의신(山川之神) 평산군(平山君)애개 “백성의 안녕과 오곡이 풍부하기”를 기원하였다. 이것이 조선반도의 가장 오래된 석각(石刻)이며, 또한 선형터의 주소를 결정하는 근거가 되었다.
帶方郡城址(대방군성지)
대방군터[帶方郡治址(Treatment site)]는 황해북도봉산군 석성리(黃海北道鳳山郡石城裡)에 위치했고, 성은 약간 장방형(長方形)으로 동서가 556m, 남북이 730m다. 성지내에서 출토된 동한에서 서진까지 기년[紀年: 기원(紀元)으로부터 차례(次例)로 셈을 센 햇수(-數)]의 전(磚: 벽돌),마치 광호5년[光和五年(182年)], 태시7년[泰始七年(271年)], 태시11년등[泰始十一年等}같았다.
성지북면(城址北面)에서 발견된 묘전(墓磚)에 “사군대방태수 장무이전(使君帶方太守張撫夷磚)”의 명문(銘文)이 있고, 대방군터를 단정한 증거를 주었다. 대방군소속소명현치지(帶方郡所屬昭明縣治址)는 황해남도신천군토성리(黃海南道信川郡土城裡)에 위치하고, 장방형으로 동서장(東西長)500m, 남북관(南北寬)200m이다.
성지부근의 묘전(墓磚)에 태강4년3월소명왕장조”(太康四年三月昭明王長造)의 명문에 이속에 소명현고지라고 표명되어 있다. 장잠현치지(長岑縣治址)는 신천군봉황리(信川郡鳳凰裡)에 위치해있고, 여기서 발견되기를 수장잠현왕군, 군위향, 연73, 자덕언, 동래황인야(守長岑縣王君,君諱鄉,年七十三,字德彥,東萊黃人也)라고 하였다. 바로 9년3월20일에 시작하여, 벽사왕덕조의 장편명문[正始九年三月廿日,壁師b王德造”的長篇銘文]으로 장잠현고지의 소재를 표명하였다. 기타 아직 허다한 동시기의 토성유적이 있으나, 직접적증거가 결핍되어 돌이켜서 그 소속현을 알아낼 수없다.
樂浪墳墓(낙랑분묘)
樂浪墓葬(낙랑묘장: tomb)
상술한 바 군현터부근의 무덤은 일반으로 낙랑묘장이라 칭하고, 낙랑군터남면의 묘군(墓群)이 가장 유명하며 많이 방태형[方台形: Square pyramid]분구(墳丘: 무덤구릉)이다. 50여개 이상을 정식으로 발굴하였다.
묘장의 구조는 주로 목곽묘와 전실묘[木槨墓和磚室墓v즉나무와 벽돌묘] 양종이며, 다른 시기를 대표한다. 목곽묘는 무덤길과 흙구덩이로 되어있어서 목재를 써서 곽실[槨室: 외관]을 구성하였고, 단실과 쌍실(單室和雙室)로 나뉘었고, 일반적으로 관 두개를 용납하였으니, 일관(관하나) 혹은 다관 (관 여러개)가 있고, 관사이에 장품(葬品)을 배열한다. 곽실 (외관)주위에 돌 혹은 탄으로 둘러쌓거나, 혹은 벽돌로 포위한다.
다욱 전형적으로 왕광묘와 채협(彩篋: 화려한 상자)이니, 전자는 단실쌍관(單室雙棺)이고, 출토된 목인(木印)에 “낙랑 태수왕광묘의 도장”으로 묘주의 신분을 표명하였다.
후자는 쌍실삼관(雙室三棺)으로 효자전의 제재의 인물로 그림을 넣은 옷칠한 상자에서 이름을 얻고, 함께 나온 한개의 나무조각에 쓴 글은 “세짝 비단으로 옛 관리 조선 승전굉이 삼가 제사를 올립니다. “하고 묘주가가 낙랑군관임을 표명하였다.
묘에서 출토된 명문을 두른 칠기는 57건에 달하고, 다수는 연도가 서한원2년(西漢始元二年; BC85)에서 동한영원십사년 (東漢永元十四年; AD102)으로 구리거울의 형태였고, 문채의 단당이 이 목곽묘의 연대가 기본적으로 이 시대임을 표명한다. 기타타 칠기의 명문중에 광한군 혹은 촉군[廣漢郡或蜀郡等]의 글잠모양이 있기에, 그들의 생산지점[它們的出產地點]을 표명한다.
전실묘(磚室墓)는 궁융정[穹窿頂; dome top]을 만들고, 단실(單室)과 쌍실(雙室)로 나누어서, 후자(後者)는 전실(前室)양측에 자주 이실[耳室; 귀방]이 있다. 묘실(墓室)안은 양관(兩棺)을 받는다. 묘전명문의 연도는 비교적 이른 위가평이년[魏嘉平二年(250)]이고, 경원원년[景元元年(260)]이며, 약간 늦게 서진의 태시, 함령, 태강, 원강ㅇ, 건시, 태안과 건흥등[西晉的泰始、鹹寧、太康、元康、建始、泰安、建興等年號] 연호가 있고, 심지어 돌이켜 동진의 영화9년과 원흥3년등 [東晉的永和九年(353)和元興三年(404)等] 연도가 있다.
이는 낙양군과 대방군(樂浪郡和帶方郡)이 건흥원년[建興元年 (313)]에 고구려(高句麗)에 공격과 함락한 후 전실묘의 사용이 일개시기동안 계속되었음을 설명한다.
이외에, 돌이켜 석곽묘(石槨墓)를 발견하여서, 비교적 대표적 남정리(南井裡) 119호묘에서 전후이실(前後二室)을 세웠고, 돌덩어리 층계(石塊砌)를 사용하여 방추형의 권정[方錐形的券頂: Square cone-shaped roof]을 이루었고, 이와같이 후에 올 고구려묘장(高句麗墓葬)에 상당히 접근하였다.[見朝鮮三國時代遺跡]
도굴(盜掘)을 만나는 일아 많아서, 유물이 남는게 많지 않고, 겨우 오수(五銖)였고, 대천50(大泉五十)등 한전[漢錢; 한대의 동전]과 칠기(漆器)이며, 도기(陶器)의 쇄편[碎片: 부스러진 조각]이었다. 이러한 유물은 석곽묘(石槨墓)기 닉링군과 대방군시기에 일찍이 있었음을 중명할 수있다.
與高句麗[여고구려: 고구려와 더불어]
歷史變革[역사변혁: historical changes]
고구려는 중국동북에서 일어났고, 중국의 지방졍권이었다. 그중 예족 부여족, 한족[穢族, 扶余族、漢族)이 위주였고, 또 소수의 한화(漢化)을 입은 선비족(鮮卑族)도 있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기재되기를, 공원37년[公元37年]에 대무신왕(大武神王)이 압록강남의 낙랑군을 공격하여 한번 점령하였다. 7년후 동한광무제(東漢光武帝)가 바다로 파병 하여 닉링을 수복하고, 고구려의 확장을 저지하였다.
심국사기에 의거하면 동천왕본기(東川王本紀)에 기재하기를, 동천왕21년(AD247)에 “왕은 환도성(丸都城)이 난을 겪어 회복하지 못하면, 평양성을 쌓고, 백성과 묘사[廟社: 종묘와 사직]을 옮기겠다. 평양은 선인왕검(仙人王儉)의 대이며, 혹시 운왕의 서울 왕혐(王險)일 수도있다.”
겨우 진서권14 지리지[《晉書》卷一四《地理志》]에서 기재하기를, “함령2년(276)시월[鹹寧二年(276)十月]에, 창랴. 요동, 현토, 대방, 낙량등군국5[昌黎、遼東、玄菟、帶方、樂浪等郡國五]로 나누어 평주(平州)를 만들었고, 낙랑군은 한조에서 다스려 6현(縣六)으로 통이리하였고, 호3700(戶三千七百: 3700호)이고, 대방군은 공손도에서 다스려 통합 현7이고 호4900(戶四千九百)이었다. “
이리하여 247년 동천왕의 성인 평양은 국내성의 위성[國內城的衛城; the acropolis of the domestic city]이고 대동강(大同江)에 있지 않았다. 전통적관점으로 보면, 서진말기에 고구려는 낙랑군의 점령을 시작하였다. 고국원왕41년(故國原王四十一年)에 백제왕은 30000병사를 이끌고 평양성으로 향하였고, 소수림왕7년(小獸林王七年)에 백제장병30000이 평양을 침범하였고, 광개토왕4년(廣開土王四年)에 패수상(浿水之上)에서 백제와 싸웠다.
이것이 표명한 바, 공원4세기초에 고구려는 상기 2군을 탈취 하고 대동강유역을 제압하였다.
自鳴鼓(자명고): 낙랑공주
樂浪公主(낙랑공주]
낙랑공주최씨[樂浪公主崔氏(?—?)]는 1세기 때 낙랑군 동부도위[樂浪郡東[部都尉(樂浪國王)] 최리의 딸(崔理之女)이었다.
기원32년[紀元32年(東漢建武八年、高句麗大武神王十五年)고구려대무신왕의 아들 호동(高句麗大武神王之子好童)이 옥저(沃沮)로 갔다가 낙랑군동부도위최리[樂浪郡東部都尉崔理]를 만났고, 최리는 그를 보고 보통사람이 아님을, 그리고 북국신왕의 아들임을 알게 되었고, 그의 딸을 그에게 결혼하도록 원했으나 호동은 아직 응답하지 않았다.
당시에 낙랑에는 고화각[鼓和角: drums and horns]이 있어 적군이 침입하면 스스로 울린다고 하였다. 호동은 귀국후 비밀리에 낙랑공주에게 사람을 보내어, 만일 그녀가 결혼에 응하고 예의에맞게 결혼할 것을 원한다면, 반드시 자명고각(自鳴鼓角)을 모두 찢어 버려야 하고, 그렇게 못하면 결혼을 못한 것이다.
이에 낙랑공주는 예리한칼을 쥐고 무기고속에 잠입하여 북과 뿔을 모두 찢었고, 아울러 호동에게 고하였고, 호동은 그녀를 아내로 받아드렸다. 후에 호동이 부왕에게 고하여 출병하고 낙랑을 공격하였는데, 당시 자명고각은 모두 다시는 울리지 않았고, 최리는 준비가 안되어서, 결과적으로 고구려군이 성아래로 이르러 공격하니, 최리는 그제야 자명고각이 모두 찢어졌음을 알게 되어서 이에 그는 낙랑공주를 죽이고 항복하였다.
그외에, 호동과 낙랑공주의 결혼은 낙랑을 멸망시키고자 대무신왕이 제안하였고, 그의 아들이 최씨후예를 아내로 받을 걸 허락하였고, 낙랑공주가 낙랑으로 돌아올 것을 기다렸고, 낙랑의 자명고각이 모두 파괴되어서 낙랑을 멸하려는 목적을 이루었다.
낙랑공주(樂浪公主, ? ~ 32년)는 낙랑왕 최리(崔理)의 딸이다.
고구려 왕자 호동과의 사랑 이야기가 전해진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32년 음력 4월 낙랑의 왕 최리는 옥저에서 유람하던 고구려 왕자 호동을 만난 후, 자신의 딸인 낙랑공주와 결혼하게 하였다.
당시 낙랑에는 적이 침입해 오면 저절로 소리를 내어 그 사실을 알리는 자명고(自鳴鼓)가 있어 정복하기가 어려웠는데, 고구려에 돌아온 호동은 낙랑공주에게 사자를 보내어 무기고에 들어가서 자명고와 나팔을 부순다면 예를 갖춰 공주를 맞이할 것이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맞아들일 수가 없다고 전한다. 낙랑공주는 호동의 말을 따르고, 호동은 아버지 대무신왕에게 권하여 낙랑을 습격한다. 낙랑국왕 최리는 딸을 죽이고 고구려에 항복하였다.
Kwan Ho Chung - Aug 31,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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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군은 우리나라 역사에 대단히 중요한 자리를 찾이한다.
고조선 후기에 뜻밖에 중국 연나라인 위만에게 속아서 나라를 빼앗겼고,
그후 백년 가까이 위만조선이 존재하다가 중국의 한무제에게 정복을 당하였다.
그리고 한제국은 위만조선의 자리에 4군을 설치하여서
조선반도의 북부와 중부를 점령하였다.
그것이 여러해 지속되었고, 또 한나라 문명이 그곳을 통하여 한반도에 들어왔다.
그런데 그 당시 남쪽에는 삼한이 있었고, 북에는 고구려가 점차 강성하여져서
결국 고구려가 한사군을 정복하였다.
고구려가 없었다면, 혹시 한사군이 우리 조선반도를 완전 점령하여서,
우리 조선은 없어졌을지도 모르겠다